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 프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7
이디스 워튼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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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 프롬

: Ethan Frome

이디스 워튼 (Edith Wharton) 지음 | 김욱동 옮김 | [민음사]

 


사회 규범이 강요당하는 인간 내면의 풍경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21년에 퓰리처상을 받게 된 순수의 시대는 작가 이디스 워튼의 대표작이다. 워튼의 또 다른 대표작 이선 프롬은 이보다 10년 전인 1911(당시 49)에 작가가 자신의 불행한 결혼을 염두에 두고 쓴 자전적인 소설이다. 사랑, 결혼, 불행 혹은 죽음은 소설 혹은 예술의 형태에서 가장 핵심적인 소재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삶의 본질을 반영하는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에서는 독특하게 액자소설의 구성 속에서 화자가 한 인물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한다.


이선 프롬은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농부로 대학공부까지 조금 맛보았던 남자다. 병으로 보살핌이 필요한 이선의 어머니는 친척인 지나의 보살핌을 받았다. 이선은 지나의 보살핌에 고마워하면서도 그녀와 애정이 없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식 날에야 신랑·신부의 얼굴을 보았다는 우리의 전통 결혼 문화에서 얼마나 많은 갈등과 충돌이 생겨났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겉으로는 멀쩡해도 술만 마시면 폭행을 일삼는 남편을 맞이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물론 평생을 다정한 친구처럼 금슬 좋게 살아온 노부부의 사연도 간간이 접하지만 그만큼 드물다. 부부 사이에 애정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부부 사이에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없다면 그 관계는 서로에게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이선 프롬은 바로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던 작가의 아바타였다.


소설에서도 부조리한 결혼 생활이 배우자 사이의 갈등으로 표면화되고 있다. 결혼 제도는 사회 규범과 도덕적 인습, 구체화된 제도가 결합된 복합적인 공동체 유지 장치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배우자 사이의 갈등은 곧 개인과 사회의 대립 국면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 혹은 공동체가 개개인에게 요구하고 강요하는 규칙과 역할은 애초에 어긋난 관계로 고통 받고 괴로움을 겪는 이들을 옭아매는 문명의 자장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데 이선과 지나의 무기력한 결혼 생활에 어느 날 지나의 사촌 매티가 등장한다. 매티는 이선의 하루하루에 활력소를 주는 존재가 된다. 그녀는 이선의 마음을 느끼고 이선 역시 그녀의 마음을 알게 되지만, 규범이 지배하는 현실의 질곡에서 벗어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난 손발이 꽁꽁 묶였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143)

 

한 집안이 가장이자 병든 아내를 돌보아야 하는 남편, 게다가 자신이 관리해야 겨우 돌아가는 농장의 주인 이선 프롬. 그는 이 모든 역할을 하루아침에 벗어 던지고 사랑을 택할 수는 없었다. 인용된 문장은 이선의 절망과 좌절감이 집약된 표현일 테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인습과 제도가 기대하는 역할을 집어던질 때 사회 혹은 공동체로부터 날아올 비난의 화살을 감당하는 것은 고스란히 이탈자의 몫이 된다. 사회의 비난, 나아가 구성원으로서의 제약과 제재는 구성원으로서의 삶을 무섭게 짓누르기 마련이다. 개인이 속한 공동체를 벗어난다는 것은 추방행위와도 다를 바 없다. 추방은 어떤 의미에서 사회적 살인에 다름 아닐 것이다. 작가 이디스 워튼은 인습과 제도의 강력한 자장 속에서 사랑과 자유를 추구하며 벗어날 수 없었던 고뇌와 고통을 이선 프롬의 행동과 입을 통해 표출했을 것이다.


지나가 매티를 내보내기로 결정했을 때, 이선과 매티의 관계는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도덕과 윤리의 장벽으로 내몰린 셈이다. 부인 지나는 사회적 규범을 무기삼아 두 사람을 곤경에 몰아넣고 압박한 것이다. 사회 혹은 공동체가 강요하는 윤리의 테두리에 내몰리고 압박을 받는 구성원들은 선택을 강요받는다. 다시 현실의 질서 속으로 복귀할 것인가, 아니면 인습의 테두리를 벗어던질 것인가. 혹은 이러한 국면이 지나친 고뇌와 갈등 끝에 자기 파괴 행위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선과 매티가 어두운 밤에 함께 썰매를 타고 동반 자살을 암시하는 행동을 함께 한 것 역시 어느 쪽으로도 결정하지 못한 이들의 몸부림일 것이다. 역자의 표현처럼 인간은 작품 속 주인공처럼 실존의 감옥에 사는 수인인 셈이다. 이는 이선과 매티가 놓인 상황을 정확히 요약하고 있다.


작가 자신의 경험과 고뇌가 여실히 반영된 이선 프롬은 길지는 않지만 묵직한 물음을 독자에게 던진다. 가족 구성원 사이의 갈등, 사회 규범과 제도, 인습이 개인에게 강요하는 역할과 기대와의 불화 혹은 대립에 관한 진실을 독자가 인식하게 한다. 하지만 독자가 문학 작품을 통해 보편적인 진실을 접할 경우, 독자는 보다 현명해지는 것일까? 나는 가끔 이점이 궁금했다. 공동체의 규칙을 파악하고 준수하면서도 개인은 자유와 욕망을 추구할 수 있을까.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자신의 몸을 기차에 던지지 않고 그녀의 남편이 안나를 비난하지 않고 수월하게 이혼을 해주었더라면, 안나는 사랑과 아들을 모두 되찾을 수 있었을까. 소설 속의 선택은 현실 속의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보여줄 뿐이다.


워튼의 시대와 나의 시대 사이에 100여년의 격차가 있지만, 그의 작품이 제기하는 본질적인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개개인의 삶 속에서 드러난 문제에 정답은 없다. 답은 각자가 내리는 것일 테니. 그러면 고전문학은 우리의 삶에 과연 어떤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각자의 해답 찾기 과정에서 여러 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분명하다. 독자는 문학이 제시하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다양한 국면을 검토하고 각자의 진실 찾기를 시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문학은 독자 나름의 해답 찾기 혹은 진실 찾기 과정에서 멍석 까는 역할을 맡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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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10-04 1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여러 장면을 보여주고
그 장면의 메시지가 어느 정도 검증 된 것이
대중매체의 그것과 다른 것 같아요 :-)
오늘은 날씨가 흐리네요
그래도 좋은 날 되새요~

han22598 2021-10-06 06: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글은 무언가 잘 정돈된 글 같아요. ^^ (저랑 완전 정반대의 글인 것 같아요 ㅎㅎ)

시대가 변해도 비슷한 주제들에 대해서 고민하고 번민하는 자들의 존재가 중요할 수 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정답을 찾았느냐의 유무보다는 번민하는 그 자체가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초란공 2021-10-06 22:36   좋아요 0 | URL
좋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읽기 전에 했던 예상보다 묵직한 주제를 던지는 것 같아서 좋았고,
본질적인 문제는 시대와 무관한 거구나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레이스 2021-10-06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토너가 생각나네요.

초란공 2021-10-06 22:42   좋아요 0 | URL
어떤 점이 <스토너>에서 생각났는지 궁금해집니다~^^
어떻게 보면 스토너는 밋밋하고 항상 패배하고 마는(?) 캐릭터 같았던 기억이 있어요.
저는 스토너가 저와 비슷하단 생각도 들고 해서 공감이 가긴 했는데요
자세한 건 기억이 잘 나지 않네요. 워낙 잔잔하게 다가왔던 소설이란 인상만 남아있어서요.^^;; 다시 읽어봐야할 것 같습니다 ㅋ

그레이스 2021-10-06 23:41   좋아요 1 | URL
제가 이 책을 안읽고 올려주신 스토리만 봐서 그런지 모르겠어요
하긴 소재가 되는 스토너의 삶이 워낙 많이 쓰여진 플롯이기도 하네요
그것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다른 감상을 전달하기도 하니까요^^
결혼, 또 다른 사랑, 하지만 순응...
그런 내용이 비슷하게 느껴졌어요^^
이선 프롬을 읽어보면 다르게 다가오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