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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뭐 먹지? - 권여선 음식 산문집
권여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그간 읽어 본 미식 에세이들은, 조금 거칠게 말하면 거진 다 남성 작가의 음식에 얽힌 인생 역정 또는 맛집 탐방기라 할 수 있었다. 얼핏 생각나는 것만 해도 무라카미 류의 <달콤한 악마가 내 안에 들어왔다>, 성석제의 <칼과 황홀>, 황석영의 <황석영의 밥도둑> 등등. 요네하라 마리의 <미식견문록> 정도가 예외적인 여성 작가의 에세이였다. 시중에 나와 있는 미식을 주제로 한 책이 대부분 남성 작가가 지은 책이라는 건, 잘 생각해보면 참 이상하다. 맛있는 걸 먹고 싶은 욕망, 그리고 그걸 표현하는 능력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닐진데 말이다.
권여선의 이 책은 여성 작가의 음식 산문집이라는 점 외에도 두 가지 점에서 특별하다. 첫째, 맛집을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제철 음식을 그녀가 직접 해 먹는 이야기가 다수라는 점. 둘째, 소개되는 음식이 어떻게든 ‘술‘과 연관되는 안주라는 점. 작가가 고백하듯 이 책의 제목은 <오늘 안주 뭐 먹지?>로 바꾸는 게 더 나아 보일 정도다.
위의 첫 번째 항목으로 인해 이 책은 기존 남성 작가들의 음식 에세이와 격이 다른 빛을 발한다. 남성 작가들의 에세이에서 그들은 그저 음식을 ‘소비‘할 뿐이지만, 권여선은 그 스스로 음식을 능동적으로 ‘생산‘한다. 남성 작가들은 시골의 한적한 식당에서 어머니의 손맛을 느끼고 추억하지만, 권여선은 어머니의 음식이 그리워지면 동네 시장에서 사다가 똑같이 만들어 먹는다. 소주를 곁들여서.
그리고 그녀는 ‘술꾼은 음식을 잘 못할 것‘이라는 편견을 산산이 부순다. 이 산문집 곳곳에서 화려하지는 않지만 맛깔나는 반찬들(권여선에게는 안주이겠지만)을 재빠르고 솜씨좋게 만들어내는 과정을 질박하게 그려내는데, 그저 숨죽여 읽고만 있어도 입안에 절로 군침이 돈다.
두 번째 항목도 재미있는 게, 여기 등장하는 안주가 대단한 별식이 아닌 일상의 음식이나 반찬이라는 거다. 찐만두나 김밥과 막걸리를 같이 먹고, 명란젓을 소주 안주로 삼는다. 권여선은 밥상이 곧 술상이고, 술상이 곧 밥상인 경지의 남다른 애주가인 것이다. 또한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술만이 아니다. 한여름 새벽에 태어난 권여선은 여름의 ‘그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맺혀 있는 땡초를 끝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말한다. 깡장에도, 양념 간장에도, 꼬막 조림에도 어김없이 잔뜩 썬 땡초가 들어간다. 그 사람이 먹어온 음식이 곧 그의 인생이라는 걸 상기해 보면, 권여선은 땡초를 먹고 번쩍 깬 정신으로 삶을 날카롭게 직시하는 작가인 것 같다.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 그런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