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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평점 :
보후밀 흐라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작가의 소설책을 구입한 것은 '국내소설가 50인이 뽑은 2016년 올해의 소설'이란 타이틀 때문.
전체 132쪽의 얇디 얇은 책. 하지만 책은 결코 두께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책입니다. 읽기가 수월한 편은 아닙니다. 중간중간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제목부터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합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역설적 표현이지요.
실존적인, 고독한 한 인간을 둘러싼 기계(압축기) 소리로 일단 해석이 가능합니다. 다음은 수많은 책을 만나며 온갖 지식으로 가득한 주인공 한탸의 곁에는 그와 지식과 감정을 공유할 사람이 없습니다. 머릿속에 떠도는 지식 속에서 홀로 외로운 주인공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볼 수도 있습니다.
소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됩니다. 주로 한탸의 현재 상황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중간중간 과거의 에피소드가 삽입됩니다. 한탸의 첫사랑 만차,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에 이름이 밝혀지는 어린 집시와의 동거 혹은 사랑이 들어가지요. 특히 만차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정말 이런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어이없으면서도 웃음을 유발하는, 작가의 유머 감각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아무튼 주인공 한탸는 삼십오 년간 폐지 압축공으로 일해온 인물입니다. 그는 어두침침하고 더러운 지하실에서 쥐와 바퀴와 공존하면 폐지를 압축합니다. 매일 처장을 통해 수많은 인류지식의 보고가 쏟아져 내려오고 그 가운데 한탸는 수많은 고전을 추려서 아름답게 장식하고 또 자신의 집에 보관합니다. 그 와중에 그는 자연스럽게 문학과 인문학을 비롯한 폭넓은 교양을 쌓게 되지요. 아무리 환경이 더럽더라도, 아무리 소장이 욕설을 하더라도 책과 함께라면, 거기에 맥주가 제공된다면 그는 충분히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부브니의 거대한 수압 압축기를 만나기 전까지는...
제목도 제목이지만 한탸의 일도 역시 모순의 상황입니다. 책을 아끼고 숭배하는 주인공이 책을 파괴하는 일을 하다니...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한탸는 명작을 지키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체제에 반하는 내용을 거침없이 없애버리고 그 어떤 일탈도 허용하지 않는 사회, 문학의 아름다움과 창의성보다는 효율을 중시하는 사회, 그 속에서 기계와 같이, 기계처럼 일만하는 인간이 있습니다. 반복적인 노동행위에 인간적인 면모가 있을 리는 없지만 작가는 책에 대한 한탸의 사랑을 통해 인간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어쩌면 개인의 자유와 선택이 금지된 전체주의(체코의 현실을 떠올리면 사회주의라고 해석해도 무방하겠습니다.) 사회에 대한 작가의 저항의식이 반영되어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탸는 압축기를 통해 책을 파괴하지만 그래도 그 곳에는 인간적인 온기가 남아 있습니다. 적어도 한탸의 마음에 들어온 책은 구해낼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부브니의 거대 압축기는 양에 있어서도, 인간적(?)인 면에 있어서도 비교불가입니다. 이제 인간이 기계를 조종하는 시대에서 인간이 기계에 종속되는 시대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물질지상주의, 과학만능주의에 대한 작가의 부정적 시선의 한탸의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집니다.(이 부분은 황순원 선생의 '독짓는 늙은이'와 매우 흡사합니다. 그리고 작품의 주제의식 역시 상당부분 유사합니다.) 작가가 보는 인간 사회는 인간과 기계의 끊임없는 대립 혹은 전쟁일 지도 모릅니다. 마치 지하에서 쥐들이 두 패로 갈려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듯...
Progressus ad futurum(미래로의 전진)
Regressus ad originem(근원으로의 후퇴)
작품에서는 미래로의 전진은 예수를, 근원으로의 후퇴는 노자를 비유한 말입니다.
Progressus ad originem(근원으로의 전진)
Regressus ad futurum(미래로의 후퇴)
그리고 한탸는 위 문장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미래로의 전진이든 근원으로의 전진이든 그 통로는 책이 될 것입니다. 수많은 책을 통해서 교양을 쌓게 된 한탸는 책이 과거와 미래를 가로지는 등불이자 통로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결국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기계화로 인해, 효율과 능률로 인해 사라지는 책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사라져가는 인간애에 대한 연민, 사라지는 모든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낸 책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책의 존재가치가 갈수록 희미해지는 시대입니다. 자극적이고 상업적인 정보는 넘쳐나지만 미래를 보는 혜안, 과거를 보는 통찰은 갈수록 자리가 위태해집니다. 책을 책답게 보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시대에서 보후밀 후라발의 작품이 더욱 의미있게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본문에 많은 작가와 위인이 등장하지만 특히 예수와 노자와 대비돼서 등장합니다.(특히 59쪽에서) 예수가 현실세계에 발딛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피 흘렸다면 노자는 근원적인 인간 존재 자체의 회복을 바랐지만 행동이나 희생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읽었는데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어렴풋이 둘의 차이는 알겠지만 작품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항대립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식견이 없기 때문입니다. 철학적, 종교적 사고가 바탕이 된다면 이 부분의 이해가 가능할 것 같기도 합니다. 혹 이 글을 읽는 분이 있다면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이 궁금하네요.
어떤 이유로든 문명은 인간의 생활을 풍요롭게 합니다. 육체적 여유를 가져옵니다. 반면 정신적 가치는 갈수록 존재의미가 희미해집니다. 모든 것은 돈과 기계, 물질과 효율로 대체됩니다. 지극히 풍요로운 이 시대에 오히려 인간과 사고의 가치는 퇴보하고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집시 여자와 내가 날린 연이 날아가 버리듯, 책의 소중함이 점차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고 자본이 정신을 대체하는 이 시대에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 주는 울림은 크고 넓습니다. 사라져 가는 모든 것에 애정의 눈길을 보낼 때, 책도 인간도 그 자체의 존재 이유가 빛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작가의 사유를 느낄 수 있는 문장들입니다.
진정한 책이라면 어김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다는 무언가를 가리킬 것이다.(11쪽)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18~19쪽)
하늘은 전혀 인간적이지 않고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다빈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24쪽)
예수는 기도를 통해 현실을 기적으로 만들려고 한 반면, '도덕경'의 노자는 순진무구의 지혜에 도달하기 위해 자연법칙들을 유일한 방편으로 삼았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51쪽)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85~86쪽)
살아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적(敵)을 두기 마련이다.(128쪽)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85~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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