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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2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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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리스토텔레스... 대단하네요. 정치학, 철학, 물리학, 윤리학, 수사학, 논리학 그리고 경제학까지... 아마도 이 책에서 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학도 그 사상의 일면에 불과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그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경제 자체가 어려운 학문인데 시대를 거스르는 그의 학문적 체계 앞에서 이미 작아진 저는 문장의 판독에만 급급합니다. 그렇기에 이번 리뷰는 지극히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겉핥기에 불과한 잡설에 그치게 됩니다.

 

경제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에서부터 논의가 시작됩니다. 단순한 돈벌이인가 물질적 부를 생산하는 활동인가에서 희소성에 바탕을 둔 합리적 선택으로 잠정적 결론이 도출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합리성이란 '협소한 합리성이 아니라 포괄적인 이성적 존재로서 행동의 동기, 신념, 사회적 제도 등을 다 보는 것을 의미'(33쪽)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경제=희소성에서의 선택이라는 합리성은 목적 합리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며 가치 합리성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33쪽)는 점을 지적합니다. 결국 합리적 선택에서의 가치 부분에 대한 고려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2장에서는 경제라는 말의 역사적 고찰을 다루고 있습니다. 초기 경제는 '단지 가정의 살림살이'(40쪽)를 가리키는 의미였습니다. 혈연에 바탕을 둔 인간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었기에 윤리, 도덕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고 당시 사람들도 이를 당연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 이후 18c까지도 경제는 '국가라는 사회적 관계의 맥락에 포섭'(43쪽)되어 있었습니다. 여전히 독립적인 영역 혹은 학문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1890년, 마셜에 의해 최초로 경제학이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이제 경제는 비로소 정치, 사회와 독립적인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 현상은 계급 관계라는 사회적 맥락에서 언급이 되었던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부를 노동가치나 물질적 부가 아닌 희소성하에서의 선택을 통한 만족의 극대화'(46쪽)로 보는 현대의 경제 관념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3장에서는 그리스의 시장의 변천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할 수 있는 생활단위로서의 가정경제'가 초기 그리스 사회가 호혜성에 기반한 선물 주고받기를 바탕으로 형성되고 발전해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폴리스가 성장하고 가정 경제 단위의 주고받기가 불가능해지면서 기원전 6c 그리스 전역에서 화폐경제가 출현하고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 발전하게 됩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폴리스로 이주한 사람들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국가 재산의 재분배가 이루어지고 그것은 화폐를 매개로한 시장의 발전으로 귀결됩니다. 이 과정에서 키몬과 페리클레스 간의 정치적 경쟁이 사뭇 재미있게 다뤄집니다. 그러나 가정경제와 폴리스, 호혜적 선물 주고받기가 시장과 민주주의, 제국주의로 변모되면서 이제 그리스인들은 '국가를 한시적 이해를 위해 교역 관계에서 맺어지는 동업자 관계'(73쪽)로 보게 됩니다. 혈연적, 불가역적 관계가 계약적 관계로 변모됩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누구도 제기하지 않았던 인간의 덕(arete)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플라톤은행복한 삶의 정의, 행복에 이르는 방법과 사람들을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 대답으로서의 철인(철학자) 정치를 제시합니다. 다시 폴리스는 '시민에게 잘 사는 법을 훈련하는 훈육의 장이자 좋은 생활을 펼쳐낼 실현의 장'(78쪽)으로 돌아옵니다.

 

4장에서 비로소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가 등장합니다. 플라톤이 추상적인 인간활동과 경제를 언급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과 수단의 측면에서 접근합니다. '인간 활동에서 목적의 추구는 무한하지만 수단의 양은 그 목적에 의해 제한되며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폴리스의 운영기술과 가정관리 기술을 상위로 삼고 거기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획득의 기술을 하위로 삼아야 한다'(97쪽)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활동을 '행위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행위'인 프락시스(praxis)와 '무언가를 생산하는 행위'인 포이에시스(poiesis)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그는 인생은 포이에시스가 아니라 프락시스라고 단언합니다. 인간의 잠재적 능력을 풍부하게 계발하는 것이 바로 행복한 삶의 기본 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5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관과 대비되는 '로빈슨 크루소'로 상징되는 개인 중심의 경제관이 소개됩니다. 가정경제와 폴리스 중심의 경제관이 '낱난의 개인들을 유일한 현실적 기본 단위'(131쪽)로 보고 '인간의 탐욕을 이성 실현이라는 세계사의 목적이 달성되는 원동력'(134쪽)으로 보는 근대 경제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원의 희소성에 기반한 근대적 경제관은 '인간세상의 부동의 진리'(139쪽)로 자리잡아 우리의 일상과 사고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6장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경제사상가를 소개합니다. 애덤스미스, 독일의 역사학파, 칼 마르크스, 베블린, 폴라니, 케인스가 그들입니다. 그리고 맺음말에서는 경제발전, 대량 소비, 자본 축적을 신봉하는 현대 경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그 전환의 바탕이 되는 것은 개인이 아닌 가정경제와 폴리스(사회) 중심의 아리스토텔레스 경제관이겠지요. 물론 그 토대는 바람직한 사회변화, 경제관에 대한 우리의 의식적 노력과 행동입니다. 숨가쁘게 정점으로 치닫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더이상의 사회(국가)의 개입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도 해서는 안되며, 설사 한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나 효과가 없다는 신자유주의의 수사학에 더이상 현혹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런 패배주의, 허무주의를 벗어날 때 진정한 인간 중심의 경제로의 전환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워낙 경제에 문외한이기 때문에 다소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내용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보기도 어렵고요. 다만 거대한 사상가의 등 너머에서 그가 바라보는 세계의 일면을, 그 탁월한 통찰을 흘깃 바라본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던 책읽기가 아닌가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작금의 경제 상황에 관심이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그 과정을 거치면 경제에 대한 개념과 변천의 과정을 피상적으로나마 인식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생은 포이에시스가 아니라 프락시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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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 세상을 조종해온 세 가지 논리
앨버트 O. 허시먼 지음, 이근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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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hetoric of Reaction. 원제입니다. 굳이 우리말로 바꾸면 '반동의 수사학' 정도 되겠습니다. 저자인 허시먼이 분석한 보수의 3가지 논리입니다. 역사적 흐름 속에서 보수의 수사학이 어떻게 교묘하게 작용하고 현실의 논리가 되었는가를 무수한 인용과 분석을 통해 제시됩니다. 아... 어렵습니다. 정말 어렵게 읽었습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뻔하지만 그 논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이렇게 철저하게 규명하다니요. 저자의 박학다식함과 그 철저함에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정치·사회·경제 질서의 일부를 향상시키려는 어떤 의도적인 행동도 행위자가 개선하려는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라는 역효과 명제,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모든 노력은 효과가 없으며 그 노력들은 어떤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무용 명제, 변화나 개혁에 드는 비용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 변화나 개혁은 이전의 소중한 성취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위험 명제.(28쪽) 이 세 명제가 보수의 수사학입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 표현 방식이 다르기야 하겠지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실로 익숙한 수사학입니다. 그리고 이 명제들은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 있지만 그 실체는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안개와 같이 우리 사회를 감싸고 있지만 그 목표물을 조준하기가 쉽지 않은, 정말 교묘한 논리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계획된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고 '신-구의 개혁은 서로가 서로를 강화시켜 줄 것'이며 '계획된 행동은 이미 '굴러가고 있는' 강력한 역사의 힘에 의해 뒷받침되기에 거기에 맞서는 것은 아주 쓸데없는 짓'(226쪽)이라고 진보의 논리를 정리합니다. 역사에 대한, 인간의 의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보여주는 결론이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어느 쪽에 자신의 시선을 두느냐에 따라 보수와 진보는 나뉘어질 것이고 행동에 대한 신념의 차이가 역사발전의 합법칙성을 야기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무심코 넘어가던 많은 일들이 사실은 보수의 수사학에 속아넘어간 경우가 참 많습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지금에도 고리원전 폐쇄의 문제에 관련한 전기요금 인상, 대체전력의 부족 등을 이야기하며 반대하는 사례, 특수목적고 일반고 전환에 대한 교육의 다양성, 선택권 차원의 문제 제기, 다양한 교육 기법이나 교육 사례의 사장 등도 그렇습니다. 또한 일제고사 폐지에 대한 학생들의 학력 저하도 마찬가지고요. 항상 똑같은 논리가 아니라 역효과, 무용, 위험 명제는 사례와 상황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 하면서 교묘하게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려 하고 있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그들의 논리를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동조할 수도 있을 만큼 보수의 수사학은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세련되게 다듬어졌거나 무의식 중에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한편으로 지금 우리사회를 무겁게 짓누르는 무기력증은 보수의 수사학이 더욱 강화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청년 실업, 갈수록 늘어만 가는 가계부채, 더딘 경제 성장, 대학입시로 귀결되는 끝없는 경쟁 중심의 교육 등을 생각해보면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고, 변화의 시도 자체가 또다른 상황의 악화를 가져올 수도 있을 거라는 걱정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허무주의야말로 가진 자들이 바라는 가장 강력한 대중적 경향'(11쪽)입니다. '행동의 위험에 대해서는 행동하는 않는 것의 위험성을 들어 반대하는 일이 항상 가능'(147쪽)합니다. 빨간머리 앤에서도 비슷한 말이 나오지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실망도 하지 않으니 다행이'라는 아주머니의 말에 앤을 말합니다.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나쁜거라고......' 또한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도 참 멋지다'고 앤은 말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앤의 자세가 보수의 수사학에 대한 올바른 자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책의 세부적인 내용을 제시하고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제가 그 부분까지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그리고 지배하려 시도하는 보수의 수사학을 이처럼 명확하게 제시하는 책도 없을 것 같습니다. 보수는 어떻게 자신의 논리를 제기하는가? 혹은 사회의 지배논리와 진보와 보수의 이념 차이 등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상당히 유의미하게 다가올 책입니다.

 

‘허무주의야말로 가진 자들이 바라는 가장 강력한 대중적 경향‘(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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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향고양이의 눈물을 마시다 - 나의 선택이 세계 동물에게 미치는 영향 동물권리선언 시리즈 7
이형주 지음 / 책공장더불어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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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부터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분명합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커피를 좋아하고 커피 소비량이 남부럽지 않은 우리나라이기에 사향고양이의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만한 사람은 바로 알게 되지요. 루왁이란 커피를 얻기 위해 사향고양이에게 가해지는 인간의 폭력을 경고하는 글이지요. 하지만 이 책에는 사향고양이만이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먹고 입는 기본생활에서부터 건강을 위해 챙기는 것들, 여행가서 즐겁게 보았던 것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폭력적인 것인지를 구체적 사례와 통계 수치를 통해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덮으며 무엇 하나 예사롭게 선택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저자인 이형주 씨는 동물과의 조화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를 원했기에 이런 글을 썼을 것입니다.

 

사자, 돌고래, 호랑이, 코뿔소, 소, 악어, 뱀, 사향고양이, 곰, 범고래, 개(복제견), 상어, 하프물범, 라쿤, 오랑우탄 등이 이 책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들 동물은 인간의 한없은 이기심과 탐욕에 의해 희생당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실제적인 사진과 사례, 수치를 대하다보니 우리 인간이 이렇게까지 잔혹했었나 하는 자문이 들 정도입니다. 정말 우리 인간은 지구상 최후의, 최상의 포식자가 맞는 것 같습니다.

 

'야만적이고 잔인한 짐승은 창살 뒤에 있지 않고 창살 앞에 있다'(149쪽) 스웨덴의 문호 악셀 문테가 한 말이라고 합니다. 책을 읽다 보면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잔인한 폭력 앞에서 깊어지는 자책감, 죄스러움이 가슴 가득 차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구상의 모든 수족관, 동물원을 폐쇄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 자체로 긍정적 기능-특히 교육적인 면이나 인간과의 교감 측면에서-을 지니고 있지만 그들이 처한 환경을 생각해 본다면 조금 더 자연적인 환경을 제공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일부 선진국에서 동물원이면서도 동물의 생태나 환경을 고려한 동물원을 새롭게 개장하는 사례가 보편적으로 확대된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인간은 결코 자연의 정복자도 아니고 자연 위에 군림하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니까요.

 

이형주 씨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완벽한 삶을 사는 한 사람보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시도하는 삶을 사는 여러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8쪽)는 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책을 읽고 나면 무심히 먹었던 음식, 생각없이 입었던 옷, 손뼉치며 봤던 수중동물의 쇼 등이 연상되며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양심의 가책없이 저 역시 동물을 향한 인간의 폭력에 가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에서 변화는 시작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완벽히 알지 못하더라도 알고 있는 사실을 현실에 적용시키는 것. 모피를 비롯한 동물 가죽 제품을 되도록 사용하지 않고 건강을 위해 잔인한 살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바야흐로 반려동물 홍수 시대입니다. 정말 많은 수의, 많은 종류의 반려동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려가 되지 못하는 혹은 반려할 수 없는 훨씬 더 많은 동물들이 인간의 폭력 앞에서, 인간의 무심함 속에서 고통받고 있음을 이 책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비단 동물뿐이겠습니까? 지구상의 거의 모든 존재들이 인간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사라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식물과 동물이 끊임없는 변화 혹은 진화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듯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끊임없는 공존과 조화를 실천해서 우리의 후세대에게 이 아름다운 지구를 물려줘야 합니다. 결국 언제나 문제는 나로부터의 실천에 있습니다.


109쪽에 보면 동물의 5가지 자유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이 자유를 기억한다면 최소한 동물을 억압하는 현실에 가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 배고픔과 목마름으로부터의 자유
  • 불편함으로부터의 자유
  • 고통과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 정상적인 행동을 표현할 자유
  • 공포와 스트레스로부터의 자유

 인간이 인간다울 때-표현이 지극히 추상적이지만-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것과의 조화와 공존도 가능할 것입니다. 무심코 보았던 동물원 곰의 재주, 수족관 돌고래의 기예. 분명 신기하고 즐거운 경험이지만 마냥 즐겁게 볼 수만은 없다고 이 책은 역설합니다. 그렇게 하나씩 알아가면서 나로부터의 변화를 실천해야 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저자가 궁극적으로 소망하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으로부터의 자유
•불편함으로부터의 자유
•고통과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정상적인 행동을 표현할 자유
•공포와 스트레스로부터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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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개정증보판 달인 시리즈 1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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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한 유명하신 분이지만(특히 '열하일기' 연구에 있어서는 국내 최고가 아닐까 합니다.) 고미숙 선생님의 글을 처음 읽어봅니다. 이번에 읽은 책은 선생님의 주분야인 고전 관련 책이 아니라 달인 3종세트라 칭하는 책 가운데 한 권입니다. 교육 현장에 있다보니 아프게 다가오는 내용들이 꽤 됐습니다.

 

책은 프롤로그, 1부-학교, 공부에 대한 거짓말을 퍼뜨리다, 2부 -고전에서 배우는 미래의 공부법, 3부-인생의 모든 순간을 학습하라, 에필로그로 구성됐습니다.

 

개정판의 머리말로 글을 시작합니다.

'헛된 꿈에서 깨어나는 것, 그것이 공부다... 매번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존재, 어디서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존재, 언제든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존재, 그것이 곧 청춘이다. 고로 공부하니까 청춘이다!' 청춘이기 때문에 공부할 수 있습니다. 공부하기에 청춘입니다. 책에서도 계속 언급하지만 공부하는 삶에는 나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서고 언제 누구에게서나 배울 수 있는 용기. 이것이 청춘의 특권이자 공부의 특권입니다. 이렇게 따지면 우리의 인생 모든 장면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부가 될 것입니다.

 

저자는 공부는 '자유에의 도정(40쪽)'이라고 합니다. 인식의 프레임에 갇히는 지식이 아니라 그 인식의 틀을 벗어나는 공부.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발판이 바로 공부가 될 것입니다. 자본과 권력이 요구하는 틀, 무엇보다 자신의 습속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공부가 진정한 공부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자본과 권력이 요구하는 틀이란 뻔한 것입니다. 기존의 제도의 습속의 굳건한 유지지요. 이를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공부를 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결국 현 상황, 현 체제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과 회의, 이를 통한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바로 공부의 길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자가 던지는 문제 제기는 충분히 의미가 있고 특히 학교교육에 던지는 비판은 통렬합니다. 공부에는 때가 있으니 학창시절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 독서와 공부는 결코 같이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 그렇기 때문에 자율학습 시간에 책을 읽는 것을 금지하는 전국의 수많은 학교들. 그리고 창의성 진작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실시되는 시설 개선과 서비스. 구체적인 내용과 철학없이 시행되는 전시행정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교사와 학생, 학부모, 교사와 정부 사이에 이미 신뢰라는 단어가 무너진 현실의 풍경일 뿐입니다. 현장에 근무하고 있기에 이런 지적은 더욱 뼈아프게 다가옵니다.

 

저자는 암송과 구술을 바람직한 공부법으로 제시합니다. 낭송이란 '일상적으로 자기안의 타자를 발견하는 과정이며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능력을 터득하는 방법이고 사람에 대한 입체적'(102쪽)인 관점이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이나 문맥을 서사적으로 재현하는 능력'(107쪽)인 구술은 '보는 것과 아는 것의 지평을 넓힐 수 있'(107쪽)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지식과 몸의 소외가 극복'(102쪽)될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결국 귀결점은 고전으로 향합니다. 고전을 바탕으로 한 읽기와 쓰기. 거기에 더하는 자유로운 사고. 이것이 저자가 생각하는 공부의 핵심입니다. 또한 '생각의 지도를 변경하고 삶의 행로를 바꿀 수 있는'(143쪽) 글쓰기를 주장합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비우고 체력과 끈기, 오기와 집요함이 있다면 진정한 글쓰기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결국 공부는 몸이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몸보다 더 확실한 실존의 현장은 없다'(153쪽)고 저자는 단언합니다.

 

'자신이 평생 뭔가를 가르치고자 한다면 자신이 평생 공부의 즐거움을 누려야 마땅하다.'(191쪽)

흠... 절로 자기반성을 이끄는 문장입니다. 과연 나는 공부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가?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나름 책을 읽고 공부한다고 하지만 그 바탕에 즐거움이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의무적으로 때로는 시간 때우기식의 독서 혹은 공부가 많기 때문입니다. 내가 즐거워야 배우는 학생이 즐거울 것입니다. '배움의 열정을 촉발하고 전염시키는 배움의 헤르메스'(194쪽)가 되어야 하는 스승. 아직 갈 길이 멀기만 합니다.

 

'앎이란 결국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과정'(213쪽)이라고 합니다. 공부를 하는 것은 결국 현실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 힘을 바탕으로 일상을 주체적으로 영위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일치 여부를 떠나서 일상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앎을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지식인의 모습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공부란 것은 당연히 끝없이 행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인간이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고 공부를 하지 않는 인간은 존재 그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은 지가 한참 지나서 내용이 가물가물합니다. 요즘의 독서가 이렇습니다. 찔끔찔끔 읽어나가니 시간은 오래 걸리고 앞의 내용은 망각의 늪에 빠집니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된 글읽기가 안 되고 당연히 글쓰기도 요모양 요꼴입니다. 내 머리 속에서 뭔가 글의 전체적인 틀이 마련되고 그 틀을 채우고 틀의 형태를 변형시키는 글쓰기기 되어야 하는데 요새의 글쓰기는 너무 먼 얘기입니다. 각성해야 하는데 여전히 몸 따로 마음 따로의 삶입니다. 몸의 피곤함은 분명하지만 그 피곤함을 변명삼아 너무나 안일하게 살아가는 일상... ㅠ.ㅠ.

 

무척 잘 쓴 책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습니다. 일단 저자가 제시하는 문제점은 분명 공감하지만 그 속에서 제시하는 공부의 방법은 현실과 거리감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몸을 통한 공부, 평생을 통한 공부란 주장은 당연하고도 당연합니다. 어쩌면 제도 교육 외곽에서 들려온 작은 외침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직 큰 반향을 가지지 못하는...

 

‘앎이란 결국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과정‘(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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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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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어 가장 오래 걸려 읽은 책은 분명합니다. 책의 두께도 장난아니거니와(무려 554쪽에 이릅니다.) 무엇보다 같은 듯 다른 내용이 연속되어서 읽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내용이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남성 중심의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전쟁에 참여했던) 여자들이 말하는 전쟁을 소개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러니 책의 내용은 대부분 저자와 여군(이었던)과의 인터뷰입니다.

 

책에서 언급하는 전쟁은 2차 세계대전입니다. 그 전쟁에 참여했던 200여 명의 목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 삶에 대해 아직은 모르는, 친구와의 수다나 장밋빛 미래를 꿈꾸기에도 부족했던 그 청춘의 시기에 전장에서 전투를 치른 이들의 목소리. 더구나 여인의 목소리. 쉽게 만날 수 없는 장면입니다. 그들의 육성을 듣다보면 가슴 먹먹한 순간이 자주 찾아옵니다. 그 극한의 상황에서도 두려움없이 적과 맞서고 동료를 챙기고 부모와 가족을 그리워하고 사랑도 합니다. 당연히 가장 많이 만나는 장면은 죽음입니다. 그 죽음을 서술하면서 인터뷰어도 울고 독자는 눈물을 머금게 됩니다.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거의 대부분의 여성(소녀가 맞는 표현입니다.)들이 아무 거리낌없이, 오히려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입대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발적 애국심인지 이념의 영향인지 군중심리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애국심이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많은 여인들이 전쟁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일상적인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입대를 거부하는 정치위원회에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거나 제 발로 찾아가서 입대를 간청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들의 입대에는 뭔가 신비로운 느낌도 강하게 듭니다.

 

인간 역사는 승리자의 역사, 남성의 역사입니다. 그 역사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전면적으로 내세운 책.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단 전쟁에 참여했던 여성들로부터 그들의 목소리를 끌어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성의 전쟁을 당국은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 책에서도 저자는 책 발간에 대한 압력과 협박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거치고, 인터뷰 내용을 거르고 걸러서 탄생한 책. 노벨문학상 수상(2015년)은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사실 1940년대는 이념의 광기가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무차별적인 전쟁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는 뒤로 밀려났습니다. 그것이 파시즘이든 나치즘이든 군국주의든 간에 조국과 민족을 위한다는 기만의 언어 아래 인간 개체는 어디에도 설 수 없었습니다. 이는 전쟁의 또다른 축이었던 연합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전쟁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고 패자는 정치, 경제적으로 수모를 당했습니다. 승자는 잔치를 베풀고 저마다의 무용담을 나열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여자는 당연히 설 자리가 없었을 테구요. 승리자의 역사, 남성의 역사에서 사라진, 아니 이전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여인들의 목소리를 지상으로 끌어내 활자화했다는 것 자체가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일 것입니다. 알면서도 보려 하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았던, 숨 죽였던 여인들의 목소리가 이제 활자 속에서 큰 울림으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전쟁이란 폭력의 상황에서 여성의 역할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일단 육체적 역량에서 남성에 비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을 떠올려보면 여성의 자리는 없는 것이 타당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하지만 2차 대전에서 그녀들은 적군을 죽이고 동료가 죽는 장면을 수없이 보게 됩니다. 너무 이른 나이에 입대를 했기 때문에 전쟁 도중 여인의 징후를 만나기도 하고 키도 훌쩍 자랍니다. 거칠고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는 상황의 연속이기에 여성의 징후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죽은 동료를 제대로 매장도 하지 못하고 혹독한 추위 속에서 행군도 해야 합니다. 배급받은 전투복과 전투화는 너무 크고 머리도 짧게 잘라야 합니다. 전쟁이라는 아수라장 속에서 더이상 여성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체적으로 여성이지만 정신적, 현실적으로는 남성으로서 그 억압과 폭력의 현실을 견디고 이겨낸 여성들. 하지만 전쟁 후에는 전쟁에 참여했다 떳떳하게 말할 수도 없는 현실입니다. 어떤 남자가 나같은 여자를 신부로 맞아 들일 것이며 내 이웃들과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겠느냐고 탄식하는 그녀들의 목소리... 마음을 울립니다. 그녀들은 전쟁이 끝나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전장에서 전투를 치르고 여전히 약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포성이 울리는 곳만이 전쟁터가 아니고 사람과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라도 근들은 여전히, 아직도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상당히 더뎠습니다. 꼼꼼히 읽어서이기보다는 같은 듯 다른 내용의 연속이었기 때문입니다. 개개인의 전쟁과 일화, 분명히 다른 내용이지만 그 본질적 측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분명 다양한 상황, 다양한 시선으로 전쟁을 이야기하지만, 그렇기에 분명히 다른 내용이지만 반복되는 인터뷰 속에서의 기시감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보니 집중도도 떨어집니다. 정말 오랫동안 책을 읽은 가장 큰 이유입니다. 꽤 읽은 것 같은데 제자리...ㅠ.ㅠ. 상당한 인내와 집중력을 가지고 읽어야 할 책입니다.

 

수많은 전쟁참전 여인들의 육성... 그렇기에 가슴에 다가온 문장들이 참 많습니다. 그 문장들로 마무리합니다.


전쟁의 세상이 우리가 아는 유일한 세상이었고, 전쟁의 사람들이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지금도 다른 세상이나 다른 세상의 사람들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다른 세상, 다른 세상 사람들은 정말 존재하기나 했던 걸까?(14쪽)


회상이란 지금은 사라져버린 옛 현실에 대한 열정적인, 혹은 심드렁한 서술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거슬러올라간 과거의 새로운 탄생이다.(19쪽)


죽음은 비밀은 그 어떤 것보다 우위에 있다. 전쟁은 지나치게 내밀한 체험이다. 우리네 인생살이만큼이나 그 끝을 알 수가 없다...(22쪽)


그들의 울음과 비명을 극화(劇化)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의 울음과 비명이 아닌, 극화 자체가 더 중요해질 테니까. 삶 대신 문학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릴 테니까(31쪽)


나는 내가 겪은 일만 기억나. 내가 겪은 전쟁만. 주위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결국 사람은 혼자야. 왜냐하면 사람은 언제나 홀로 죽음을 대면해야 하거든(65쪽)


나는 감정의 역사를 쓴다... 영혼의 역사를 쓴다... 전쟁이나 한 나라의 역사, 영웅들의 인생역정이 아닌, 그저 평범한 삶을 살다가 거대한 사건의 깊은 서사 속으로,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 작은 사람의 역사를 쓴다.(90쪽)


행복... 그건 죽은 사람들 사이에서 기적처럼 산 사람을 발견하는 일이야(145쪽)


역사는 만들어졌지만, 낮뿐이 삶이었으며 기억도 짧았다.(192쪽)


내겐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인 많은 반면, 집사람에겐 전쟁에 대한 감정이 더 많아요.(198쪽)

전쟁도 우리에게 앙갚음을 했소... 우린 그 사실을 인정하기를 두려워하지만... 전쟁이 우리를 쫓아와 우리와 나란히 가고 있어요...(198쪽)


하느님은 총을 쏘라고 사람을 창조하신 게 아니야. 서로 사랑하라고 만드셨지. 어떻게 생각해?(224쪽)


그 일을 떠올리는 건 끔찍하지만 그 일을 기억하지 않는 게 더 끔찍하거든(225쪽)


난 들꽃을 보면 전쟁이 떠올라. 전쟁때 우리는 꽃을 꺾지 않았어. 꽃을 꺾는다면 그건 누군가의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서였지... 작별을 고하려고...(252쪽)


그리 넓지 않은 이 작은 영토-한 사람의 영혼의 공간-가 역사보다 더 난해하다... 길은 오로지 하나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것.(268쪽)


한편으로 고통은 앎의 특별한 형태는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삶에는, 특히나 우리네 삶에는 고통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도 지켜낼 수도 없는 뭔가가 있다.(374쪽)


이 길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악은 끝이 없어 보인다. 나는 이제 더이상 악을 역사의 문제로서만 대할 수가 없다. 누가 나에게 대답해 줄 것인가... 무한정 되풀이되는 삶의 반복성에 대해 생각해본다.(479쪽)

 

 



또다시 두 개의 다른 세상, 두개의 다른 삶이다. 기껏 증오하는 법을 익혔는데 다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오래 전에 잊힌 감정들을, 잊힌 말들을 다시 떠올리야 했다. (511쪽)


지금 녹음되고 있는 거지? 역사를 위해, 그렇지?(5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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