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도 당연한데 1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지리도 안 지켜지는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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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보도사진 1967~1979>

도서관 키오스크 앞에 섰다. 빌릴 책을 올리고 터치스크린을 눌러 대출절차를 마쳤다. 돌아가려는데 바로 옆 책수레가 눈에 띄었다. 이용자가 반납한 책들이 올려져있었다. 맨 위 책은 『한국의 보도사진 : 제3공화국과 유신의 추억 1967~1979』. 한국사진기자협회가 엮은 사진집이었다. 훑어보니 주로 신문에 실은 사진을 모아 놓았다. 눈빛사진가선으로 유명한 사진전문 출판사 ‘눈빛’에서 펴낸 것이었다. 우연한 만남이 대출욕구를 자극했다. 이 책도 집어 들어 키오스크에 올려 다시 도서관카드를 댔다. 도서관카드는 신용카드와 달리 아무리 긁어도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는다. 제때 반납만 하면 된다.

눈길을 잡아끄는 사진 위주로 빠르게 읽었다. 아니, 사진집이니 보았다고 하는 게 적절할 것이다. 사진설명도 읽고 거르고를 반복했다. 책은 따라붙은 부제대로 “1967년 년부터 1979년까지의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포괄하”는 사진을 수록했다. 카메라로 기록한 역사책이었다. “발생한 사회 전반의 현상을 카메라를 통해 담아내고 있으며, 격랑의 과정을 여과 없이 리얼하게 증언하”는 사진을 실었다고 하나 반만 믿기로 했다. 그 엄혹했던 시절 실려야 할 사진이 실리지 않은 일도 부지기수였을 테다. 그리고 사진도 거짓말을 한다. 그대로 찍어도 그대로 찍힌 게 아니다.

익숙한 정치인얼굴에 눈이 먼저 갔다. 대통령인 아버지와 영부인인 어머니 곁에 서있는 지금 대통령, 여유 만만한 미소를 띤 JP, 아랫입술이 부르튼 DJ, 반백머리 장발 YS. 어떤 사람은 저 세상으로 떠났고 누군가는 아직 이 세상에 남았다. ‘배꼽 룩 명동 상륙’, ‘핫팬츠 명동 상륙’ 사진은 지금 관점으론 시시하지만 그때는 꽤 충격이었을 거다. 요새로 치면 시스루, 마이크로 비키니 급 가십이 아니었을까. (이것들도 이제는 좀 시시하다.)

나는 전체 사진 가운데 ‘무인도에의 도전’이 가장 인상 깊었다. 어린이 다섯 명을 찍은 평범한 사진인데 그들의 표정과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1979년 2월 6일, 김용일 기자가 찍었다. “모험심에 불타던 10대 5명이 무인도를 찾아 집을 뛰쳐나갔다. 한동네에 사는 이 어린이들은 나름대로 온갖 생활필수품과 각종 장비를 꾸려 가출, 인천을 거쳐 서해 영종도까지 진출했었으나 경찰의 수배로 무사히 가족들 품에 돌아왔다.” 어린이 모험소설에 나올 상황이 현실에서 벌어졌다. 아이들은 붙잡혀서 무인도 발견에 실패한 뒤 사진을 찍었을 터다. 그런데 표정을 보아하니 전혀 겁먹지 않았다. 움츠러든 자세도 아니다. 오른쪽 끝 아이는 무리에서 가장 어려보이고 키가 작다. 하지만 손을 꽂은 두 주머니에서 나는 귀여운 사나움을 느꼈다. 요즘 어린이들은 ‘스마트폰’의 감시망과 ‘빅 페어런츠’의 보호를 뚫고 저런 모험을 감행할 수 있을까.

지금은 온 국민이 성능 좋은 카메라를 언제나 품에 넣고 다니며, 누구나 보도사진을 찍어 올릴 수 있는 시대다. 각종 언론매체와 사진기자 수도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우리의 카메라는 이 시대를 어떻게 기록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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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한 보석같은 소설가, 마르셀 에메>

예전에 소설을 공부하는 모임에 나간 적이 있다. 그 모임 사람들이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라는 단편소설을 추천했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에메의 작품이었다. 처음 들어본 작가였다. 별로 유명하지 않은 작가려니 생각하며 그의 소설을 읽었다. 내가 지식이 부족해 잘 몰랐을 뿐 그는 “프랑스 문학의 희귀한 보석으로 평가받고 있는 거장”이었다. 다 읽고 나서 마르셀 에메에게 흠뻑 빠졌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는 무척 매력 있는 작품이었다. 등기소 공무원 뒤티유욀이란 남자가 잘못 처방 받은 약을 먹은 뒤 아무런 장애 없이 벽을 뚫고 나가는 능력을 얻는다. 그는 못된 상사를 골리고 의적처럼 은행과 부잣집을 턴다. 정체를 숨기다가 일부러 도둑질을 저지르고 감옥에 들어가서 신분을 드러내기도 한다. 투옥되고 나서도 능력을 발휘해 교도소장을 놀리고 탈옥한다. 그 뒤 뒤티유욀은 변장을 하고 살아가다 어떤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벽으로 드나드는 능력을 이용해 유부녀인 그녀의 집에 방문을 하고 사랑을 이어가던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예전에 처방 받은 남은 약을 먹고 나서 초능력을 서서히 잃는다. 그는 그걸 알아채지 못한 채 벽을 드나드려다가 꼼짝달싹 못하고 담벽 속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익살스럽고 재치 있는 이야기였다. 흥미로운 설정과 기발한 상상력 덕에 읽으면서 무릎을 쳤다. 재미와 완성도를 갖춘 훌륭한 문학작품이었다. 소설집에 실린 다른 작품들도 독특하고 흥미로웠다. 「생존 시간 카드」는 부자들의 한 달은 31일보다 더 많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며칠 안 되는 삶이 주어진 상황을 배경으로 설정했고 (김영하 작가가 팟캐스트 `책 읽는 시간`에서도 소개한 작품이다. 그의 목소리로 소설 전문을 들을 수 있다.), 「천국에 간 집달리」는 꼼꼼하고 성실한 집달리가 죽은 뒤 하늘나라에서 천국과 지옥행을 두고 재판 받는다는 이야기였다. 각 소설에 박힌 깔끔한 문장과 풍성한 어휘가 읽는 맛을 더해주었다. 프랑스어 작품을 한국어로 옮긴 이세욱 씨 덕분이다. 「개미」를 비롯해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품을 여럿 옮긴 스타 번역가다.

마르셀 에메를 `좋아하는 소설가 명단`에 망설이지 않고 올리겠다. 그가 쓴 다른 작품들을 더 찾아 읽고 싶다. 장편 『초록 망아지』와 단편모음 『파리의 포도주』를 출판사 `작가정신`이 냈는데 지금은 절판되었다. 도서관을 뒤져야겠다. `창비`와 `살림`이 출간한 책에는 「사빈느」와 「난쟁이」가 수록되었다. 이것부터 읽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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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시뮬레이션 만화, 은근 설레네
[서평] 그래픽 노블 <내 눈 안의 너>

내겐 읽고 싶은 책을 가득 적어둔 목록이 있다. 적어두는 건 쉽되 읽어 치우는 건 어렵다. 읽는 양은 산술급수로 쌓이는데 책 목록은 기하급수로 오르기 때문이다. 때로 읽어야 한다는 압박과 다 읽지 못할 거라는 무력에서 벗어나고자 목록에 없는, 전혀 생각지 않은 책을 고를 때가 있다.

<내 눈 안의 너>(바스티앙 비베스, 미메시스)도 그렇게 만났다. 도서관 서가를 둘러보다가 우연히 찾았다. 글자가 거의 없고 한 페이지에 여섯 컷이 들어간 만화책이었다. 활자에서 벗어나되 여전히 독서를 계속할 수 있기에, 읽고 있던 다른 책을 덮고 이 만화를 펼쳤다.

<내 눈 안의 너>는 한 남자의 시선을 따라 이야기가 흘러간다. 그는 대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다른 과 여학생을 만난다. 둘 사이 풋풋한 연애가 시작된다. 함께 저녁을 먹고, 도서관 서가에서 좋아하는 책을 뽑아 소개하고, 극장의 어둠을 빌려 입을 맞추고, 댄스파티에서 춤을 춘다.

어찌 보면 단순한 연애담을 그렸다. 하지만 이 만화에는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표현방식, 바로 `관점`이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남자주인공의 눈에 비친 상을 만화 프레임에 그대로 반영한다. 그의 눈은 카메라처럼 여인의 모습과 주변 세계를 담는다.

독자는 남자주인공의 눈에 맺힌 화면을 고스란히 보게 된다. 독자와 남자주인공의 시선이 일치하는 것이다. 자기가 남자주인공이 된 착각에 빠질 수밖에 없다. 먼저, 만화에 남자주인공의 대사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여인은 남자주인공을 바라보며 말을 한 뒤 무언가 대답을 들었다는 듯 다음 말을 이어간다.

다음으로, 키스 신을 살펴보면 그 특징이 더욱 도드라진다. 처음에는 여인의 얼굴과 상반신이 담긴 컷이 나온다. 다음엔 눈을 감고 입술을 살짝 연 여인의 얼굴, 그 모습을 감싸는 가로 타원형 검정색 두꺼운 테두리(게슴츠레 감은 눈꺼풀일 것이다)가 나오는 컷. 그 다음은 여인의 코 아래와 윗니와 입술, 더 두꺼워진 테두리 컷.

만화를 보는 동안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미연시) 게임`이 기억났다. 애니메이션 소녀 캐릭터를 앞에 두고 게이머의 선택에 따라 연애하듯 과정을 이끌고 엔딩도 맞는 형태의 게임이었다. 게임 속 상황을 실제로 겪는 것 같게 하는 힘이 있었다.

<내 눈 안의 너>도 마찬가지였다. 전개과정과 표현방식이 미연시 게임과 다르지 않았다. 여인이 나를 보듯 정면을 응시하는 컷이 설렜다. 내 왼쪽 어깨에 머리를 댄 여인이 이렇게 말했을 땐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까 학교에서 봤을 때부터 키스하고 싶었어. 계속 계속 이야기만 했지 나한테 키스 안 해주더라.˝

<내 눈 안의 너>는 가느다란 펜으로 윤곽을 그리고, 색연필로 채색해서 산뜻한 만화였다. 두 청춘남녀의 풋풋한 사랑을 깔끔하게 표현했다. 그린이 바스티앙 비베스는 1984년에 태어난 프랑스 만화가로 2000년대 후반부터 유럽에서 젊은 거장이라는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신선한 감성이 듬뿍 담겼을 그의 다른 작품들도 만나보고 싶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대학신입생 남자가 느꼈을 법한 연애감정을 다시 만나고 싶은 분들에게 <내 눈 안의 너>를 권한다. 오랜만에 미연시 게임을 하고 싶은데 십덕후 소리 들을까봐 선뜻 나서지 못하는 분들에게도 추천한다.

다만, 다 읽고 나서 여인 캐릭터에게 선물을 사주거나 그녀 생일을 챙기지는 말길. 그녀는 내 `눈 안`의 너일 뿐 현실 세계의 사람이 아니니까. 사랑은 2D 것들과 하지 말고 피와 뼈와 살이 있는 상대와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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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젊은 시절, 스페인 내전에 공화군으로 참전한 안토니오의 일대기를 담은 그래픽 노블이다. 그래픽 노블은 진지하고 성숙한 내용을 담은, 깊이 있는 만화다. 설명글과 대사가 빽빽한 편이며 주로 성인을 독자층으로 삼는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주인공 안토니오의 아들이 시나리오를 쓰고 기성 만화가가 그림을 그려 완성했다. 실제 사건과 인물을 기반에 둔 작품이다.

안토니오는 1910년 스페인의 사라고사 근처 시골 페나플로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2001년 양로원 건물에서 투신자살했다. 그는 유럽과 스페인의 현대사 격랑을 헤치며 살았다. 농부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난과 아버지의 폭력이 싫어 도시로 도망간다. 그곳에서 실업자로 생활하거나 방문판매 영업사원이 되어 현실을 체험한다. 극우민족주의 정당이 들어서고 프랑코 장군의 독재가 시작된 스페인의 상황에 지긋지긋해하며 군 입영 뒤 일부러 탈영하여 공화군 진영에 들어간다. 전쟁터에서 몸소 싸우고 아나키스트들과 뜨거운 결의도 맺는다. 공화군의 전세가 밀려 프랑스로 퇴각한 그는 그곳에서도 점령 독일군에 맞서 싸우는 레지스탕스 진영에 합류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에 자리 잡으려 하나 먹고 살 길이 요원하다. 아나키스트였던 옛 동료들의 사업을 도와주지만 그 동료들은 혁명, 이상, 낭만과는 동떨어진 탐욕, 부정을 저지른다. 실망한 안토니오는 어쩔 수 없이 독재체제에 신음하는 암담한 조국, 스페인으로 돌아가 자리 잡는다. 그도 결국 자신이 꿈꾼 정의로운 삶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한다. 비열한 방법으로 공장경영권을 빼앗는 일에 저항하지 않고 가담하며, 유부녀와 바람을 피운다. 말년에는 배우자와도 관계가 멀어지고 홀로 양로원에 들어간다. 오랜 기간 우울증을 앓은 안토니오는 날아오를 순간을 꿈꾸며 양로원 5층에서 몸을 던진다.

안토니오는 이상을 향해 날아오르길 꿈꾸었다. 하지만 현실의 중력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먹고 사는 문제는 누구도 해결해주지 않았다. 안토니오는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살아가려했다. 하지만 옛 동료들은 밀수를 하고 실력자에게 뒷돈을 먹이고 약삭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그런 분위기에 절망한다. 프랑코의 서슬 퍼런 독재가 버티고 있는 스페인으로 돌아간다. 일이나 하면서 조용히 살려고. 주류세력에 빌붙은 사업가 친척 밑으로 들어간다. 친척은 안토니오에게 말한다. “정치에는 관심도 갖지 말게나. 혁명이니 아나키즘이니 그딴 것들은 종쳤다고. 이제부터는 프랑코 장군이 법이자 질서일세.” 안토니오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안토니오는 패배했으나 자신이 패배자임을 안 사람이다. 현실에 안주한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객관화하려 한 사람이다. 현실에 투항했으나 그는 괴물이 되지는 않았다. 아나키스트이자 레지스탕스였던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지 않았다. 프랑코 독재세력에게 영혼을 팔지 않았다. 그의 신산했던 삶에 경의를 표한다. 나도 소시민의 삶을 살아가며 밥벌이 하고 있다. ‘역사와 현실의 수레바퀴에 눌려 패배를 거듭’하더라도 내가 ‘지향하는 자유를 한 줌이나마 움켜쥐도록’ 깨어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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