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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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내내 어디선가 유사한 얼개를 가진 이야기를 본 듯한 기시감에 시달렸다. 기억을 곱씹고 독서 목록을 뒤져 마침내 찾아낸 건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두 소설 모두 2차 대전 무렵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사랑하는 이와 헤어진 노인, 그리고 아버지를 일찍 여읜 소년 또는 소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야기의 무대도 둘 다 뉴욕이고 소년/소녀가 아버지가 남긴 단서를 찾아 수수께끼를 쫓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공교롭게도 <사랑의 역사>의 작가 니콜 크라우스와 조너선 사프란 포어, 두 사람은 부부다. 게다가 두 소설 모두 미국에서 2005년에 출간됐다.

작가적 양심을 굳이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사실 두 작품의 소설적 문법은 꽤나 다르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은 자칫 산만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실험적이며, 독자에게 수없이 많은 문장을 쏟아낸다. 반면 <사랑의 역사>는 정갈하고 솔직하게 읽는 이의 감정을 파고든다. 쓸데없이 배배꼬지 않으면서도 수수께끼의 핵심으로 교묘하게 접근한다. 자세히 보면 꽤 차이가 많은 작품들이지만, 내러티브가 지나치게 유사하다는 건 짚고 넘어가야겠다.

<사랑의 역사>는 노인 레오 거스키와 소녀 엘마 싱어의 이야기가 교차되는 구조로 짜여져 있다. 나치의 폴란드 침공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레오는 고향 마을에 사랑하는 소녀가 있었지만, 그녀는 먼저 미국으로 건너와 레오를 기다리다 아이를 낳고 다른 이와 결혼한다. 레오는 열쇠공으로 살다 쓸쓸히 늙어가는데, 어느 날 그의 집 앞으로 소포가 하나 도착한다. 소포의 정체는 그가 소녀를 사랑하던 시절에 썼던 소설.

엘마 싱어의 아버지는 엘마가 여섯 살 때 췌장암으로 죽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남미를 여행하다가 우연히 서점에서 산 <사랑의 역사>라는 소설의 여주인공 이름에서 딸의 이름을 따 왔다. 엘마의 어머니는 남편이 죽은 뒤 번역으로 생계를 이어 가는데, 어느 날 그녀에게 <사랑의 역사>를 영어로 번역해 달라는 익명의 편지가 도착한다. 거액의 사례금을 약속하면서. 엘마는 번역을 부탁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게 왜 하필 자기 이름을 따온 작품인지 추적해 간다.

작중에서 <사랑의 역사>는 레오 거스키와 엘마 싱어,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이어주는 열쇠이자 서서히 드러나는 진실의 모체이다. 니콜 크라우스는 노련한 솜씨로 독자의 호기심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레오와 엘마가 처음으로 만나는 이 책의 마지막 순간, 모든 궁금증은 해소되고 역사는 마무리된다.

이 책의 제목은 다분히 도발적이다.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감정이어서 역사의 보편성을 접합하는게 당치 않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 책은 이야기의 맥락을 잃지 않으면서 남녀 간의 사랑, 부모자식 간의 사랑, 친구 사이의 우정 등 거의 모든 종류의 사랑을 담고 있다. <사랑의 역사>라는 거창한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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