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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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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선생의 '담론'을 읽었습니다. 아니 이 책은 읽었다는 표현을 쓸 수가 없겠네요. 총 독서 기간을 알 수가 없습니다. 1년이 넘은 건 확실하고요. 그래서 책을 '읽다'가 아닌 '보다'가 맞는 표현입니다. 더구나 책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도 했고 어떤 부분('주역'편)은 읽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읽었다가 보다는 그냥 시간날 때 잠시잠시 흘깃 살펴본 책입니다. 이런 책에 대한 후기를 남기는 것도 웃기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선생의, 삶과 인간, 세상에 대한 격조높은 시선의 자취를 조금이나마 남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남깁니다. 따라서 이 글은 책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책을 '보며' 제 눈에, 마음에 와닿았던 문장들을 정리하고 소개하겠습니다.

책은 1부 - 고전에서 읽는 세계 인식, 2부 - 인간 이해와 자기 성찰로 구성되었습니다. 1부는 대학과 대학원 수업 원고를 녹취한 것이고 2부는 우리가 흔히 신영복 선생하면 떠오를 수 있는 삶과 세상에 대한 사색과 통찰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수업 원고는 동양 고전 강독입니다. 그래서 앎이 미천한 저같은 사람에게는 상당히 어렵게 다가왔습니다. 동양 고전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끊임없는 공부의 필요성을 절감했지만... 언제나 문제는 실천입니다.

아무튼 다음부터는 제 마음에 들어온 문장들입니다.

'工'은 天과 地를 연결하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夫는 천과 지를 연결하는 주체가 사람(人)이라는 뜻입니다.(18쪽)

문사철의 추상력과 함께 그것의 동일성 논리, 시서화악의 상상력과 함께 그것의 주관성과 관념성, 그리고 영상서사의 압도적 전달력과 함께 인식 주체의 소외 문제를 해결해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29쪽)

현실의 조각 그림을 뛰어 넘어 진실을 창조하려고 하는 고민이 바로 이상과 현실을 결합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45쪽)

추상은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압축하는 것이고, 상상력은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을 읽어내는 것입니다.(52쪽)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79쪽)

사회에 대한 정의가 많지만,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라고 생각합니다.(108쪽)

비어 있음 즉 없음이 그릇을 유용한 것으로 만들어준다는 뜻입니다...... 무란 그냥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근본입니다.(123쪽)

'노자' 영역본에서 자연을 'self -so'라고 번역합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최고의 질서, 가장 근본적인 질서입니다.(125쪽)

노자가 강물을 최고의 선이라고 하는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다투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처하기 때문에 상선(上善)입니다.(133쪽)

기계는 도부재(道不載), 도를 실현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이 장자의 문제의식입니다.(140쪽)

노동은 생명의 존재형식입니다.(147쪽)

'천자문'에 묵비사염(墨悲絲染)이란 말이 있습니다. 묵자가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실이 물든다는 것은 사회의 허위의식, 즉 지배 이데올로기의 포섭 기능을 지적하는 것입니다.(265쪽)

법은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이고 술(術)은 신하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법은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이고, 술은 임금의 마음 속에 숨겨 놓고 절대로 신하가 읽을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179쪽)

가슴이 공감과 애정이라면 발은 변화입니다. 삶의 현장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230쪽)

차이와 다양성은 그것을 존중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어야 합니다......차이는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의 대상이어야 하고, 학습의 교본이어야 하고, 변화의 시작이어야 합니다.(232쪽)

자기 변화는 최종적으로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바뀜으로써 변화가 완성됩니다. 이것은 개인의 변화가 개인을 단위로 완성될 수는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239쪽)

중요한 것은 두 발 걸음의 완성이 아니라 한 발 걸음이라는 자각과 자기비판, 그리고 꾸준한 노력입니다.(243쪽)

美는 아름다움입니다.그리고 아름다움은 글자 그대로 '앎'입니다. 미가 아름다움이라는 사실은 미가 바로 각성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252쪽)

공부는 우리의 동공을 외부로 향하여 여는 세계화가 아니라 우리의 내면을 향하여 심화하는 인간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276쪽)

관계의 최고 형태는 입장의 동일함을 훨씬 뛰어넘는 곳에 있습니다. 서로를 따뜻하게 해 주는 관계, 깨닫게 해 주고 키워주는 관계가 최고의 관계입니다.(284쪽)

관계야말로 궁극적 존재성입니다. 자신을 개인적 존재로 인식하는 사고야말로 근대성의 가장 어두운 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358쪽)

경쟁은 옆 사람과의 경쟁이 아니라 '어제의 나 자신'과의 경쟁입니다.(370쪽)

인간을 원상태로 돌려놓는다는 것은 인간의 노동력이 사회적으로 계승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놓는다는 뜻입니다.(371쪽)

양심은 이처럼 인간과 세계를 아우르는 최고 형태의 관계론이면서 동시에 그것은 또한 가장 연약한 심정에 뿌리 내리고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품성이기도 합니다.(406쪽)

우리가 생명을 저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은 기쁨만이 아닙니다. 슬픔도 사랑의 일부입니다. 마치 우리의 삶이 그런 것처럼.(418쪽)

우리는 '논어'의 '사십불혹'을 나이 마흔이 되면 의혹이 없어진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올바른 독법이 못 됩니다...... 가망없는 환상을 더 이상 갖지 않는 것이 불혹입니다.(421쪽)

앞서 언급했듯 워낙 드문드문 읽어서 책에 대한 감상을 쓰기가 어렵고 조심스럽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그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선생의 고결하고 명징한 사유의 세계를 엿볼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결국 모든 학문은 인간과 그 인간 사이의 관계 조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의 출발은 언제나 나로부터입니다. 누구를 사랑하든 미워하든 그것 또한 삶의 모습일 테니까요. 사람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발판 삼아 또 다른 관계, 사회의 변화를 추구해야 하는 것도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일 것입니다.

순탄하고 무난한 삶이란 없는 것 같습니다. 주위의 꽤 많은 사람들이 교직에 있는 저를 부러워하지만 학교에서의 일상은 자잘한 전투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밖에서 바라보는 것과 안에서 겪는 것의 차이지요. 그 자잘한 전투는 사실 수많은 인간관계의 다양한 모습입니다. 화를 내고 찡그리고 웃고 이해하는 그 모습들... 결국 이해와 배려, 주체와 실천, 없음과 채움, 경쟁과 관계 등등 선생이 말하는 그 모습들이 제가 있는 현장에 고스란히 존재합니다. 저 뿐이겠습니까? 인간 사회의 모습이 대동소이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선생의 말과 글이 실생활과 연관되어 더 아프게, 더 의미깊게 다가왔습니다.

선생은 떠나시고 그분의 말과 글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글과 말은 남아있는 우리에게 여전한 가르침과 깨우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표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좋게 말하면 아껴두고 읽은 책, 나쁘게 말하면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읽은 책입니다. 그 독법이 어떠하든 간에 읽고 나면 모두에게 진한 여운을 남길 책입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우리가 생명을 저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은 기쁨만이 아닙니다. 슬픔도 사랑의 일부입니다. 마치 우리의 삶이 그런 것처럼.(4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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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같은 꿈을 꾸었어 (일반판)
스미노 요루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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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스미노 요루의 또다른 작품. 하지만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보다는 다소 아쉬운 작품. 무엇보다 중간을 넘어가면 이야기의 전개가 눈에 뻔히 보이는 것이 치명적이 약점이라 느껴집니다. 추리 소설이 아니라 하더라도 작품의 다음 내용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면 그 순간부터 작품의 매력이 반감되는 것은 당연지사. 이런 면에서 스미노 요루의 이번 작품은 아무래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이 점이 이 소설의 치명적 약점입니다.

 

소설은 무척이나 똑똑한 소녀 고야나기 나노카의 시점으로 전개됩니다. 그녀는 또래보다 무척 똑똑하기에 학교 안에는 이렇다 할 친구가 없습니다. 나노가 스스로 반 친구들을 바보로 여기고 있지요. 오직 한 사람만 제외하고. 하지만 그녀는 외롭지 않습니다. 꼬리가 반으로 잘린 고양이 ‘그녀’는 항상 나노카와 산책을 같이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나노가의 다른 친구들과의 만남에도 동행합니다. 그 친구들이란 '그녀'의 상처 치료를 도와준, 예쁘고 상냥한 아바즈레 씨. 그리고 항상 맛있는 과자와 주스를 주면 나노카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때론 해답을 주기도 하는 할머니. 마지막으로 가보지 않은 길 끝에서 만난 버려진 집 옥상에서 마주친 고등학생 미나미 언니입니다. 이런 친구들이 있기에 나노카는 바보들이 있는 학교보다 학교 밖이 더 즐겁고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학교에도 그녀를 이해해 주는 히토미 선생님과 같이 소설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오기와라도 있습니다. 그리고 수줍고 말없는 짝 키류도 있지요.

소설은 학교 수업에서 다루는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합니다. 이 수업 때문에 나노카는 키류와 멀어지고 또 키류는 학교에 등교하지 않게 되지만 또 이 수업 덕분에 나노카는 키류와의 갈등을 해소하고 행복에 대한 정의를 내리게도 됩니다. 그리고 나노카는 한 단계 더 성장하게 됩니다. 사실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고 누구나 행복한 삶을 원합니다. 그런데 그 행복이란 것은 객관적 기준이 없습니다. 실체도 없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사소한 상황 하나에도 행복을 느끼고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작품에서도 미나미, 아바즈레, 할머니, 키류, 나노카 모두 자신만의 행복을 정의하지요. 그리고 그 행복의 정의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행복이란 것이 결국 관점의 차이, 상황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인정할 만한 행복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행복은 '모두 달라. 하지만 모두 똑같아'(144쪽)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소설의 주인공 나노카는 아마도 초등학교 저학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인생이란~~~'의 비유에 무척이나 능숙합니다. 물론 그 비유가 철학적이고 관념적이지는 않지만 초등학교 학생이 구사하는 언어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더구나 작품 중간중간에 보이는 언어유희는 아무리 똑똑한 학생이라고 하더라도 과하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똑똑한 아이가 아바즈레(매춘부의 뜻이라고 합니다.)의 뜻을 모르고 또 모르는 그 단어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특출한 아이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어린 아이라고 하기엔 작품 전개상 일관성이 다소 부족합니다. 이 점이 이 소설의 치명적 약점 두 번째일 것입니다.

 

한 줄기 바람이 불면 나노카의 친구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나노카는 한 단계 성장합니다. 그리고 독자는 이내 작품의 구조를 파악합니다. 그래도 이 작품이 읽을 만한 이유는 바로 '행복 찾기'에 있습니다. 과연 나노카는 어떤 식으로 행복을 정의할까?가 작품을 읽게 하는 힘입니다. 여기에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 노래 '행복은 제 발로 걸어오지 않아~ 그러니 내 발로 찾아가야지~'는 나노카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행복을 대하는 자세를 일깨웁니다. 내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저절로 행복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소중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의 중요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노카에게 미나미가, 아바즈레 씨가, 할머니가 다가온 것입니다. 아니 나노카가 다가간 것이지요.

 

누구나 행복한 삶을 꿈꿉니다. 그리고 누구나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러니입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우리는 너무 큰 행복을 찾아 헤매는 것은 아닐까요? 소설에서 여러 번 나오지만 '행복이란~' 쿠기에 아이스크림을 먹든 커피를 먹든 바로 나, 그리고 내 주변의 소소한 일상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요. 사소한, 지극히 평범한 삶 속에서 행복이 있다는 것을... 다만 우리는 그 행복을 애써 외면하거나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흘려보내고 맙니다. 그러고는 행복하지 않다고 입버롯처럼 되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마주잡고 걷는 길... 요즘 제 생활의 가장 큰 행복입니다. 결국 이 소설은 누구나 꿈꾸지만 미처 알려하지 않는 작은 행복 찾기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라고 넌지시 충고하는 것만 같습니다.

 

제 취향의 소설은 아니었습니다. 소설을 읽으며 '내가 정말로 나이를 먹었구나'를 실감하게 한 소설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맑고 순수한 소설을 읽기에 저는 너무 세파에 물들었나 봅니다. '스미노 요루'를 좋아하는 작가라면, 그리고 지금의 현실이 답답하고 힘들다고 느낀다면 꽤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소설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생이란...
전부 다, 희망으로 빛나는 지금 너의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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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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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후밀 흐라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작가의 소설책을 구입한 것은 '국내소설가 50인이 뽑은 2016년 올해의 소설'이란 타이틀 때문.
전체 132쪽의 얇디 얇은 책. 하지만 책은 결코 두께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책입니다. 읽기가 수월한 편은 아닙니다. 중간중간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제목부터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합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역설적 표현이지요.
실존적인, 고독한 한 인간을 둘러싼 기계(압축기) 소리로 일단 해석이 가능합니다. 다음은 수많은 책을 만나며 온갖 지식으로 가득한 주인공 한탸의 곁에는 그와 지식과 감정을 공유할 사람이 없습니다. 머릿속에 떠도는 지식 속에서 홀로 외로운 주인공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볼 수도 있습니다.

소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됩니다. 주로 한탸의 현재 상황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중간중간 과거의 에피소드가 삽입됩니다. 한탸의 첫사랑 만차,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에 이름이 밝혀지는 어린 집시와의 동거 혹은 사랑이 들어가지요. 특히 만차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정말 이런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어이없으면서도 웃음을 유발하는, 작가의 유머 감각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아무튼 주인공 한탸는 삼십오 년간 폐지 압축공으로 일해온 인물입니다. 그는 어두침침하고 더러운 지하실에서 쥐와 바퀴와 공존하면  폐지를 압축합니다. 매일 처장을 통해 수많은 인류지식의 보고가 쏟아져 내려오고 그 가운데 한탸는 수많은 고전을 추려서 아름답게 장식하고 또 자신의 집에 보관합니다. 그 와중에 그는 자연스럽게 문학과 인문학을 비롯한 폭넓은 교양을 쌓게 되지요. 아무리 환경이 더럽더라도, 아무리 소장이 욕설을 하더라도 책과 함께라면, 거기에 맥주가 제공된다면 그는 충분히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부브니의 거대한 수압 압축기를 만나기 전까지는...

제목도 제목이지만 한탸의 일도 역시 모순의 상황입니다. 책을 아끼고 숭배하는 주인공이 책을 파괴하는 일을 하다니...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한탸는 명작을 지키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체제에 반하는 내용을 거침없이 없애버리고 그 어떤 일탈도 허용하지 않는 사회, 문학의 아름다움과 창의성보다는 효율을 중시하는 사회, 그 속에서 기계와 같이, 기계처럼 일만하는 인간이 있습니다. 반복적인 노동행위에 인간적인 면모가 있을 리는 없지만 작가는 책에 대한 한탸의 사랑을 통해 인간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어쩌면 개인의 자유와 선택이 금지된 전체주의(체코의 현실을 떠올리면 사회주의라고 해석해도 무방하겠습니다.) 사회에 대한 작가의 저항의식이 반영되어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탸는 압축기를 통해 책을 파괴하지만 그래도 그 곳에는 인간적인 온기가 남아 있습니다. 적어도 한탸의 마음에 들어온 책은 구해낼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부브니의 거대 압축기는 양에 있어서도, 인간적(?)인 면에 있어서도 비교불가입니다. 이제 인간이 기계를 조종하는 시대에서 인간이 기계에 종속되는 시대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물질지상주의, 과학만능주의에 대한 작가의 부정적 시선의 한탸의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집니다.(이 부분은 황순원 선생의 '독짓는 늙은이'와 매우 흡사합니다. 그리고 작품의 주제의식 역시 상당부분 유사합니다.) 작가가 보는 인간 사회는 인간과 기계의 끊임없는 대립 혹은 전쟁일 지도 모릅니다. 마치 지하에서 쥐들이 두 패로 갈려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듯...

Progressus ad futurum(미래로의 전진)
Regressus ad originem(근원으로의 후퇴)
작품에서는 미래로의 전진은 예수를, 근원으로의 후퇴는 노자를 비유한 말입니다.
Progressus ad originem(근원으로의 전진)
Regressus ad futurum(미래로의 후퇴)
그리고 한탸는 위 문장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미래로의 전진이든 근원으로의 전진이든 그 통로는 책이 될 것입니다. 수많은 책을 통해서 교양을 쌓게 된 한탸는 책이 과거와 미래를 가로지는 등불이자 통로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결국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기계화로 인해, 효율과 능률로 인해 사라지는 책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사라져가는 인간애에 대한 연민, 사라지는 모든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낸 책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책의 존재가치가 갈수록 희미해지는 시대입니다. 자극적이고 상업적인 정보는 넘쳐나지만 미래를 보는 혜안, 과거를 보는 통찰은 갈수록 자리가 위태해집니다. 책을 책답게 보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시대에서 보후밀 후라발의 작품이 더욱 의미있게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본문에 많은 작가와 위인이 등장하지만 특히 예수와 노자와 대비돼서 등장합니다.(특히 59쪽에서) 예수가 현실세계에 발딛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피 흘렸다면 노자는 근원적인 인간 존재 자체의 회복을 바랐지만 행동이나 희생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읽었는데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어렴풋이 둘의 차이는 알겠지만 작품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항대립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식견이 없기 때문입니다. 철학적, 종교적 사고가 바탕이 된다면 이 부분의 이해가 가능할 것 같기도 합니다. 혹 이 글을 읽는 분이 있다면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이 궁금하네요. 

어떤 이유로든 문명은 인간의 생활을 풍요롭게 합니다. 육체적 여유를 가져옵니다. 반면 정신적 가치는 갈수록 존재의미가 희미해집니다. 모든 것은 돈과 기계, 물질과 효율로 대체됩니다. 지극히 풍요로운 이 시대에 오히려 인간과 사고의 가치는 퇴보하고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집시 여자와 내가 날린 연이 날아가 버리듯, 책의 소중함이 점차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고 자본이 정신을 대체하는 이 시대에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 주는 울림은 크고 넓습니다. 사라져 가는 모든 것에 애정의 눈길을 보낼 때, 책도 인간도 그 자체의 존재 이유가 빛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작가의 사유를 느낄 수 있는 문장들입니다.
진정한 책이라면 어김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다는 무언가를 가리킬 것이다.(11쪽)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18~19쪽)

하늘은 전혀 인간적이지 않고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다빈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24쪽)

예수는 기도를 통해 현실을 기적으로 만들려고 한 반면, '도덕경'의 노자는 순진무구의 지혜에 도달하기 위해 자연법칙들을 유일한 방편으로 삼았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51쪽)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85~86쪽)

살아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적(敵)을 두기 마련이다.(128쪽)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85~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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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포도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5
존 스타인벡 지음, 김승욱 옮김 / 민음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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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 이어 2권을 마저 읽었습니다. 1권에 비해 만족도도 다소 줄고 조금은 아쉬운 결말이었지만 그래도 감동을 주는 결말이었습니다.


톰 조드 일가는 힘겹게 캘리포니아에 도착했습니다. 푸르른 숲과 오렌지, 포도, 그리고 목화가 있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집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오키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키들은 여전히 가지지 못하고 착취를 당하며 오직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급급합니다. 후버빌에서의 비참한 삶을 뒤로 하고 도착한 국영천막촌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지만 몸을 여전히 춥고 배가 고프기만 합니다. 로저샨의 남편 코니는 그들의 곁을 떠나고 내내 함께 했던 전직목사 케이시는 톰의 죄를 대신해서 경찰에 연행돼 갑니다. 그리고 화차가 길게 늘어선 목화농장에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는가 싶었더니 목화농장의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파업을 주도한 케이시의 죽음을 목격한 톰이 다시 사람을 죽이고 쫓기게 됩니다. 로저샨은 사산을 하고 이번에는 극심한 대홍수가 그들을 덮칩니다. 어디를 가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는 오직 가난과 절망, 착취와 억압만이 있을 뿐입니다.


1권의 시작은 극심한 가뭄이었습니다. 그리고 2권의 끝에는 대홍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자연재해 속에서 인간은 결국 굴복할 수 없습니다. 톰의 아버지와 큰아버지, 화차의 사람들이 홍수를 막기 위해 갖은 애를 쓰지만 결국 실패하고 그들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채 다시 길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절망의 끝에서도 생명은 지속되고 사랑은 이어집니다. 굶어죽어가는 노인을 위해 자신의 가슴을 여는 로저샨... 생명의 숭고함과 숙연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절망이 클 지라도, 좌절의 끝이 보이지 않을 지라도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한, 그리고 그것을 지키려 노력하는 한 희망이 있다는 것을 작가는 역설하는 듯합니다. 모든 것을 삼키고 모두가 주저않을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더욱이 새생명의 탄생까지도 좌절된 상황에서도 희망은 피어나고 비참한 인간은 그들의 삶을, 그들의 역사를 이어갈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소의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입니다. 톰 조드 일가를 비롯한 농민들의 절망과 가난의 끝에 다시 자연재해를 대입한 것이 그렇습니다. 그들의 가난에 자연재해가 큰 원인이 된 것은 명확한 사실이나 그것보다도 -특히 작품의 전개 상에서- 자본과 문명(기계)의 폭력이 더 큰 원인이었으니까요. 더구나 작가의 시선은 가난의 끝에서, 좌절의 끝에서 '나'가 아닌 '우리'의 분노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결말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분노가 어떤 식으로든 형상화되어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나한테 식량이 조금 있다'에 '나는 식량이 하나도 없다'가 덧붙여 지는 것. 이것이 '우리한테 식량이 조금 있다.'로 발전하면 이미 문제가 시작된 것이다. 문제의 방향은 이미 정해졌다. 이제 조금만 더 앞으로 나아가면 이땅, 이 트랙터는 우리 것이다..... 이것이 폭발의 시초다. 이것이 시작이다. 나에서 우리로 변하는 것이.'(1권 316~317쪽) 하지만 분노의 함성도 저항의 행동도 없습니다.(물론 짐 케이시를 비롯한 일부의 저항이 묘사되긴 하지만 흔히 말하는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고 맙니다.) 너무나 낭만적인, 지극히 비현실적인 결말의 방식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가득합니다.


물론 짐 케이시의 영향을 받은 톰 조드의 행동과 사고의 변화도 유의해야 합니다. 불의한 폭력 앞에서 또다시 살인을 하고 덤불 속에서 숨어 살던 그가 그의 어머니에게 던지는 말은 매우 상징적이고 변화의 가능성을 짙게 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2권 399쪽)

'저는 어둠 속에서 어디나 있는 존재가 되니까. 저는 사방에 있을 거예요. 어머니가 어디를 보시든. 배고픈 사람들이 먹을 걸 달라고 싸움을 벌이는 곳마다 제가 있을 거예요. 경찰이 사람을 때리는 곳마다 제가 있을 거예요...'(2권 402쪽)

하지만 여기서 끝입니다. 분명 톰은 각성을 했고 그 각성에 따른 행동을 할 것이 분명하지만 어디까지나 암시일 뿐, 작품 속에서는 그려지는 바가 없습니다. 노동자, 농민의 분노와 저항이 용솟음치던 우리의 80년대 리얼리즘 문학에서는 그들의 조직화된 행동이 제시됩니다. 끝내 현실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억압의 현실, 부조리한 폭력 앞에서 결코 굴복하지 않고 일어서던 수많은 민중의 힘이 표현됐습니다. 저는 '분노의 포도'에서도 이와 같은 민중의 저항으로 작품이 귀결될 거라 예단했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의 미국 사회에서 이런 사고의 진행까지는 무리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에서 내내 언급하던 그들의 분노가 어떤 식으로든 형상화되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가시지는 않습니다.


1권에 이어 2권에서도 어머니의 존재감은 대단합니다. 어쩌면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인 인물이 톰의 어머니가 아닐까 싶습니다. 생뚱맞지만... 대학생 때,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를 정말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분명 결을 달리 하지만 톰의 어머니를 보면서 고리끼의 어머니가 떠올랐습니다. 아들에 대한 사랑, 현실을 보는 냉정한 눈, 그리고 그 상황에 맞는 뛰어난 판단력과 행동이 유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작품 속에서 저의 기대에 가장 부합한 인물이 어머니였기 때문에 더욱 애정이 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땅과 집을 잃어버린 후 자신의 권력마저도 잃어버린 남자들을 대신해서 실질적 가장의 역할을 하던 어머니, 그러면서도 자식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의 모습이 작품 내내 자리합니다. 작품 속 어머니의 모습은 우리가 리얼리즘 문학에서 기대하는, 이상화된 어머니가 아닐까도 싶습니다. 그러나 절망의 현실 속에서 가장 기민하게 움직이고 판단하는 이는 어머니가 아닐까요? 존 스타인벡은 그것을 이미 알고 있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을 해 봅니다.

1권을 정리하면서도 언급했듯 소설의 줄거리는 사실 간단합니다. 그러나 그 줄거리에 살을 붙이는 농민들의 핍진한 삶, 구체적인 현실과 인물의 묘사, 그 바탕에 깔리는 냉엄한 비판의식, 그리고 인간과 생명에 대한 긍정의 시선 등이 이 소설의 갖는 미덕이자 장점이 될 것입니다. 다만 줄기차게 흘러왔던 민중의 분노와 저항의식의 끝내 타오르지 못하고 끝을 맺은 것에 대한 아쉬움 혹은 실망감도 큰 소설입니다. 어쩌면 작가는 절망 속에서도 피어나는 인간애, 생명에 대한 사랑이 현실에 대한 조직적 저항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2권을 마저 읽고 작품 해설을 보니 장과 장 사이에 끼어있는 작가의 시선의 연결성, 결말의 처리 방식에 대한 극단의 평가가 있다고 하더군요. 충분히 일리있는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장과 장 사이의 설명 혹은 논평은 긍정적으로 생각했으나 결말의 처리에 있어서는 다소 부정적이네요. 결국 관점의 차이인 것이지요.

 

'분노의 포도'는 자본주의의 폭력성과 비정성 아래에서 신음하던 수천만의 미국인의 삶을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제시한 데 그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가난과 폭력이 인간을 억압하더라도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 끈질긴 생명의식이 있다면 그 어디에도 희망은 존재한 다는것을 역설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짧은 기간에 전세계의 패권국으로 자리매김한 미국이라는 나라의 성장에는 집과 땅을 잃고 눈물과 한숨, 절망과 좌절을 감내한 농민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고발하는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절망과 슬픔이 아직도, 여전히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민중의 피와 눈물을 먹고 이미 손쓸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하게 성장해버린 자본주의 사회에서 존 스타인벡의 시선이 유효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소설은 아주 자그마한 희망을 암시하면서 끝을 맺지만 현실은 그 작은 희망마저 삼켜버리는 신자유주의의 물결만이 도도하게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결국 '나'가 아닌 '우리'가 되어야만 이 미친 흐름을 바꾸거나 잠시나마 멈출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가 되기에 현실은 각박하기만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진 노인을 위해 젖을 물리는 로저샨이 되지 않는 이상,  그 꿈은 여전히 요원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랜만에 묵직한 소설 하나를 읽었습니다. 주위에 일독을 권해도 전혀 망설임이 없을 소설입니다. 독서의 계절, 톰 조드 일가를 만나는 추체험을 권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2권 3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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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포도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4
존 스타인벡 지음, 김승욱 옮김 / 민음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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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넓고 읽어야 할 책은 참으로 많습니다. 제목만 알고 있었던 '분노의 포도'를 중년이 되어서야 만나봅니다. 1권 밖에 읽지 않았지만... 명작이네요. 제 취향에 딱 맞는 소설이었습니다.

 

소설 1장부터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코맥 맥카시가 존 스타인벡의 문체에 영향을 받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가뭄으로 인해 모든 것이 말라가고 대지에는 흙먼지, 모래바람이 가득한 오클라호마의 시골마을을 묘사하는 것으로 소설을 시작됩니다. 이 끔찍한 자연재해 속에서 농작물은 더이상 농작물이 아닙니다. 농부들은 모든 것을 잃은 것이지요. 흙먼지는 '평평한 담요가 땅을 덮고 있는'(13쪽) 것처럼 쌓이고 말라버린 옥수수만이 그들 곁에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들 곁에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아내와 아이들만이 있습니다. 망연자실하게 상황을 바라보던 옹부들이 강인함과 분노와 저항의 표정을 보이자 그녀들과 아이들은 안심합니다. '남자들이 건강하기만 하다면 그 어떤 불행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마음속 깊이 알고 있'(14쪽)기 때문이지요. 이때 살인죄로 감옥에 들어가 있던 톰 조드가 가석방되어 그의 집을 향해 갑니다. 차를 얻어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집으로 향하던 도중 산에서 목사 짐 케이시를 만나고 집 근처에서는 이웃 멀리를 만납니다. 그리고 멀리를 통해서 고향의 상황을 전해 듣습니다. 소작을 짓던 그들은 극심한 가뭄으로 집과 밭을 은행에 빼앗기고 캘리포니아로 떠나기 직전이라는 것을... 두 사람이 집에 도착하자 가족들은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려는 준비를 거의 끝마쳤습니다. 세간살이를 헐값에 넘기고 캘리포니아로 가기 위한 트럭을 사서 할머니, 할아버지, 큰아버지를 비롯한 대가족(12명)이 단돈 154달러를 가지고 2천마일이 넘는 머나먼 여정을 떠나게 됩니다.  말그대로 고난의 여정이지요.

 

이런 고난의 여정의 근본 원인은 극심한 가뭄과 트랙터로 상징되는 거대자본의 폭력 때문이었습니다. 가뭄으로 인해 빈사 상태에 빠진 농민들에게 은행의 대출금은 마지막 카운터 펀치를 남기고 대출금을 갚지 못한 그들의 밭을 트랙터가 점령합니다. 그들의 피와 땀이 배인 땅의 주인은 더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기계(트랙터)와 자본(은행)이 그들의 위치를 대신한 것이죠. 이렇게 서늘하게 자본주의의 비정성과 추악함을 잘 드러내는 소설도 드물 거라 생각합니다. 자본은 더욱 거대해지고 지주는 적어집니다. 땅과 집을 잃은 소작인만이 늘어납니다. 이제 그들은 어딘가로 떠나야 합니다. 그곳은 최소한 생계에 대한 걱정이 없어야 합니다. 다행입니다. 따뜻한 기후에 땅은 기름지고 1년 내내 노동이 가능한, 노동자를 구하는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 정든 땅을 떠납니다. 그 먼 곳 캘리포니아로... 하지만 그들은 캘리포니아로 가는 내내 '오키'라고 멸시받고(우리나라의 지역감정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단어입니다.) 캘리포니아에 도착해서도 그 멸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결국 자본과 지주에게 쫓겨난 그들의 안식처는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 '1930년대 후반 오클라호마의 톰 조드 가족이 갖은 고생 끝에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이 한 문장으로 1권을 정리해도 될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죽음, 톰의 형 노아의 이탈, 윌슨 가족과의 만남과 이별 등의 사건이 들어갑니다. 이렇게만 따지면 간단한 줄거리의 소설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이 소위 말하는 고전 혹은 명작의 반열에 들지 못하겠지요.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톰 조드 일가의 생생하고 구체적인 수난사와 함께 교차적으로 제시되는 당대 현실의 압축적 장면입니다. 톰 조드 일가의 수난사는 사실성을 획득하고 교차적으로 제시되는 당대의 현실은 압축성을 획득합니다. 그래서 독자는 인물들의 삶에 마음 아파하고 그들의 말과 행동에 공감을 하기도 하면서 인물이 처하게 된 상황의 원인과 결과를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장에서는 분노의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이런 교차적인 서술 방식은 작품의 흐름을 방해할 수도 있지만 이 소설에서는 인물들의 비극성을 더욱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인물 중심으로 소설을 파악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톰 조드. 자신을 칼로 찌르려는 친구를 삽으로 쳐서 살인죄로 복역한, 지극히 평범한 생활을 하던 소작인의 아들. 그는 가석방으로 출소한 후 가족들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떠납니다. 감옥에서의 삶이 그를 크게 변화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여전히 그는 자신을 위협하는 대상에 대한 분노를 간직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지만 장자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가장의 역할을 하면서 가족들과 머나먼 여정을 함께 하죠. 무엇보다 톰 조드는 상황을 냉정하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삶에 대한 긍정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변화할 것입니다.

 

1권에서 톰 조드 못지 않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인물이 전직 목사인 짐 케이시입니다. 마치 모세와 같은, 예수와 같은 기시감이 느껴집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교회를 떠나 수련의 기간을 가진 인물. 마치 인류를 구원하기 전 사막으로 떠난 예수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뒷표지의 줄거리를 참고하면 노동자들의 파업을 이끌다 죽음을 당하게 되는데 예수의 희생과도 자연스레 연관이 됩니다. 다만 그는 인간의 삶에 실질적 도움을 주지 못하는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가지고 스스로 목사이기를 포기한다는 점에서 예수와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입니다. 종교인이 아니라 가진 것 없는 소작인과 동일한 위치에서 그들의 삶과 슬픔, 분노를 함께 하는 인물. 그리고 그들과 함께 저항하고 그들의 맨 앞에서 삶을 마감하는 그의 모습은 어떤 삶이 가장 인간다운 삶인가를 웅변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톰의 어머니. 온화하면서 전통적인 어머니의 역할에만 충실한 인물로 보이던 어머니가 캘리포니아로 떠나는 날부터 현실적인 인물로 변화합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란 말을 형상화하는 인물입니다. 누구보다도 가족을 사랑하고 누구보다도 가족의 앞날을 걱정합니다. 그러면서도 시부모의 죽음 앞에서는 의연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 톰의 안위를 걱정하며 그의 말과 행동을 제지하기도 합니다. 특히 가족들이 무사히 사막을 건너가기 위해 농산물검사소에서 시어머니의 죽음을 숨기고 그 곁을 지키는 모습은 절로 감동을 자아냅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힘이고 사랑의 힘일 것입니다.

 

톰 조드 일가의 여정과 아울러 압축적으로 제시되는 당대의 현실 모습은 카메라적 시선이 함께합니다. 어떤 감정이입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인물과 현실을 제시합니다. 상당히 메마르고 건조한 문체입니다. 그들이 떠나야만 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그들이 점차 하나로 모일 것임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작가의 신념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이라고 볼 수 도 있습니다. 척박한 환경, 그보다 더 척박하고 매정한 자본과 기계. 그 속에서 억눌리고 쫓겨나야만 하는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나 혼자가 아니 집단의 '우리'입니다. 여기서 진정한 희망이 시작됩니다. 여기서 민중의 역사가 생성됩니다.

 

1권의 핵심은 자본과 기계 앞에서 힘없이 물러나는, 대대로 내려오는 터전을 잃어버린 소작농의 비참한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뿔뿔이 흩어져 캘리포니아로 향합니다. 아직 그들은 '우리'가 아닙니다. 낱낱의 개인은 결코 자본과 기계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대지주의 총 앞에 나설 용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장 오늘의 끼니를 걱정하며 66번 고속도로에 오릅니다. 캘리포니아가 결코 살기좋은 곳이 아니며, 그들은 '오키'라고 멸시를 당한다는 말을 들었어도 다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버리고, 팔고 떠나온 길이니까요. 아무리 고달파도 오클라호마의 그 가난과 치욕과 같지는 않을 것이라는 한 가닥 희망을 안고 갑니다. '언덕 위의 하얀 집'은 아니더라도 더이상 끼니를 걱정하지 않는 날을 상상하면서...

 

이것이 폭발의 시초다. 이것이 시작이다. ‘나‘에서 ‘우리‘로 변하는 것이.(3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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