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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왕이 된 남자
이주호.황조윤 지음 / 걷는나무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역사속에서 폭군으로 기록되고 왕의 칭호를 받지 못한 두 임금, 연산군과 광해군. 그러나 그 둘은 너무도 다르다. 광해군일기에 기록된 광해군은 인조반정에 성공한 사대주의적 명분론자들이 자신들의 반란을 합리화하기 위해 왜곡, 혹은 조작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더구나 광해군은 폐위되고도 18년을 더 살고 죽었다. 그만큼 광해군을 죽이면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았던 인조와 대신들이 부담을 가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의 혼란스런 상황에서 세자로 책봉되었고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명나라의 현장실사라는 치욕을 당해야 했다. 이는 조선조정과 광해군을 무시한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우여곡절끝에 왕이 된 광해군은 조정의 기풍을 바로 잡고 임진왜란으로 파탄지경에 이른 국가 재정을 회복하는데 전력을 기울인다. 초당파적 인물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등용시키고 전란중에 타버린 궁궐을 창건,개수하여 왕실의 위엄을 살렸으며 대동법을 실시하여 민생을 구제하려 했다. 하지만 왕권안정과정에서 피바람이 일어났다. 동복형 임해군,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계모 인목대비 등 결국 폭군으로 기록되는 일들이 벌어진다.광해군은 일부 왕권위협세력을 제거하긴 했지만 민간을 위협하고 학대하는 정사를 편 일은 없다. 태종과 세조처럼 명군으로 일컬어지는 왕들역시 자신의 정적 세력제거에는 조금도 틈을 보이지 않았다.광해군은 이들의 행적에 비하면 극악스러웠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인목대비를 죽여야 한다는 대북세력의 강력한 주장을 물리치고 인목대비를 살려놓기도 했고, 영창대군을 죽이는 일도 반대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을 주동하거나 방조한 인물들이 편찬한 사료에 의해 폭군으로 기록되었다.
이 책은 승정원일기라는 사료에서 출발한다. 매일매일의 왕의 일을 기록하는 승정원일기에서 15일간의 기록이 사라졌다. 이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하는 데서 작가의 상상력이 마음껏 발휘된다.
광해는 끊임없이 살해의 위협을 받는다. 광해를 죽여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은 무서운 집념과 광기를 가진 이들이었다. 누구라도 죽음의 공포를 견디지 못했을 것이고 성한 정신으로 살기 힘들 것이다. 그 속에서 변해버린 광해, 왜란시절의 단순한 적은 사라졌지만 뒤에서 음험하게 권력을 노리는 노회한 적들이 그득한 궁궐의 삶은 힘들다. 그 속에서 찾는 여인이 있다. 그 여인과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자신과 닮은 하선을 대신 침전에 두게 된다. 그러다 반대세력의 음모로 혼수상태에 빠지고 하선이 15일간 광해의 대역을 하게 되는 게 이 책의 스토리이다.
돈 몇푼에 혹 해서가 아니라 나랏일이라서 왕의 역할을 하게 되는 하선의 좌충우돌 궁궐생활. 읽으면서 웃음도 나고 하선에게 기대감도 생겼다. 대충해도 되는 역할일 수도 있지만 하선은 왕의 역할에 빠져든다. 실제로 백성의 생활에 공감하며 분노하고 드디어는 공부도 하고 대신들 앞에서 자기주장도 하게 된다.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은 과인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대신들의 이러한 태도가 문제란 말입니다. 이것 때문에 어렵겠습니다,저것 때문에 어렵겠습니다. 안 된다는 마음으로 일을 시작하려 하니 제대로 일이 풀리겠소? 밖을 보시오. 조정이 아닌 백성들의 삶을 보시오. 뜨뜻미지근하게 우리가 여기서 입방아를 떨고 있을 이 시간에도 백성들은 스스로 노비가 되고 기생이 되는 판입니다. 그깟 지주들 쌀 한 섬 때문에 차별을 웅운하다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그깟 사대의 명분이 무엇이오. 대체 무엇이길래 2만명의 백성을 사지로 내몰면서 눈도 깜빡하지 않는 것이오? 조선의 관리라면, 백성들이 부모라 칭하는 왕이라면 그리 해서는 안됩니다! 살기가 힘들어 빼앗고 훔치고 빌어먹을지언정, 그렇게 비루하게 살지언정,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대들이 무엇이기에, 사대가 무엇이기에,귀하디귀한 목숨을 빼앗으려 하는 것이오! 과인은 그들을 살려야겠소."
이제 15일이 지나고 진짜 광해가 돌아온다. 하선은 왕이 되고 싶어한다. 선정이 무언지 알 수 없지만 백성을 위한 왕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나 살자고 누군가를 죽여야하고, 그로 인해 누군가가 또 죽어야 한다면, 그렇게 사람목숨을 장기판의 졸처럼 대하는 것이 왕의 길이라면 싫다고 한다. 그는 자기 꿈은 자기가 꾸겠다고 말한다.
결국 허균이 승정원일기를 반대세력에게 내어주고 자신의 홍길동전을 빼앗기면서 광해도 반대세력도 다 목숨을 보전하고 하선만이 죽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하선이 추구하고 하려하는 왕이 우리 백성들이 원하는 지도자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선을 앞두고 쉽고도 재미있는 역사소설을 통해서 지도자로서 가져야 할 철학과 태도는 어때야 하는지 생각해 보면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