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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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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과 자연미, 건축을 빚어내는 장인들의 순도높은 이야기들.


 더위도 추위도 잘 타지만 유독 올해 여름은 무척이나 무더웠다. 연일 오르는 뜨거운 햇빛 아래 무엇을 하든 축축한 땀과의 전쟁이어서 그 뜨거운 시간들이 어떡해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더울 때는 언제 이 더운 여름날이 지나갈까, 하며 푸념을 내세우며 하루하루 길고 긴 여름을 보냈는데 시간이 지나 서늘한 가을 하늘을 마주 하고서야 그 더운 여름날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뜨거운 여름에도 서늘하면서도 뜨거운 이야기에 빠져 열심히 책을 읽었지만 정작 책을 읽기 좋은 계절인 가을에는 비실비실 앓을 정도로 기운이 없었다. 뭘해도 기운이 나지 않아 힘에 부쳤지만  마쓰이에 마사시의 첫 작품인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여름의 끝과 가을의 첫 시작점에 만난 책임에도 페이지가 생각보다 쉬이 넘어가지 않았다.


오랫동안 잡아둔 덕분에 겨우 끝을 마주 할 수 있는 책이지만 간결한 내용과 달리 문장의 밀도가 높고 섬세하다. 흐르는 이야기의 구조 보다는 무라이 건축 사무소에서 만들어내는 건축에 대한 정의와 그들이 만들어가는 손길 하나하나의 정성과 정신들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이런 문장들이 빼곡하게 완만하게 그려져 있기에 그 어떤 문장 하나도 놓칠 수 없이 촘촘하게 수가 놓아져 있다. 그렇기에 빠르게 이런 문장들을 읽어나간다면 손 사이로 빠져드는 모래알같이 자잘하게 빠져 나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1960년대 무라이 슌스케는 외국에 나가 건축을 공부하고 경험을 쌓아 일본에 귀국했다. 일본의 고도경제성장에도 발빠르게 지어 나가는 흐름 속에서 그는 흔들리지 않았고, 자기 과시욕을 충족시키는 건축이 아니라 실질적이면서도 아름답고, 실제 사용하기 편리한 건물을 하나하나 만들어냈다. 시대의 흐름에 흔들리지 않는 건축가의 신념은 많은 동종업계 사람들의 열망을 불러 일으켰고, 건축을 공부한 학생들에게는 우러러쳐다 볼 만큼 동경하게 되었다. 갓 대학을 졸업한 소설 속 화자인 '나'인 도오루 역시 무라이 슌스케를 동경했고 몇 년째 신입사원을 뽑지 않은 무라이 건축사무소를 희망했기에 무라이 선생에게 졸업작품과 이력서를 동봉하여 제출한다. 다행히 그의 졸업작품이 마음에 든 무라이 선생은 그를 채용하게 되고, 아사마 산 자락에 있는 여름 별장에서 무라이 선생과 함께 한 1년의 시간과 그 후의 시간을 그려낸 이야기다.


누군가의 손에 지어진 집에 살고 있고, 혹은 유명한 국내, 국외의 건축물을 밟아 보면서도 건축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문제들을 무라이 사무소의 일원들과 함께 고민하게 되었다. 그릴듯 그려지는 체계적인 공정아래 그들이 만들어내는 건축은 사람과 자연, 세월을 이겨내는 힘을 가진 건물이지만 그 속에 사람에 대한 배려와 자연에 대한 배려, 세월에 의해 마모되는 순간 까지도 그 빛을 잃지 않는 건축가의 정신이 모두 함유된 일이었다. 모든 것에 대한 '배려'와 생각이 모여 사람의 삶에 자연스레 녹아든 집과 공간을 만드는 일이었고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무라이 슌스케 선생의 정신은 완고하고 단호했다.


건축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쓰는 의자, 책장, 그 무엇 하나도 쓰임새가 왜곡되지 않았고 공간에 따라 달리 표현되었다. 건축가의 생각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에 직결되어 풍요롭게 생활 할 수 있는지를 알게 할 수 있는 책이다. 건축에 있어서는 예술, 자연, 과학등 수많은 요소의 결합이 총체적으로 합쳐져야 한다는 것도 건축도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철학이었다. 자연친화적인 건축을 선호해 오던 무라이 선생이 국립현대도서관 설계라는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해 각각의 일원들이 고군분투하고 주인공인 도오루 역시 한 부분을 맡아 일을 돕는다. 그 속에서 선생님 조카인 마리코와의 접촉 혹은 만남, 사랑의 지속성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건축물을 완성하기 까지의 과정을 희붐하게 그려냈다.


단단한 땅에 천천히 힘차게 뿌리를 박으려는 모습이 엿보이면서도 마리코와의 만남이 점점 더 깊이를 더해져가면서 느껴지는 관계의 불안감이 서서히 옥죄어 온다. 은밀하게 만나는 두 사람의 관계가 잔에 찰랑찰랑 넘치는 물과 같아서 읽는 내내 불안하게 느껴졌다. 이어질 것인가, 이어지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불안은 결국 무라이 선생이 끌고간 프로젝트의 결과가 맞닿아져 있다. 한철 내내 뜨거운 태양아래에서도 흔들림없이 일을 하며 화려한 시절을 보냈던 무라이 건축 사무소의 이야기가 일달락되고, 삼십 년 후 나의 모습을 비추면서 마쓰이에 마사시가 그리고자 하는 이야기는 끝이 난다.


길고 긴 이야기지만 닿을 수 없는 세계의 끝과 관계, 신념,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너무나 명확히 아름다운 문체로 그려내고 있어 읽는 내내 긴 여운을 주는 작품이었다. 비록 페이지는 빠르게 넘어가지 않아도 천천히 붙잡고 있는 페이지 안에 가득한 진심이 그 안에 숨어져 있다. 가장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던 장면은 그가 무라이 사무소에 오기 전 그가 설계한 교회를 실측하는 장면이었다. 하나하나 그가 걸어간 발걸음을 따라 그리고, 실측하고 고민하며 따라가는 모습은 그가 무라이 건축 사무소에 입성하기 전의 일이지만 그 전에도 그 후에도 그는 끊임없이 그가 걸어간 여정을 생각하며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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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실은 너무 넓지 않은 쪽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숙면을 도와. 천장도 높지 않은 편이 좋아. 천장까지의 공간이 너무 넓으면 유령이 떠돌 여지가 생기거든." 우스갯소리를 하듯 말했다. "침대와 벽 사이는 말이야. 한밤에 잠이 깨서 화장실에 갈 때, 한 손을 가볍게 내밀면 바로 닿을 만한 거리가 좋아. 캄캄해도 벽을 따라서 문까지 갈 수 있고 말이지. 다이닝 키친의 경우, 요리하는 냄새가 좋은 것은 식사하기 전까지만이고 식사가 끝나면 바로 싫어지지. 주방의 천장높이와 가스풍로, 환기통 위치가 냄새를 컨트롤하는 결정적인 수단이야." 장인이 전달하는 비법 비슷했다. - p.20~21


사람이 드나들지 않게 된 집은 마치 선반에 놓인 채 잊힌 복숭아나 같았다. 순식간에 상하고 녹아버린다. 주위 숲도 손질을 게을리하면 일 년이면 울창해지고 마당은 잡초가 무성해진다. 통풍을 시키지 않는 물건은 눈 깜짝할 사이에 곰팡내가 난다. 청장에는 시커먼 개미집과 벌집 덩어리가 달라붙고, 덧문 두껍닫이에는 새가 둥지를 튼다. 외벽은 딱따구리가 구멍을 뚫고, 지붕의 비 새는 곳을 내버려두면 방바닥을 비집듯이 버섯과 양치류가 염치없이 자란다. - p.33


이런 섬세한 마감에 사람들은 주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의식 밑에서 뭔가 받아들여지는 것이 있다. 사진이나 도면으로서는 알 수 없는 촉감이나 편한 쓰임새 속에 선생님의 표시가 각인되어 있다. 그 표시를 찾아내고, 손으로 만지고, 스케치하고, 기록한다. 실측을 되풀이할수록 나는 한 발자국씩 선생님의 생각에, 손을 움직인 그 흔적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같이 느껴졌다. - p.75


"간단하고 간결하다는 것은 사람을 가리지 않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가 설명하지 않아도 어떻게 사용하는지 저절로 알 수 있으니까 말이야. 건축에서 사소한 장치를 생각할 때도 사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그 장치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이상적인 거야. 취급 설명서 따위 붙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훨씬 더 우위라고." - p.114


나는 풀베기랑 잔디 깎기를 좋아했다. 고속으로 회전하는 나일론 끈이 잡초를 끊고 작은 돌을 튕겨내면서 자기 의지가 있는 것처럼 앞으로, 앞으로 인도해나간다. 귀를 찢는 엔진 소리. 풀이 끊어지는 소리도, 새가 우는 소리도, 사람 소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된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부지 내 진입로랑 흙둑 주변이 깨끗해졌다. 왜 사람은 잡초만 깎아도 이렇게 상쾌해지는 걸까. 울퉁불퉁한 땅보다 펀펀하게 고른 편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콘크리트 마감도 보기에 나쁘지 않다. 평평한 면을 인간이 좋아하게 된 것은 도대체 언제부터일까? 인간이 처음 본 평평한 것. 바람 없는 날의 호수. 파도가 쓸고 간 모래사장, 얼어붙은 물엉덩이. 내 청바지와 티셔츠에는 주름이 가고, 풀이랑 잎사귀의 초록색 파편이 달라붙어 있다. 예초기 엔진을 끄고 헬멧을 벗는다. 숲의 소리가 귀에 돌아온다. - p.161~162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 같은 것은 놀랄 만큼 빠른 단계에 완성돼. 태아는 그 손가락으로 뺨을 긁기도 하고 열었다 닫았다, 태어나기 몇 달 전부터 손가락을 움직여. 건축에서 세부라는 것은 태아의 손가락과 같아. 주종관계에서의 종이 아니야. 손가락은 태아가 세계에 접촉하는 첨단이지. 손가락으로 세계를 알고, 손가락이 세계를 만들어. 의자는 손가락과 같은 것이야. 의자를 디자인하다 보면 공간 전체가 보이기도 하지"


무의식의 영역을 빼놓고 사람에게 태아시절의 기억은 없다. 그렇지만 이 손가락이 예전에 그렇게 세계를 탐색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서 손을 움직일 뿐만 아니라 손을 움직이는 것이 생각으로 연결된다. 선생님의 건축 작법은 그 양쪽으로 성립되어 있다. 나는 내 손을 펼쳤다가 쥐었다. - p.173~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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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를 가진 소녀 BIS 비블리오 배틀부 1
야마모토 히로시 지음, 이승형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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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SF소설을 좋아하는 소녀의 열정.


 누군가의 공간을 들여다 볼 기회가 있다면 그때마다 가장 유심히 보는 공간이 '서재'다.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관심을 두는지 알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을 보면 그 사람이 좋아하는 장르나 취향, 성격이 동시에 드러난다고 한다. 아마도 그 말을 들은 이후로 책장을 오픈 하는 것에 주저하게 된다. 누군가 나도 모르는 나의 성향까지도 알아버릴 것 같은 생각에 오롯하게 나만의 공간으로 책장을 곁에 두고 있다. 책을 좋아하는 이에게는 책장 가득히 꽂아 있는 책들이 너무나 아름다운 보물같이 느껴지지만, 책을 좋아하지 않는 이에게는 그저 집을 많이 차지하는 짐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탈 때 누군가 책을 읽을 때면 그 책이 무슨 책인지 궁금해 하며, 책 표지만 보고도 책을 맞출 때면 나도 모르게 절로 미소가 지어지곤 한다.


야마모토 히로시의 <날개를 가진 소녀>는 SF를 좋아하는 소녀 후시키 소라가 책을 통해 세상을 읽는 소년인 우즈미비 다케토와 시립도서관에서 만나게 되고 첫만남을 통해 그녀가 얼마나 SF소설을 좋아하는지 알게 된다. 이야기를 하다가 그의 할아버지가 애장해 온 책들 중 후시키가 그토록 읽고 싶었던 책들이 있는 것을 알고 우즈미비는 후시키를 그의 집에 초대하게 된다. SF소설을 좋아하는 것을 물론 작품이나 작가에 바삭하게 아는 그녀의 긴 수다를 들으며 우즈미비는 BIS 비블리오 배틀부에 대해 소개해주게 되고 후시키는 '비블리오 배틀'의 매력에 빠져 가입하게 된다.


처음 책을 읽을 때는 후시키가 이야기한 모든 SF소설이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책들인줄 알았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익숙하게 들어왔던 작가들이 거론되면서 진짜 출판된 SF소설을 이야기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그녀가 빠져든 리스트들을 빠짐없이 읽어보고 싶었다. 소설을 좋아하지만 후시키처럼 SF소설만 찾아서 읽지 않아 보니 읽어본 작품이 손에 꼽을 만큼 별로 없다.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2008,황금가지)와 H.G. 웰스의 <모로 박사의 섬>(2009,문예출판사),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2015, 소담출판사) 정도가 내가 읽은 SF소설이다. 그나마도 SF소설로서 어느 정도 이름은 들어봤다고 해서 읽은 책들이지만 후시키처럼 눈을 반짝이며 SF소설의 계보라 할만큼 그녀가 말한 책의 이름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책을 좋아하지만 가족이나 친구들까지 책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기에 혼자서 즐기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독서모임을 하면서 책을 함께 읽기도 하고, 앞으로 읽을 책이나, 좋아하는 책에 관한 리스트들을 나누기도 한다. BIS 비블리오 배틀부는 BIS에 다니는 아이들이 시간을 정해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소개 하고, 소개한 책들을 투표하여 가장 읽고 싶은 책이 선정되면 '챔피언 책'으로 등극된다. 단순히 책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누군가가 함께 읽어줬으면 하는 바램으로 '비블리오 배틀'을 시작했기에  소개되는 책들마다 각 부원의 애정이 느껴지는 것은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그러다 후타고자와 고교에서 수상한 배틀을 제안해 오고 그들은 정치적인 색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자신의 생각을 우위에 점하려고 했으나 그 어떤 정치적인 색 없이 자유로운 교칙을 갖고 생활 하는 BIS교고의 아이들과 극명한 생각의 차이로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놓는다. 어떤 책이 더 우위를 점하는 것 보다 내가 접해보지 않았던 책들을 알아가는 재미가 컸기에그 어떤 책보다 책을 좋아하는 동무를 만난 느낌이었다. 더욱이 후시키나 우즈비미처럼 한 분야의 책들을 깊이 있는 녀석들이다 보니 고전, 라이트노벨, 만화등 다양한 장르가 가미되어 이야기가 더 풍부하게 느껴졌다.


'비블리오'하면 <비블리오 고서당 사건수첩>(2013. 디앤씨미디어)를 떠올렸는데 '비블리오'가 책이라는 뜻이기에 야마모토 히로시 역시 이작품을 읽으면서 아이디어를 얻었고, 여러 작품을 접하면서 이 소설을 착안했다고 한다. 시리즈의 첫 시작이지만 우리가 접해보지 않은 많은 작품들이 언급되어 책에 소개된 책들을 찾아서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정도로 이야기가 탄탄하다. 각 인물이 갖는 특성, 책과 책의 만남. 후시키와 우즈미비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 그리고 BB부의 부원들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 및줄을 치다가 좋은 문장들이 너무 많아 많이 생략했음에도 각 작품이나 그들의 생각들이 좋아 줄을 그었다.


혼자 읽고,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행위임에도 여전히 함께 생각을 나누고, 누군가에게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함께 나누는 행위가 얼마나 즐거운지를 후시키의 모습에서 많이 보고 배웠다. 우즈미비의 할아버지가 모았던 많은 책들을 흔쾌히 가져가라는 가족들의 이야기에도 손사래를 치며 함부로 가져갈 수 없다는 후시키의 마음도 너무 예뻤고, 그 귀한 책들을 한 권 한 권 빌려가며 아껴가며 읽은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귀엽게 느껴졌다. 책을 좋아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 책을 좋아하는 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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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할아버지의 열정 같은 건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다만 부모님이 이것들을 처분하지 않은 이유만큼은 왠지 모르게 알게 된 것 같다. 몇 권되지 않는 책이라면 처분할 수 있어도, 이렇게 많은 양이 모여 있으면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할아버지가 살아 있었던 증거. 영혼의 일부라는 느낌마저 들기에. - p.61


"무슨 소린지 알겠어? 우리처럼 매달 몇 권씩 책을 익는 사람은 이미 그 사실만으로도 천연기념물, 마이너리티란 얘기야."

나는 멍해졌다. '젊은 층의 활자 회피'란 문구를 질릴 정도로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런게 이렇게 구체적인 수치를 보고 나니 역시 충격이다. 한 달에 한 권도 책을 읽지 않는 고등학생이 거의 반이라고? 나처럼 주당 한 권 이상 책을 읽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수치다. 어떻게 한 달이나 책을 읽지 않고 지낼 수 있지? - p.206~207


"책도 같다는 소리야. 우연히 문학가나 문예 평론가에게 발견되어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 '명작'이라 불려. 그렇지만 서점에 가봐. 소설만 봐도 엄청난 양의 책이 늘어서 있잖아? 그걸 전부 읽는 다는 일은 그 누구도 불가능해. 아니 전체의 0.1퍼센트라도 다 읽을 수 있을지 없을지···그렇다는 소리는 평론가의 눈에 들어오지 앉은 책 중에서도 걸작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많은 책들 중에서 우연히 평론가에게 발견된 책이 '명작'이 된다?"

"그렇단 소리야. 괴테든 헤세든 어쩌면 같은 시대에 동등한 레벨의 걸작을 남긴 작가가 있었는지도 모르잖아? 그저 못 보고 지나쳐 잊혔을 뿐이고···. - p.210~211



이건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비블리오 배틀이란 건 그런 일부 '책의 특권계급'으로부터 '개인'에게 책에 관란 평가를 돌여주기 위한 시도가 아닐까 생각해.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어도 좋다. 평론가들로부터 무시당해도 좋다. 내가 '재미있다', '대단하다'하고 생각한 책이야말로 나에게는 명저 · 명작이다···소라에게 있어선 SF가 그렇고 너에게 있어선 논픽션이 그런 거겠지···. - P.211


내가 BB부에 들어와 다양한 논픽션 책을 소개하는 건 내 마음에 든 책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전혀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했기 때문이다. 큰 인기를 얻지 못해도 괜찮다. 내 이야기를 듣고 관심을 갖게 되어 책을 읽어 보게 되는 사람이 한두 명이라도 나타나주면 된다. 항상 그런 바람을 가지고 비블리오 배틀에 임했다.

후시키가 그렇게까지 열심히 SF 이야기를 하는 것도 나와 같은 이유일까? 방향성은 다를지언정 근본적인 충동,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는 같다는 말일까?  - P.21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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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맨 매뉴얼
대니얼 월리스 지음, 이규원 옮김 / 비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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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맨의 모든것.


​ 처음 아이언맨의 흔적을 보게 된것은 어느 영화관에서부터였다. 영화를 보기 위해 표를 끊다가 옆에 여러개의 가면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아이언맨을 상징하는 가면이었다. 처음에는 '아이언맨'이라는 이름도 몰라서 저게 무슨 가면이지? 했는데 나중에 영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를 우연히 보게 되면서 비로소 그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정말 말 그대로 세계의 히어로들이 다 모여서 싸우게 되는 이 이야기는 때로는 흥미롭기도 했고 혹은 너무 만화같은 이야기에 신기하게 영화를 관람했던 것 같다.


어른들과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이 시리즈에 대해 그나마 이름이라도 알고 있으니 다행인가. 아무튼 대니얼 월리스의 <아이언맨 매뉴얼>은 그야말로 최고 슈퍼 히어로인 아이언맨의 모든 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 토니 스타크의 집을 비곳하여 각각의 작업실, 아무 분석 자료, 그의 동료들에 대한 자료 뿐만 아니라 그가 설계한 기계의 공학적인 면면까지도 빠짐없이 그려내고 있어 아이언맨에 대해 관심이 없던 이들까지도 입을 못 다물만큼 현실감있는 자료들이 빼곡하게 수록되어 있다.

 

 

자료에 대한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입체감있게 해 놓은 것 뿐만 아니라 스케치, 명함, 메모, 기록들 하나하나까지도 자세하게 붙여져 있어 마치 누군가의 기록을 생생하게 보는 것 마냥 설레이기도 하고, 그가 누군지를 알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언젠가 브라운관에서 어떤 랭킹을 조사하며 토니 스타크이자 아이언맨으로 변신을 하고 꾀하고 있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에 대한 인기가 '아이언맨' 때문에 급상승하며 그가 높은 출연료를 받는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그만큼 그의 성공은 아이언맨으로 변신하여 세계 최강 히어로로서의 면모를 뽐내고 있고, 예전에 우리가 많은 히어로들의 이야기에 감탄을 하고 추종을 불사할 만큼 아꼈던 것처럼 요즘에는 그가 연기한 '아이언맨'이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컬러풀한 사진 보다 하나하나 그가 써 놓은, 혹은 동료가 써놓은 것 같은 메모들이었다. 읽다보면 토니 스타크의 가장 큰 장점이 부각되기도 하지만 그의 단점이 깨알같이 스며들어 있어 읽다가 여러번 큭큭큭거리며 책을 읽었다. 아이언맨의 적에게는 그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는 이 책이 1급 비밀이자 그의 모든 기술이 숨어져 있어 적에게는 보여서는 안 될 책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가 변신을 꾀하고 있는 아이언맨에 관한 기술이 잘 녹아져 있고, 설명 또한 세밀하다. 하나하나 읽어보아도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아이언맨을 좋아하는 팬이거나 아이언맨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은 독자에게는 더없이 좋은 선물일 것 같다.

 

 

비록 스크린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지만 통쾌하고 짜릿하고, 스릴있는 슈퍼히어로의 모습들이 다층적으로 그려져 있어서 이 책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아이언맨의 모든 것을 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언맨의 팬이라면 당연히 사야 할 책이자 필수품은 아닐까 할 정도로 정교해서 보고 또 봐도 큰 애착이 가는 책이었다. 다음에 다시 어밴져스의 인물들을 만난다면 아니, 아이언맨을 만난다면 이전보다 훨씬 더 애정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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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2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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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습하면서도 축축한.


 요 네스뵈는 <바퀴벌레>를 쓰기 위해 방콕에 가서 완전히 땀에 젖은 채 쓰고, 또 썼다고 했다. 찌는 듯한 더위에 나는 나는 책을 또 읽고, 읽으며 바퀴벌레를 완독했다. 요즘처럼 무덥고 습한 여름에는 제격인 소설이었다. 타이의 수도인 방콕을 가 보지 않아 요 네스뵈의 시선으로 형사 해리 홀레의 모습을 통해 도시 방콕을 유랑하며 그와 함께 천사의 도시를 유랑했다. 미국의 서부인 로스앨젤레스를 떠올리면 절로 천사의 영어 약자를 떠올려서 그런지 천사를 연상시키는데 방콕이야 말로 타이어로 끄룽텝이라고 하며, 천사의 도시라는 뜻을 갖고 있다. 천사의 도시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방콕에서 일어나게 되고 주태국 노르웨이 대사가 한 '사창가'에서 살해된채로 발견되고 태국과 노르웨이 측에서는 조용히 덮기위해 형사인 해리 홀레를 호출한다.


쇠스의 폭행이 해리 홀레의 가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홀레 역시 많은 상처를 받은터라 그들의 호출이 반갑지만은 않았다. 동생인 쇠스의 폭행 사건에 대한 조사를 하기 위해 상사인 묄레르에게 사건에 대한 재량권을 주기를 부탁했고 그가 승락하자, 조용한 해결을 보기 위해 홀레는 방콕으로 날아간다. 추운 나라인 노르웨이와 달리 방콕은 찌는 듯한 더위에 습한 기후까지 더해 현재 우리나라의 날씨를 연상시켰다. 무엇보다 덥고 무더운 날씨 속에 더 더운 것은 태국의 날씨가 아니라 노르웨이 대사의 살해사건 뒤로 보여지는 음습하고 축축한 곳에 살고 있는 그들 때문이었다. 요 네스뵈가 그린 소설의 배경은 방콕이지만 어디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이 태국 뿐만이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대나무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게 된 게 못마땅하다는 말이 아니에요. 너무 빠르다는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장을 위한 성장은 암세포의 원리와 같다고 생각해요. 어떤 때는 우리가 작년에 벽에 부딪힌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이미 도로에서도 그 여파를 느낄 수 있죠." -p.77


마치 현재 로케를 하듯 저절로 그려지는 도시 속에서 보여지는 폭행, 살인, 도박, 아동성매매등 만연하게 물 밑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기 뇌관을 뜯어가듯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홀레는 기어코 사건의 중심에 누가 서 있는지를 밝혀낸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 누가 범인일까,를 되새기며 조용히 발걸음을 쫓아 걸어들어 갔다. 아직 보호를 받아야 할 나이에 어른들의 노리개의 되고,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 아래 자행되는 폭행들이 묵인되다 보니 홀레는 그 실체를 마주하며 동생인 쇠스의 사건을 생각하며 혼란에 빠진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바퀴벌레는 종류가 3천 가지라고 했다. 그리고 바퀴벌레는 누가 다가오는 진동을 듣고 숨어버려서 바퀴벌레 한 마리가 눈에 띄면 적어도 열 마리가 숨어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어디에나 있다는 뜻이었다. - p.113


왜 책 제목이 바퀴벌레일까, 하던 궁금증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보이지 않는 그늘 속에 숨어둔 사람들의 비틀어진 욕망들이 한데 모여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고, 노르웨이 대사 역시 그들의 색을 띠고 있는 사람이었으며 그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소굴 속에서 나오고, 또 비어져 나오는지를 알게 되었다.


"머릿속의 눈으로 봐야 돼요. 그러면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을 수 있거든요. 이를테면 형사님은 아까 그리그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테이프를 소장해야 한다고 말할 때 입을 다 열지 않았죠." - p.122


"수치심은 영리하게도 위장술의 대가를 만들거든. 소아성애자들은 대부분 일생동안 성적 취향을 남에게 숨기는 데 도통한 사람들이라,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경찰이 잡아들이는 성폭행범보다 훨씬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뿐이야." -p.146


"도박이 왜 병이고, 직업이 아닌지 알아요. 해리? 도박꾼은 위험을 사랑하거든요. 도박꾼은 짜릿한 불확실성을 위해 살고 숨 쉬어요." - P.298


뉴스를 통해 종종 그런 사건을 접하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이 들어가 그들을 들쑤신다. 태국에서는 '파랑'이라는 이름으로 낯선 이방인으로 다가오지만 조용히 일을 마무리를 하기 위해 자신을 택했다는 상부의 말과 달리 홀레의 모든 것을 알고 파견을 보낸 것을 그제서야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 처음으로 해리 홀레 시리즈를 접하는 나로서는 형사 이야기를 무엇 보다 좋아하지만 책 속에서 보여지는 단단함과 강한 이미지의 '히어로' 다운 모습이 아닌 사건에 대해 깊이 고뇌하고, 경악하며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모습이 마음이 들었다.


가장 애착이 갔던 인물 중에서는 역시 홀레와 루나였다. 동질감인지 모르겠지만 홀레와 루나의 마음이 조금 통하나 싶었는데 이야기는 점점 내 예상과 달리 흘러갔다. 겨울마다 추위를 피해 화분을 거실에 놓다보니 본의아니게 화분 속에 들어있던 바퀴벌레가 들어와 밤마다 깜짝 놀랄 때가 여러번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깜짝 놀라며 바퀴벌레를 처치하지 않고서는 잠을 자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바퀴벌레와 사투를 벌이곤 했다. 한마리를 죽여도 계속해서 생명력이 죽지 않은 바퀴벌레를 여전히 가장 혐오스러워 하지만 요 네스뵈가 그린 바퀴벌레의 종족들 역시 바퀴벌레 보다 더 강한 생명력으로 우리 사회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는 비약적으로 발전되어 있고, 점점 초고속으로 성장해 있지만 인간의 본성은 우리 사회가 발전하는 것만큼 따라가지 못하고 돈으로, 권력으로 자신의 변태적인 욕망을 누군가에게 풀어가는 현장은 더 없이 음습하고 축축하기 그지 없었다. 그 속에서도 알콜중독이지만 해리 홀레가 자신의 무게를 묵묵히 이겨나가는 모습이 눈에 그려질듯 좋았지만 또 하나의 십자가가 붙은 것 같아 마음이 서늘해진다. 왜 사람들이 그렇게 요 네스뵈를 외치며, 해리 홀레 시리즈에 반했나 했더니 읽어보니 절로 수긍이 갔다. 이 책을 읽고 나니 해리 홀리를 시리즈를 계속해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실감나게 읽었던 작품이다.


"책임감, 맞아요." 리즈는 지친 미소를 지었다. "누구나 자기만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죠. -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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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어처리스트
제시 버튼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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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의 암스테르담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 미스터리 소설.

제시버튼의 <미니어처리스트>를 읽으면서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모든 선물을 받는 여신'이라는 뜻으로 제우스가 만든 최초의 여성인 판도라는 제우스가 상자 하나를 주면서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으나 호기심이 많은 판도라는 그 상자를 기어코 열어보고 말았다. 상자 안에 무엇이 담겨져 있을까, 하는 가벼운 호기심 하나가 상자 속에 담겨져 있는 온갖 나쁜 것들을 세상으로 펼쳐내고 말았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을 떠올릴 때는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이름과 관계되어 불명예스러운 뜻으로 기억하고 있다. 수 천년이 지나도 계속해서 나쁜 의미로 쓰인다면 그녀의 기분이 어떨까?

판도라는 자의적인 행동으로 상자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고, 그것이 수 천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녀의 이름에 족쇄처럼 걸려있지만 열 여덟살인 넬라는자신의 나이보다 곱절이나 많은 부유한 상인인 요하네스 브란트와 결혼하여 암스테르담에 건너왔다. 그녀가 살던 소도시와는 달리 1686년의 암스테르담은 나날이 발전해가는 도시였다. 여자에게는 결혼이 곧 인생의 제 2막으로 흘러가는 가장 중요한 순간이고, 한 가정의 꽃으로 성장해 나갈 중심축이라는 것을 넬라는 엄마의 충고를 마음 속 깊이 담아두고 대저택의 문을 열었으나 결혼생활의 환상과 달리 첫날부터 남편인 요하네스는 그녀를 반겨주지 않는다. 서먹하면서도 규율적인 면면을 고집하는 시누이 마린과 어딘가 모르게 경계하는 하녀 코넬리아를 보며 어린 소녀이자 새신부는 자꾸만 마음이 움츠려든다.


사랑은 리넨 헝겊 위의 핏자국보다 훨씬 더 모호했다. 매달 비치는 피는 넬라가 사랑하는 사랑, 육체적이면서도 육체를 초월한 사랑과는 관련이 없어 보였다. "그게 사랑이란다, 페트로넬라." 몰이 졸려 죽기 직전까지 까망눈을 끌어안고 있는 아라벨라를 바라보며 그녀의 엄마가 말했다. 마을의 악사들도 사랑에 관한 노래를 부르긴 했지만, 주로 사랑이라는 미명에 감춰진 고통을 노래했다. 진정한 사랑은 시궁창의 꽃이고, 꽃잎은 피어나지 못한다. 사람들은 사랑을 위해 모든 고통을 기꺼이 감수할 것이며, 그래서 한없이 행복하지만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린다. - p.39


오롯하게 크나큰 환영을 받고 남편의 사랑을 기대했던 소녀에게 닥친 당혹한 시선과 냉대는 이내 그녀를 낯선 이방인으로 만들어 버리고, 사랑이 아닌 부를 통해 어린 신부의 마음을 녹히려 한 요하네스는 어느날 결혼선물로 미니어처 하우스를 그녀에게 건네준다. 대저택의 축소판이라고 칭할만큼 정교하고 화려한 그 공간을 넬라는 미니어처리스트를 고용해 하나둘 채워가지만 그녀가 주문하지 않은 물건들이 오면서 대저택의 비밀을 하나씩 드러난다. 마치 누군가가 예언이라도 하듯 맞아떨어지는 진실들 때문에 넬라는 두려워하게 되고 정교하게 물건을 만들어낸 미니어처리스트를 찾아 나서며 이야기는 점점 더 고조된다.


"부는 자신이 직접 일구어야만 합니다.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어요. 조심하지 않으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리지요." - p.55


17세기의 암스테르담이 가장 황금기였던 그 시절의 화려함, 부유한 상인인 요하네스는 무역을 하면서 부를 쌓아가고 마린은 오빠의 일을도우면서 창고에 쌓인 설탕을 빨리 팔아야 한다고 하지만 요하네스는 크게 중점을 두지 않는다. 갓 시집온 새색시인 넬라는 옥신각신하며 사업이야기를 하는 오누이를 보며 자신이 어디에 서 있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며 혼란스러워 한다. 만약 내가 넬라라도 남편의 차가움이 마음 속 깊이 시리게 다가올 것 같다. 요하네스는 어딘가 모르게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착각과 함께 그녀를 자꾸만 멀리하고 그러던 중 남편인 요하네스가 왜 그렇게 자신을 멀리하는지 그 비밀을 알고 충격을 먹는다.


"사람을 깊이 알게 되면요, 넬라, 달콤한 몸짓과 미소의 이면을 알게 되면, 우리 모두가 숨기고 있는 분노와 측은한 두려움을 보게 되면, 그땐 그저 용서하는 수밖에 없어요. 용서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죠. 그리고 마린은 용서를 썩 잘하는 편이 아니고요." 그가 잠시 말을 멈춘다. "이 사회에는 사다리가 있고······ 아그네스는 그 사다리를 오르고 싶어해요. 문제는, 아그네스가 결코 풍경을 즐길 줄 모른단 거죠." 장난기를 머금은 그의 눈이 반짝인다. - p.113


그의 말이 허공에 맴돈다. 넬라는 그 말에 숨이 차고 남자들의 침묵  속에 얼어붙는다. 그 말이야말로 암스테르담의 건물, 암스테르담의 교회와 대지 밑에 설치된 뇌관을 건드리는 말이고, 그들의 소중한 삶을 산산조각 내는 말이다. 그 말은 이 도시의 용어사전에 탐욕과 홍수 다음으로 끔찍한 단어다. 그 말은 곧 죽음을 의미하고, 시민군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지휘관의 대범함에 말문이 막혀버린 그들은 넬라의 눈을 쳐다보지 못한다. - p.327


당시의 암스테르담의 생활상이 눈에 그려지는 듯 화려하게 펼쳐져 있고 주인공인 넬라 오트만에게 배달되는 미니어처들을 통해 또다른 상황들이 맞닥들일 때마다 예견처럼 미니어처 속에 그려져 있는 표식들이 쿵 하고 내려앉게 만든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저택에서 내려다 보며 넬라의 미니어처 하우스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동물, 가구들을 들일 때마다 미로처럼 펼쳐지는 이야기가 놀라웠다.


묘한 긴장감, 넬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골과 도시의 생경함. 결혼 이후 낯선 사람들과의 마주침, 남편과 아내. 올케와 시누이의 모습등 각기 상반되는 이미지들이 매혹적이면서 번영해가는 대도시 암스테르담의 면면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부유한' 상인에 대한 거부감이 짙게 깔려있어 부유한 것이 모자란 것 보다 훨씬 더 못하다라는 것을 소설에서 깊숙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요하네스라는 인물이 갖는 모순점과 안타까움이 느껴졌던 책이었다. 매혹적인 이야기를 통해 17세기 암스테르담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었고 한 여자가 시집을 옴으로서 갖는 낯선 기운들이 나중에는 슬며시 사라져 비밀의 정점 끝에 다가와 문이 열려질 때 느끼는 당혹함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이야기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책이었다. 지금까지 읽었던 많은 책들 중 가장 시대상이 눈앞에 그려질듯 아찔하게 그려져 있어 나도 모르게 이야기 속으로 깊이 파고 들었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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