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 지음, 이상원.조금선 옮김 / 황소자리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기대를 많이 했는데 솔직히 다소 실망했다
이건 전적으로 저자의 글쓰기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시간 통계법을 이용해 단 한 순간의 낭비도 없이 치열한 삶을 산 류비세프라는 매력적인 인물을 이 정도로 밖에 풀어내지 못하는 저자의 내공이 아쉽다
류비세프는 워낙 독특하고 매력적인 소재이므로 누군가 다시 그의 삶을 멋지게 풀어 내리라 기대한다
다만 시간 통계법을 요즘 유행하는 처세론이나 자기 계발서의 소재로 이용하지 않고 류비세프라는 인물 자체의 삶에 초점을 맞춘 건 칭찬하고 싶은 부분이다
지나친 표현인지 모르지만 자기 계발서는 인간을 수단화 시킨다
류비세프가 자기 계발서에 등장한다면 그는 주어진 생을 보다 치열하게 살기 위해 애쓴 과학자에서 효율성을 위해 감정을 억제한 기계적 인간으로 돌변할 것이다

사실 류비세프야 말로 내가 꿈꾸는 사람이다
나는 시간에 대해 강박 관념을 가지고 있어서 항상 효율적인 시간 관리로 고민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고민만 할 뿐 대부분의 시간은 흘려 보내고 만다
빡빡하게 계획만 세우다가 끝나는 식이다
아마 평범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럴 것이다
그래서 파레토의 법칙이 나왔는지도 모른다
핵심적인 20%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편하게 지내라는 식으로 말이다
인간이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은 한계가 있고 상황은 늘 가변적이므로 하루를 계획할 때 지나치게 빡빡한 일정은 오히려 흐트러지기 쉽다는 얘기는 학교 다닐 때부터 누누히 들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한 치의 낭비도 없는 완벽한 시간 관리를 꿈꿔 왔고, 계속 실패해 왔다
요즘은 내연 기관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열효율이 겨우 33%에 불과하다는데, 하물며 감정과 이성이 어울어진 인간이 하루를 완벽하게 보낸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위안삼고 있다
그런데 류비세프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를 거의 완벽하게 보냈다
물론 치열한 자기 통제와 정신 수양이 있었다
사실은 효율적인 시간 관리 자체 보다는 그 정신적인 노력에 의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오차 없는 기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욕구를 절제하고 의미있는 일에 헌신하는 높은 정신력을 가진 인간을 추앙한다

인간이 다른 생물체 보다 위대한 점이 있다면 먹고 마시고 즐기는 본능 보다는 내면의 가치를 위해 욕구를 절제할 수 있는 고귀한 정신에 있을 것이다
류비세프는 시간 통계법을 통해 자신을 절제하는 법을 배웠다
목적을 위해 자신을 쥐어 짰다기 보다는 자신을 가다듬는 채찍으로서 사용한 것 같다
그는 유명한 학자가 되지 못했다
사실 그 점이 더 마음을 끈다
유명한 사람들의 철저한 시간 관리는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감히 시도조차 못할 것처럼 접근하기 힘들어 보이고, 무엇보다 어떤 목적을 위해 시간을 아끼는 것은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을 경우 헛수고 한 꼴이 되버리 위험이 있다
업적을 이루고 이름을 얻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성취에 의미를 둔다면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이 아닌 이상 죽을 때 되면 내가 한 것이 뭐 있나, 허망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회적인 성취 보다는 내면의 가치와 만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외형적인 것을 이루기는 참 힘들다
또 물질적인 가치는 때로 자신을 천박하게 만들고 일 중독에 빠져 정작 중요한 것을 잊게 만든다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업적을 이루기 위해 철저한 시간 관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통제와 생을 열심히 사는 수단으로서 시간을 관리하는 게 훨씬 현명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곤충학자였으나 곤충학사에 이름을 남기지는 못했다
러시아 시골 대학의 교수로 평생을 보냈고 오히려 본인은 전혀 원하지 않았을 엉뚱한 시간통계법으로 죽은 후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라도 결국 그의 삶이 무의미 하지 않았고 그의 치열한 삶의 방식이 의의를 얻게 되서 정말 기쁘다
위대한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사실 이건 아무나 하기 힘든 일이다 운도 따라야 하고 여러가지 요건이 맞아 떨어져야 한다) 적어도 그는 성실하게 치열한 삶을 살았다고 우리 모두가 인정한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80 평생은 행복하고 의미있는 삶이 되지 않을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낭비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려는 열정 때문에 그는 다른 데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적었다
이를테면 사치라든가, 의복이라든가, 남의 시선 같은 것 말이다
저자도 인정한 바처럼 그가 철저하게 내면의 세계에만 몰두했기 때문에 세속적인 지위나 재산 등에 관심을 두지 않아 가족들이 고생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생이란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라는 대명제를 생각해 본다면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모든 시간을 기록했고 월말, 연말, 5년마다 통계를 냈다
심지어 시간 통계 내는 그 시간까지 다 계산했다
그가 강박적일 정도로 시간을 관리했던 까닭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낭비없이 최선을 다해 살기 위해서였다
그는 주어진 시간 활용에 몰두한 덕분에 지위나 재산, 사치 등에는 좀 더 초연할 수 있었다
또 자신에 대한 만족감도 컸을 것이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므로 기본적인 의식주만 해결된다면 물질 자체가 주는 만족감 보다는 내면의 가치와 신념을 지켰을 때 얻는 내적 만족감이 훨씬 클 것이다
그렇다면 류비세프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남들이 보기에는 시간의 노예가 되어 일에만 매달린 불쌍한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내적인 가치가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든다고 믿는다
물질적 자원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내가 많이 얻으면 남은 적게 가질 수 밖에 없는 제로섬 게임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얻어도 결코 전체의 크기는 줄지 않는 영적 자원을 획득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삶을 훨씬 더 풍요롭게 한다고 믿는다
시간통계법을 통해 류비세프가 얻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 영적 가치라고 확신한다

류비세프의 시간통계법을 흉내내 볼까 생각 중이다
워낙 철저하기 때문에 과연 나처럼 허술하고 빈틈많은 인간이 따라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런 노력들을 통해 내 삶이 보다 풍요로워질 것이라 믿는다
무엇보다 의미없이 보내는 시간이 없도록,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만 견지한다면 그 태도만으로도 의미가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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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4-12-20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꼬옥 읽어봐야겠습니다. 읽지 않고 이야기하기가 좀 그렇지만....요.


서구와 동양의 시간관도 그렇지만, 조금 달리 드는 생각이 있어요. 시간표하면 답답하고, 그 시간을 놓치면 왠지 부담감도 느끼고..꽉 짜여진 틀이 생각난답니다. 농사짓는 일하고, 이렇게 무덤덤한 시간 속에 사는 우리하고도 다르겠지만, 잔치나 축제가 어김없이 들어가 있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비효율적이고 시간죽이는 일?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농사 일에선 꼭 필요한 것이지요. (사실 농사짓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새참시간이든 막걸리 한잔 하는 시간이 길고 지루한 일을 제대로 하는 방법이기도 하지요.)


횡설하네요. 암튼 저자도 같은 생각이겠지만 시간 관리엔 여유/여백이나, (내 시간만이 아니라) 남이 들어올 시간도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더욱 더 잘 즐기고, 잘 하고, 오래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렇지 않겠지만, 저두 그런 챗바퀴에서 허덕거리지만, 몸을 쉬게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보내는 시간도 꼭 필요하다고 여깁니다. (읽어볼께요.ㅎㅎ)

marine 2004-12-20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사람의 성향 나름이라고 생각해요 아마 여울마당님은 저하고 다른 성향일 게 분명해요 이 책을 읽으면서 류비셰프가 저하고 비슷한 성향의 사람임을 느꼈어요 그의 시간통계법이 옳다 나쁘다, 이런 게 아니라 저하고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의 일생을 읽으면서 일종의 동지 의식을 느꼈어요 완벽주의, 강박관념, 내적인 가치에의 몰두, 자기 확신 등등 이 사람과 저는 한 부류로 묶일 겁니다 물론 실생활에서 저는 실수투성이고 헐렁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지만 어쨌든 속성 자체는 그렇거든요 혹시 폴 오스터가 쓴 "달의 궁전" 읽어 보셨나요? 거기 등장하는 마르코 같은 인물도 이런 성향이죠 그런데 솔직히 별 재미는 없는 책입니다 작가 글 솜씨가 좀 떨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