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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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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가수로 데뷔한 모 연예인의 음주사고가 있었다. 그리고 몇 주 전에는 유명한 모 힙합 뮤지션이 음주운전을 하다 적발 되어 출연하던 예능 프로그램을 하차하기도 했다. 그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언론이나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 “어떻게 공인인 연예인이 음주 운전을 할 수 있느냐?”이다. 그래서 분개한다. 아니 돈도 많은 연예인들이 대리운전하면 될 것을 왜 그러냐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이 개인적인 일이고 그들이 무슨 공인이냐 반론을 할라치면 우르르 몰려와 난리를 친다. 그 연예인들이 대중들로 인해 인기를 얻고 그들이 출연한 TV프로그램이나 광고를 통해 돈을 벌었다면 그것은 이미 대중적인 혹은 공적인 책임을 다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일견 동의하면서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연예인들의 그런 사건과 사고에는 그렇게까지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진짜 공인들에게는 왜 그렇게 관대하냐는 것이다. 특히 국회의원들이 그렇다. 국회의원들은 국민들의 마음을 대변해 선출된 진짜배기 공인이다. 사적 욕망과 입신양명을 달성하라고 국회에 보낸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지역구와 지역사회를 대변해 일을 해달라고 국회에 보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선거운동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국회의원 임기 대부분을 자신의 사적 욕망과 입신양명을 위해 살아도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하물며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사고와 사건을 일으키거나 사회적 상식의 선을 넘어선 발언이나 망발을 하더라도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아나운서가 되려면 다 줄 생각을 해야 한다.’ 라는 막말로 크게 문제가 되었던 전직 국회의원은 지금 케이블TV에서 종횡무진하고 있다. 내가 본 것만 해도 3-4개 프로그램은 되는 것 같다. 사람들은 그렇게 어이없는 막말을 한 전직 국회의원인 줄 뻔히 알면서 그가 나오는 혹은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보며 희희덕 거린다.

첨단의 디지털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지하철 무개념녀, 터미널 무개념남이 SNS상에 올라오면 바로 그(그녀)의 신상을 털어낼 정도다. 실시간으로 지구의 이쪽과 반대편이 연결되고, 과거의 특정 시점을 손바닥 안으로 불러낼 수 있다. 관계와 소통은 파편화되고 분자화되었지만 내가 하는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는 거리낌 없이 나를 노출한다. 무개념녀와 무개념남에게는 엄격하게 공적인 잣대를 들이미는 개인이 철저하게 사적 공간을 전시한다.

 

 

“존경은 공공성의 초석을 이룬다. 존경심이 사라지면 공공성도 무너진다. 공공성의 붕괴와 존경의 소멸은 서로에 대해 원인이자 결과이다. 공공성은 무엇보다도 존경심을 가지고 사적인 것에 대해 눈을 감는 태도에 의해 유지될 수 있다.” (p.116)

책의 저자 한병철의 논리와 사고에 동의한다. 공적 공간과 공적 영역은 일정정도의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공공성이 붕괴된 곳에 존경이 움틀 수 없다. 이미 현대 사회를 사는 젊은이들은 함께 살아가는 어른들을 존경하지 않는다. 무시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자본주의의 천박함의 끝을 내달리는 현대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이 공공성의 확보와 확대인데, 정부의 국민에 대한 존경심도 없고 국민의 정부에 대한 존경심도 없으며 국민들 상호의 존경심도 사라져 버린 오늘이기에 공공성의 확보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디지털시대의 확장과 대두는 사적 거리를 없애 버렸다. 책의 표현처럼 “내밀한 영역이 공적으로 전시되고, 사적인 것이 공개된다.” 공적인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가 사라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연예인들과 정치인들에게 공적 책무를 요구하고 거리낌 없이 내놓은 SNS상의 사적 영역이 고스란히 보호될 것을 기대할 수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이 책 「투명사회」는 투명성이 가지는 허물과 망상이 어떻게 현대인의 의식과 생활을 파고들었으며 그것이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를 미학적으로 파헤친 책이다. 재독학자의 책이라 그런지 현학적이고 사변적이다. 책의 분량은 많지 않지만 읽기가 쉽지 않았다. 대학 때 레포트를 준비하다 미치기 일보 직전에 갔었던 헤겔의 책이 떠올랐다.

 

 

“신뢰 위에 세워진 사회에서는 투명성에 대한 집요한 요구가 생겨나지 않는다. 투명사회는 불신과 의심의 사회, 신뢰가 줄어들기에 통제에 기대려는 사회다.” (p.98)

이 문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나는 이제껏 신뢰 위에 세워진 사회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도 분명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는 사회인데, 저자의 말처럼 왜 투명성에 대한 요구도 집요하게 제기되고 있지 않는지 궁금했다. 앞서 언급했던 공공성의 확보와 확대에 대한 개념에 투영해 생각해보니 이해가 되었다. 한 사회가, 그 구성원의 대다수가 ‘이 사회는 신뢰의 사회야. 공공성이 확보되고 그것이 우리들의 삶에, 일상에 미치는 사회야.’라는 확신이 있다면 저자가 이야기하는 투명성의 필요조차 느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상적으로 부딪치고 경험하는 모든 삶의 기록이 투명성의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불신과 의심이 증폭되면 통제가 뒤따른다. 신뢰를 확보하지 못한 집단은 반드시 통제에 기댄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진도 팽목항에도 수백 명의 사복 경찰을 투입했다고 한다. 경찰 유니폼을 입고 유가족을 위해 공적 서비스를 수행하기 위함이 아니라 통제하고 감시하기 위함이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투명성을 제고한다는 미명하에 구성원을 통제한다. 이미 6년이 넘게 겪고 있는 현실이다.

 

 

“현대 통제사회의 주민들은 네트워크화 되어 서로 맹렬하게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다. 고립을 통하나 고독이 아니라 과도한 커뮤니케이션이 투명성을 보장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특수성은 무엇보다도 그 속의 주민들 스스로가 자기를 전시하고 노출함으로써 파놉티콘의 건설과 유지에 능동적으로 기여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p.95)

근대의 파놉티콘은 이제 별 의미가 없다. 저자의 지적대로 지금은 개인 간 커뮤니케이션이 너무 넘치는 사회다. 너무 넘치는 것이 문제다. 투명성으로 겉칠해진 과도한 커뮤니케이션은 개인을 더욱 고립시킨다. 고독하게 SNS를 수시로 드나들지만 넘쳐나는 건 탐라의 찌꺼기들뿐이다. 한눈에 죄수들을 통제하고 감시위해 만들어진 원형감옥에 스스로를 집어 던지는 꼴이다. 하지만 한 가지 저자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어 보인다. 한국의 현실이다. 지극히 사적 공간인 SNS조차 어떤 집단과 무리에 의해 감시되고 조작되고 왜곡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한국보다는 여론개진과 형성이 자유로울 것으로 확신되는 독일에서는 통제사회의 주민들, 과도한 커뮤니케이션을 장착한 개인들이 능동적으로 디지털 원형감옥을 유지하겠지만 한국은 다르다. 능동적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의 SNS조차 스스로 자기 검열을 하고 하늘의 별따기 보다 더 어려운 대기업 취업과 공무원 고시를 통과하기 전까지는 그저, 전적으로 사적인 가십을 늘어놓는 것으로 SNS를 활용한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내 SNS 감시되고 있을지 모른다는 광범위한 공포가 도처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전시하고 과도한 가시성의 장에 던져 넣음으로써 사회의 포르노화를 촉진한다.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것은 전시가치의 극대화다.” (p.55)

“포르노적 과시와 파놉티콘적 통제가 서로를 넘나든다. 노출증과 관음증이 디지털 파놉티콘인 인터넷을 살찌운다.” (p.96)

이미 자본주의의 천박함은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만천하에 들어났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대체할 다른 수단과 방법이 마땅치 않다. 누구하나 ‘자! 이제 이 길로 갑시다!’라는 이도 없다. 모든 것이 상품으로 치환되고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사람)들은 포르노에 출연하지도 못한다. 포르노적 과시와 파놉티콘적 통제가 넘실대는 사회를 사는 현대인들이 애처롭다. 나도 그 현대인들 중 한명이라는 자각을 하면서도 애처롭다. 투명한 사회를 열망하면서도 속물근성을 버리지 못한다. 이미 비대해져서 감당 못할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는 인터넷은 이것의 첨병이다. 이 책의 한 장을 통해 지적하는 인터넷 댓글과 관련한 논의에서도 이러한 심각성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일베’는 여러 각도에서 여러 시도를 통해 조명되고 있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을 사회병리현상임은 분명하다. 그냥 우리는 이런 사회를 살고 있다는 것을 쿨하게 인정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일베’또한 함께 디지털 파놉티콘을 살찌우고 있는 공범인 것이라는 생각. 애처롭고 걱정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딱히 별다른 대안이 없다면 별 수 없는 문제다.

 

 

“행동을 함께하기로 결단한 군중만이 권력을 산출한다. 군중은 권력이다. 디지털 무리에서는 이러한 결연함을 찾을 수 없다. 그들은 행진하지 않는다. 디지털 무리는 갑자기 생겨났다가 갑자기 사라진다.” (p.132)

행진하지 않는 디지털 세대를 향해 ‘분노하라. 거리로 나오라!’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예전의 진용을 갖출 수 없다. 대열도 분명하지 않고 정체성도 모호하다. 앞서 지적했듯이 한국이라는 사회에서는 거리로 나오기만 하면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경찰버스가 옹위해주고 무료로 사진 촬영도 해주고 한겨울에도 이한치한 하라고 물대포를 쏴준다. 제대로 권력을 형성해 결연한 행동을 함께 하고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적이 없다. 단 한번도. 책에서 표현하는 디지털 무리들보다 더 빠르게 생겼다가 사라진다. 미리 겁을 먹는다. 책에서는 따로 다루지 않지만 한국의 특수하고도 기괴한 언론환경에 대해서 저자가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군중의 힘으로 권력을 산출할 수 있다는 것이 가정일 수밖에 없고 행진하고 모이는 것이 이곳에서는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알려주고 싶다. 세월호가 침몰한 곳에서 돈과 힘과 뒷배경을 등에 업은 큰 언론사들이 보도하는 내용과 독립 인터넷 언론이 보도하는 내용이 왜 그렇지 다른지 저자에게 설명해주고 싶다. 이런 상황에서 부유하는 디지털 무리를 한데 모으는 힘이 과연 다시 탄생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타자와 직면할 때 찾아오는 문턱의 감정, 즉 고통은 정신의 매체다. 정신은 고통이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고통스러운 삶을 묘사한다. 반면 디지털의 현상학은 정신의 변증법적 고통과 무관하다. 그것은 좋아요의 현상학이다.” (p.187)

그렇다면 우리에게 시급하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나는 타자화라고 생각한다. 창궐하는 디지털의 대해(大海)에서 그저 떠다니며 포르노와 파놉티콘을 소구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타자와 직면할 때 찾아오는 문턱의 감정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이 저자의 말처럼 고통일수도 있고 고통이 아닐 수도 있다. 자꾸만 타자화에 힘써야 한다. 시도하고 또 시도해야 한다. 타자화는 이제 누군가 선동하고 주입하는 것으로 경험할 수 없는 문제다.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시도되어야 하는 문제다. 당장의 삶을 영위하고 직면한 문제에 거꾸러지는 오늘이지만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현대의 개인이 사회를 구성하고 살 이유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최소한 함께 사회를 구성하는 타자가 겪는 고통과 아픔에 귀 기울이고 그것에 나를 투영하는 노력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결국 그것이 개인이 사는 길이라는 것이 증명된 적은 없지만 최소한 떠돌며 부유하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디지털 무리를 만들어야 한다.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한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간 자의든 타의든 많이 먹었던 겁에서 조금 떨어져 나와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언급하기도 하고 다른 이의 언급을 공유하고 리트윗하고 생각하는 행위 정도. 이것마저 무리한 요구라면 그냥 투명사회에서 투명인간으로 손가락질로 디지털의 대해(大海)를 부유하셔야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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