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하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
-
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고등학교 때 철학 수업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책을 읽지 않던 때였고 철학의 ‘ㅊ’ 자도 모르던 시절이다. 철학 담당 교사가 여자교사이고, 미모마저 빼어났다면 가장 신나는 수업이었겠지만 그런 행운도 없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사립 남자 고등학교였고, 지역에서 가장 공부를 잘 하는 고등학교를 바짝 뒤쫓아 가는 입장이라 무지하게 공부를 시켰다. 수십 명의 교사 중 여자 교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모조리 남자 교사만 득시글대는 학교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아마 체벌과 구타, 욕설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여자 교사는 아예 채용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 철학 담당 교사는 젊은 남자 교사였는데, 그에 대한 아무런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수업도 아마 재미가 없었던 것 같다. 그저 교과서를 보고 필기하고, 철학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철학의 역사를 배웠던 것 같다. 누가 무슨 학파를 만들고, 무슨 주의를 주장하고 등등.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인 청소년 시절, 앞으로 마주할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터득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대학에 들어가 주체할 수 없는 자유와 방종 사이에서 늘 술에 취해 허덕이거나, 취업과 경쟁의 논리에 함몰되어 변변한 MT나 동아리 활동 하나 하지 않은 채 늘 도서관에 처박혀 있는 이유는 철학의 부재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과 세상에 대한 스파링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고민하거나 싸워보지 않은 채 갑자기 어른이 된 이유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보다 더 극한 경쟁과 입시 지옥에 허덕이는 요즘 고등학생들의 학교 교실에서 ‘철학’이라 이름 붙여진 수업이 있는지 모르겠다. 아마 없을 거라고 추측 해 보는데,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철학은 삶을 대하는 태도다. 그리고 다가 올 삶의 파편들과의 싸움이다. 그래서 중요하다. 단순히 철학의 역사를 달달 외우고 ‘누구는 무슨 주의, 누구는 무슨 학파’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는 철학이 ‘박식함’에 있지 않고 ‘일깨움’에 있다고 생각한다.” (p.9)
“교육이란 학생의 머릿속에 무언가를 집어넣는 일이 아니라 그들을 각성시키는 일이다.” (p.69)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지적에 동의한다. 지금은 ‘박식함’을 요구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좋은 성적을 요구한다. 대학 입시를 앞둔 학생들에게는 높은 수학능력시험 점수가 되겠고, 취업을 앞둔 청년들에게는 높은 스펙이 될 수 있겠다. 대학과 직장에서만 원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 전체가 이것을 종용한다. 무한 경쟁 시대. 이것은 급격한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었고, 실질적으로 지표와 수치로 드러났던 경제성장은 무한 경쟁으로 인해 오는 사회적 비용과 폐해를 무시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시대다. 다른 사회다. 사람들도 다르다. 각자의 자리에서 맞이하는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박식함’ 내지는 ‘좋은 성적, 좋은 스펙’이 전부라면 그 사회의 결말은 절망뿐이다. 사회 전체가 하나의 방향으로 끝 모른 채 내달리다 보니 모두가 그 곳으로만 골몰해 있다. ‘나는 아닙니다!’라고 NO를 외치면 왕따가 된다. 바보가 된다. 낙오자가 된다.
대학 이후 책을 읽으며 알게 된 철학자는 대부분 외국 사람들이다. 한국에는 철학자가 없나? 무슨 무슨 학파라는 대가(大家)를 이루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철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많을 텐데, 한국 사람의 철학책은 거의 읽어본 기억이 없다. 어렵고 복잡한 철학적 담론이 아니라 이 책의 저자처럼 쉽게 삶과 적용하는 철학 수업이 필요하다. 힐링, 청춘 타령 하며 어설픈 자기계발서를 팔아먹는 대학교수나 종교인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처럼 들리지만 쉽게 철학적 화두를 던지는 이런 책이 필요하다. 이런 책을 쓰는 철학자들이 필요하다.
책은 저자가 일상에서 경험한 철학적 화두로 채워져 있다. 어렵지 않고 복잡하지 않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어떤 이들은 “이게 뭐야! 이게 철학책이다!”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런 책이 철학책이라 생각한다. <철학>이라 써 놓고, 정의부터 해서 최근 철학적 담론을 설파하는 따위는 전공자들로 충분하다. 나와 같은 일반인들에게 철학은 삶과 아주 가까워야 한다. 지난 대선 전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던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가 던진 단 하나의 화두는 “정치가 내 삶과 아주 가깝다.”는 것이었다. 정치도 그렇고 철학도 나와 가까워야 한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어야 한다. 고담준론은 전공자들 내지는 자칭 똑똑하고 고매한 분들끼리 모여서 하면 그만이다. 우리는 당장 내 삶, 나의 오늘과 내일에 적용되고 오늘 아침에 내가 겪은 일에 적용되는 철학이 필요하다. 당연히 어렵지 않아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떠받드는 어떤 것 때문에 그것들을 소홀히 한다. 추상적인 인류 평화보다 내가 요즘 듣는 음악이 내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철학이란, 그것들을 다루고 가꾸는 법이라고 할 수 있다.” (p.102)
미스코리아에 당선된 늘씬한 아가씨들은 늘 세계평화를 걱정한다. 그래. 세계평화는 미스코리아 아가씨들께 맡기면 된다. 우리는 당장 나의 한 시간 뒤, 두 시간 뒤에 있을 평화를 챙겨야 한다. 그것으로 족하다. 아니, 그것으로도 여지가 없다. 직장에서 어떻게 상사와 후배를 대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행동이 바로 철학이다. 우리 회사가 지역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나아가 국가와 동북아시아, 세계경제에 어떻게 이바지할 것인가는 CEO들께서 하시면 되는 일이다. 나는 당장 오늘 퇴근 후 상사가 권할 술자리를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 지, 상사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고 납득이 될 변명을 만들어 내는 것에 골몰해야 한다. 그것이 오늘을 사는 ‘나의 철학’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지 마라! 그것이 ‘우리’가 ‘우리’에 갇히지 않기를 바라는 정의의 목소리다. 네 이웃이 아닌 자들과 연대하고 그들과 사랑을 나누다. 그것이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정의의 요구이다.” (p.238)
나는 종교인이다. 개신교인이다. 교회를 다니고 있다. 신을 믿지만 교회는 가고 싶지 않다. 결단이 쉽지 않다. 교회, 특히 한국의 교회를 향한 날선 비판과 조롱에 95%쯤 동의한다. 교회 내에서도 줄곧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지만 발톱의 때만도 못한 내 목소리를 교회의 도그마에 파묻혀 버리기 일쑤였다.
얼마 전 내가 사는 지역에서 퀴어축제를 했다. 대구는 한국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동네중 하나다. 그런 곳에서 퀴어축제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놀랐다. 제대로 축제가 진행될 지 걱정되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퀴어축제 당일 수많은 개신교인들이 거리로 나와 반대 집회를 하고 기도회를 했다. 퀴어축제가 열리는 바로 옆에서 말이다. 추태가 그런 추태가 있을 수 있을까 싶었다. 60넘은 노인 신자들만이 아니라 젊은 신자들도 많았다. 그들은 ‘동성애가 죄’라는 구약의 텍스트에는 주목하면서 ‘재물과 욕심이 죄’라는 신·구약의 수많은 텍스트에는 눈을 감는다. 동성애를 하는 것과 재물을 탐하고 그것이 신보다 더 큰 우상이 되는 것을 등치시키지 않는다. 재물과 탐욕에 대한 성경의 명령은 당장 ‘내 일’이 되니, 눈을 감고 동성애는 공격할 대상이 있으니 ‘너의 일’이 되는 것이다. 편하고 명확하다. 도그마와 자기합리화에 빠진 종교는 쓸모가 없다.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사안마다 요리 빼고 조리 빼면서 성경을 우악스럽게 들이미는 것에 종교적 순수는 정체를 상실한다. 자신들을 향한 세상의 비판과 조롱도 그들 내부의 도그마 안에서는 종교적 고난으로 둔갑된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당장 내가 오늘 만나는 회사의 동료들, 학교의 친구들, 연락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종교적 순수를 담보하는 일이다. 교회 안에서 거룩하게 찬송 부르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렇게 은혜로운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깜빡이를 켜지 않은 채 내 앞으로 들어오는 차를 향해 욕설을 내뱉는다면, 그의 종교성은 순수한 것인가? 그의 예배는 정직한 것인가? 중세 성인들처럼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 안에서의 모습과 교회 밖에서의 모습이 일치해야 한다는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요구조건도 아니다. 일치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판이하게 다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은 나 스스로의 고백이자 다짐이다.
철학은 이런 것이다. 이런 것이어야 한다. 어렵지 않고 멀지 않아야 한다. 가깝고 쉬워야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된다. 골머리를 앓고 괴롭기만 했다면 ‘철학’의 ‘ㅊ’자도 다시 꺼내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삶을 부정하거나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철학이 필요하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철학의 면은 각자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무리한 요구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책의 저자처럼 삶과 가까운 철학적 담론을 던지는 철학자들이 많아야 한다. 성장과 경쟁, 힐링과 청춘이 난무해 너무 어지럽다. 복잡하지 않아도, 번지르르하지 않아도 쉽게 내 삶과 적용할 수 있는 철학을 던지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이 책처럼 쉽게 읽히고 쉽게 나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책도 많이 출간되기를 희망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