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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어처리스트
제시 버튼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17세기의 암스테르담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 미스터리 소설.
제시버튼의 <미니어처리스트>를 읽으면서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모든 선물을 받는 여신'이라는 뜻으로 제우스가 만든 최초의 여성인 판도라는 제우스가 상자 하나를 주면서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으나 호기심이 많은 판도라는 그 상자를 기어코 열어보고 말았다. 상자 안에 무엇이 담겨져 있을까, 하는 가벼운 호기심 하나가 상자 속에 담겨져 있는 온갖 나쁜 것들을 세상으로 펼쳐내고 말았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을 떠올릴 때는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이름과 관계되어 불명예스러운 뜻으로 기억하고 있다. 수 천년이 지나도 계속해서 나쁜 의미로 쓰인다면 그녀의 기분이 어떨까?
판도라는 자의적인 행동으로 상자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고, 그것이 수 천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녀의 이름에 족쇄처럼 걸려있지만 열 여덟살인 넬라는자신의 나이보다 곱절이나 많은 부유한 상인인 요하네스 브란트와 결혼하여 암스테르담에 건너왔다. 그녀가 살던 소도시와는 달리 1686년의 암스테르담은 나날이 발전해가는 도시였다. 여자에게는 결혼이 곧 인생의 제 2막으로 흘러가는 가장 중요한 순간이고, 한 가정의 꽃으로 성장해 나갈 중심축이라는 것을 넬라는 엄마의 충고를 마음 속 깊이 담아두고 대저택의 문을 열었으나 결혼생활의 환상과 달리 첫날부터 남편인 요하네스는 그녀를 반겨주지 않는다. 서먹하면서도 규율적인 면면을 고집하는 시누이 마린과 어딘가 모르게 경계하는 하녀 코넬리아를 보며 어린 소녀이자 새신부는 자꾸만 마음이 움츠려든다.
사랑은 리넨 헝겊 위의 핏자국보다 훨씬 더 모호했다. 매달 비치는 피는 넬라가 사랑하는 사랑, 육체적이면서도 육체를 초월한 사랑과는 관련이 없어 보였다. "그게 사랑이란다, 페트로넬라." 몰이 졸려 죽기 직전까지 까망눈을 끌어안고 있는 아라벨라를 바라보며 그녀의 엄마가 말했다. 마을의 악사들도 사랑에 관한 노래를 부르긴 했지만, 주로 사랑이라는 미명에 감춰진 고통을 노래했다. 진정한 사랑은 시궁창의 꽃이고, 꽃잎은 피어나지 못한다. 사람들은 사랑을 위해 모든 고통을 기꺼이 감수할 것이며, 그래서 한없이 행복하지만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린다. - p.39
오롯하게 크나큰 환영을 받고 남편의 사랑을 기대했던 소녀에게 닥친 당혹한 시선과 냉대는 이내 그녀를 낯선 이방인으로 만들어 버리고, 사랑이 아닌 부를 통해 어린 신부의 마음을 녹히려 한 요하네스는 어느날 결혼선물로 미니어처 하우스를 그녀에게 건네준다. 대저택의 축소판이라고 칭할만큼 정교하고 화려한 그 공간을 넬라는 미니어처리스트를 고용해 하나둘 채워가지만 그녀가 주문하지 않은 물건들이 오면서 대저택의 비밀을 하나씩 드러난다. 마치 누군가가 예언이라도 하듯 맞아떨어지는 진실들 때문에 넬라는 두려워하게 되고 정교하게 물건을 만들어낸 미니어처리스트를 찾아 나서며 이야기는 점점 더 고조된다.
"부는 자신이 직접 일구어야만 합니다.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어요. 조심하지 않으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리지요." - p.55
17세기의 암스테르담이 가장 황금기였던 그 시절의 화려함, 부유한 상인인 요하네스는 무역을 하면서 부를 쌓아가고 마린은 오빠의 일을도우면서 창고에 쌓인 설탕을 빨리 팔아야 한다고 하지만 요하네스는 크게 중점을 두지 않는다. 갓 시집온 새색시인 넬라는 옥신각신하며 사업이야기를 하는 오누이를 보며 자신이 어디에 서 있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며 혼란스러워 한다. 만약 내가 넬라라도 남편의 차가움이 마음 속 깊이 시리게 다가올 것 같다. 요하네스는 어딘가 모르게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착각과 함께 그녀를 자꾸만 멀리하고 그러던 중 남편인 요하네스가 왜 그렇게 자신을 멀리하는지 그 비밀을 알고 충격을 먹는다.
"사람을 깊이 알게 되면요, 넬라, 달콤한 몸짓과 미소의 이면을 알게 되면, 우리 모두가 숨기고 있는 분노와 측은한 두려움을 보게 되면, 그땐 그저 용서하는 수밖에 없어요. 용서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죠. 그리고 마린은 용서를 썩 잘하는 편이 아니고요." 그가 잠시 말을 멈춘다. "이 사회에는 사다리가 있고······ 아그네스는 그 사다리를 오르고 싶어해요. 문제는, 아그네스가 결코 풍경을 즐길 줄 모른단 거죠." 장난기를 머금은 그의 눈이 반짝인다. - p.113
그의 말이 허공에 맴돈다. 넬라는 그 말에 숨이 차고 남자들의 침묵 속에 얼어붙는다. 그 말이야말로 암스테르담의 건물, 암스테르담의 교회와 대지 밑에 설치된 뇌관을 건드리는 말이고, 그들의 소중한 삶을 산산조각 내는 말이다. 그 말은 이 도시의 용어사전에 탐욕과 홍수 다음으로 끔찍한 단어다. 그 말은 곧 죽음을 의미하고, 시민군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지휘관의 대범함에 말문이 막혀버린 그들은 넬라의 눈을 쳐다보지 못한다. - p.327
당시의 암스테르담의 생활상이 눈에 그려지는 듯 화려하게 펼쳐져 있고 주인공인 넬라 오트만에게 배달되는 미니어처들을 통해 또다른 상황들이 맞닥들일 때마다 예견처럼 미니어처 속에 그려져 있는 표식들이 쿵 하고 내려앉게 만든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저택에서 내려다 보며 넬라의 미니어처 하우스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동물, 가구들을 들일 때마다 미로처럼 펼쳐지는 이야기가 놀라웠다.
묘한 긴장감, 넬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골과 도시의 생경함. 결혼 이후 낯선 사람들과의 마주침, 남편과 아내. 올케와 시누이의 모습등 각기 상반되는 이미지들이 매혹적이면서 번영해가는 대도시 암스테르담의 면면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부유한' 상인에 대한 거부감이 짙게 깔려있어 부유한 것이 모자란 것 보다 훨씬 더 못하다라는 것을 소설에서 깊숙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요하네스라는 인물이 갖는 모순점과 안타까움이 느껴졌던 책이었다. 매혹적인 이야기를 통해 17세기 암스테르담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었고 한 여자가 시집을 옴으로서 갖는 낯선 기운들이 나중에는 슬며시 사라져 비밀의 정점 끝에 다가와 문이 열려질 때 느끼는 당혹함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이야기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책이었다. 지금까지 읽었던 많은 책들 중 가장 시대상이 눈앞에 그려질듯 아찔하게 그려져 있어 나도 모르게 이야기 속으로 깊이 파고 들었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