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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정복자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사이언스 클래식 23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감수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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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몽골여행 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음식이었다. 홈스테이 하는 현지인 집에서도 사막과 초원에서 만난 유목민들의 게르에서도 반가운 손님에게 대접하는 수태차는 현지인들에게는 우리가 매일 마시는 물과 똑같은 것이다. 차와 우유(원래는 말 젖으로 만드는)로 끓여 내는 것인데, 나는 원래 흰 우유를 못 마신다. 우유가 주는 고소함보다 비릿함이 더 내 미각을 자극해 코를 막지 않고는 넘기지 못한다. 물론 우리나라의 흰 우유와는 또 맛이 다르지만 수태차는 정말 힘들었다. 처음 여행 가서도 줄곧 잘 마시지 못했는데 2년 후 다시 간 여행에서도 수태차는 정말 힘들었다. 그런데 사양하거나 뱉어버릴 수 없었다. 그들은 반가운 손님으로 나를 대해주는데, 내 입에 맞지 않다고 싫은 내색을 할 수 없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어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평소 일할 때도 정장을 입지 않는 터라 가까운 지인들의 결혼이나 잔치가 있어도 캐주얼로 단정하게 입는 편인데, 어쩔 수 없이 양복을 입어야 하는 때에는 정말 불편하다. 목이 꽉 끼는 와이셔츠 맨 위 단추를 잠그고 목을 죄는 듯이 넥타이를 칭칭 감고 빳빳하게 클리닝된 양복을 입고 나서 반짝반짝 닦여진 구두를 신고 나면 정말 불편하다. 운전할 때도 그렇게 불편하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것이 내가 편한 것만 찾아서 할 수 없다. 모두가 그렇게 살고 싶은데 그렇게 살 수 없다.

 

 

이 책 「지구의 정복자」는 내가 가장 관심이 없는 분야의 내용이다. 생물학, 진화학, 유전학 등 정확하게 어떤 학문인지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문외한이다. 최재천씨가 감수하고 해설을 단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주창한 ‘통섭’학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할 따름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폴 고갱이 타히티에서 완성한 걸작의 캔버스에 극도로 단순화시킨 이 질문들은 사실 종교와 철학의 핵심 문제들이다.” (p.15)

“이 책에서 나는 과학의 발전, 특히 지난 20년 동안에 이루어진 발전에 힘입어 이제는 우리가 어디서 왔으며 무엇인가 하는 질문들을 일관성 있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p.19)

 

더군다나 나와 같은 종교인의 입장에서는 더욱 재미없고 지루한 책이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내가 무엇인지, 내가 어디로 가는지 나는 명확하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늘 고민은 하고 있다. 모순되는 이 말은 내 신앙의 결정체다. 그 누구보다 내 신앙에 대해 고민하고 공부했다. 나의 정체성과 가치관과 방향성은 한 곳으로 향한다. 하지만 매일 부닥치는 내 일상과 삶의 선택 앞에서 나는 매번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그리고 내가 가진 신앙에 비추어 기준을 정한다. 그래서 이 책을 쓴, 유명하다고 하는 학자의 첫 질문에 대해 수긍하지 못한다. 폴 고갱이 그린 타히티를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그림을 보며 나는 그와 다른 감상을 한다.

나는 종교와 과학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종교의 비과학성을 두고 비판하는 것과 더불어 창조과학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고 진화론을 비판하는 것에 반대한다. 종교는 종교대로 두고 과학은 과학대로 두어야 한다. 벌써 이 리뷰의 결론을 얘기해 버렸다. 나는 종교인, 특히 기독교인들도 리처드 도킨스의 책을 읽고 다른 진화론에 관련된 책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책을 읽고 자신의 신앙이 잘못된 것이구나 생각한다면 신앙을 버리는 게 당연하고 그런 책을 읽고 신앙에 아무런 지장이 없으면 그 신앙을 유지하는 게 당연하다. 어설프게 무시하거나 어설프게 따라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종교는 종교의 영역에서, 과학은 과학의 영역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무리 내가 맞네, 니가 틀렸네 얘기한다고 해서 결론 나는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런 종류의 책을 읽는 나의 자세는 그렇다.

그래도 나는 이 책을 읽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던 분야를 읽게 된다는 지적호기심 하나로 겨우 수태차를 들이키고 정장을 빼 입었다.

몇 가지 재미있고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이 있었다.

 

 

“엉성한 수준에서 추정하자면, 현재 살고 있는 개미의 수는 1경, 즉 10의 16승 마리에 이른다. 개미 한 마리의 평균 무게가 사람 평균 몸무게의 100만 분의 1이라면, 개미가 사람보다 100억 배 많으므로, 지구의 모든 개미를 더한 무게는 모든 사람을 더한 것과 비슷하다.” (p.145)

 

저자는 개미를 전공한 생물학자이다. 과학자가 엉성한 수준으로 추정한다는 것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지구의 모든 개미를 더한 무게가 모든 지구인을 더한 것과 비슷하다는 추정이 놀라웠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읽으며 ‘어쩌면 이 개미들이 인류의 종말에도 살아남을 유일한 종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만큼 개미는 놀랍고 대단한 존재라고 한다.

저자는 지구의 탄생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걸어온 길을 통시적으로 분석한다.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자세하게 열거한다. 걔중에는 학교에서 배웠던 부분도 있고 처음 들어본 부분도 있었다. 앞에서 소개한 개미는 인류와 더불어 초기 지구의 탄생과정에서부터 지금까지 인간과 함께 해 온 존재이다. 개미는 진사회성 곤충에 속한다고 한다.

 

 

“진사회성 곤충은 약 2만 종이 알려져 있으며, 개미, 벌, 말벌, 흰개미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약 100만 종에 달하는 곤충 중 겨우 2퍼센트를 차지한다. 하지만 이 소수의 종은 개체수, 몸무게, 환경에 미치는 영향 측면에서 나머지 곤충들을 압도한다. 인류가 척추동물 중에서 우뚝 선 독보적인 존재라고 하지만, 진사회성 곤충은 무척추동물 세계에서 훨씬 더 웅대한 존재이다. 미생물과 선형동물보다 몸집이 더 큰 동물 중에서 육상 세계의 진정한 지배자는 진사회성 군총이다.” (p.140)

 

육상의 모든 동물 중 척추동물이 살아남았고 그 중에서도 인간이 지구를 정복하기에 이른다. 언급할 수조차 없을 만큼 많은 시간 동안 수많은 일이 일어나고 수많은 종이 탄생하고 사라졌다. 곤충은 인류와 더불어 살아남아 함께 지구를 정복하게 된 존재다. 그 중에서도 진사회성 곤충인 개미와 벌은 더욱 그렇다. 아무리 과학에 문외한인 사람도 ‘벌이 없어지면 지구가 멸망한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정확하게 어떤 과학적 증거에 의해 그런 말이 떠돌다 나와 같은 과학 문외한에게도 전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꽤 신빙성이 있는 말이라고 한다. 그만큼 개미와 벌과 같은 진사회성 곤충이 대단한 존재라는 것이다.

 

 

“전형적인 아마존 우림 지역에서 서식하는 개미들의 몸무게를 모두 합친 것은 그 지역에 서식하는 모든 척추동물들의 몸무게를 모두 합친 것보다 4배 더 많다.” (p.141)

 

아마존 정글 지역에 대한 다큐멘터리나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출연자들과 스텝들을 가장 괴롭히는 것이 바로 곤충이다. 수도 없이 쏟아지는 개미와 모기 같은 곤충들에 의해 온 몸이 퉁퉁 부어오르는 경우도 TV를 통해 본 적이 있다. 아마존 우림 지역에서 사는 모든 척추동물들의 몸무게를 합친 것보다 4배나 더 많은 개미가 산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존재다.

 

 

“곤충의 여왕은 로봇처럼 움직이는 자식들을 본능이 이끄는 대로 낳을 수 있었다. 반면에 선행 인류는 개체 사이의 동맹과 협력에 의존해야 했다.” (p.32)

 

그런 진사회성 곤충인 개미와 벌, 그리고 지금 지구의 정복자인 인류는 같은 듯 다른 모습으로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개미와 벌은 여왕이 있다. 여왕을 제외한 나머지는 오직 여왕만을 위해 존재한다. 저자의 표현처럼 로봇을 움직이는 것처럼 그렇게 진화해 왔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수많은 전쟁과 전투를 거쳤지만 선행 인류는 개체 사이의 분명한 동맹과 협력이 존재 했다. 선행 인류가 살던 그 시대에는 인간이 나약한 존재였다. 외부 환경과 인간보다 몇 배가 크고 강한 종과 싸워야 했다. 당연히 개체들 끼리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평등한 무리와 촌락에서 군장 사회를 거쳐 국가에 이르는 문명의 발전은 유전자의 변화가 아니라 문화적 진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것은 군거성 곤충 집단이 가족으로, 이어서 계급과 분화를 갖춘 진사회성 군체로 발전한 것과 비슷하지만 훨씬 더 장엄한 방식으로 펼쳐진, 강한 추진력을 지닌 변화였다.” (p.127)

 

그런 선행 인류가 촌락을 이루고 군장 사회를 이루고 국가로 발전하면서 외부환경과 유전자의 변화를 넘어서서 문화적 진화를 경험했다고 한다. 개미와 벌이 진사회성 곤충으로 변화한 과정 또한 재미있고 신선하고 장엄하다. 하지만 인류의 그것 또한 대단한 것이 사실이다. 불을 다루고 도구를 사용하게 되면서 인류는 문화 형질을 만들어 냈다. 새롭게 창안하거나 전파하고 배웠다. 이 전파와 사용은 곤충 집단이 진사회성 존재로 진화해 가는 추진력보다 더 빠르고 역동적이었다. 이후 언어를 찾아내게 되었다. 저자는 책에서 언어를 인류 사회성 진화를 ‘성배’라고 표현하는데, 이 ‘성배’는 역동성의 에너지를 무한대로 끌어 올렸다고 판단한다.

아무튼 초기 지구의 탄생과정에서부터 지금까지 인류와 진사회성 곤충이 겪어 온 변화와 진화의 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인간과 개미와 벌이 대단한 존재라는 것이다.

 

 

아쉽거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과학과 종교 사이의 갈등사에서 아마겟돈(이렇게 강한 비유를 써도 된다고 한다면 쓰고 싶다)은 지난 20세기에 가장 격렬하게 시작되었다. 그것은 과학자들이 종교의 토대를 설명하려고 시도한 결과이다.” (p.313)

 

과학자들은 종교의 비과학성에 집착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과학의 비종교성에 집착하는 이상한 종교인들도 있다. 나는 그 둘 다에 반대한다. 과학의 발달과 발전이 왜 종교 사이의 아마겟돈이 된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많이 배우고 많이 연구하고 과학적 역량이 월등한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종교를 비판하고 그 교리와 맹목적으로 보이는 신앙의 형태를 향해 합리적 비아냥거림을 날리고 그 전체 판을 뒤집어엎으려는 의도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들이 90년대 중반 기독교도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창조과학에 대해 유사과학으로 취급하며 비과학이라 치부했던 것과 같은 논리로 나는 저 과학자들을 바라본다. 존재론적 형태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과학을 하는 분들은 과학을 열심히 하셨으면 좋겠다. 마찬가지로 신앙을 하는 종교인들은 신앙만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되고 그 과학으로 성경과 창조론을 깨부숴도, 리처드 도킨스의 책이 불티나게 읽히고 팔린다 해도 이미 신앙을 정립한 사람들은 종교를 버리지 않는다. ‘아~ 과학적으로 맞지 않으니 나는 종교를 버릴 테야~’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화론, 생물학, 유전학 책을 읽고 자신의 종교를 버리는 사람들은 그들 자유다. 또한 그런 책을 아무리 읽어도 종교를 버리지 않는 것 또한 자유다. 또한 아무리 신이 있다. 이 세계는 창조되었다. 성경을 믿어라. 아무리 이야기해도 신이 없다고 믿고 창조를 믿지 않고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위 또한 자유다. 서로의 자유와 영역을 인정해야 한다. 굳이 아마겟돈이 벌어지지 않아도 평화로운 세상을 함께 공유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마 가장 배타적이고 교리적이며 맹목적인 보수 기독교계와 기독교인들의 생각과 행동부터 바꾸어야 함은 인정한다. 하지만 유신론자와 기독교인과 창조론을 믿는 사람들이 무조건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이라 무시 받고 비아냥거림을 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

 

 

“객관적 진리 탐구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려면 과학과 종교를 다시 검토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과학은 의학이나 공학이나 신학 같은 그저 또 하나의 분야가 아니다. 과학은 우리가 현실 세계에 관해 지닌 모든 지식의 원천이다. 과학은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데 필요한 기술과 수학의 창고이다.” (p.360)

 

더불어 과학에 대한 맹목도 나는 또 다른 신앙의 형태로 이해된다. 현실 세계의 모든 것이 과학으로 증명될 수 있나? 인간의 모든 삶의 형태가 과학으로 설명될 수 있나?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과학자이니 당연히 과학에 대한 맹신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나는 아니다. 과학은 필요하고 편리하며 유용하다. 하지만 내게 과학은 신앙이 아니다. 부정하지 않지만 저자처럼 맹신하지 않는다.

그저 서로의 영역을 그만 침범하고 공존하기를 바랄 뿐이다. 인정하는 것조차 할 수 없다면 그냥 무시했으면 좋겠다. 굳이 찌르고 후벼 파 아마겟돈을 일으키는 것이 저명한 과학자들 모여서 컨퍼런스 하며 서로 멋있게 과업을 칭송하며 박수치는 것 외에 무엇에 도움이 되나.

 

 

“윌슨 교수는 그 강연에서 그동안 그 누구보다도 열렬하게 지지했던 윌리엄 해밀턴의 혈연 선택 이론을 버리고 학문적으로 거의 뇌사 상태에 이른 집단 선택의 품으로 귀의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 컨퍼런스에 모인 거의 모든 사람이 이를테면 ‘해밀턴교’의 광신도들인데 윌슨 교수가 그 소굴 한복판에서 나름의 개종 선언은 한 것이었다.” (p.372)

 

나는 최재천씨의 해설에 이르러서야 이 책의 저자 에드워드 윌슨이 저명한 학자이고, 그가 이 책을 통해 ‘혈연 선택 이론’을 버리고 ‘집단 선택 이론’으로 귀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해설을 읽어야 겨우 책의 주제 정도를 알 수 있는 과학의 문외한이자 과학자들이 그토록 비난하고 비아냥대는 기독교인인 내게 이 책은 호의를 거절할 수 없어 겨우 목구멍으로 넘기는 수태차와 어쩔 수 없는 격식을 맞추기 위해 불편하기 그지없는 양복을 차려 입는 것과 같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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