도화가 이불 밖으로 뻗어나온 이수 맨발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전에는 집을 나설 때 이수 발등에 자주 입맞춰줬다. 한 손 가득 발을 감싼 뒤 털 난 발가락을 쓰다듬다 이불 안에 도로 넣어주곤 했다. 도화는 그 발, 자신과 많은 곳을 함께 간 연인의 발을 응시했다. 그러곤 결국 아무것도 안 하고 돌아섰다. - P87

도화가 이별을 준비할 때면 두 사람 사이에 꼭 무슨 일이 생겼다. 이수가 새 직장의 면접을 앞두고 있건, 도화가 승진을 하거나, 이수의 생일이거나, 누가 아픈 식이었다. 미래를 예측해 결론 내리기 좋아하는 도화는 벌써부터 오늘 하루가 빤히 읽혀 울적했다. 과음한 이수는 하루종일 앓을 것이다. 술과 담배 냄새로 이불을 더럽히고 땀에 전 몸으로 오후 느지막이 일어나 두통을 호소하겠지. 그러다보면 우리는 오늘도 헤어지지 못할 것이다. - P94

선의나 온정에 기댄 나눔이 아닌 기술과 제도로 만든 공공선. 그 과정에 자신도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긍지를 느꼈다. 그것도 서울의 중심 이른바 중앙에서. - P90

도화는 이수 옆에 비스듬히 누워 오랜 연인의 잠든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헤어지더라도 잊어버리지는 않겠다는 듯. - P96

당시 이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도화 혼자 어른이 돼가는 과정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일이었다. 도화의 말투와 표정, 화제가 변하는걸, 도화의 세계가 점점 커져가는 걸, 그 확장의 힘이 자신을 밀어낸느 걸 감내하는 거였다. - P99

-나는 네가 돈이 없어서, 공무원이 못 돼서, 전세금을 뺴가서 너랑 헤어지려는 게 아니야.
-......
-그냥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어.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아. - P115

도화는 노량진이라는 낱말을 발음한 순간 목울대에 묵직한 게 올라오는 걸 느꼈다. 단어 하나에 여러 기억이 섞여 뒤엉키는 걸 알았다.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 안에서 여러 번의 봄과 겨울을 난, 한 번도 제철을 만끽하지 못하고 시들어간 연인의 젊은 얼굴이 떠올랐다. - P117

나는 내게 괜찮은 필기구가 있다는 걸 기억해낸 뒤 서랍을 뒤져 만년필을 꺼냈다. 그러곤 자기만의 필기구를 가진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종이 위에 제일 먼저 내 이름을 써봤다. 그뒤 통장을 새로 만들고, 혼인신고서를 작성하고, 전세 계약을 할 때마다 그 만년필을 썼다. 그래서 곽교수와 함꼐 ‘그 일‘을 겪고 며칠 뒤 경찰서에서 조서를 작성할 때도 습관적으로 품안에서 그 펜을 꺼냈다. 그러곤 조서에 서명하기 전, 만년필을 다시 주머니에 넣은 뒤 책상 위에 있던 모나미 볼펜으로 내 이름을 적었다. - P181

휴대전화 속 부고를 떠올리며 문득 유리 볼 속 겨울을 생각했다.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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