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퍼크래시 - 세계경제를 약탈하는 법
대릴 커닝엄 지음, 권예리 옮김 / 이숲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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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이웃님의 블로그에서 만난 책. 읽어 봐야지 하고 찜해 두었던 책을 읽었습니다. 한 마디로 대단하네요. 전혀 이름도 몰랐던 아인 랜드란 인물을 만나고 2008년의 세계경제 위기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발생했는지를 알려주며 보수주의의 자유주의의 심리적 특징, 현 경제상황에 대한 대응 태도 등을 전달하는 책입니다. 그림체는 상당히 투박하지만 그 안에 실린 내용은 (매우 쉽고 매끄럽게 쓰인) 경제학 교과서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말 멋진 책입니다.

 

책은 1부 아인 랜드, 2부 크래시, 3부 이기주의 시대로 구성되었습니다. 아인 랜드? '보수주의 사상을 이해하는 관문이자, 보수주의 정신이 현대 사회에서 자유무역, 시장 개방, 민영화, 규제 철폐, 민간 부문의 역할 확장을 장려함으로써 어떤 식으로 지난 30년간 신자유주의를 승리로 이끌었는가를 이해하는 관문'(8쪽)이었다고 저자는 고백합니다. 결국 아인 랜드란 여인은 미국 보수 우파의 사상적 기틀을 마련하고 현재까지도 그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인물입니다.  책을 읽다 보니 그녀가 쓴 '파운틴헤드', '아틀라스'가 궁금해 집니다. 대체 어떤 내용이 1,300만부라는 어마어마한 판매고로 이어져 있는지 말이죠. 하지만 읽고 싶진 않습니다.  아인 랜드는 '신을 믿거나, 이타적 목표를 세우거나, 자신에게 명령하는 독재자에게 의존해 살아가면서 자기 정체성과 무관한 삶의 의미, 혹은 무의미한 삶을 좇는'(29쪽) 이들을 가리켜'중고인간'이라 칭합니다. 나아가 그녀는 소수 엘리트들로부터 세금을 받아 사회적 약자를 돕는 정부의 행위를 도둑질이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그녀에게는 '아무런 제약 없는 자유시장계제 자본주의는 무능력한 빈곤층이 자신의 게으름으로 자초한 결과를 책임지는 도덕체계(76쪽)였습니다. 그러니 가난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상일 뿐입니다. '극단적인 엘리트주의자!' 이것이 제가 느끼는, 그리고 작가가 느낀 아인 랜드입니다.

 

2장은 상당히 어렵게 읽었습니다. 투자은행과 시중은행의 차이, 신용파산스왑, 부채담보부증권, 바보 이론, 파생상품, 옵션 등의 다양한 경제 용어가 나옵니다. 책에 설명이 되지만 워낙 경제에 문외한이라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아무튼 어떤 경로로 2008년의 세계경제위기가 발생했는지를 상당히 자세히 서술합니다. 아마 만화가 아니었다면 바로 책을 내려놓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런 것이 만화의 장점이지요. 세계 금융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월스트리트. 이들이 얼마나 추악하게, 얼마나 기상천외하게 그들의 부를 축적했는지를 알게 되니 기가 찹니다. 수많은 서민의 경제적 파산 과정에서도 이들은 단물을 온전히 빼 먹었다니... 더우기 우리에게 이름도 익숙한 골드만삭스가 보험회사인 아메리칸인터내셔널그룹(AIG) 파산과정에서 수익을 얻은 대목(사실 그 과정이 잘 이해가 되진 않습니다.)이나 그리스의 EU 가입과정에서의 사기(?) 과정 등은 경악스러울 따름입니다. 또한 S&P, 피치, 무디스 등의 신용기관들이  이 과정에 개입해서 또 막대한 이익을 얻습니다. 자신들의 이익 외에는 어떤 가치도 없었던 월스트리트의 사람들. 공공선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존재하는 않는 곳이 월 스트리트이고 미국이라는 나라였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장이 3부입니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의 성향을 먼저 제시합니다. 뇌에서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 심리적 특성, 여가생활, 인간관계, 직업 등의 생활방식도 그들은 다르다고 합니다.(163쪽) 그렇기에 이 둘 사이에는 끊임없는 긴장과 갈등이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시카고 대학에서 진행한 에이즈에 걸린 네 집단(세 집단은 에이즈 감염 경로가 알려지기 전에 걸린 이들. 네 번째는 이를 안 집단)에 대한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의 반응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진보주의자들도 불안과 공포를 느끼면 선택에 있어 보수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결론. 유언비어와 공포를 통해 사회를 지배하는 보수 세력의 수법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또 우익 민간차원의 정치 운동 단체인 '티 파티', 찰스 코크가 세운 '카토 연구소' 등이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정책들. 노동자가 아닌 최고 부유층을 위해 정책들이 먹혀 들어가는 현실도 놀라울 따름입니다. 정부 지출 감소와 세금 감면을 요구하는 티 파티 운동가들은 그들 자신도 모르게 이기적인 거대기업의 이익에 기여하고 있다(229쪽)는 사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결국 그들의 요구는 아인 랜드가 꿈꿨던 사회의 디딤돌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부의 양극화, 사회적 격차의 증가 등 경제적 부조리를 이주노동자, 장애인 등의 사회 약자층에 원인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정치 주체, 정책의 주체에게 책임을 물어야 진정한 개혁을 이룰 수 있다(231쪽)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래서 현재의 상황을 바꿀 수 없다고 절망하고 좌절하지 말고 변화를 거부하는 기득권에 저항하는 시민운동이 필요하다(232쪽)고 저자는 말합니다. 아인랜드의 이기주의가 틀렸다고, 이타주의는 도덕적 약점이 아니라고, 이기주의를 거부할 때가 되었다고.

 

책 내용을 어느 정도나 이해했을까요? 솔직히 자신이 없네요. 다만 아인 랜드라는 여인이 미국 신자유주의의 정신적 지주라는 것. 2008년의 세계경제 위기에서 거대금융그룹과 신용평가기관이 자신의 책무를 방기하고 막대한 이득을 거뒀다는 것. 그 과정에서 아인 랜드의 객관주의가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 진보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성향이 결정된다는 것, 현재의 상황에 절망하지 말고 이기주의를 거부하는 이타주의가 필요하다는 것 정도나 될까요? 책이 전해주는 내용을 온전히 소화하지 못했다는 자괴감까지는 아니고... 열등감 정도를 느끼게 했던 책입니다. 그래도 거친 만화 속에서 상당히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해 준 책이기에 만족감은 상당히 높습니다. 다시 읽어봐도 좋을 책인 것 같습니다. 실천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밑줄 그은 문장들로 글을 맺습니다.

 

신입사원한테는 가위, 수정액, 스카치테이프를 선물했어요. 금융전문가라면 절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죠.(112쪽)

 

시장은 막강하지만, 도덕성이 없다. 시장의 운영방식은 인간이 결정한다.(153쪽)

 

일반적으로 인간의 성격을 특징짓는 요소들을 이야기할 때 심리학에서는 다섯 가지 특성을 들곤 한다. 경험에 대한 개방성, 성실성, 외향성, 친화성, 신경성이 그것이다.... 보수와 진보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특성은 성실성과 경험에 대한 개방성 두 가지다. (165쪽)

 

보수주의자의 편견은 노력 없이 이득을 얻는 것이 불공정하다는 데서 비롯한다. 좌파에게 공정성은 평등을 뜻하지만 우파에게 공정성은 노력과 이득 사이의 정비례 관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결과가 불평등하더라도 누구나 기여도에 비례하는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201쪽)

 

시장은 막강하지만, 도덕성이 없다. 시장의 운영방식은 인간이 결정한다.(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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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과 천둥
온다 리쿠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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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하지만 손이 가지 않는 작가가 있습니다. 일본 여류작가(특히 장르소설에서 ) 중에는 미야베 미유키와 온다 리쿠가 그렇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은 단 한 작품도 읽은 것이 없습니다. 영화로 나왔던 '화차'만이 간적경험이었을 뿐... 온다 리쿠와의 만남은 오래 전 '밤의 피크닉' 밖에 없습니다. 고등학생들이 밤새 걷는 내용이죠 ㅎㅎ 잔잔하면서도 약간의 스릴이 있었던 작품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온다 리쿠의 작품이 일본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는, 작가에게 사상 첫 '서점대상 2회 수상'의 영예를 안겼고, 나오키상까지 동시 수상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기에? 하는 호기심이 들었습니다.

 

아껴가며 읽었습니다. 소설의 첫 부분부터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흡입력이 상당합니다.

총 12년의 구상, 11년의 취재, 7년의 집필 끝에 탄생한 작품. 일본에서는 인물들의 콩쿠르 연주곡을 모은 클래식 음반이 발매되었다고 합니다.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됐습니다. 작품을 읽어나가며 이런 묘사와 감상을 주는 음악을 직접 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들곤 했으니까요. 더구나 인물들이 연주하는 음악들 중의 일부는 직접 감상해 봤거나 제목만이라도 들어본 것들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모르는 작곡가, 음악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기 마련입니다.

 

작품의 배경은 3년에 한 번 개최되는 ‘요시가에 피아노 콩쿠르’(실제 하마마쓰시에서 3년마다 열리는 콩쿠르라고 합니다.) 이곳에 압도적인 4인이 등장합니다. 천재라고 불리며 주니어 콩쿠르를 제패했지만 어머니의 죽음 이후 공연장에서 돌연 모습을 감췄다 이제는 대학생이 돼서 무대에 나타난 에이덴 아야. 압도적인 실력과 뛰어난 외모를 갖춘, 이미 스타임에도 불구하고 요시가에 콩쿠르에 등장한 마사루 카를로스 레비 아나톨. 음악에 대한 열정과 꿈이 있었지만 가족을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평범한 악기점 직원으로 살아가던 다카시마 아카시. 그리고 거장 유지 폰 호프만의 제자라고 알려진, 양봉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지만 자유롭고 창의적인 연주를 선보이는 16세 소년 가자마 진. 이들이 소설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이 네 인물 중 하나를 응원하지 않을까 합니다. 워낙 개성적인 인물이라 어느 한 사람에게만 눈길을 주기에도 애매하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꾸 마음이 가는 인물이 있기 마련입니다. 저는 에이덴 아야를 응원했습니다. 혜성과 같이 등장해서 역시 혜성과 같이 사라진 천재 소녀.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또 모든 것을 준비해주던 어머니의 죽음은 이 천재 소녀를 음악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하지만 마음 속에서까지 음악을 내몰 수는 없습니다. 피아노 연주가 아닌 밴드도 하면서 평범한 생활을 하던 그녀가 어머니의 대학동기였던 하마자키 학장의 요청으로 콩쿠르에 참가합니다. 그리고 심리적 방황과 두려움을 이겨내며 그녀는 콩쿠르를 통해 인간으로서도, 음악가로서도 한 단계 성장합니다. 스스로 떠났던 음악계에 다시 돌아온 그녀... 그녀는 우승을 거머쥘 수 있을까요?

 

거의 700쪽에 육박하는 분량입니다. 하지만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물론 뒷부분에 가서는 다소 흥미도나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다르게 서술을 해도 음악에 대한 해석 혹은 설명이 반복되다 보니 약간의 지루함도 느껴집니다. 하지만 초반부의 신선함과 세밀함이 워낙 좋았기에 후반부도 무리없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 실제 콩쿠르가 이렇게 3차 예선과 본선으로 진행되기 때문이겠지요. 특히 네 인물의 연주에 대한 서술이 계속 반복되는데(어쩔 수 없는 측면이긴 한데...) 이 부분의 양을 줄이거나 예선마다 초점을 맞추는 인물을 설정하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면 아무래도 작품의 밀도가 떨어지겠죠? 그런 면에서 한 인물을 중도에 탈락시킨 것은 꽤 절묘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욕심같아서는 한 인물을 더 떨어뜨렸으면 했는데요(공교롭게 그 인물이 우승을 합니다 ㅎㅎ) 이유는 작품에 대한 집중도가 다소 향상될 수 있을 거란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제 개인적인 느낌일 뿐 처음부터 끝까지 감탄을 하며 읽는 분들도 많지 않을까 합니다.

 

백 명에 가까운 참가자 중에 1차 예선 통과자는 24명, 그 후 12명, 6명으로 통과자는 줄어듭니다. 피를 말리는, 잔인한 토너먼트죠. 하지만 이 과정에서 참가자들의 경쟁은 거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존경합니다. 공감합니다. 자신의 배움의 양분으로 삼습니다. 그렇기에 이 책은 따뜻합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상호 영향을 받고 상대의 장점에서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깨닫고 또다른 도약의 디딤대를 마련합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갈등이 없습니다. 이미 각 단계별 경쟁이 있기 때문에 굳이 인물 간의 갈등이 필요없었는 지도 모릅니다. 그냥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며(읽으며) 그 인물에, 작가의 능력에 감탄하면 될 뿐입니다. 이렇게 인물 간의 갈등이 없는 소설도 참 오랜 만에 만나지 않나 싶습니다.

 

음악에 대해서는 거의 백지입니다. 그래서 인물들의 연주곡명은 알아도(그것도 새발의 피지만) 들어본 경험은 없습니다. 그래서 작품에 묘사되는 혹은 서술되는 연주에 대한 느낌을 떠올릴 만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습니다. 다만 작가가 표현한 음악에 대한 느낌을 읽어가면서 간접적인 추체험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작품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절묘하게 음악을 표현한 글을 보면서 직접 음악을 듣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으니까요. 개인적으로 수많은 악기 중 피아노를 참 좋아하는데 기회가 된다면 아니 우리나라에서 음반이 발매된다면 꼭 사서 들어보고 싶습니다. 과연 그들이 연주했던 음악들은 제가 어떤 느낌을 줄까요? 궁금하기만 합니다.

 

재미있습니다. 저처럼 음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읽어도 충분히 만족할 만한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음악을 이렇게 절묘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경탄하면서 읽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인물이 마지막 우승을 차지할까 짐작하면서 읽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네 인물 중 하나를 자연스럽게 응원하면서 읽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어느 인물이 우승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게, 정말 매력적이면서 개성적인 인물들입니다. 이런 조합을 생각해 낸 작가의 능력도 놀랍지요. 어쩌면 대중에게 거의 외면되는 클래식 음악에 대한 관심을 환기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일본의 예만 보더라도 그렇지요. 과연 한국에서도 음반이 발매될 지, 또 성공을 거둘 지는 알 수 없지만...

 

매력적인 문장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더 다가온 문장들을 소개합니다.

 

세상은 밝고, 한없이 넓고, 항상 흔들리며 쉽게 변화하는, 성스럽고도 두려운 장소였다.(17쪽)

 

물결이기도 하고 진동이기도 한 무언가가 온 세상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 울림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니 나라는 존재 자체를 포근히 감싸주는 것만 같아 마음이 차분해졌다...... 환한 들판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꿀벌은 세상을 축복하는 음표라고. 그리고 세상은, 언제나 지고한 음악으로 가득 차 있노라고.(18쪽)

 

'세상에서 백 명밖에 연주하지 않는 악기로 1등을 해봤자 시시하잖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들 훌륭한 음악을 만들고 싶다고, 더 훌륭해지고 싶다고 몸부림치며 자기 음악을 추구하기 때문에 정상에서 한 줌밖에 안 되는 빛을 받는 음악가의 위대함이 더욱 두드러지는 거야. 그 뒤에 좌절한 음악가들이 수없이 많은 걸 알기 때문에 음악은 더욱 아름다워.'(136쪽)

 

도시의 목소리는 청아하다. 아련한 메아리처럼, 수도승이 쥐고 있는 석장처럼, 하염없이, 하염없이, 하늘 저편에서 울려 퍼진다.(297쪽)

 

나는 두렵지 않단다, 진...... 한 발 먼저 음표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갈 거야...... 진은 내가 두고 가는 선물이란다.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기프트지.(309쪽)

 

하루하루 삶속에서 물을 준다. 그것은 삶의 일부이자 생활을 구성하는 행위다. 빗소리와 바람의 온도를 느끼고, 그에 따라 작업도 바뀐다. 어느 날 예상치 못한 개화와 수확이 찾아온다. 어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오로지 인지를 초월한 기프트다. 음악은 행위다. 습관이다. 귀를 기울이면 언제나 음악이 가득하다.(374쪽)

 

아무리 연습해도 제자리걸음,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가 있다. 여기가 한계인가 절망하는 시간이 끝없이 계속된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유는 몰라도 느닷없이, 그때까지 연주하지 못했던 부분을 연주할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것은 표현할 길 없는 감격과 충격이다. 정말로 어두운 숲을 빠져나가 탁 트인 벌판에 서는 기분이다.(455쪽)

 

일렁거리는 시간의 흐름 밑에 가라앉은 고독, 평소에는 못 본 척하는 고독, 느낄 새도 없는 일상생활 이면에 찰싹 들러붙어 있는 고독, 아무리 다들 부러워하는 행복의 정점에 있어도, 충실한 인생을 보내고 있어도, 역시 모든 행복은 언제나 인간이라는 존재의 고독을 등에 업고 있다. (561쪽)

 

인간이라는 존재에 아주 조금, 지상의 중력이라는 멍에에서 벗어나기 위한 무언가를 덧붙인다면. '음악을 한다'는 것이 그에 가장 합당한 답 아닐까? 눈에 보이지도 않고, 나타나는 순간에 곧 사라지는 음악. 그 행위에 정열을 쏟고, 인생을 바치고, 마음을 강하게 빼앗기기 때문에 다른 생물과 구별되는, 인간에게 덧붙은 작은 마법 같은 옵션 기능이 아닐까?(654쪽)

 

물결이기도 하고 진동이기도 한 무언가가 온 세상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 울림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니 나라는 존재 자체를 포근히 감싸주는 것만 같아 마음이 차분해졌다...... 환한 들판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꿀벌은 세상을 축복하는 음표라고. 그리고 세상은, 언제나 지고한 음악으로 가득 차 있노라고.(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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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 죽이기 2 - 전이하는 메타포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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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 죽이기'를 다 읽었습니다. 흠... 너무 기대가 컸던 것일까요? 아니면 뭔가 획기적인 반전을 기대한 것일까요? '기사단장 죽이기'는 '1Q84'와 마찬가지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지만 그 세밀함이나 설득력의 측면에서는 많이 떨어지네요. 무엇보다도 사건의 연결 고리가 무척이나 약해서 읽는 내내 이상한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중에서 평균 아래에 위치한다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자, 그럼 소설의 내용부터 정리해 볼까요? 여기서부터는 소설의 내용에 바탕을 둔 주관적 해석이 가득합니다. 따라서 책을 읽지 않은 분이라면...(물론 이 블로그를 찾는 이도 거의 없지만 ㅎㅎ)

 

키 173cm, 나이 36세, 부모와는 거의 절연하고 15살 나이에 여동생을 잃은, 직업은 초상화가인 '나'. 친구인 아마다 마사히코의 도움으로 그의 아버지이자 저명한 일본화가 아마다 도모히코가 살던 산속 아틀리에 천장에서 아마다 도모히코의 미발표작 ‘기사단장 죽이기’를 발견. 그 그림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의 첫 장면을 표현한 것. 백발의 신사 멘시키 와타루의 초상화 의뢰와 완성. 그리고 한밤중에 들리는 정체 모를 방울소리. 돌무덤 밑의 원형의 석실, 그 안의 방울. 이후 이데아라고 명명되는 기사단장이 출현. 멘시키의 또다른 초상화 의뢰(자신의 딸로 추정되는 아키가와 마리에의 초상화). 나와 멘시키, 아키가와 쇼코와 마리에의 만남. 그 중간중간 아마다 도모히코의 과거와 가족사(특히 가족사에는 난징대학살의 참상의 조금이나마 소개되고 있습니다.) 초상화의 순조로운 진행과 아울러 나와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지는 마리에(그리고 멘시키와 아키가와 쇼코도 가까워지죠.) 그리고 (서류상으로는) 이혼한 아내 유즈의 임신소식. 그리고 갑작스러운 마리에의 실종과 '나'의 아마다 도모히코가 있는 요양원 방문. 마리에를 찾기 위한 신비한 체험-제목인 기사단장을 죽이고 '긴얼굴'과 '돈나 안나'의 안내를 받아서 메타포 세계로의 여행. 공포와 두려움, 험난한 환경을 이기고 가까스로 빠져나왔더니 그곳은 바로 잡목림 속의 원형 석실. 멘시키가 나를 구조하고 그보다 조금 이르게 마리에의 귀가. 나와 마리에의 만남과 대화, 나와 유즈의 만남과 대화, 그 이후의 재결합. 이에 앞선 '기사단장 죽이기'의 밀봉 보관. 후일담.

 

거듭 언급하지만 이 이후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편협한 소설읽기의 결과입니다. 이 말을 꼭 염두에 두고 다음을 보시길...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드는 생각은 2권보다 차라리 1권이 낫다는 생각. 1권에서의 생각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는 인식. 정말 좋아하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전반적으로 불만족스러운 독후의 느낌. '1Q84'도 뒤로 갈수록 뭔가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지만 '기사단장 죽이기'는 1권부터 강한 기시감으로 인해 작품의 흥미도가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 꾸역꾸역 완독. '1Q84'가 환상적 세계 속에서의 암투와 인물 간의 사랑을 상당히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면 이번 '기사단장 죽이기'는 환상적 세계와 현실의 연결고리는 너무나 느슨하고 그 둘을 연결해 준 '기사단장 죽이기'란 그림은 그저 소도구일 뿐 그 자체의 의미를 전혀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인물 사이의 연결도 당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고 이데아와 메타포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았을 뿐 이 둘의 개념이나 보조관념 따위가 거의 무의미하다는 것.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데아와 메타포는 그저 언어표현일 뿐 그 어떤 언어적, 문학적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아무리 환상적인 세계를 다룬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내용 전개에 개연성이 필요한데 이번 소설은 그 부분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혼을 하자 했던 아내는 정식 이혼서류를 보내며 이혼에 적극성을 보이다 갑자기 몇 개월 후 남편을 만나 재결합을 합니다. 이혼 제의에도 뚜렷한 이유가 없고 재결합에도 그 어떤 이유가 없습니다. 수상한 인물로 그려지는 멘시키는 여전히 많은 비밀이 있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지극히 순애보적인 사랑을 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안개 속에 가둬놓고 끝내 그 안개 속에서만 인물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뜬금없이 사랑에 빠지는 모습도 어처구니 없습니다. 요양원에서 만난 아마다 도모히코의 모습도 상당히 억지스럽습니다. 그리고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 역시 어떤 이유도 없이 '나'에게 두려움(?)을 주고 끝내 그림으로 형상화할 수 없습니다. 단지 '나'의 느낌만이 나타날 뿐(현실에서 두 번, 그리고 두 번은 그로 추정되는 장면이 나올 뿐입니다.) 그는 작품 안에서 유령과 같은 인물입니다. 아키가와 마리에도 신비에 쌓인 인물입니다. 그저 멘시키의 집에 갇혀 있던 그녀를 위해서 나는 암흑과도 같은 메타포 세계에서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를 경험합니다. 왜 마리에를 찾기 위해 '나'의 시련과 희생이 필요한 것인지 도무지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사단장의 죽음은 어느 정도 이해를 하나 뜬금없이 나타나는 돈나 안나는 무엇 때문이지... 무엇보다도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 의미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해서 나치즘과 일본 군국주의를 향한 아마다 도모히코의 저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일본의 난징대학살과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안슐루스, 크리스탈나흐트-폴란드계 유대인 학생인 헤르헬 그린슈판이 독일인 외교관 에른스트 폼 라트를 파리에서 저격한 것을 구실로 1938년 11월 9~10일 나치 독일이 유대인과 유대인 재산에 폭력을 휘두른 사건이 발생했던 밤-가 몇 번에 걸쳐 언급되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 부분은 작가인 하루키의 역사인식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작품 전체에서 새발의 피처럼 언급되는 난징대학살 때문에 일본 우익의 비판이 상당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네요.) 그러나 이 저항의식과 작품 내용과의 연관성은... 글쎄요. 이어붙이기가 애매합니다. 또한 그림을 통해 이데아가 열리고 메타포의 세계가 펼쳐지는데 그리고 그럼으로 인해서 '나'에게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연속되는데 이것이 작품 전개의 필연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그냥 우연적 사건의 연속일 뿐... 무엇보다 인간의 의식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이데아의 세계가 현실 속에서 현현할 수는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것이 가지는 의미와 역할이 불분명하면서 작품 전체의 이해도를 저하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이데아의 소멸이 실제화되면서 관념과 현실의 구분이 애매해지고 그 이데아의 소멸로 인해 메타포의 세계가 열리는 것도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또한 메타포의 세계, 이중메타포는 명명 자체는 상당히 거창하지만 작품 속에서의 의미는 인물의 불안과 두려움의 형상화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메타포가 전이가 되는 과정이 '나'의 시련 극복과 희생이 따르는 것인데 그 전제가 무엇보다 희박합니다. 어느모로 보나 단순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건(마리에의 실종)이 해결되는 것인데 왜 기사단장의 죽음과 '긴얼굴'이 필요했던 것일까요? 제 자신이 가지는 지식과 이해의 한계입니다.

 

1권보다 2권의 읽기가 더뎠습니다. 아무래도 '이게 뭐야?'하는 생각이 내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책을 읽다보면 여러 작품들이 떠오릅니다. 작가의 전작인 '1Q84', '상실의 시대'와 '해변의 카프카' 그리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위대한 개츠비' 등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책을 읽으며 기시감이 강하게 나타나서 작품의 몰입도를 방해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시감은 하루키 세계의 한계 혹은 반복으로도 다가왔습니다. 결국 제게는 하루키란 브랜드(이런 명명을 해도 될까 싶지만)가 가지는 기대감과 명성을 생각할 때 이 작품은 많은 부분에서 아쉬움 가득한 작품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이 작품을 보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아니 무라카미 하루키만의 장점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소설입니다. 인물의 표정과 모습에 대한 세밀한 묘사, 마치 그림을 보는 듯한 배경의 사실적 표현, 음악을 비롯한 상식의 광대함, 애련함을 자아내는 듯한 인물의 내면 심리,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가능케 하는 문체, 무엇보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필력이 잘 나타난 작품입니다. 그래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라면 무난하게 아니 매우 만족스럽게 읽을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다만 저에게는 작가에 대한 기대치에 다소 못미치는 작품일 뿐이죠. 어디까지나 하나의 작품에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기 마련이니까요.

 

익숙하다는 것은 편안함과 동시에 나태함을 안겨줍니다.(하루키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제 태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읽고 난 후의 미진함이 마음에 걸립니다. 좀더 적극적으로 좀더 공감하며 읽었다면 또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하루키 월드로의 또한번의 순례가 끝났습니다. 다음 순례에는 또다른 그의 세계가, 마음이 혹하는 새로운 세계가 제 앞에 펼쳐지기를 기대합니다.


2권에서 마음에 들어온 문장들로 글을 마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좋아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정도로'(12쪽)


우리는 무언가를 내어주는 동시에 무언가를 얻었다. 그것은 제한된 시간, 제한된 장소에서만 일어나는 교류였다. 이윽고 엷어져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기억은 남는다. 기억은 시간에 온기를 줄 수 있다. 그리고-잘되면 말이지만-예술은 그 기억을 형태로 바꾸어 그 자리에 머무르게 할 수 있다.(122쪽)


'...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실제 일어난 일의 많은 부분은 어디까지나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온 결과죠.'(139쪽)


늙는다는 것은 어쩌면 사람에게 죽음보다 더 뜻밖의 사건일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일이다. 자신이 이 세상에 생물학적으로(그리고 사회적으로) 더이상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고, 어느 날 누군가가 또박또박 알려주는 것. (190쪽)


'벽은 원래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어요. 외적이나 비바람으로부터 말이죠. 하지만 때로는 사람을 가두기 위해서도 사용됩니다. 높게 솟은 견고한 벽은 안에 갇힌 사람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시각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어떤 벽은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집니다.'(261쪽)


'당신한테는 원해도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을 원할 만큼의 힘이 있어요. 하지만 저는 제 인생에서, 원하면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밖에 원하지 못했습니다.'(298쪽)


커다란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바깥에 펼쳐진 태평양을 바라보았다. 수평선이 하늘에 바짝 다가가 있었다. 나는 그 똑바른 선을 끝에서 끝까지 눈으로 좇았다. 그토록 길고 아름다운 직선은 어떤 자를 써도 인간의 손으로는 그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선 아래에는 무수한 생명이 약동하고 있을 터였다. 이 세계는 무수한 생명과, 그리고 그것과 같은 수의 죽음으로 가득하다. (333~334쪽)


'... 훌륭한 메티포는 모든 현상에 감춰진 가능성의 물줄기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훌륭한 시인이 하나의 광경 속에 또다른 새로운 광경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당연한 말이지만, 최고의 메타포는 곧 최고의 시가 되죠...'(415쪽)


'당신 안에서 당신이 하는 올바른 생각을 붙들어 하나하나 먹어치우는 것, 그렇게 몸집을 불려 나가는 것. 그것이 이중메타포입니다. 그것은 옛날부터 쭉 당신 안의 깊은 어둠에 살고 있었어요.'(417쪽)


'우린 인생에는 잘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많고, 또 설명해서는 안되는 일도 많습니다. 특히 설명함으로써 그 안의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경우에는요.'(450쪽)


'... 형태를 지닌 것들에게 시간이란 위대한 존재지. 시간은 한없이 존재하진 않지만, 존재하는 동안은 상당한 효력을 발휘하거든. 그러니까 기대하고 있으라고.'(541쪽)

 

우리는 무언가를 내어주는 동시에 무언가를 얻었다. 그것은 제한된 시간, 제한된 장소에서만 일어나는 교류였다. 이윽고 엷어져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기억은 남는다. 기억은 시간에 온기를 줄 수 있다. 그리고-잘되면 말이지만-예술은 그 기억을 형태로 바꾸어 그 자리에 머무르게 할 수 있다.(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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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 죽이기 1 - 현현하는 이데아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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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하루키!

이 문장으로 시작하려 합니다. 이 문장은 감탄의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크지만 저는 '또다시'의 의미로 '역시!'를 썼습니다. 하루키만큼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많은 일본 작가는 없는 것 같습니다. 서구권 작가 중에서도 베르나르 베르베르 정도가 하루키에 필적할 만 할까요? 하루키의 신간이 나오면 선주문 몇 부가 심심찮게 기사에 등장하고 많은 이들이 예약 주문을 넣습니다. 하루키란 이름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발간 전부터 화제가 되곤 합니다. 저 역시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합니다. 제가 읽은 그의 책들이 '상실의 시대', '태엽감는 새', '해변의 카프카', '나미야잡화점의 기적',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여자없는 남자들', '1Q84' 가 있으니까요. 그만큼 저에게도 하루키는 믿고 보는 작가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기사단장 죽이기'는 기대가 컸던 만큼의 만족감을 주지는 못합니다. 하루키 소설에서 반복되는 서사의 틀이 그대로 유지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대개 책을 구입할 때는 서평을 훑어보는데 이번에는 서평을 읽지 않으려 했습니다. 일단 작가에 대한 신뢰가 있었고 또 평을 읽으면 아무래도 선입견을 가지기 마련이니까요.


하루키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문체입니다. 사람의 감성을 오래도록 관조한 끝에 나온 듯한 그의 문체가 저는 참 좋습니다. 그리고 모든 작품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하루키보다 삶의 애상과 젊은 날의 방황을 치밀한 감각으로 표현하는 작가는 (적어도 저에게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도 내러티브의 개연성을 잃지 않는 것도 하루키 소설의 장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에 음악(특히 클래식)에 관한 박학다식함도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들이 감탄하는 부분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적은 하루키 소설의 기본 특성이 '기사단장 죽이기'에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역시! 하루키!'란 문장으로 글을 시작한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이 가장 잘 하는 요소를 총체적으로 드러낸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이전 소설들의 변주 혹은 반복으로만 느껴집니다. 소설의 앞부분에 소위 말하는 밑밥이 충분히 깔립니다. 그리고 독자는 그 밑밥을 따라 하루키의 세계로 한 발을 내딛지요. 그 세계에는 어딘가 아웃사이더의 느낌이 나는 주인공이 있고 그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있고(하지만 그는 한 여자의 사랑을 얻지 못하거나 사랑에 배신을 당한 상태죠.) 뭔가 신비한 느낌의 사건이나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주인공은 기이한 체험을 합니다. 그 체험은 잃어버렸던 소중한 그 무엇, 주로 자아를 찾거나 상처의 회복과 관련됩니다. 그 과정을 다루면서 하루키는 인물의 복장이나 표정, 동작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방대한 음악적 지식을 풀어놓습니다. (이렇게 일반화하는 것이 상당히 위험하고 편협한 시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대개 이런 식의 전개가 아닌가 합니다. 그럼 '기사단장 죽이기'는 어떨까요?


키 173cm, 나이 36세, 부모와는 거의 절연하고 15살 나이에 여동생을 잃은, 직업은 초상화가인 '나'가 아내의 이혼 통보 후 일본의 북부 지방을 떠돌다 친구인 아마다 마사히코의 도움으로 그의 아버지이자 저명한 일본화가 아마다 도모히코가 살던 산속 아틀리에에서 지내게 됩니다. 그러면서 미술학원에서 어린이와 주부를 대상으로 강사일을 하지요. 그 와중에 수강생 2명과 육체적으로 가까워지고... 그러던 어느날 집 천장에서 아마다 도모히코의 미발표작 ‘기사단장 죽이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그림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의 첫 장면을 표현한 것이지요. '나'는 그 작품에 묘하게 끌리고 오래도록 지켜봅니다. 그러나 작품에 담겨진 함의는 파악하지 못하지요. 그런 와중에 에이전트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 나. 내가 사는 집의 맞은 편 골짜기에 사는 백발의 신사 멘시키 와타루(의도적으로 나에게 접근한 인물입니다. 그 의도가 단순한 초상화 의뢰인지 아니면 또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2권까지 읽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가 거액을 제시하며 초상화를 의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직접 모델을 서겠다고 합니다.(이전의 나는 한 번도 인물을 앞에 두고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습니다.) 이 기이한 제의를 나는 수락하고 신비로운 남자 멘시키와의 만남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또하나의 신비로운 사건이 발생하는데 한밤중에 들리는 정체 모를 방울소리. 멘시키의 도움으로 돌무덤을 파헤쳐보니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지어놓은 듯한 원형의 석실이 드러나고 그 안에서 방울만이 발견됩니다. 그리고 초상화가 완성되고(멘시키는 무척 만족합니다. 그리고 또다른 의뢰를 하게 되지요.) 이데아라고 명명되는 기사단장이 출현합니다. 1권의 제목이 '현현하는 이데아'입니다. 흔히 이데아는 사물이나 형상의 본질 혹은 근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본질이 현실에 나타납니다. 이데아와 현실은 순환적 관계일까요? 아니면 순차적 관계일까요? 현상과 본질의 합일은 가능할까요? 현상 속에 나타난 이데아는 어떤 기능을 하게 될까요? 꽤 많은 의문이 떠오르는 제목입니다. 이 의문도 2권을 다 읽으면 풀릴 수 있기를...


제가 일반화한 내용과 큰 틀에서는 벗어나지 않는 서사가 전개됩니다. 2권에서는 어떤 내용이 나와서 반전의 묘를 보여줄 지는 모르겠지만 1권만 읽은 지금 상태에서는 거의 하루키 월드의 무한변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압도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의 전개가 진부하거나 틀에 박힌 것은 아닙니다. 상당히 빠르게 읽히고 재미도 있습니다. 다만 하루키 소설에 다소나마 익숙한 사람이라면 '또?'란 의문이 충분히 들 수 있는 전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직 1권일 따름입니다. 2권에서의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하기에 섣부른 결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책에 대한 감상은 2권까지 마치고 더 자세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1권에서 눈에 들어왔던 문장들을 정리해 봅니다.


깊숙이 들여다보면 어떤 인간이든 저 안쪽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27쪽)


시간이 흐른 뒤 돌이켜보면 우리 인생은 참으로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믿을 수 없이 갑작스러운 우연과 예측 불가능한 굴곡진 전개가 넘쳐난다. 하지만 그것들이 실제로 진행되는 동안에는 대부분 아무리 주의깊게 둘러보아도 불가해한 요소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 눈에는 쉼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 지극히 당연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비치는 것이다. 그것은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치에 맞는지 아닌지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드러난다.(94~5쪽)


눈앞에 어떤 흐름이 생겼다면 일단 흘러가보면 된다. 상대에게 숨은 의도가 있다면 그 의도에 걸려들면 될 일이다.(128쪽)


'위장한 축복. 모습을 바꾼 축복. 언뜻 불행처럼 보이지만 실은 기뻐할 만한 일이라는 뜻이야. Blessing in disguise. 그리고 이 세상에는 당연히 그 반대도 있을 테지. 이론적으로는.'(157쪽)


'생각해보니 그건 타자와 대면하는 자신을 정의하는 일과도 통하는 데가 있을 것 같군요. 자명하되 그 자명성을 언어화하기는 어렵다...'(179쪽)


정념을 통합하는 이데아 같은 것. 그러나 그것을 찾아내려면 좀더 시간을 두어야 한다. 솟구치는 색깔을 잠시 재워두어야 한다. 그것은 다음날 이후, 밝은 빛 아래서 할 일이었다. 필요한 만큼 시간이 흐르면 그 정체를 절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참을성있게 기다리려면 나는 시간을 믿어야 한다. 시간이 내편이 되리라고 믿어야 한다.(294쪽)


끝없이 이어지는 그 침묵 속에서 내 감정은 날붙이로 만든 무거운 추처럼 한끝에서 다른 한끝으로 커다란 호를 그리며 왕복했다.(306쪽)


세상에는 모르는 편이 더 좋은 일도 있어, 라고 아마다는 말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듣지 않는 편이 더 좋은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듣지 않고 버틸 수는 없다. 때가 오면 아무리 단단히 귀를 틀어막아도 소리는 공기를 진동시키며 사람의 마음을 파고든다. 그것을 막기란 불가능하다. 그게 싫다면 진공의 세계로 가는 수밖에 없다.(378쪽)


'제 나이쯤 되면 당신도 분명 이 심정을 알게 될 겁니다. 진실이 때로 사람에게 얼마나 깊은 고독을 가져오는지... 저는 흔들림 잆은 진실보다는 오히려 흔들릴 여지가 있는 가능성을 선택하겠습니다. 그 흔들림에 제 몸을 맡기는 쪽을 선택할 겁니다...'(468쪽)


내 주위의 소용돌이가 점점 세차고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이미 물러날 수 없는 곳까지 와 있었다. 너무 늦었ㄷ. 그리고 그 소용돌이는 철저하게 고요했다. 그 기묘한 정적이 나를 떨게 만들었다(495쪽)


'역사에는 그대로 어둠 속에 묻어두는 게 좋은 일도 많다네. 올바른 지식이 사람을 윤택하게 해준다는 법은 없네. 객관이 주관을 능가한다는 법도 없어. 사실이 망상을 지워버린다는 법도 없고 말일세.'(501쪽)


양이 많아서 일부를 빼고 썼는데도 눈에 들어오는 문장이 참 많았네요. 하루키의 문체적 감각은 정말 놀랍고 부럽습니다. 그러나 서사의 틀은 아직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2권에서는 어떤 사건이, 어떤 인물이 '나'의 앞에 나타날까요? 회의적이면서도 조심스러운 기대를 안고 2권으로 향합니다.

 

시간이 흐른 뒤 돌이켜보면 우리 인생은 참으로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믿을 수 없이 갑작스러운 우연과 예측 불가능한 굴곡진 전개가 넘쳐난다. 하지만 그것들이 실제로 진행되는 동안에는 대부분 아무리 주의깊게 둘러보아도 불가해한 요소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 눈에는 쉼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 지극히 당연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비치는 것이다. 그것은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치에 맞는지 아닌지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드러난다.(9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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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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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소설가 중 좋아하는 작가가 몇 없습니다. 신경숙씨(살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종종 있는데 신경숙씨의 표절사건도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대 놓고 표절을 한다는 것도 그렇고, 그것이 유야무야 넘어갔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작가적 역량이나 위치를 따져봐도 그렇습니다. 상당히 좋아했던 작가인데 과연 재기가 가능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후 가장 마음에 드는 작가가 김애란입니다. 그녀의 문체, 그녀의 작품 세계가 다 마음에 와 닿습니다. '달려라 아비'에서 '두근두근 내 인생', '비행운'까지 그녀의 작품을 읽었고 다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이 여름 새로운 소설집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읽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번 소설집에서는 '입동', '노찬성과 에반', '건너편', '침묵의 미래', '풍경의 쓸모', '가리는 손',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의 7편이 수록되었습니다. 제목인 '바깥은 여름'과 일치하는 작품은 없습니다. '바깥은 여름'? 그렇다면? 아마도 '안은 겨울'이 가장 무난한 답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겨울은 세상 만물에게 시련과 고난의 계절입니다. 활기차고 생동감이 넘치는, 열정의 여름이라면, 겨울은 소멸되어가거나 생명력이 사라진, 죽음의 계절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바깥은 여름'일까요? 이런 의문을 가지고 소설집의 첫 장을 넘깁니다.


'입동'을 읽고서 한동안 책을 덮었습니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먹먹함 때문입니다. 사고로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젊은 부부. 그들의 시간은 그날 이후로 멈춰버렸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시간이라 부르는 뭔가가 빨리감기한 필름마냥 스쳐가는'듯 했을 것이고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그들만 빼고 자전하는 듯한'(21쪽) 느낌이 들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뻔한 위로를 하고 누군가는 연민의 눈길을 보냈을 터지만 그 누구도 그들의 슬픔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사람의 관심과 위로라는 것은 시간에 구속될 따름입니다. 채 피우지 못한 단원고의, 그 안타깝고 한스러운 스러짐도 짧은 집단적 애도의 기간이 지나자 시들해졌습니다. 그리곤 이제 그만하자고, 일상을 살자고 애써 털어냅니다. 시간이 흐르면 아픔이 강도는 연해집니다. 결국 아픔은 스스로의 몫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 나는 멍하나 아내 말을 따라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37쪽) 아프게,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들의 슬픔과 아픔을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한파가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도 나는 온몸이 후들후들 떨립니다. 계절은 지나가고 시간은 흐리고 관심은 사라지지만 그들은 여전히 겨울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할머니, 용서가 뭐야?

'없던 일로 하자는 거야?'

'아님 잊어달라는 거야?'

'그냥 한번 봐달라는 거야.(43~44쪽)

'노찬성과 에반'의 핵심적인 문장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에반을 안락사시키기 위해 돈은 모았던 찬성, 하지만 그 돈에서 일부를 휴대폰 충전기, 유심, 그리고 케이스를 사는데 쓰고 맙니다. 그리고 에반은 찬성이 곁에 없는 시간에 돌아오지 못할 먼길을 떠납니다. 에반을 찾다 돌아오는 밤길에 찬성을 '용서'란 말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입밖에 내지는 않습니다. 이후 찬성의 마음에도 겨울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긴 겨울을 지나고 나서야 찬성은 한 뼘 성장할 것이고, 용서란 말의 의미를 체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건너편'의 이수와 도화 역시 겨울을 살고 있습니다. 특히 이수는 어떻게든 이 겨울을 벗어나 도화 앞에 당당하고 싶습니다. 도화는 이 겨울을 끝내는 것은 이수와의 이별이라고 생각합니다. 취업난에 시달리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표상이 바로 이수와 도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들은 어떻게든 이 겨울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래야만 따뜻한 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겨울의 끝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도화가 '이수는 이제...... 어디로 갈까?'(118쪽)라고 궁금해 하지만 그녀 역시 갈 길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풍경의 쓸모'는 제목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182쪽). 과거는 추억의 좋은 재료가 되지만 현실의 질곡을 딛고 일어설 만한 힘이 되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과거는 자신의 굴레가 될 수도 있으며, 인간 관계의 장애가 될 수 있음을 '풍경의 쓸모'는 말합니다. 나는 여전히 눈이 날리는 겨울을 살고 있는데 누군가는 그 겨울을 함께 했으면서도 까맣게 잊(어버리려 노력하)고 온통 여름만을, 태양만을 좇는 생활을 합니다.  그렇게 '과거가(는)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173쪽)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그 과거가 나의 일자리를 빼앗고 새로운 상실을 안겨줍니다. 뜨거운 태국에 있지만 나는 여전히 눈이 날리는 한국을 떠나오지 못했던 것입니다. 곽 교수와의 과거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곽교수의 여름 바깥으로 쫓겨나고 마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의 명지 역시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습니다. 계곡에 빠진 제자를 구하기 위해 물어 뛰어들었다 남편은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세상의 반을 잃은 것입니다. 차가운 마음 속의 겨울에서 그 어떤 것도 하지 못하던 그녀에게 사촌언니는 스코틀랜드 행을 권합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오롯이 혼자가 됩니다. 그녀는 '죽음 위에서, 다른 건 몰라도 죽음만은 계속 피어날 수 있다'고 느낄만큼 죽음과 가까이 합니다. 그런데 그녀 옆에는 시리(siri)가 존재합니다. 프로그램된 대답만을 하는 시리가 오히려 그녀에게 존재의 이유를 알려줍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냐는 나의 질문에 '어디로 가고 싶'은 거냐는 선문답과도 같은 대답을 하는 시리. 그런 시리에게 그녀는 친구같은 친근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다 다시 한국에 들어온 그녀에게 도착한 편지 한 통. 아이의 누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깨닫습니다.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 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266쪽)라고. 비로소 그녀는 남편의 죽음과 직면하고 남편의 행위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남편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그녀에게 이제 더이상의 겨울은 없을 것입니다.


'침묵의 미래'에서는 극단적인 고독, 상실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세상의 언어가 다 사라지고 오직 중앙어만 남아있습니다. 사라져가는 언어를 보호하기 위해 중앙에서는 '소수언어박물관'을 세우고 천여 명의 언어대표자를 박물관에 전시(!)합니다. 그리고 보름에 한 번꼴로 언어가(사람이) 사라집니다. 보호하고 연구하기 위해 세운 박물관은 소멸을 가속화하고 박물관에 거주하는 이들은 단 한 마디 말도 섞지못하고 철저히 고립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현실에서 사라집니다. '시원이자 결말, 거의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145쪽) 언어가, 존재가 사라지고 맙니다. 이런 침묵의 미래에서는 '나는 누구'인지도 의미가 없으며(알 수도 없으며), 어찌 될 것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언어와 존재가 사라진, 침묵만이 자리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프게 읽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고 볼 수 있는 아픔과 슬픔을 이렇게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작가도 드물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 슬픔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의 명지처럼 다시금 삶의 희망을 보여줍니다. 소설집의 모든 작품들이 절망의 끝에서 부르는 희망 노래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듯합니다. 마음은 여전히 차가운 겨울 속에 있지만 발 디디고 서 있는 현실은 끊임없이 계절이 흐르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이 겨울 속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찬성'처럼 정신적 성장을 하고, 때로는 '이수'처럼 또 한번의 도전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명지'처럼 가장 가까운 이의 삶을,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정우'처럼 자신의 실패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여름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는 '내가 이름 붙인 이들이 줄곧 바라보는 곳이 궁금해 이따금 나도 그들 쪽을 향해 고개 돌린다'(269쪽)고 합니다. 아픔을, 상실을 이야기하면서 그녀는 그것을 결코 외면하지도 않습니다. 상실의 끝에는 죽음이, 소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작디작은 희망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희망을 바라보려 합니다. 많은 이들의 아픔과 슬픔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를 작가는 말합니다.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 몰라도 아픔을 부여안고 그 어느 곳으로 향하는 것. 이것이 아픔과 상실을 극복하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 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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