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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도시 -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령운동까지
데이비드 하비 지음, 한상연 옮김 / 에이도스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돌이켜 보면 그때가 참 좋았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운동장으로 나가 뛰어 놀았다. 학교 바로 앞에 넓은 백사장이 있어 뒹굴며 놀았다. 한참 놀다 집에 가자마자 가방을 던져 놓고 동네 놀이터로 부리나케 뛰어 나갔다. 그렇게 또 한참을 놀다 보면 엄마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OO야~~ 저녁 먹어라~~~” 아쉽지만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며 엄마 손에 붙잡혀 끌려갔다. 아쉽지만 아쉽지 않았다. 내일 또 그렇게 한바탕 놀면 되니까.

매일같이 뛰고 뒹굴고 하는 우리들의 놀이터에는 항상 함께 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보형이었다. 동네 골목 담벼락 아래나 놀이터 한쪽 구석에서 항상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름도 나이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함께 노는 형들의 얘기나 동네 어른들로부터 주워들은 얘기는 많았지만 그 바보형의 사연에 대해 팩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 없었던 것 같다. 아침 일찍 동네 어귀에서 나타나 동네 꼬마 녀석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이후 비로소 그 바보형도 집으로 갔다. 그 사람의 집이 정확히 어딘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집으로 가려면 동네 끝 저수지를 지나 산을 하나 넘어야 한다는 말도 있었고 집이 없어 산에서 잔다는 말도 있었고 우리가 다니던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아들이어서 밤에는 학교에서 잔다는 말도 있었지만 그 바보형의 집에 가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진위를 알 수 없었다.

그냥 그 바보형이 있었다. 항상 우리와 함께 있었다. 적어도 우리 무리 중 가장 덩치 큰 형보다 더 덩치가 컸고, 가장 나이가 많은 형보다 더 나이가 많은 것으로 보였지만 단 한번도 우리가 노는 것을 방해하거나 때리거나 위협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멀찍이 떨어져서 한참을 지켜보다가 동네를 배회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특이했던 것은 다른 동네에도 우리 동네 바보형과 같은 사람들이 꼭 한명씩은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냥 거기에 있었다. 우리와 같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인지 정확하게 특정할 수는 없지만 동네에서 바보형들이 없어졌다. 골목을 어슬렁거리고 동네 꼬마들 노는 곳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동네에 꼭 한 명씩은 있었던 바보형들이 없어졌다. 골목골목 들어찬 주택이 없어지고 아파트가 생기고 도시가 개발되면서부터 없어졌던 것 같은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돌이켜보면 자동차가 왕래하기 이전 도로는 공유재였다. 사람들이 교류하는 장소, 아이들이 뛰노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현재 도로라는 공유재는 파괴되었고 이제는 자동차만 바삐 오가는 공공 공간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p.139)

맞다. 그때는 도로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버스가 다니는 큰 도로를 제외하면 모조리 우리, 동네 꼬마들이 뛰어 다니고 뒹굴 수 있었던 골목이 많았다. 이 책 「반란의 도시」는 우리들이, 우리들과 같은 공간에 존재했었던 바보형들이 어떻게 도시에서 사라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회적 고찰을 다루고 있다. <도시권>은 생소한 개념이지만 이해하기 쉬운 개념이다. 도시에서 살고 있는 도시인들이 당연하게 가지는 권리다. 그땅에서 살고 있고 그 도시에서 세금을 내고 그렇게 세금을 내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권리를 가진다는 개념이다. 도시는 원래 공유재다. 국가와 사회도 그렇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땅과 도로는 공유재다. 일정한 공유재를 도시에서 함께 사는 사람들이 공유해서 사용해도 남았을때는 현대 도시가 갖는 제반 문제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공유재가 파괴되고, 그것을 가지는 이가 사유화하면서 도시는 급속도로 파괴되었다. 이 책에서 논하는 파괴는 일반적인 파괴의 개념과는 다르다. 시대가 변하고 도시가 개발되면서 도시는 물론 발전했다. 높은 건물이 생기고 더 많은 도로가 생기고 온갖 편의시설과 공공시설, 교육시설이 만들어 졌다. 분명 예전보다 더 살기 좋고 편리하고 유용한 삶의 장이 되었다. 하지만 바보형들이 없어졌다. 일부러 내쫓은 것도 아니고 모두 모아서 어떤 장소에 가두어 놓은 것도 아닐텐데, 없어졌다.

 

 

“과거부터 형성되어 오늘날의 모습으로 자리 잡은 도시권은 지나치게 협소하고 제한적이며 대부분의 경우 한줌도 안 되는 정치·경제 엘리트 수중에 들어가 있다.” (p.58)

책에서 말하는 이들 정치·경제 엘리트는 자신들의 특수한 수요와 욕구에 가까운 모습으로 도시를 만들었다. 국가와 사회의 특성에 따라 그런 엘리트들은 다른 형태로 발현된다. 한국의 현대사에서도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했다.

 

 

“전 세계 거의 모든 도시에서 부자를 위한 건설 붐이 한창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도시는 농업의 산업화와 상업화 탓에 농지를 잃고 몰려든 가난한 농민들로 북적인다.” (p.40)

박정희 시절 도시로 몰려든 도시빈민들에 대한 강제 이주 정책은 폭력적이고 야만적이었다. 농촌에서 농사로는 도저히 살길이 없어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은 서울의 산등성이에 몰려들었다. 판잣집을 짓고 살고 움막을 짓고 살았다. 그런데 갑자기 멀리 광주로 성남으로 부천으로 쫓겨났다. 그들이 땅거미처럼 들러 붙은 것이 미관에 좋지 않았던 것인지, 그들이 없어진 자리를 상업·주택 용지로 만들어 부동산 투기를 하려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그들은 쫓겨났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벌판에 내던져 진 도시빈민들에게 도시권은 해당 사항이 없었다. 서울에 있는 공장에 가기 위해서 타고갈 버스도 없었고 상·하수도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삶을 영위해야마나 했다. 이들이 떠난 도시는 엘리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황무지로 쫓겨가 죽을 힘을 다해 돈을 벌고 모아 다시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들 엘리트들의 손에 있는 아파트를 사야 했다. 또다시 엘리트들의 잇속만 채워지는 꼴이었다. 이 꼴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친 부동산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님은 주지의 사실이다.

 

 

“실천적 슬로건이면서 정치적 이념이기도 한 집단적 권리, 도시권은 해묵은 물음을 다시 제기한다. 즉, 도시 공간의 형성과 잉여의 생산 및 이용 사이의 내적 관계를 지배하는 자는 누구인가?” (p.60)

도시 공간을 재배치하고 재구조화하는 것에는 분명히 잉여가치가 형성된다. 누군가는 반드시 배를 불린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분별하게 도시를 개발하고 확장하며 미친듯이 치솟는 부동산 가격을 지금처럼 이렇게 펌프질 하는 미친짓을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형성된 잉여를 갖는 자(들)은 누구인가? 지금도 도시의 모든 이권을 독차지 하고 있는 자들이다. 단순히 건물 몇채를 가진 건물주가 아니라 도시를 재배치하고 개발하는 등의 구조를 만들게 한 장본인들, 정치·경제 엘리트들이라 볼 수 있다. 도시에 건물이 들어서게 하고 큰 도로가 생기게 하는 등의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동네 꼬마들과 바보형들은 모조리 사라졌다. 도시는 더 이상 동네 형들과 친구들, 바보형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아이들은 학원이다 과외다 독서실이다 도로와 골목을 뛰어다닐 시간이 없다. 물론, 그런 골목 또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른들은 도시에서 살아남이 위해 매일 고군분투 중이다. 반란과 혁명을 꿈꾸기에는 현실이 너무 가혹하다. 국가와 사회가 더 이상 국민의 안전을 지켜줄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자 사람들은 집단 우울증에 빠진 것처럼 힘들어졌다. 최소한 국가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안전을 지켜주고 위기에 빠진 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해 줄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 그리스의 파업 노동자 그리고 런던에서 더반, 부에노스아이레스, 선전, 뭄바이 등 세계 곳곳에서 등장하는 전투적 대항운동도 민중 대 월스트리트당 투쟁의 일환이다. 대자본과 화폐 권력의 야만적 지배는 이제 세계 어디에서나 수세에 몰렸다.” (p.274)

그래서 책의 후반부에서 소개되는 세계 각국에서 일어난 도시의 반란은 최소한 한국에서는 해당되지 않을 것 같다. 모든 것이 가진 자, 정치·경제 엘리트를 위해 존재하는 도시와 국가에서는 애초에 도시권을 가진 시민, 국민들이라 할지라도 ‘자기 팔 자기가 흔들기’를 해야마나 한다.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고 지켜주지 않는 사회와 국가에서 산다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다. 분명히 이번 달에도 피같은 내 돈이 국가의 주머니에 세금으로 정확하게 들어가고 있는데, 내 팔은 여전히 내가 흔들어야 한다. 이것이 반복되고 재생산되면서 가끔 해외에서 들려오는 ‘반란의 기운’은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문제는 자본주의 자체가 걷잡을 수 없이 야만스러워지는 사회에서 우리가 힘겹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야만적 정치인은 지출 경비를 속이며 국민의 혈세를 가로챈다.” (p.262)

“대량 약탈의 정치경제, 백주의 강도짓을 방불케 하는 약탈적 수법의 정치경제는 이제 일상사가 되고 있다.” (p.263)

신자유주의가 종언을 고하고 난 후 그 빈자리를 차지한 것은 거대 자본권력이다. 거대 자본권력이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정치권력과의 결탁이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 야만적 정치인, 야만적 기업인, 야만적 지식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단지 내가 어린 시절 뛰어놀던 동네 골목과 그 골목에서 함께 존재했던 바보형들만 판을 빼앗긴 것이 아니다. 정당하게 도시권을 주장하고, 아니 굳이 주장하지 않더라도 당연하게 누려야 할 도시권을 박탈당한 채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있다. 책에서의 표현처럼 벌건 대낮에 강도짓을 당하고 있지만 하소연 할 데도 없다. 계속되는 표현처럼 일상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분노하고 짱돌을 들고 봉기하고 반란을 도모하거나 일으키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멀리서 전해 듣지만 우리의 일상을 바꿀만큼은 아니다.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 우리가 특별히 굼뜨거나 약한 사람들은 아닌데,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 쉽게 일어서지 못한다. 쉽게 반란을 꿈꾸지 못한다. 오랜 독재정권의 무시무시한 공권력의 발로가 지금세대의 DNA에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는 것일까? 일상이 되어 버리면 나중에는 불편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어차피 이렇게 살아 왔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바뀌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살아야 한다.’ 라는 패배주의적인 자각. 이것이 가장 위험한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대로, 계속해서 끝까지 지금의 정치·경제 엘리트들이 도시와 사회와 국가를 움켜쥐고 모든 것을 가진다면... 우리의 미래는 너무 참담하다. 정치적 각성만으로 반란을 도모할 수 없다. 애초에 우리에게 도시권이라는 것이 존재했고, 그것은 사회와 국가를 구성하는 당연한 권리이자 특권이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단순히 현재 정권과 기득권 혹은 자신과 정치적 방향이나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설익은 채 나무에서 떨어져 썩어가는 어느 열매처럼 그렇게 없어질 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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