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젊은 시절, 스페인 내전에 공화군으로 참전한 안토니오의 일대기를 담은 그래픽 노블이다. 그래픽 노블은 진지하고 성숙한 내용을 담은, 깊이 있는 만화다. 설명글과 대사가 빽빽한 편이며 주로 성인을 독자층으로 삼는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주인공 안토니오의 아들이 시나리오를 쓰고 기성 만화가가 그림을 그려 완성했다. 실제 사건과 인물을 기반에 둔 작품이다.

안토니오는 1910년 스페인의 사라고사 근처 시골 페나플로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2001년 양로원 건물에서 투신자살했다. 그는 유럽과 스페인의 현대사 격랑을 헤치며 살았다. 농부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난과 아버지의 폭력이 싫어 도시로 도망간다. 그곳에서 실업자로 생활하거나 방문판매 영업사원이 되어 현실을 체험한다. 극우민족주의 정당이 들어서고 프랑코 장군의 독재가 시작된 스페인의 상황에 지긋지긋해하며 군 입영 뒤 일부러 탈영하여 공화군 진영에 들어간다. 전쟁터에서 몸소 싸우고 아나키스트들과 뜨거운 결의도 맺는다. 공화군의 전세가 밀려 프랑스로 퇴각한 그는 그곳에서도 점령 독일군에 맞서 싸우는 레지스탕스 진영에 합류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에 자리 잡으려 하나 먹고 살 길이 요원하다. 아나키스트였던 옛 동료들의 사업을 도와주지만 그 동료들은 혁명, 이상, 낭만과는 동떨어진 탐욕, 부정을 저지른다. 실망한 안토니오는 어쩔 수 없이 독재체제에 신음하는 암담한 조국, 스페인으로 돌아가 자리 잡는다. 그도 결국 자신이 꿈꾼 정의로운 삶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한다. 비열한 방법으로 공장경영권을 빼앗는 일에 저항하지 않고 가담하며, 유부녀와 바람을 피운다. 말년에는 배우자와도 관계가 멀어지고 홀로 양로원에 들어간다. 오랜 기간 우울증을 앓은 안토니오는 날아오를 순간을 꿈꾸며 양로원 5층에서 몸을 던진다.

안토니오는 이상을 향해 날아오르길 꿈꾸었다. 하지만 현실의 중력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먹고 사는 문제는 누구도 해결해주지 않았다. 안토니오는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살아가려했다. 하지만 옛 동료들은 밀수를 하고 실력자에게 뒷돈을 먹이고 약삭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그런 분위기에 절망한다. 프랑코의 서슬 퍼런 독재가 버티고 있는 스페인으로 돌아간다. 일이나 하면서 조용히 살려고. 주류세력에 빌붙은 사업가 친척 밑으로 들어간다. 친척은 안토니오에게 말한다. “정치에는 관심도 갖지 말게나. 혁명이니 아나키즘이니 그딴 것들은 종쳤다고. 이제부터는 프랑코 장군이 법이자 질서일세.” 안토니오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안토니오는 패배했으나 자신이 패배자임을 안 사람이다. 현실에 안주한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객관화하려 한 사람이다. 현실에 투항했으나 그는 괴물이 되지는 않았다. 아나키스트이자 레지스탕스였던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지 않았다. 프랑코 독재세력에게 영혼을 팔지 않았다. 그의 신산했던 삶에 경의를 표한다. 나도 소시민의 삶을 살아가며 밥벌이 하고 있다. ‘역사와 현실의 수레바퀴에 눌려 패배를 거듭’하더라도 내가 ‘지향하는 자유를 한 줌이나마 움켜쥐도록’ 깨어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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