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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없는 에세이 -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 함께읽는책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아직도 메모하는 습관을 몸에 새기지 못했다. 대학 때 한창 책을 읽으면서 나만의 독서기록노트를 만들었다. 간략하게 책에 대한 정보와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이나 문장 하나를 추가해서 리스트로 만들었다. 강의에 들어가든지 열람실에서 시험공부를 하든지 고향 집에 내려가는 열차 안에서든지 늘 나와 함께 했다. 고이 모시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 그만 그 노트를 잃어버렸다. 정확한 숫자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적어도 100권 이상의 책에 대한 기록이 담긴 나만의 기록이었는데 허망하게 잃어버리고 나니 다른 일들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것이 지금껏 트라우마로 작용해서인지 정성들여 기록하거나 그 기록을 따로 보관하는 것에 지레 겁을 먹는 것 같다. 특히 손으로 직접 작성해서 만든 것에는 더욱 그런 애착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책을 읽고 서평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무시로 메모를 해야 하는데 이게 생각처럼 쉽게 되지 않는다. 휴대폰에 메모 기능이 아주 편리하게 탑재되어 있어 원하는 만큼 메모 하고 저장 하고 관리 하고(적어도 나만의 독서기록 노트를 허망하게 잃어버렸던 경험은 하지 않아도 되는) 사용 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메모를 잘 하지 못한다. ‘아~ 왜 책이 잘 읽히지 않을까? 왜 글이 잘 안 써지는 걸까? 왜 그 문장이,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걸까?’ 답답해하기만 했는데 메모하지 못하는 나의 특징이 이에 한몫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책은 15년이라는 세월 동안 주제도 길이도 제각각으로 쓴 글을 모은 책이다.”

 

버트란드 러셀의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 유명한「서양철학사」를 띄엄띄엄 읽어봤을 뿐이다. 시대를 풍미한 사상가이자 철학자, 수학, 과학, 종교, 예술에 이르는 박학다식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책은 러셀의 메모를 모아 놓은 책이다. 자신의 박학다식의 범위만큼이나 수많은 책을 출간해낸 러셀의 또 다른 면모를 들여다 볼 수 있다. 메모와 기록이라는 것이 꼭 어떤 특별한 동기나 목적을 위해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거리를 걷다가 문득 드는 생각,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솟구치는 의문 같은 것들을 자신만의 언어와 방법으로 쏟아낸 것이다.

일단, 이 책에서는 영국인 특유의 건조한 유머가 마음에 든다. 제레미 클락슨 특유의 유머를 연상시킨다. 제레미 클락슨은 시대를 풍미했고 지금도 풍미하고 있는 BBC의 ‘탑기어’의 메인 호스트다.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어색한 큰 키에 구부정한 자세, 큰 얼굴, 어색하기 짝이 없는 곱슬머리. 자동차를 주재료로 삼는 TV쇼의 메인 호스트이면서 입고 나오는 옷도 말투도 촌스럽기 짝이 없다. 수억 원대를 호가하는 슈퍼카를 운전하면서 온갖 비판과 지적질을 하는 제레미를 보면 ‘저 사람 정말 제 정신인가’싶다. 그런데 나는 제레미가 좋다. 썰렁한 유머는 물론이고 함께 쇼를 진행하는 리처드와 제임스를 시종일관, 주구장창 놀리고 비꼰다. 나이로만 따지자면 제레미가 가장 형이지만 오히려 형답지 못하다. 그래서 더 재미있다. 영국산 차를 타면서 대놓고 영국과 여왕을 조롱하고 미국산 차를 타면서, 독일산 차를 타면서 신나게 그들을 씹어 돌린다.

러셀의 메모를 읽으며 제레미가 떠올랐다.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 적어도 나는 지금껏 그렇게 배웠다. 긴 생애 동안 나는 그 명제를 뒷받침할 증거를 부단히 찾아보았지만, 세 개 대륙에 걸쳐 수많은 나라들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운이 없어서 그랬는지 여태 발견하지를 못했다.” (p.159),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모르는 게 없을 정로로 박학다식한 학자이자 영국 내에서 가장 고결한 혈통을 이어 받은 귀족 출신인 러셀이 제레미식 유머를 하고 있으니 오히려 재미있었다. 그의 다른 책이라면 이런 표현은 없었을 것이다. 이것도 메모의 장점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내가 두 살이었을 적에 딱 한 번 알현한 적이 있다. 안타깝게도 나는 전혀 기억이 안 나지만 집안 어른들 말씀에 따르면 당시 내 행동거지가 꽤 공손했다고 한다.” (p.335), <내가 만난 유명인들>

 

그의 유머는 끊이지 않는다. 제레미식 영국 유머.

 

 

“모든 인간, 어쩌면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가 종말을 맞는다. 인구가 파국적으로 감소하여 야만 상태로 돌아간다. 주요 전쟁 무기를 모두 독점한 단일 정부가 전 세계를 통일한다.” (p.89), <인류의 미래>

 

사실 이 책에서도 그렇고 러셀을 평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점이 되는 부분은 세계정부 구상에 대한 그의 태도였다. 전 세계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한 나라, 한 정부로 독점되어 그 힘이 적절하게 조절되는 단일 정부를 한동안 주장했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이었다. 이해되는 것이 암흑과 같았던 중세를 벗어나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가까이서 경험하게 된 유럽인들에게 두 번의 참혹한 세계전쟁은 그동안의 모든 것은 한 번에 앗아간 비극이었다.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뼈저리게 경험한 것이다. 특히, 2차 대전 중 나치에 의해 일어난 유대인 학살은 전 유럽을 이후에도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게 만들었다. 두 번의 참극을 경험한 러셀에게는 어떻게 하든지 전쟁만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을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분쟁이 없어야 하고 분쟁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는 힘의 균형이 한쪽으로 완전히 쏠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저 자식하고 싸우면 이길 것 같다.’라고 생각하면 싸움이 나지만 ‘신나게 얻어맞을 것이 뻔하다.’라고 생각하면 아예 덤비지도 않는다. 그래서 실제로 그의 다른 책에서도 이런 단일정부 구상을 여러 번 밝힌 바 있는데 그의 말년에는 이 구상에 대해 부끄러워했었다고 한다.

뭐, 결과론적으로 미국은 수십 년 동안 전 세계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주물러 왔고 지금은 중국이라는 강력한 카운터파트너가 등장함에 따라 잠시 주춤거리고는 있지만 언제든지 자신들의 최고의 자리를 다시 선점하기 위해 애쓸 것은 분명하다.

나도 차라리 단일정부 같은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다. 세계정부가 아니라 단일정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만국의 만국에 대한 투쟁도 이젠 좀 지겹다.

 

 

“사람은 철학을 통해 자신이 사회와 맺는 관계, 현재를 사는 사람이 과거에 살았던 사람, 또 미래에 살 사람과 맺는 관계, 인류 전체의 역사가 광대한 우주와 맺는 관계 등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p.85), <초보자를 위한 철학>

 

철학이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다. 인문학이 멸종한 시대를 살고 있다. 요즘 대학에 철학과가 있는지 모르겠다. 수년 동안 경쟁력이 없는 학과는 없어지기도 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는데 철학과야 말로 시장과 자본의 논리에서는 당장에 없어져야 할 학문이니 말이다. 일베가 어떻고 요즘 아이들이 어떻고 하는 문제들은 결국 어른과 부모의 문제다. 제대로 된 인성교육과 철학교육, 인문교육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먹고 살면서 아이들 학원 하나 보내려면 부부가 맞벌이해야 하는 상황이 태반이다. 부모가 맞벌이를 하면 집에서 아이들에게 인성·철학·인문교육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결국 구조의 문제라고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헤겔의 철학, 공리주의, 스토아학파. 이런 종류의 철학은 사실 몰라도 된다. 철학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삶의 자세다. 나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라면 함께 살아야함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따로 모아서 살 수 없다. 내가 싫어하거나 나를 싫어하거나 맞지 않는 사람들과도 함께 살아야 한다. 그때 내 행동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이 철학이다. 가치관이라 할 수도 있겠다. 유년기를 거치며 수년 동안 잔소리의 형태로 들어온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전혀 이런 교육이 시행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더 심각하다. 부모는 학교에 떠맡기고 학교는 부모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고등학교 1학년인 아이의 입에서 벌써부터 안정된 직장, 공무원, 토플, 성공 이라는 단어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비극인 시대다.

단순히 인기 없는 에세이를 제레미식 유머로 채우고 있지 않다. 이 책의 다른 챕터들에서는 꽤 진지하고 심각한 문제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러셀은 한평생을 천방지축으로 살았지만 그 삶은 시대에 뒤떨어진 방식으로 일관성이 있었고, 그의 신념은 기묘했으나 그의 행동은 늘 신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사생활에서 그는 자신의 글에 가시처럼 돋은 신랄함을 전혀 보여 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진솔한 대화 상대이자 인간적 공감 또한 넘치는 사람이었다.” (p.352), <스스로 쓴 부고>

 

끝까지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부고를 쓰기도 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 앞에 심각하게 유서를 쓰는 경우는 많지만 부고를 쓰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의 부고에서 겸손함이 엿보인다. 자신의 삶은 문득 돌아보며 ‘천방지축’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신나는 인생을 살았음이 틀림없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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