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천재 - 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고명섭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제목을 보는 순간 몇 년 전 베스트셀러였던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가 떠올랐다. 자신이 추구하던 것엔 엄청난 집중력과 열정을 쏟아부으며 奇人의 면모를 과시하던, 허나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들. 무언가 큰 일을 해내려면 그들같은 '狂'이 필요하다 부추기는 책이었다. 허나 이 책은 시대를 잘못 탄 불운한 천재라기보단 시대를 잘 이용할 줄 알았던 천재에 가깝다. 첫장부터 히틀러나 푸셰같은 '악당'들이 등장하는게 심상치 않다. 적어도 이 책의 주인공들은 똑똑하고 인격적으로도 훌륭해 뭇 사람들을 주눅들게하는 '교과서적 천재'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자신의 광기에 몸을 불살라 시대를 휘저은 '반동가'들이다.

정치, 문학, 철학을 가로지르는 총 아홉 '광인'이 등장한다. 아돌프 히틀러, 세르게이 네차예프, 조제프 푸셰(정치), 장-자크 루소, 나쓰메 소세키, 프란츠 카프카(문학),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마르틴 하이데거, 미셸 푸코(철학). 솔직히 네차예프나 푸셰, 소세키는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낯선사람(?)들이고 다른 이들조차도 교과서 혹은 다른 책들에서 간간히 인용되는 것만 보아왔을 뿐 생존 당시의 상황이나 그들의 인생이 어떠했는지는 아는바가 없었다. 이 책은 여느 평전처럼 당시 정치적/사회적 상황속에서 주인공들의 대외활동/업적에 대해 일대기 식으로 서술하지만 인물의 행적에 대해 차가운 비판도 서슴치 않는다. 주인공 뿐만 아니라 중요한 관계를 맺었던 타인의 사진까지 배치해 놓은것도 재미있다.

이 책의 성격은 딱, 대중적이다. 문학적 필체로 한 인물이 풍기는 이미지에 대한 묘사 및 비유로 시작해서 크고작은 사건들을 나열하며 딱딱하지 않게 풀어나가기에 쉽게쉽게 읽히고 나름 재미도 있다. 처음 책을 집었을 땐 두툼한 두께(대략 손가락 한마디 정도?)에 하드커버까지 합세해 퍽 부담스러웠지만 정작 쪽수는 400페이지 정도.(개인적으로 갱지 느낌이 나는 거친 종이를 별로 안좋아한다. 들고다니긴 가볍지만 괜히 부피만 커져 '뻥튀기'의 느낌이 들어서) 개인적 사족을 붙이면 빨리 읽히는 책은 읽을땐 좋지만(이번달 읽은 도서 목록에 한권 추가했다는 지극히 속물적인 이유로) 막상 읽고나면 무언가 허전한 느낌. 머리를 끙끙 앓으며 힘들게 읽어나간책은 (가끔은 졸리기도 하고 물론 그러다 한계를 느껴 반쯤 읽고 다시 덮어두기도 하지만) 뿌듯하고 없던 애착까지 생겨 괜히 참고목록의 책들을 찾아 보관함에 추가하는 요란을 떨기도 한다.

평범한 둔재들의, 때로는 당대의 석학들에게까지 끊임없는 존경과 찬사를 받았지만 정작 스스로는 불행했다는 '흔한' 얘기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최고에 자리에 오르는 '자수성가'신화는 종종 주인공의 카리스마를 높이는 긍정적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 그의 내면에 치유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기곤 한다. 모두들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것을 일정정도 이뤄냈지만 정작 삶을 온전하게 살아냈다는 느낌이 들진 않는다. (말년의 푸코를 제외한다면 - 죽기 직전 푸코는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것이 진정한 주체라고 주장했다. 에이즈로 죽어가면서도 자기 삶을 돌보는, 즉 인생 전체를 예술품으로 만드는 법을 연구했다고 한다.) 내면에 극단의 공포와 파괴의지로 가득했던 히틀러나 실제 삶에선 미숙한 어린아이 같았던 루소, 자기혐오에 같혔던 소세키, 죽음이 일종의 탈출구였던 카프카 등등...생애 초기부터 붕괴된 자기 이미지로 인해 표출된 극단의 광기로 인류사에 한 획을 그었을진 몰라도 인격의 통합성 측면에선 영 꽝이다. 이런면에서 본다면 천재들을 만드는 건 지능의 과잉이 아니라 무언가의 '결핍'이다.

"...이 책의 주제는 '천재'나 '광기'와는 아무런 직접적 관련이 없다. 한계상황에서 자신을 한계 너머로 밀어붙이려 햇던 사람들, 불행한 의식을 견딜 수 없어 끝 모를 위험에 뛰어들었던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속성이 광기이고 천재였을 뿐이다. 여기서 천재는 광기 안에서 솟아오르며, 광기는 천재의 어두운 그림자와 같다. 광기가 없었더라면 천재성도 없었을 것이며, 천재가 아니었다면 광기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광기는 한계체험까지 자신을 몰아갔던 내적인 충동의 다른 말이다.." (p.13~14)

천재들의 비상한 열정에 자극받고자 열었던 책인데 도리어 음산하고 핏물이 밴 듯한 인간의 '광기'만 잔뜩 떠안고 나온 기분이다. 대중들은 천재의 화려한 카리스마에 열광하지만 그들 역시 평범하고 나약한 인간이기에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 광기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지만 얼마나 자신의 삶 속에 통합시키느냐는 개개인의 문제고, 또 사회에 따라 표출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하나. 한국인이 지은 책이지만 정작 한국인 주인공은 없다. 그만한 카리스마가 없었던 것인지 혹은 마음껏 광기를 표출하기엔 사회자체의 광기가 너무 짙었던건지. 어쩌면 여기 주인공들의 광기는 현재 지구 곳곳에서 집단으로 표출되는 광기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이 망상에 시달리면 광인이라 부르고 집단이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부른다'는 유명한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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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1-08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나 이거 살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갠적으로 고명섭을 좋아해서.

Jade 2007-11-09 01:20   좋아요 0 | URL
아 네..ㅎㅎ 그냥 지하철 오가며 읽기 좋은 책 같아요 흥미있고 ㅎㅎ

2007-11-09 12: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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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09 13: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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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09 14: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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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10 20: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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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5 17: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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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6 09: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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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6 13: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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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6 14: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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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 2007-12-14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카추카^^;;

Jade 2007-12-16 20:18   좋아요 0 | URL
어머나, 감사해요 멜기세덱님 ㅎㅎ 저도 멜기님 축하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