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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교 이야기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믿음과 분쟁의 역사
홍익희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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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신교인이다. 성경을 6번 읽었다. 중3때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으니 지속적으로 교회에 출석한 지 20년이 다 되어 간다. 나는 개신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믿는다. 굳이 따지자면 자유주의적 복음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다. 자유주의와 복음주의자가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기는 한데 사실이 그렇다. 어떤 사람들이 보면 신앙이 없다고 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이 보면 근본주의자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유대학자의 책 몇 권을 읽은 적이 있다. 대학 때, 유명한 유대교 랍비인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책「사람을 찾는 하느님」,「사람은 혼자가 아니다」를 읽으며 유대교의 깊은 명상에 대해서 조금은 알게 되었다.

이슬람교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기껏해야 이태원 놀러가면서 이슬람 사원에 가서 사진 몇 장 찍은 것이 전부다.

    

 

“지난 50여 년간 이슬람교는 500퍼센트의 성장을 했다. 이 같은 추세가 계속된다면 2025년에는 전 세계 인구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p.385)

 

현재까지는 기독교인의 숫자가 가장 많다고 한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인의 숫자는 완만한 감소세를 보이고 있고 무슬림의 숫자는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최근 들어 심각한 국제뉴스가 되고 있는 ‘ISIS(이라크-시리아 이슬람 국가)’는 하나의 국가다. 이라크와 시리아 일대에서 이슬람교 원리주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는 수니파 무장단체인 그들은 2014년 6월 29일 ‘칼리프 제도의 신정일치 이슬람 국가를 건국했다.’고 선포했다고 한다. 지금과 같은 추세로 무슬림의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난다면 또 다른 이슬람 국가의 건설이 멀지 않은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뉴스는 대부분 부정적이거나 호전적인 것이 많다. 무장단체나 테러, 전쟁과 분쟁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한다. TV에 등장하는 무슬림들은 자신들과 일부 근본주의 이슬람 단체와 세력을 같은 이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호소한다. 하지만 세계의 경제와 정치와 문화를 주도하는 것은 사실 유대교와 기독교인들이다. 아직은 말이다. 여전히 그들의 내재적인 종교성 속에는 ‘이슬람은 정복하고 전도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유대인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국수주의자들이나 개신교의 근본주의자들은 이슬람 무장단체의 종교적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들의 종교와 자신들의 신념만이 신을 대리하고 신의 뜻에 합치한다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태도를 도그마로 합당화한다.

    

 

“세 종교의 가장 큰 차이는 ‘예수에 대한 관점’에 있다.” (p.368)

 

나는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었다고 믿는다. 동시에 신이라고 믿는다.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은 나와 다르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종교적인 관점의 차이는 사실 지금의 세 종교가 갖는 서로간의 불신과 갈등의 주요원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이 유대인에게 노란색을 강요한 것은 더 깊은 의미의 차별이 있었다.” (p.408)

 

기독교가 통치이념이 되고 교황이 황제보다 더 큰 권력의 정점에 있던 암흑의 시대, 중세에는 창궐하던 흑사병도 유대인 탓이었다. 돌+아이 네로도 자기가 불을 질러 놓고 로마의 대화재의 원인을 유대인들에게 돌렸다. 유대인의 역사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차별의 역사’다. 몇 십 년, 몇 백 년 정도가 아니라 수천 년에 걸친 차별이다. 상상할 수 없는 역사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하고 차별 당했다. 지배계급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기독교 국가의 왕실과 귀족들은 국고와 재무 관리를 주로 유대인에게 맡겼다. 자신의 손에는 더러움을 묻히지 않으면서 실리는 챙기자는 것이었다.” (p.422)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과 공격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노골적으로 표출되었다. 영원한 종교적 지배와 도그마의 독점을 위해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까지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수 없었다. 당연히 사람들은 문맹일 수밖에 없었다. 유대국가의 멸망 이후부터 디아스포라로 살아 온 유대인들에게 토라는 유일한 구원의 방법이었다. 그들에게 토라를 가르치고 삶의 지혜를 나누는 랍비는 사제가 아니다. 함께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산 것이다. 중세부터 유대인은 공직이나 영지를 가질 수도 없었다. 그들이 갈 곳은 상업과 무역, 금융업뿐이었다. 기독교 지배자들에게 유대인들은 똑똑한 하수인들이었다. 글을 읽고 셈을 잘 하고 외국어도 능통한 유대인들에게 더러운 일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은 그만두지 않았다.

예수를 팔아넘긴 가룟 유다가 입었던 옷이 노란색이었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에게는 주홍글씨가 아닌 노란글씨를 새겼다. 모두가 손가락질 하고 발길질 할 수 있게 만든 지독한 폭력이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런 비극을 뻔히 보면서도 유럽 사회는 침묵했다. 교회도 침묵했다. 당시 바티칸은 유대인 학살에 대해 한마디 발언도 하지 않았다.” (p.449)

 

이러한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공격, 폭력은 나치에 의해 극단에 이르렀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가공할 폭력과 학살에 대해 교회도 침묵하고 바티칸도 침묵했다는 것은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다. 이러한 오랜 시간에 걸친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공격이 현재 이스라엘의 시온주의자들과 국수주의자들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공격과 차별을 정당화 할 없다. 결코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유대인에 대한 오랜 시간에 걸친 공격과 차별에 대해서 교회와 바티칸이 제대로 사죄한 적은 없다.

    

 

“시오니즘과 유다이즘은 엄격히 구분된다. 시오니즘은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 건설을 목표로 극단적 민족주의 성향을 띠며 이를 위해 폭력을 서슴지 않는다. 반면 유다이즘은 평소 경건한 생활을 위해 <성경>과 전통을 중시하는 유대인 고유의 사상이다. 팔레스타인을 인정치 않으려는 극단적 시오니즘을 유대인 진보파는 물론 정통파들조차 반대하고 있다.” (p.471)

 

좀 더 자세히 알아야 한다.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유대교와 유대인이 똑같지 않다는 것은 상식임에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오니즘과 유다이즘은 명백하게 다른 것이다. 일반 무슬림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기독교인들은... 음... 뭐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싸잡아서 욕해도 변명할 수 없는...흐흐흐

아무튼 알 필요가 있다.

 

 

“<토라>의 내용 중에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반드시 쓰기를 멈추고 목욕을 한다. 몸과 마음이 깨끗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느님’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198)

 

유대인들이 철저하게 <토라>의 가르침을 지키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일면을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쓰기를 멈추고 목욕을 한다니.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저 무슨 이상한 행동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자유주의 복음주의자인 내가 보기에 저들의 종교행위는 성스럽기까지 하다. 교회 다니는 개신교인 누가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 혹은 예수라는 단어가 나오면 읽기를 멈추고 목욕을 하거나 기도를 하겠나. 일반 신도들은 물론 성직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슬림들의 철저한 종교적 기준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어느 어느 곳에 있든지 하루 5번 기도를 하고 라마단을 철저하게 지키며 생이 끝나기 전에 메카순례를 꿈꾸는 그들의 철저함과 신실함.

지금이야 기독교, 그중에서도 개신교가 우스개가 되고 비아냥거림거리가 되는 마당이지만 로마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화 한 후 이천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기독교는 ‘갑’이었다. 지배체제였다. 그 기간 내내 유대교와 유대인을 차별했다. 집요하고 끈질기게 공격하고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지금이라도 교황이나 개신교 지도자(세계 개신교를 대표할 만한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 더 슬픈...)가 유대교와 유대인에 대한 역사적 사죄를 했으면 좋겠는데, 그런 일이 일어날 일은 요원하다.

나를 포함한 개신교인들이 유대인과 무슬림들의 종교적 행위의 반 정도라도 흉내 낼 수 있다면 그토록 강조하는 사랑의 종교를 만들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이 책은 부담스럽지도 불편하지도 않은 내용이다. 저자가 종교 전공자나 전문가가 아니라서 적절한 정도의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 것 같다. 반대로 심층적인 세 종교 이야기를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좀 부족한 내용일 수 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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