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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평전 - 조선 후기 민족 최고의 실천적 학자
박석무 지음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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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십 수 년 전, 강진에 있는 다산초당에 갔었다. 수능을 치고 친구들과 함께 전라도 여행에 나섰는데 그 일정 중 하나가 다산초당 방문이었다. “우리들 스스로 동서화합, 전라도와 경상도의 화해를 위해 우리가 전라도를 가보자.” 성인이 되는 문턱에서 터져 나온 전적인 객기와 호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와 친구들은 경상북도 포항에 살고 있었다. 아는 대학생 형 몇 명과 함께 봉고차를 타고 생전 처음 88고속도로를 탔다. 담양IC를 나서려 하는데, 친구 한 명이 걱정스러운 말을 꺼냈다. “우리 엄마가 경상도에서 온 티 내지 마라 하던데? 경상도 차면 길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하드라.” 명색이 동서화합을 위해 떠난 여행인데, 전라도에 들어가기 직전 이상한 소리를 하는 친구 녀석을 응징했다. 한편 걱정되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하는 여행길이었다. 그때만 해도 내비게이션이 없었다. 전적으로 이정표와 도로지로를 보며 찾아다니는 여행이었다. 담양IC에서 통행료를 계산한 후 직원 분에게 길을 물었는데, 웬걸~! 너무 친절하게 대답해주셨다. “경북 번호판이네요. 어디서 오셨어요?” 바보들……. 그때는 자동차 번호판에 지역이 명기되어 있었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지 않아도 번호판만 보면 어디 지역에서 온 차량인지 뻔히 알게 되는데…….

포항에서 왔다고 대답하니까 어이구 멀리서 오셨다고 경상도 차보기 힘든데 반갑다고 길을 아주 자세하고 친절하게 가르쳐주셨다.

아무튼 담양, 광주, 목포, 해남, 고흥, 강진, 순천을 여행했는데 너무 좋았다. 무작정 들어간 허름한 시골 식당에서 생전 처음 맛보는 남도 음식에 모두들 넋을 잃었다. 사람들도 너무 친절했다. 첫 전라도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여행지 두 곳은 망월동 국립묘지와 다산초당이었다.

다산초당은 당시만 해도 일대가 개발되거나 수리·보수되기 전이었다. 주차장에서 초당까지 올라가는 좁은 길 양 옆으로 늘어선 대나무 숲이 장관이었고 마침 안개가 많이 끼어 있어서 환상적인 운치를 경험했었다. 역사시간에 선생님이 열변을 토하며 설명하시던 다산 정약용의 초당이 너무 초라하고 작아서 놀랐다. 그나마도 원래 초가집이던 초당을 기와집으로 새로 만들었다는 이 책의 설명을 읽고 나니 원래는 얼마나 보잘 것 없었을지 짐작이 갔다. 건물이나 선생의 거처는 초라했으나 초당 뒤편으로 펼쳐진 남해 바다를 장관이었다. 이후에 재차 방문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건물도 많이 들어서고 일대가 개발이 많이 되어 있다고 하는데 예전에 봤던 그 운치와 분위기를 지금은 느낄 수 없을 것 같다.

 

이 책 「다산 정약용 평전」국내 다산 정약용 연구의 전문가이자 권위자인 박석무씨가 썼다. 워낙 유명한 역사적 인물이고 학교에서도 배우는 인물이기 때문에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모르는 것이 훨씬 많았다. 책은 다산의 생애를 순차적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따라 읽는 것이 큰 재미다. 책의 두께만큼이나 배울 수 있고 현 시대에 적용해야 할 적용점이 많았다.

 


 

“다산이 추구했던 학문의 궁극적 목적이나 실현하고 싶던 국가에 대한 목표는 바로 공정하고 공평한 세상의 실현이었다.” (p.20)

“다산은 「원덕」이라는 글에서 타고난 착한 성품을 행동으로 옮기면 덕이 된다고 했다. 곧 성(性)+행(行)=덕(德)으로, 위대한 철학의 탄생이었다.” (p.624)

 

무엇보다 다산은 실천적 지식인이자 학자, 정치가이자 철학자였음을 알 수 있다. 단순히 책만 쓰고 글만 쓰는 지식인이 아니었다. 다산은 한 고을을 맡은 목민관이었고 임금의 어명을 받아 암행어사로도 활동했다. 그래서 자신의 글과 책에서 강조한 면을 실제 정치와 행정에 적용한 실천가였다.

 


 

“갓 태어난 유아에게 도 군포를 매기는 황구첨정과 이미 세상을 떠나 무덤 속에 뼈만 남아 잇는 부재자에게도 세금을 물리는 백골징포의 기막힌 제도” (p.51)

 

조선후기 삼정의 문란이 결국 왕조를 몰락으로 이끈 중요한 계기가 되었는데, 다산은 이것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단지 뇌물과 인맥으로 벼슬자리에 올라 탐관오리가 되는 여느 정치가, 행정가들과는 달랐다. 우선 그는 백성들의 현실을 정확하게 간파했다. 만약 실천적 학문에 관심을 두지 않은 벼슬아치였다면 백성들의 궁핍한 삶과 헤어날 수 없는 불행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후기 대부분의 벼슬아치들과 목민관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다산은 자신이 맡은 고을의 문제와 구조적 폐해를 정확하게 인식했고 그것을 혁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실학자 다산은 학문이 실용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학문으로 여길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녔다.” (p.342)

 

그것은 곧 수많은 저술을 남긴 동력이 되었다.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등은 궁핍하고 참담한 백성들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데서 출발했다. 백성들이 대수롭지 않은 병에도 죽어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인식하고 의서를 펴내기도 했다. 한양에 살거나 큰 고을에 살고 있다면 의원을 찾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산간벽지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이런 상황을 가슴으로 이해하고 아파한 다산은 자신의 지식과 연구를 통해 의서를 편찬한 것이다.

다산의 이런 실천적 학문과 행정은 이후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다. 유배 길에 떠나는 그를 향해 백성들이 진심으로 마음 아파하고 애통해 했다는 이야기는 이것의 방증이다.

 


 

“‘마음속의 이치’는 관념일 뿐, 아무런 공효(功效)가 없다. 행위와 행동으로 나타나야만 인의예지의 공효가 있지, 그렇지 않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p.171)

 

당대 주류 학문이자 조선의 통치이념이기도 했던 성리학을 바라보는 다산의 관점도 철저하게 실천적이다. “‘마음속의 이치’는 관념일 뿐”이라는 다산의 일갈은 주류 성리학적 구조를 뒤흔드는 혁명적인 선언이다. 아무런 공효(공을 들인 보람이나 효과)가 없는 관념론적인 문제를 가지고 정파 싸움을 하고 당쟁을 하는 무리들을 향한 싸대기인 것이다. 다산의 일생은 행위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는 공효에 주목되었다.

 


 

“18세기 후반, 비록 영조의 탕평책으로 남인들이 미관말직에라도 오르던 때였으나, 역시 권력의 중심은 노론과 소론에 있었고 남인은 소외된 세력임에 분명했다.” (p.77)

 

어쩌면 다생의 태생적 정체성이 이런 실천적 일생을 살게 한 원동력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영·정도 시절 권력에서 배제된 남인 세력에 속한 다산이었기 때문이다. 영조가 탕평책을 실시하고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가 신진 남인 세력을 중용하기는 했으나 다산의 일생은 비주류였다고 봐야 한다. 영·정조 시절이 조선의 마지막 중흥기라고 역사 시간에 배우기는 했지만 이미 백성들의 삶은 파탄 지경이었다. 조선 왕조 내내 전쟁이 지속되었고 당쟁은 격화되었다. 그 속에서 고스란히 피해를 떠안는 것은 일반 백성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주류를 형성한 세력들은 당쟁에 치중하고 사대주의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비주류 남인세력들이 모두 다산처럼 훌륭한 지식인이 아닌 것을 보면 다산의 삶은 칭송받을 만하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비주류라 하더라도 입신만을 위했다면 적절하게 타협하고 정치적으로 처신하면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시군시신(是君是臣)이라. 그 임금에 그 신하라는 뜻이니, 다산이 없는 정조, 정조가 없는 다산의 모습은 설정할 수가 없다.” (p.287)

 

성균관에 들어온 지 6년 만에 급제한 다산을 든든하게 지켜준 이는 정조다. 정조가 없었다면 다산이 없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남인들은 말단 벼슬자리도 힘든 정치적 상황이었지만 정조는 그런 정치적 상황을 넘어서, 다른 정파의 관료들도 다산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조성했다.

 


 

“노론 벽파의 영수로 영의정으로 있던 심환지 역시 경연 석상에서 ‘상소문이 좋고 그의 심사도 광명스럽다’라고 극찬하였으며” (p.222)

 

6년 동안의 성균관 생활은 이후 다산이 백성을 위하는 실천적 목민관이 되고 후세에 보석과 같은 책을 전해줄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 임금이 참여하는 경연과 술자리에서조차 정조는 다산의 글 솜씨가 많이 전해지도록 애쓴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노력으로 남인의 반대 노론 벽파의 영수인 심환지에게조차 다산의 글 솜씨와 심사를 인정받게 만들었다. 물론, 이후에 다산이 정승에까지 오르지는 못하지만 정조의 복심이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다산이 임금으로부터 총애를 받고, 그의 학술이나 글재주가 높아갈수록 시기하는 사람도 늘고 그를 해치려는 무리들이 패거리를 지어 비방하기 시작했다.” (p.148)

 

당연한 이치겠지만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는 다산을 싫어하고 시기하는 무리가 생겼음은 당연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른 것이 없다. 지금도 그렇다. 하물며 지금 연예인들도 어떤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갑자기 인기가 많아지고 하면 팬들도 많아지지만 안티도 많아지게 마련이다. 정조 당시 비주류 젊은 관료인 다산에 대한 정조의 총애가 지나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정조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세손 시절부터 당쟁을 지켜봐 왔고 자신만의 힘으로는 반대파를 이겨낼 수 없었다. 그래서 성균관을 통해 젊은 관료들을 키워내고 힘을 축적했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은 성공하지 못했다. 정조는 끊임없는 암살과 암투의 시도를 벗어날 수 없었고 다산 또한 음해와 시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젊은 시절 같은 남인으로 가까이 지내며 절친했던 친구 이기경은 천주교 문제로 입장을 달리하면서 다산의 일생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대표적인 악연의 인물이었다.” (p.538)

 

결국 다산은 젊은 시절 잠시 빠졌었던 천주교 문제로 인해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반대파의 음해가 아니라 젊은 시절 절친했던 친구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단지 이기경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로부터의 공격과 음해가 정조의 과도한 다산에 대한 총애 때문이었는지, 책에서의 설명처럼 다산이 암행어사로 임무를 수행할 때 피해를 입은 탐관오리들과 연관된 사람들의 복수로 연유한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산 자신의 고백서이자 반성문인 「자명소」가 생생하게 존재하고, 어떤 기록에도 그가 천주교 신자였다는 반대파의 명확한 증거가 제시되지 않고 있다. 일부 천주교 관계자들이 다만 외국인들의 믿기 어려운 기록이나 자료를 근거로 귀양살이 이후에도 다산이 신자 생활을 했다는” (p.224)

 

나도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다산이 자신의 천주교도로서의 정체성을 끝내 부정하지 않아 18년이라는 유배생활을 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다고 한다. 「자명소」라는 일종의 고백서이자 반성문의 일부가 책에 실려 있는데, 다산은 한 때 천주교에 빠지기는 했지만 천주교가 조선에서 교세를 확장하기 시작하면서 제사를 지내지 않아야 한다는 교리를 내세웠을 때 자신은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천주교를 버렸다고 고백한다. 실제로 천주교인을 체포하는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저자인 박석무씨는 이후에 한국의 천주교 측에서 다산이 천주교임을 전하고 외국인들의 신빙성 없는 자료를 근거했다고 주장 한다.

이 책의 내용대로라면 다산은 천주교인이 아님에도 그로 인해 파직 당하고 유배생활을 한 것이다. 그것도 끈질기고 집요한 예전 친구로 인해서 말이다.

 


 

“18년의 유배살이에서 마침내 풀려난 다산은 1818년 9월 14일 고향의 여유당으로 돌아왔다.” (p.507)

 

하지만 이 책은 18년의 이 유배생활을 대하는 다산의 태도와 삶의 방향에 박수를 보낸다. ‘친구 놈이 나른 천주교인으로 음해해 이 촌구석까지 내려와 있다니! 못 살겠다.’가 아니라 끊임없이 책을 쓰고 아들들과의 편지 왕래를 통해 자신의 가르침을 전했다. 유배가 풀려난 뒤에도 벼슬자리를 기웃거리지 않고 후학양성과 유배생활 중 완성하지 못한 저술활동에 전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실천적 학문을 하고 그것을 민치(民治)에도 적용해 실제 백성들의 아픔을 덜어 준 다산의 학문과 업적이 그렇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고 다산에 대한 책이나 평전 또한 많지 않은 것이 책을 읽는 내내 궁금했는데, 책의 말미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다산 정약용 탄생 200주년기념 논문집」 김광진 다산의 만민개로사상(萬民皆勞思想)을 높이 평가, 사회 경제 사상의 한 대목을 설명 선비라는 양반 계급의 죄악과 무위도식을 통렬하게 폭로 비판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에게서 토지에 대한 봉건적 지배권을 박탈함으로써 그들의 특권의 경제적 토대를 완전히 깨트려 버리고 그들도 생산 노동에 참가하지 않으면 먹지 못하게 하는 혁신적인 최고의 토지 강령을 여전법에서 관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p.595)

 

 

북한에서는 다산 탄생 200주년을 맞아 학술적으로 큰 작업을 했다고 책에서는 소개한다. 그 중에서도 다산 선생이 강조했던 <여전>의 개념은 다분히 공산주의·사회주의적이다. 그래서 오히려 북한에서는 다산에 대한 연구에 집중했는지도 모르겠다. <여전>은 쉽게 말하면 공동경작개념이다. 무엇보다 지주의 봉건적 토지를 몰수해 일반 백성들이 공동 경작한다는 것이 북한에서는 연구할 만한 주요한 가치였겠지만 한국에서는 국사시간에나 배우는 과거 이야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현 시대에도 다산이 주창했던 <여전>과 비슷한 경제정책은 한국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정책이다. 부동산과 금융을 손에 쥔 일부가 대다수를 지배하는 국가에서 <여전>은 빨갱이 정책이다. 당장 친노종북으로 몰리게 될 것이다. 참...씁쓸하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다산 선생을 연구하지 않는 것은 아닐 텐데, 더 많은 책이 출간되기를 희망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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