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세계에 어설프게 발을 들이고 보니, 조금은 알 것 같다. 정말로 식물은 뭐든 될 수 있다는 것을, 지구는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말 외계 행성 같다는 것도,
온실의 모순성을 좋아한다. 
자연이자 인공인 온실, 
구획되고,
통제된 자연, 멀리 갈 수 없는 식물들이 머나먼 지구 반대편의 풍경을 재현하는 공간. 
이 소설을 쓰며 우리가 이미 깊이 개입해버린, 되돌릴 수 없는,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곳 지구를 생각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면서도 마침내 그것을 재건하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마도 나는, 그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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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최초의 감정이 하필 공포와 혐오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때가 있다. 당시 파도와 상상된 파도의 차이를 생각하면 내게 공포와 혐오란 상상된 것에 가깝다. 파도라는 생물을 상상하며 바다를 응시하던 나는 내 말랑한 몸을 보호해줄 껍데기랄 것도 없고 생존에 필요한 정보도 기술도 갖추지 못한 어린이였으므로 그때 내게는 공포와 혐오가 가장 유용하고도 쉬웠을 것이다. 파도라는 낯선 것이 내게 다가올까봐 무섭고 그것이 내게 달라붙을까봐 싫고, 공포와 혐오는 애쓰는 상태가 아니다. 그중에 혐오는 특히 그래서,
그건 지금 내게도 쉽다. 그런 감정이 내게 문득 쉬울 때, 뭔가가 누군가가 즉시 싫고 밉고 무서울 때 나는 그것이 어느 정도로 상상된 것인지, 혐오는 아닌지를 생각한다.

사람들은 온갖 것을 기억하고 기록한다. 기억은 망각과 연결되어 있지만 누군가가 잊은 기억은 차마 그것을 잊지 못한 누군가의 기억으로 다시 돌아온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 화석이다. 뼈들은 역사라는 지층에 사로잡혀 드러날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퇴적되는 것들의 무게에 눌려 작아버릴 테지만 기억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기억하고, 기억은 그 자리에 돌아온다. 기록으로, 질문으로.

 나의 부모는 네가 이 개똥밭 출신이라는 걸 잊지말라고 내게 경고한 적이 있다. 나는 출신이라는 걸 생각한적이 없고 어디든 개똥밭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는데 그들은 그런 걸 생각하고 있었다니, 자기 삶을 그런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니, 놀랍고 상심했지만 이제 그런 말은 예전만큼 나를 흔들지 못한다. 괜찮지는 않고 여전히 흔들리지만 진폭이랄지 파형이랄지 그런 것을 어느 정도는 내가 조절할 수 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가장 가까운 이들의 나쁜 말과 태도와 행동에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를 향해 당신을 손상시키면서까지 자기가 살고자 하는 이를 거절하고, 떨어지라고, 어떤 형태로든 그를 돌볼 수는 있겠지만 그의 비참을 자기삶으로 떠안지 말라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러나 그 대신 가물치를 물에 돌려두었다고 썼다. 해당화를 심고 작약을 두고 보았다고 썼다. 그것이 너무나 개인적인 이야기는 아닐까. 너무 이른 이야기는 아닐까. 누군가를 너무 상처입히는 이야기는 아닐까 망설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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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은 디지털 시대에나타난 쇼펜하우어의 의지다. 끝없이 분투하고, 절대 만족하는법이 없다. 나의 가장 귀중한 자원인 시간을 포함해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행복이라는 환상을 제시하지만 오로지 고통만을 가져온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처럼, 인터넷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금욕적인 삶을 살거나, 미학적인 삶을살거나. 명상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나는 음악을 선택한다. 물론 로시니의 음악이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고 스카치위스키 한 잔을 따른다. 싱글몰트 위스키를마시며 두 눈을 감고 음악을 듣는다. 멜로디에 귀를 기울인다. 달라이라마가 뉴스를 듣듯이, 사심은 없지만 무관심하지는 않게.
주의는 기울이되 반응은 없이. 마음을 달래주는 따뜻한 목욕물처럼 음악이 나를 적시게 둔다. 말 없는 소리. 내용 없는 감정, 소음없는 신호.
나는 깨닫는다.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 유예가 아닌, 더욱 풍성한 다른 세상으로의 침잠, 바로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음악 안에서본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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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구체적인 슬픔이나 구체적인 즐거움이 아닌 슬픔이라는 감정 자체와 즐거움이라는 감정 자체를 느낀다.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감정에서 추출한 정수"라고 표현한다. 슬픔 자체는 고통스럽지 않다. 우리를아프게 하는 것은 무언가에 관한 슬픔이다. 그래서 우리가 신파 영화를 보거나 레너드 코헨의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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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신의 감각이 주변 환경을 훑으며 정보를 뽑아내는안테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감각은 홍수처럼 밀려드는 감각 정보에 압도되지 않도록 뒤엉켜 있는 온갖 잡다한 것에서 유의미한신호를 걸러내는 필터에 더 가깝다. 소로의 말처럼 우리는 "무한한 세상에서 자신의 몫"만을,더도 덜도 아닌 딱 그만큼만 받아들이도록 타고난다.

소로는 피상적이었다. 좋은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피상적이라는 표현은 억울한 누명을 쓴다. 종종 ‘얄팍하다‘ 라는 표현과 동의어로 사용되지만 두 단어는 다르다. 얄팍한 것은 깊이가 부족한것이다. 피상직인 것은 깊이가 분신된 것이다. 무한한 세상에서는 자신의 몫이 얇지만 매우 넓게 퍼져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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