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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토텀
찰스 부코우스키 지음, 석기용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1. 이거 미친놈 아냐?
주인공 헨리 치나스키에 대한 내 생각은 책을 읽는 내내 줄곧 이랬다.
그는 끊임없이 성관계와 술에 탐닉한다.
그는 기차를 타고 가는 일자리에서 숙소와 음식을 제공받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도 하지 않고 내린다.
그는 부모에게 의절 당한다.
그는 가끔 들어간 직장에서 유혹한 상대와 일터에서 성관계를 갖기도 한다.
물론 그 사실이 발각되면 직업을 잃는다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다.
그는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청소 방법을 듣고 화장실을 청소하는 일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도 감독이 말해준 것보다 자신의 생각이 중요했다.
바닥을 닦는 일이 그에게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만 구석에 놓인 담배꽁초 따위는 그냥 두어도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헨리 치나스키가 처음부터 미쳤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는 ‘내가 또라이라는 사실을 학창시절에 처음 알았다’(177p)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그건 따돌림을 당했을 때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는 얘기다.
어쩌면 이런 일에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며 자기를 지켰기 때문에 그가 미쳐갔을지도 모른다.
미치면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아니면 양탄자 위에 토한 벌로 토사물을 먹이려는 엄한 그의 아버지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37p)
그가 내게 ‘미친놈’으로 정의 되는 사람이 된 이유를 하나로 정의하기는 역시 힘들다.
그는 잡역부이기도 하지만, 로스앤젤레스 시립대학에서 2년간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소설을 쓰고 있는 습작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단편소설을 쓰는 일을 꽤 꾸준히 해나갔으며 결국 그 중 「맥주에 절은 내 영혼은 세상의 모든 죽은 크리스마스트리들보다 더 슬프다」라는 단편은 여러 작가를 키워냈다는 미국 최고의 문학잡지 『프런트파이어』의 발행인인 클레이 글래드모어에게 낙점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뿐, 이후로 그가 변변한 작품을 썼다는 말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 에피소드를 넣은 이유는 그가 미국최고의 문학잡지 편집장을 감동시킬만한 사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즉 아무리 이상한 말을 짓거리던 허랑방탕한 사람이라도 세상을 보는 눈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2. 부조리한 세상을 부조리한 사람이 이야기 한다
나는 그가 공부한 학문이 ‘저널리즘’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널리즘이란 사회의 모순점을 찾아내 고발하는 것이 아닌가?
내 생각이 맞다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시대 고발은 대개 여러 잡일거리를 나열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건빵공장에서 그는 힘든 노동으로 미쳐가는 사람, 경영자만 배불리는 구조, 인간답지 못한 대우를 받는 노동자, 사회의 변화로 망하는 회사 등.
이 사실은 그가 실크 스타킹을 멋지게 신은 다리를 부모님보다 사랑하며, 싸구려 포트와인을 물보다 자주 마신다는 것만큼이나 진실하다.
그러나 이것은 저널리즘에서 흔히 사용하는 객관적 사실 전달과는 구별된다.
철저히 헨리 치나스키의 눈으로 보고 그의 머리로 생각한 주관적 이야기의 나열이다.
게다 이 말을 하는 사람이 지독한 색광에 주정뱅이임을 독자는 잊지 않고 있다.
독자는 그의 말을 딱히 신뢰하지도 않으면서 반신반의하며 듣게 된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느새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세상을 보게 된다.
3. ‘미친놈’의 이야기가 아닌, ‘미칠 수밖에 없는 사람’의 이야기
역자 석기용 씨는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 대답해보자. 거창하게 말해서,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소외, 수단화된 인간관계의 절망과 위선에 저항하며, 인간 본성의 실현과 진정한 인간관계의 회복을 추구하는 자유인, 혹은 아예 내친 김에 한술 더 떠서,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해 냉혹한 현실의 삶 속에서 현대인의 나아가야 할 바를 꿋꿋하게 실천하려 한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영웅인가? 글쎄, 아무리 좋게 봐줘도 그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치나스키는 그렇게 단순히 악당으로 분류해 미워할 수 있는 그런 사람도 아닌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주정뱅이 치나스키.
작가는 그를 통해 자본이 최고 덕목인 황금만능주의 사회에서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가장 낮은 자의 삶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사회의 잘못으로 돌리는 사회주의적 모순도 저자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 자기계발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열심히 사는’ 인물을 넣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일부러 도덕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밑바닥에 있는 인생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일단 그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들려주는 과정 속에서 그가 얼마나 인생을 제대로 허비해 나가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넓게 깔린 그 잔디 위에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라는 꽃을 조금씩 섞는다.
잔디와 꽃이 어우러져 있는 공간은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일상의 공간이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면 누렇게 죽은 잔디에 초록색 페인트를 칠한 것일 뿐이며, 꽃 또한 반영구지만 향기 없는 조화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앞에서 이야기 했듯 저자는 사회의 문제점만을 꼬집지는 않는다.
역자 석기용 씨는 “치나스키는 뒤죽박죽 엉터리 같은 인간이지만, 그런 모습들에서 무엇에 주목해야 할지는 독자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라는 말로 치나스키에 대한 논평을 유보한다.
솔직히 치나스키는 책임감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방탕하고 게으르다.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면 깜짝 놀랄 일을 서슴없이 한다.
그러나 그런 그도 사람이다.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다.
그는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한다.
잡지 출판사들의 배급총판, 신문사의 식자실, 자동차 부품 창고, 지하철 포스터 붙이기, 야간 청소 노동자, 발송계원, 건물 보수와 경비원, 미술재료 도매상 발송계원, 형광등 설비 창고일 등. 그의 방탕함이 그 일을 지속하지 못하게 한 적도 있지만, 과도한 노동이 그를 갉아먹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사람이 견디지 못할 노동은 사람을 기계화 한다.
헨리 치나스키가 그러게까지 변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는 개인의 잘못도 있지만 사회의 잘못도 무시하지 못한다.
원인을 제공한 것은 사회이니 사회의 잘못이 더 크다.
작가가 이야기하는 이 사실을 눈치 챘을 때에야 비로소 이 소설은 내가 ‘미친놈’의 이야기가 아닌, ‘미칠 수밖에 없는 사람’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