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포도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5
존 스타인벡 지음, 김승욱 옮김 / 민음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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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 이어 2권을 마저 읽었습니다. 1권에 비해 만족도도 다소 줄고 조금은 아쉬운 결말이었지만 그래도 감동을 주는 결말이었습니다.


톰 조드 일가는 힘겹게 캘리포니아에 도착했습니다. 푸르른 숲과 오렌지, 포도, 그리고 목화가 있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집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오키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키들은 여전히 가지지 못하고 착취를 당하며 오직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급급합니다. 후버빌에서의 비참한 삶을 뒤로 하고 도착한 국영천막촌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지만 몸을 여전히 춥고 배가 고프기만 합니다. 로저샨의 남편 코니는 그들의 곁을 떠나고 내내 함께 했던 전직목사 케이시는 톰의 죄를 대신해서 경찰에 연행돼 갑니다. 그리고 화차가 길게 늘어선 목화농장에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는가 싶었더니 목화농장의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파업을 주도한 케이시의 죽음을 목격한 톰이 다시 사람을 죽이고 쫓기게 됩니다. 로저샨은 사산을 하고 이번에는 극심한 대홍수가 그들을 덮칩니다. 어디를 가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는 오직 가난과 절망, 착취와 억압만이 있을 뿐입니다.


1권의 시작은 극심한 가뭄이었습니다. 그리고 2권의 끝에는 대홍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자연재해 속에서 인간은 결국 굴복할 수 없습니다. 톰의 아버지와 큰아버지, 화차의 사람들이 홍수를 막기 위해 갖은 애를 쓰지만 결국 실패하고 그들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채 다시 길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절망의 끝에서도 생명은 지속되고 사랑은 이어집니다. 굶어죽어가는 노인을 위해 자신의 가슴을 여는 로저샨... 생명의 숭고함과 숙연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절망이 클 지라도, 좌절의 끝이 보이지 않을 지라도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한, 그리고 그것을 지키려 노력하는 한 희망이 있다는 것을 작가는 역설하는 듯합니다. 모든 것을 삼키고 모두가 주저않을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더욱이 새생명의 탄생까지도 좌절된 상황에서도 희망은 피어나고 비참한 인간은 그들의 삶을, 그들의 역사를 이어갈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소의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입니다. 톰 조드 일가를 비롯한 농민들의 절망과 가난의 끝에 다시 자연재해를 대입한 것이 그렇습니다. 그들의 가난에 자연재해가 큰 원인이 된 것은 명확한 사실이나 그것보다도 -특히 작품의 전개 상에서- 자본과 문명(기계)의 폭력이 더 큰 원인이었으니까요. 더구나 작가의 시선은 가난의 끝에서, 좌절의 끝에서 '나'가 아닌 '우리'의 분노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결말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분노가 어떤 식으로든 형상화되어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나한테 식량이 조금 있다'에 '나는 식량이 하나도 없다'가 덧붙여 지는 것. 이것이 '우리한테 식량이 조금 있다.'로 발전하면 이미 문제가 시작된 것이다. 문제의 방향은 이미 정해졌다. 이제 조금만 더 앞으로 나아가면 이땅, 이 트랙터는 우리 것이다..... 이것이 폭발의 시초다. 이것이 시작이다. 나에서 우리로 변하는 것이.'(1권 316~317쪽) 하지만 분노의 함성도 저항의 행동도 없습니다.(물론 짐 케이시를 비롯한 일부의 저항이 묘사되긴 하지만 흔히 말하는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고 맙니다.) 너무나 낭만적인, 지극히 비현실적인 결말의 방식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가득합니다.


물론 짐 케이시의 영향을 받은 톰 조드의 행동과 사고의 변화도 유의해야 합니다. 불의한 폭력 앞에서 또다시 살인을 하고 덤불 속에서 숨어 살던 그가 그의 어머니에게 던지는 말은 매우 상징적이고 변화의 가능성을 짙게 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2권 399쪽)

'저는 어둠 속에서 어디나 있는 존재가 되니까. 저는 사방에 있을 거예요. 어머니가 어디를 보시든. 배고픈 사람들이 먹을 걸 달라고 싸움을 벌이는 곳마다 제가 있을 거예요. 경찰이 사람을 때리는 곳마다 제가 있을 거예요...'(2권 402쪽)

하지만 여기서 끝입니다. 분명 톰은 각성을 했고 그 각성에 따른 행동을 할 것이 분명하지만 어디까지나 암시일 뿐, 작품 속에서는 그려지는 바가 없습니다. 노동자, 농민의 분노와 저항이 용솟음치던 우리의 80년대 리얼리즘 문학에서는 그들의 조직화된 행동이 제시됩니다. 끝내 현실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억압의 현실, 부조리한 폭력 앞에서 결코 굴복하지 않고 일어서던 수많은 민중의 힘이 표현됐습니다. 저는 '분노의 포도'에서도 이와 같은 민중의 저항으로 작품이 귀결될 거라 예단했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의 미국 사회에서 이런 사고의 진행까지는 무리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에서 내내 언급하던 그들의 분노가 어떤 식으로든 형상화되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가시지는 않습니다.


1권에 이어 2권에서도 어머니의 존재감은 대단합니다. 어쩌면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인 인물이 톰의 어머니가 아닐까 싶습니다. 생뚱맞지만... 대학생 때,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를 정말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분명 결을 달리 하지만 톰의 어머니를 보면서 고리끼의 어머니가 떠올랐습니다. 아들에 대한 사랑, 현실을 보는 냉정한 눈, 그리고 그 상황에 맞는 뛰어난 판단력과 행동이 유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작품 속에서 저의 기대에 가장 부합한 인물이 어머니였기 때문에 더욱 애정이 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땅과 집을 잃어버린 후 자신의 권력마저도 잃어버린 남자들을 대신해서 실질적 가장의 역할을 하던 어머니, 그러면서도 자식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의 모습이 작품 내내 자리합니다. 작품 속 어머니의 모습은 우리가 리얼리즘 문학에서 기대하는, 이상화된 어머니가 아닐까도 싶습니다. 그러나 절망의 현실 속에서 가장 기민하게 움직이고 판단하는 이는 어머니가 아닐까요? 존 스타인벡은 그것을 이미 알고 있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을 해 봅니다.

1권을 정리하면서도 언급했듯 소설의 줄거리는 사실 간단합니다. 그러나 그 줄거리에 살을 붙이는 농민들의 핍진한 삶, 구체적인 현실과 인물의 묘사, 그 바탕에 깔리는 냉엄한 비판의식, 그리고 인간과 생명에 대한 긍정의 시선 등이 이 소설의 갖는 미덕이자 장점이 될 것입니다. 다만 줄기차게 흘러왔던 민중의 분노와 저항의식의 끝내 타오르지 못하고 끝을 맺은 것에 대한 아쉬움 혹은 실망감도 큰 소설입니다. 어쩌면 작가는 절망 속에서도 피어나는 인간애, 생명에 대한 사랑이 현실에 대한 조직적 저항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2권을 마저 읽고 작품 해설을 보니 장과 장 사이에 끼어있는 작가의 시선의 연결성, 결말의 처리 방식에 대한 극단의 평가가 있다고 하더군요. 충분히 일리있는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장과 장 사이의 설명 혹은 논평은 긍정적으로 생각했으나 결말의 처리에 있어서는 다소 부정적이네요. 결국 관점의 차이인 것이지요.

 

'분노의 포도'는 자본주의의 폭력성과 비정성 아래에서 신음하던 수천만의 미국인의 삶을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제시한 데 그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가난과 폭력이 인간을 억압하더라도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 끈질긴 생명의식이 있다면 그 어디에도 희망은 존재한 다는것을 역설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짧은 기간에 전세계의 패권국으로 자리매김한 미국이라는 나라의 성장에는 집과 땅을 잃고 눈물과 한숨, 절망과 좌절을 감내한 농민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고발하는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절망과 슬픔이 아직도, 여전히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민중의 피와 눈물을 먹고 이미 손쓸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하게 성장해버린 자본주의 사회에서 존 스타인벡의 시선이 유효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소설은 아주 자그마한 희망을 암시하면서 끝을 맺지만 현실은 그 작은 희망마저 삼켜버리는 신자유주의의 물결만이 도도하게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결국 '나'가 아닌 '우리'가 되어야만 이 미친 흐름을 바꾸거나 잠시나마 멈출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가 되기에 현실은 각박하기만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진 노인을 위해 젖을 물리는 로저샨이 되지 않는 이상,  그 꿈은 여전히 요원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랜만에 묵직한 소설 하나를 읽었습니다. 주위에 일독을 권해도 전혀 망설임이 없을 소설입니다. 독서의 계절, 톰 조드 일가를 만나는 추체험을 권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2권 3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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