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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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글쎄, 녹스는 것보다는 낡아서 못 쓰는 게 낫지! 그리고 난 사실 놀라울 정도로 건깅해. 감사할 따름이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하루이틀 아무 일 없이 생각이나 하며 지내는 것도 참 괜찮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블란치가 말했다.

 조앤은 웃음을 터뜨렸다. 구슬이 굴러가듯 작고 유쾌한 소리였다. 

 "생각거리야 얼마든지 있지 않을까?" 조앤이 말했다.

 블란치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지은죄에 대해서라면 언제든 생각할 수 있지!"

 "맞아, 그래." 조앤은 내키지 않았지만 예의상 맞장구쳤다.

 블란치는 그녀를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너라면 그 일을 오래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러고는 인상을 쓰면서 불쑥 말을 이었다. 

 "그러다 선행에 대한 생각으로 넘어가겠지. 그리고 네 인생에 주어진 축복들을 생각할 테고! 흠......모르겠다. 좀 지루하지 않을까. 궁금하네......" 블란치는 잠깐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몇 날 며칠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자신에 대해 뭘 알게 될까......"



 사람이 사는 시간이 모여 한 채의 집으로 눈에 보인다고 상상해 본다. 바닥을 반듯하게 만들고 고른 막을 입힌다. 철근과 콘크리트로 뼈대를 세우고 벽을 세운다. 어떤 벽은 외벽이 되고 어떤 벽은 칸막이가 될 것이다. 지붕은 안전하게 머리 위에 있고 바닥은 발아래. 그러나 그 외의 것. 이를테면 창문이라든지 커튼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집에는 굴뚝이 있나? 페치카가 있을까? 빅토리아 시대의 구조인가, 혹은 바우하우스의 입김이 서렸나? 무엇보다도, 사람의 삶이 한 채의 집이라면 모든 집에 다른 색을 입히는 특별한 개성, 영혼의 울림 같은 창의 위치와 크기는 어떻게 이렇게 제각각일까? 그 창문을 우리는  옳고 그름의 영역에서 볼까, 아니면 아름답고 추함의 영역에서 바라볼까? 




 애거서 크리스티가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여섯 편의 소설 중 한 편, '봄에 나는 없었다'를 읽노라면 이런 두 가지 영역이 조용히 서로 스미는 것이 느껴진다. 소설의 구조라는 측면에서 만나는 미추의 미학적 구조와 영역, 주제라는 측면에서는 가치판단의 영역. '타인을 자신의 잣대로 넘보지 말지어다'하는 명상과도 같은 잠언을 넘어서는 소설의 주제. 물론 작가가 빠른 속도로 쌓아올린 이 메시지를 책장을 덮고 나서는 머리에 보관할지 마음에 보관할지 손끝에 보관할지는 읽는 이의 몫으로 남겨두었으니, 이는 소설가가 꿈꾸는 최후의 마침표가 아닐까. 그 마침표는 주인공 조앤이 기차에서 만나는 동창 블란치와의 대화로, 그녀가 회상하는 어떤 사건으로, 낯선 곳에서 쓰는 편지로 마침표 이전의 안개로 조용히 쌓이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바버라에게

 이번 여행에는 별로 운이 따르지 않는구나. 월요일 저녁 기차를 놓쳤고, 여기서 며칠 발이 묶일 것 같다. 하지만 평화롭게 햇볕이 좋아서 난 무척 행복하단다.


조앤은 손을 멈췄다. 이제 무슨 말을 쓰지? 아기? 아니면 윌리엄의 안부? 바버라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던 블란치의 말은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그래! 블란치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블란치는 바버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척 이상하게 굴었다.

 마치 바버라의 엄마인 조앤이 딸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바버라는 걱정하지 마. 이제 괜찮을 거야."이 말은 바버라가 그때까지 괜찮지 않았다는 뜻일까?




 기차를 기다리며 낯선 곳에서 발이 묶인 중년의 여성 조앤의 생각이 빠른 속도로 변화한다. 구불구불한 비단길처럼 사막을 헤엄치다가 어느 순간 발이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일평생 하지 않던 일, 뒤돌아보기를 거쳐 마침내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기 주변의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까지 알아가는 길을 애거서 크리스티는 속도감 있게 드러낸다. 쓰는 이의 펜 끝에서 이루어졌던 속도감이 읽는 이의 눈 끝에서 기분 좋게 겹치는 순간. 추리 소설이 아닌 서정 소설의 외피를 썼지만 추리 소설 작가로서 발휘하는 겹겹 쌓인 단어가, 이 책은 애거서 크리스티였던 여자 메리 웨스트매콧의 책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앞서 나온 어떤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앞서 나타났던 징조가 끝부분에 다시 나타나니, 독자는 서둘러 책장을 넘기다가도 앞으로 다시 돌아가 그 낱말, 그 단어, 그 목소리를 마침내는 다시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독자가 경험하기 전 이미 조앤이 경험했던 일. 즉 그 생각의 구불구불한 길에서 언뜻 마주치는 첫모습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런던에서 멀지 않은 한적한 타운, 성공한 변호사의 아내 조앤. 정원을 잘 가꾸고 봉사활동을 하며 삼남매를 둔 중년의 여자. 성공한 변호사인 남편 로드니, 일찍 결혼한 에이버릴, 최근 중병에 걸렸으나 조앤의 간호를 받았던 바버라, 변호사가 되지 않은 것이 좀 아쉽지만 하고 싶은 농장 일을 하는 토니. 




 그렇다면 이런 대화는 어떨까. 

 





 "빌어먹을 사무소!" 로드니가 투덜거렸다. 

 "아, 로드니, 당신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무소를 싫어하지 않아요."

 "아니, 난 싫어해. 오 년 동안 거기서 일했다. 내 마음이 어떤지는 내가 똑똑히 잘 알아."

 "적응할 거에요. 게다가 이제 사정이 다르잖아. 아주 달라요. 파트너 변호사가 되는 거니까요. 그리고 결국은 업무에-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에게-관심을 갖게 될 거에요. 두고봐요, 로드니. 결국에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질 테니까."

 


 타인의 감정을 멋대로 판단하는 이상한 대화라고만 보기에는 더 많은 무엇을 담은 단락이다. 어떻게 저렇게 쉽게 속단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 부분은 읽는 이의 머릿속에는 분명, 다른 정체가 불명확한 어떤 도마뱀이 드나들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조앤이 애써 막고자 했던 생각의 어떤 흐름이 독자에게도 스며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부분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어둠 속을 빛이 가로지른다면, 그 빛이 우리의 삶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어둠이 곧 우리의 진짜 모습은 아닐까? 이러한 의문을 품다 보면 마주치는 길 끝. 결국, 문제는 나머지 밝혀지지 않은 어둠이 한 사람의 인생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가 아닐까? 




 미궁에 갇힌 이가 손끝에 잡은 가느다란 실 처럼 애거서 크리스티가 내미는 실낱같은 의혹을 따라 이 책을 읽어내려가 보면, 공간과 사유가 어우러진 미묘한 이중주가 드러난다. 그러나 이 이중주는 짝수가 아닌 홀수이며 협화음이 아닌 불협화음이다. 또한, 피아노와 목소리로만 허공을 떠돌다가 어느 순간 목소리만 남아 물방울처럼 귀를 조심스레 두드린다. 




 그 물방울은 불쑥 왈칵 조앤의 마음을 두드린다. 도마뱀은 물방울이 만든 구멍을 드나든다. 사막에 고립되어 생각 말고는 할 것이 없는 조앤은 머릿속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허물었다가 세우고, 그림자를 바라보고 그 허무한 그림자 속을 걷게 된다. 생각은 물살처럼 흔들리고 특별한 것이 없어도 묘한 느낌을 준다. 자신이 기억한다고 믿었던 사건과 실제 있었던 사건이 다르다는 것을, 애거서 크리스티는 조앤이 바라보는 신기루를 통해 가장 간단하고 단순한 비유로 읽는 이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소설 중반에서 조앤이 신기루를 보며 신기루 하면 나무나 마을이 떠올랐지만, 지평선 너머 물살이 묘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며 훨씬 더 구체이고 생생한 무엇이라고 깨닫는 장면을 이야기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블란치가 했던 말이 허공을 떠돈다. 







"몇 날 며칠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자신에 대해 뭘 알게 될까......"




 다시금 떠오르는 이 말은 인간이 얼마나 얄팍한지, 그리고 사람이 제각각 얼마나 다른 생각의 층위를 지녔는지를 말하는 중요한 실마리이기도 하다. 조앤과 같이 세상을 규정한 바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지닌 규율, 의무, 가치, 판단, 소속감이 세상 한 부분의 지축을 지탱한다면 블란치와 같은 이가 어느 순간 갑자기 드러내는 삶의 다양한 층위, 드러나지 않았던 어두운 부분이 다른 한 부분을 떠받치고 있을 것이다. 혹은 조앤의 남편 로드니가 드러내는 삶의 진실, 존중, 통찰력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제대로 바라보는가 하는 것인데, 애거서 크리스티는 이 문제에 관해서는 무척 비관적인 태도를 보인다. 바위섬이 모래의 성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구조를 레고 블럭처럼 하나씩 쌓아올려 조앤이 만든 것이 실은 커다란 허무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은 역설적으로 그녀가 겪었던 사건을 하나하나 해체하면서 보여준다. 스러지면서 일으켜 세우는 한 사람의 어떤 집.




 그리고 마침내는 그녀의 변화를 독자가 기대하는 찰나 로드니의 슬픈 혼잣말이 들린다. 꼭 그래야 한다는 필연, 인간이 자기 삶을 온갖 변수로부터 보호하려는 통제력, 자신의 삶을 안전함으로 도배하려는 오만함.

그 이전에 의식 밑바닥에 깔린, '판타지'로 분류하는 빛이 비치지 않아 보이지 않는 부분이 조앤에게는 안전한 삶으로 존재한다. 타인의 겉을 보고 속을 판단하려는 자의 치기 어림을 이야기하려 했다면 이 이야기는 조앤이 마침내 성찰 끝에 다시 기차를 타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 왜 하필 애거서 크리스티는 이런 대화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일까?




 에이버릴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영국과 독일이 전쟁을 벌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조앤은 정신을 차렸다.

 "기차에서 만난 부인도 그런 말을 하더구나.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어. 아주 지체 높은 부인인데,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아는 듯했어. 난 믿기지가 않는구나. 히틀러는 감히 전쟁을 일으키지 못할 거야."

 "글쎄요, 모르죠......" 에이버릴이 생각에 잠겨 대꾸했다.

 "아무도 전쟁을 바라지 않는단다, 얘야."

 "네, 하지만 사람은 때로 바라지 않던 일을 당하기도 해요."

 "나는 이런 대화가 몹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을 집어넣거든." 조앤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에 에이버릴은 미소만 지었다. 



 소설 속에서 남편 로드니가 세익스피어의 소네트 구절을 물어볼 때 머뭇거림 없이 전 소절을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암송하던 것도 조앤, 에이버릴이 유부남 의사와 사랑에 빠졌을 때 어른의 단순한 지혜로 에이버릴을 뜯어말리던 사람도 조앤, 로드니가 레슬리를 잘 도와주는 것에 흡족해하던 것도 조앤.

 소네트를 그렇게 암송하고 시와 소설을 탐독하면서도 작가가 숨긴 뜻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던 것도 조앤, 에이버릴이 그토록 탐닉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 실체에 관해서는 조금의 통찰력도 발휘하지 못했던 사람도 조, 실은 로드니가 레슬리를 그토록 사랑했으며 자신에게는 넌더리가 났다는 사실에서 도망치던 것도 조앤.




 이 끝에 드러나는 얕은 한숨이 로드니의 것이라는 것이 독자로서 슬프다면, 아, 다시 탄식. 




 어떤 이에게 성찰은 공간을 옮겨가거나 상황을 급반전시켜야만 가능해지기도 한다. 조앤이 사막에 가서야 자기가 도망쳐왔던 진실을 마주할 때 변화를 감지했건만 집에 돌아가서는 다시 밝고 유능하며 분주한, 성공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조앤을 볼 때 나오는 로드니의 중얼거림은 곧 독자를 향한 것이었다. 책장 속의 조앤은 그렇게 특출난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당신을 닮은 사람입니다.' 라고 애거서 크리스티가 펜을 내려놓으며 하는 혼잣말이 들리기에 독자는 다시금 의심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진실과 감당할 수 있는 허울이 만나는 지점이 어디인지 우리는 잘 판단해야만 하지만, 이것 역시 관성의 테두리를 벗어나기가 힘들다. 그 테두리를 벗어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그는 행복한 사람이리라. 







-따옴표는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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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팻 캐바나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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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쪽에서 부는, 남서쪽에서 부는 바람 때문에 에식스로 가게 됩니다. 북해를 횡단하려면 바람이 줄곧 서쪽에서 불어줘야 하지요. 하지만 프랑스로 가려면 바람 북쪽에서 불어줘야 하는데, 그런 바람이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다가 변덕스러워서요."



 곧 잃고

 곧 쓰러지고
 다시 잃을 것이었다가
 나는 그러나 이미 잃었음을 깨닫는 여정을 담은 이야기, 줄리언 반스의 작품.



 줄리언 반스의 'levels of life'는 그러한 길에 올라선 여행자의 한숨. 



 영국 맨부커상과 프랑스 메디치상을 비롯하여 다양한 문학상을 휩쓴 영국 작가 줄리언 반스의 작품을 떠올려 본다. 
 늦가을과 초겨울의 중간 온도의 사랑 이야기. 혹은 세상에 없는 이의 그림자. 모든 것이 허물어진 후 도착한 끝의 시작, 삶과 이 세계가 이끈 교집합과 합집합.

 

 

  

 사랑을 이야기할 때 느끼는 관계의 심연(내 말 좀 들어봐). 글쓰는 사람이 풀어야 하는 숙제(플로베르의 앵무새).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자신의 갈 길을 갈 때 인간이 느끼는 울먹거림의 회한, 그 다양한 층위(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그의 글에는 단어의 분명한 뜻과 장르의 다양한 얼개, 통찰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글 대부분은 '팻에게 바친다.'라는 헌사로 시작했다. 



 헌사의 주인공 팻 카바나가 단 한 번도 등장하 않는, 그녀 뒤에 남겨진 줄리언 반즈의 이야기.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라는 한글 제목으로 나온 'levels of life'는 영국을 대표한 문학 에이전트이자 줄리언 반스의 평생의 문학적 동지인 팻 카바나의 죽음을 읽는 줄리언 반스의 지도이다. 양피지에 쓰인 모르스부호와도 같은 지도. 겪지 않은 이는 볼 수 없다. 알 수 없는 자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내 팻 카바나가 죽은 다음 줄리언 반스가 남긴 자취를 '언젠가 내게도 이런 불상사가 생기면 참조해야겠다'라고 간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는 나도 검은 양복이 필요하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위도와 경도의 자취. 아무런 도움도 주고받을 수 없는 고립된 자의 말소리.



이제껏 하나인 적이 없었던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쳐보라. 그러면 세상은 변한다. 사람들이 그 순간을 미처 깨닫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세상은 달라졌기 때문이다. 


 앞으로 닥칠 것에의 예언.
 이미 겪은 일의 기록. 
 이야기 세 개가 이 픽션-논픽션에 있다. 

 '비상의 죄'에서는 사진과 비행을 함께 시도하여 땅 위의 사람들에게도 자신이 본 풍경을 선사했던 나다르의 이야기가, '평지에서'로 페이지를 넘기면 여배우 사라 베른하르트와 모험가이자 군인인 프레드 버나비의 가상의 사랑 이야기가. 그다음 이어지는 '깊이의 상실'에서 반스가 하는 이야기가 팻 카바나의 것이다. 이 마지막 챕터에 이르면 앞서 우리가 바라본 하늘과 땅이 지하로 연결된다. 이 챕터 세 개, 이야기 세 개, 커플 세 쌍이 우연을 되풀이한다. 그림자의 춤이 겹쳐서 줄리언 반스와 팻 카바나의 손을 이끈다. 두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사라 베른하르트와 프레드 버나비가 언젠가 기구에 올라타듯, 첫 번째 이야기의 나다르가 사라 베른하르트를 사진기에 담듯, 나다르가 헌신적으로 아내를 간호하듯, 반스가 카바나를 헌신적으로 간호하듯. 




 '팻에게 바친다.'로 시작하여 2012년 10월 20일 런던에서 줄리언 반스'로 끝맺는 기억.
 그 기억 도중, 반스는 여전히 죽은 아내와 장난을 친다. 죽은 아내는 도로 그에게 장난스러운 말을 건넨다. 두 사람은  뭔가를 나누고, 서로의 존재를 이끈다. 죽었으나 여전히 나타나 장난스레 그림자를 잡아채다 사라지고 몇몇 지엽적인 이야기 속에서 여전히 팻은 떠돌고 있다. 그녀는 곧장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반스를 통해 나타난다.
 죽은 그녀의 그림자는 집안 곳곳에, 그가 숨 쉬는 공기에 머문다. 그녀는 죽었으나 죽지 않았고 그는 살았으나 살아있지 않다. 



 살아있는 사람이 먼저 죽은 이를 땅에 묻고 나서 느끼는, 자신도 모를 어느 공간의 이야기. 읽노라면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파스칼 키냐르가 떠오른다. 중심도, 길도, 역사도 존재하지 않는 자기 생을 느끼는 일. 뒤섞인 모든 것이 알 수 없는 하나에 흡수되어 어떤 글도 쓸 수 없는 때를 살아가는 일이라고 뒤라스가 말했었다. 저 세상은 여기처럼 견고하지 않아, 당신 나룻배는 이미 썩었지만 바람 말고는 만질 것이 없다고 말했던 마랭 마래의 죽은 아내가 파스칼 키냐르의 손끝에서 슬며시 빠져나왔다. 이 지독한 상실 한 묶음 앞에서 위로는 길 잃고 기억은 더욱 난폭해진다. 견고해서 난폭하고 난폭해서 날카로워지는 미래의 역사. 



우리는 사라 베르나르가 빗방울 사이를 피해 다닌다고 주한 것처럼 총알 사이를 피해 다닌다. 그러나 언제나 느닷없이 목을 찔러오는 창이 있게 마련이다. 모든 사랑의 이야기는 잠재적으로 비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몇 가지 층위가 서로 스며들어서 세 번째 이야기, 줄리언 반스의 이야기에서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들린다. 비탄이 바꾸는 시간의 길이와 공간의 영속성. 반스가 말하는 상실의 사막, 무심의 호수, 황무지가 된 강, 자기연민의 습지, 기억의 (지하)동굴. 반스는 이 지도를 가지고 선 자는 누가 더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지, 내장이 더 많이 파열된 쪽이 누구인지의 문제도 여기서는 중요치 않다고 말한다. 오로지 부조리함 밖에 느껴지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반스가 내세운 메타포는 첫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나다르가 카타콤에서 찍은 사진, 두 번째 이야기의 소파 쿠션을 집어삼켜 총에 맞아 죽은 보아 뱀이었으나 결국, 그 자신은 메타포조차 필요치 않은 경우임을 느낀다. 이전에는 아내의 것이었던 열쇠고리에는 집 현관 열쇠와 묘지 뒷문 열쇠가 있다. 그것을 보며 그는 '이게 내 인생이야.'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꿈속으로 내려가고, 또 기억 속으로 내려간다. 그렇다. 예전의 기억은 과연 돌아온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우리는 두려움을 배우고, 다시 찾은 기억이 원래 그대로인지 확신할 수 없다. 어떻게 똑같을 수 있겠는가. 당시 거기 있었던 사람이 더 이상 확증을 해줄 수 없게 되었는데. 우리가 한 것, 우리가 간 곳, 우리가 만난 사람들, 우리가 느낀 감정을. 우리가 함께하게 된 사연을, 그 모든 것을. '우리'는 씻겨가고 이제 '나'만 남았다. 쌍안경의 기억은 단안경이 되었다. 



 상실의 슬픔 앞에서 아니 에르노는 애간장이 끓는다, 마음이 벼랑에 내몰린 것 같다, 이런 표현을 떠올린다. 줄리언 반스는 프랑스어로 이미 죽은 팻의 안부를 묻는 이에게 답하면서 '내가 이걸 이제 프랑스어로까지 말해야 한다니.' 라고 생각한다. 지독한 아픔을 느낀 이가 혼자가 아님을 떠올리는 아니 에르노와 이런 상황에서조차 유머 감각을 발휘하는 줄리언 반스 중 누가 더 낫다고 할 것인가. 앞서 말한 비교가 쓸데없이 지는 지도인데. 위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어제가 오늘인가, 내일이 어제였던가. 휘청이고 들끓다가 땅속으로 푹 꺼지는 이 지도를 들여다보면 언젠가 바람이 내 속에서 멈추었던 날이 있기나 했었나 의아해진다. 한 사람이 겪는 고통의 깊이가 궁금해진다. 곧, 무엇이든 알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건만 막상 알고 나면 고개를 젓는 존재 역시 인간이 아니었던가.




 균형, 속살, 끝. 놓치지 않는 기억 한 자락.

 

 

 

 이 책의 감정적인 중심이면서도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천칭 같은 무게중심을 잡는 챕터가 가장 마지막 챕터임을 마지막 장에 이르른 독자라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앞서 하는 이야기 두 개는 물론 어떤 이들의 앞선 경험은 기름과 물처럼 겉도는 것이 아니라 수채화의 덧칠처럼 함께 어우러지고 스미는 것임을, 반스의 나지막한 음성이 이야기한다. 반스는 애도와 슬픔의 위험한 매혹까지 붙잡는다. 신중하게 선별해서 조심스레 드러나는 명확한 감정과 또렷한 표현. 이 책이 술자리 돌림노래 같은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나 제 나름의 의미를 드러내는 힘은 바로 이런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우주가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는 우주가 그렇게 끝낸 일의 부산물이다. 어쩌면 비탄 또한 그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그 아픔과 싸웠고,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슬픔을 극복했고, 우리의 영혼에서 녹을 긁어냈다고 생각하지만, 그 모든 일이 일어난 때는 비탄이 다른 곳으로 떠났을 때, 자신의 관심사를 다른 데로 돌린 때이다. 우리 쪽에서 먼저 구름을 불러들인 것이 아니며, 우리에겐 구름을 흩어지게 할 힘도 없다. 그 모든 건 어디선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예기치 못한 산들바람이 갑자기 불면서 일어난 일일 뿐이고, 그렇게 우리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방향으로 이끌려가고 있는가? 에식스로? 북해로? 만약 이 바람이 북풍이라면, 그래서 운이 좋으면, 우리는 프랑스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 



-따옴표 글은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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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뒤바꾼 아이디어 100 100 IDEAS 시리즈 2
리차드 웨스턴 지음, 김광현.서울대 건축의장연구실 옮김 / 시드포스트(SEEDPOST)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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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를 바라보는 이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우리는 늘 철근, 콘크리트, 나무, 벽돌, 유리로 만든 건축 속에 살면서도 쉽게 잊는다. 우리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우리가 만든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샌프란시스코의 골든게이트 브릿지를 보면서, 뉴욕의 마천루와 런던의 코쿤을 보면서, 파리의 퐁피두와 로마의 원형경기장을 보면서도.


'뉴욕에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만큼 철골구조(강구조)를 집약적으로 잘 보여주는 건물은 없다. 102층으로 이루어진 이 건물은 놀랍게도 단 14개월 만에 지어져 40년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책속에서.

건축을 뒤바꾼 아이디어 100가지. 이 명쾌한 100이라는 한정 속에는 부정이 없다. 지은이 리차드 웨스턴이 시작하는 글에서 밝히듯, 이 책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건축의 흐름을 주도한 아이디어와 이 아이디어가 선별된 건축과 어떻게 그 흐름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건축가의 눈으로 본 것이되 낯설지 않고, 편향과 파편화가 있되 외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미술공예운동이 어떻게 건축으로 모습을 드러냈나? 바우하우스는 왜 중요한 것일까? 고대 그리스 기둥 양식과 인본주의가 지금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저자는 평범한 특성을 기술의 발전과 건축가의 생각, 형태와 기능에의 고민을 담은 건축물과 함께 제시한다. 이것은 교과서와 같이 일정한 흐름에 따라 엮은 책이 아니다. 일정한 범위를 지정하지도 않았다. 대신 공간을 구성하는 수단을 좀 더 실용적으로 다루었을 뿐이다. 단, 백 가지 아이디어를 연대순으로 간략히 소개하며 개념을 소개할 뿐이다. 이 흐름을 따라가노라면 논점이 최근의 혁신에 집중되었으며 아이디어와 아이디어 사이를 오가는 여행을 하는 기분이다. 어쩌면, 이 다양한 생각을 잇는 여행은 깊고 넓은 가벼운 나들이와도 같은, 시계토끼가 지닌 시계를 살짝 엿보는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벽, 천장, 창문, 기둥, 벽돌, 계단 같은 것으로 먼저 드러났다.






사진은 마요르카의 요른 웃존의 자택, 칸 리스. 전망을 특별하게 선사하고 빛과 공간을 나누는 방식을 보노라면 창문이 우리에게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공기, 건물의 표정을 보여주는 건물의 눈. '창문을 설계할 때는, 여자친구가 밖을 내다보며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라'는 알바 알토의 말을 떠올리면 창문이 사람에게 어떤 것인지를 단박에 알 수 있다. 이 수사학은 창문이 실용적인 이유 외에도 건물의 표정을 결정짓는 요소임을 일깨워 준다.

르네상스가 전성기를 이루던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고전적인 비례를 따르는 창문, '벽보다 유리가 더 많다'는 농담이 오가던 하드윅 홀의 유리의 성과도 같은 수많은 창문, 20세기 들어 나타난 알루미늄과 강철, UPVC로 이루어진 실용적인 창문까지, 창문은 건축의 성격을 나타내는 눈과도 같다. 절벽의 저 창문을 바라보노라면 그 공간이 한없이 깊어, 바다와 하늘이 하나로 이루어진 듯한 극적인 효과까지 느껴진다. 감성과 질서, 장식과 형태는 그러나 비단 창문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조화와 질서를 이루는 다른 영역을 살펴본다. 코니스, 프리즈, 기둥머리 등으로 이루어진 기둥을. 아주 먼 옛날부터 당연히 그 자리에 있는듯 지금도 있는 기둥을 훑어보면, 아래와 같은 양식이 눈에 들어선다.








책에서는 '오더'라고 영어를 한글로 굳이 옮기지 않았지만 잰슨의 '서양미술사'를 참조하자면 역자는 오더를 양식이라고 옮겼다. 이 양식이 어떤 기원을 가졌는지는 학자들 사이에서 아직도 논쟁이 되고 있다 전하는데, 서양 건축 역사에서 그 단어 자체가 그러하듯, 양식은 특정한 형상, 형태, 모양, 비례를 넘어 음의 높이, 지속, 조화와도 같은 전체적인 체계를 아우른다. 콜로세움만 하더라도 아래에서부터 토스카나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기둥이 함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오더'라는 단어가 갖는 느낌이 좀 더 명확해지는 느낌이다. 추상적인 연상작용, 상호 관련성, 일괄된 방식.


책에서 소개하는 그리스의 건축 양식은 오른쪽에서부터 도리스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이 있다. 가장 복잡한 상부를 가진 도리스식은 아키트레이브, 트리글리프, 메토프로 조직된 프리즈와 코니스가 그 특징이다. 분명 세 가지 고전적 건축 양식이 그리스에서 나타났으나 가장 코린트식은 실제로는 이오니아식의 변종이라 할 수 있기에 실제로는 이오니아식과 도리스식, 이 두 가지 양식만 존재한다 하여도 무방하다. 건축학자들이 도리스식 양식에 더욱 집중하는 이유를 잰슨은 도리스식이 가장 기본적인 양식이며, 가장 먼저 나타나 다른 양식에 비해 훨씬 정확한 모습을 갖추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책과 잰슨의 책을 번갈아 들여다보노라면 결국, '양식'은 건축의 형태가 기능과 기술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그 목적이 아름다움의 추구에 있는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어쩌면, 잰슨의 해석처럼 이 두 가지 입장이 서로 어우러질 때 그에 대한 답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초기 고딕 양식의 아미앵 대성당의 형태를 바라보노라면, 가벼워진 조적 구조가 보인다. 끝이 뾰족한 아치, 높이에 대한 폭의 비례. 이 책에서 지적하는 석재 건축의 가능성에 나타난 혁명적인 변화가 아치에서 단번에 드러난다. 공간을 가로지를 수도 있고 석조 벽에 개구부를 낼 수도 있는 잠재력. 누르는 힘은 강하지만 밀고 당기는 힘에는 약한, 벽돌로 만들기에 이상적인 구조. 이 책에서는 구조상의 건축기법에 주목하고 있으나 나는 잠시, 고딕 양식이 가져다주는 그 특징을 떠올려 본다. 초기 고딕, 전성기 고딕, 고전적 전성기 고딕, 국제 고딕, 국제 양식. 얼핏 생각하면 앞의 세 단어가 시대 명칭이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실은 서로 다른 양식적 특성에 따른 분류이다. '위대한 성당의 시대'였던 1150~1250년의 건축. 처음 건축에서 시작된 이 단어는 회하 쪽으로 그 비중을 옮겨가면서 건축적인 성격이 회화적인 성격으로 대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 고딕의 효과는 '가벼움'에 있으리라. 회당의 벽이 얇아 보이는 효과, 높이에 대한 깨달음. 시간이 좀 더 흐른 1400년대, 유럽 전역을 뒤덮은 놀랍도록 통일된 양식, 국제 고딕이 꽃피기까지, 고딕은 높이와 무게에 관한 인간의 개념을 다시금 창조해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건축은 저 홀로 돌연 생겨나지 않는다. 사진의 도나토 브라만테가 설계한 원형의 순교자 기념 성당은 로마에 위치한 것으로, 이 책의 설명으로는 르네상스 인본주의자들이 고대 로마문화와 이상적인 기하학을 지향했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더는 중세에 살고 있지 않음을 자각하는 목소리, 인간 스스로 이름을 부여한 최초의 시기, 과거와 현재의 구분. 이런 것들이 생겨난 '새로운 시대'로 서서히 그 이름표를 붙여나간 시기.


스위스 미술사학자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우리에게 있는 예술적인 재능, 인간의 주관성을 강조하였다. 일반세상의 모든 사물과 상태에 대한 객관적 인식과 태도를 부르크하르트가 생각했다면 사진의 순교자 기념 성당은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의 고전적 형태, 신체 치수의 비례에 기반을 둔 건축에 대한 생각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이 아름다운 제퍼슨 격자를 보며 나는 잠시 말을 잊고 오랜 시간, 이 사진을 들여다보았음을 고백한다. 한 변이 1마일로 이루어진 이 사각의 격자. 서부 개척을 용이하게 하려 도입된 것인데 하늘에서 내려다본 시카고의 사진을 보노라면 로마의 군사 주둔지 계획에서 비롯된 격자 시스템이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도시 풍경에서도 여전히 반짝임을 볼 수 있다. 교차하고 평행한 선, 미국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질서와 합리성을 여전히 증명해 보이는 격자의 역사는 이 책에서 이르듯 '공간의 질서를 그물 안에 넣는' 시도였을 것이다. 평등주의에의 지향, 인체와 비례적으로 관계를 갖는 원주 지름을 이용하는 고전적 방식에서 벗어난, 원주의 중심과 중심 사이의 거리를 측정했던 그리드 사용은 분명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사용을 염두에 두고 사용한 것. 이러한 격자 사용을 보면 지금 흔히 우리가 바라보는 수많은 양식과 형식은 아주 먼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자연의 원칙을 건물에서도 따른다."-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땅, 그 자체에 부응하는 행위. 공간보다 장소에 갖는 관심. 재료의 본질을 살리는 건축.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낙수장을 보노라면 대지의 기운이 어떻게 형상화되는지가 보인다. 지질학적 성층, 나무줄기 주위를 감싼 콘크리트 그리드 구조. 이 낙수장을 자세히 보면 귀퉁이가 둥글게 처리된 것이 재미있다. 어떻게 콘크리트가 둥글게 나타날까, 생각하는 즉시 떠오른다. 콘크리트는 본래 액상 재료였음을.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 재료를 다루는 태도, 재료의 특성과 본질에서 나타나는 근본적인 형태.






베네치아 출신 안드레아 팔라디오는 인정된 양식에 자기 이름이 붙어있는 최초의 건축가이다. 팔라디오의 작품은 그리스와 로마 신전건축의 기반이 되는 형식적 원칙을 엄격하게 해석함으로써 전 세계에 영향을 두루 미쳤는데, 이는 그의 저서인 건축사서의 출간 때문이었다. 이 건축사서에는 건물에 대한 실무적 조언, 설계에 대한 체계적인 규칙만이 아니라, 고대 로마 건축과 팔라디오 자신의 계획안을 실측한 도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책 속에서


팔라디오의 이러한 고전적 본보기를 따른 건축물 중 하나가 사진의 치즈윅 하우스. 이후 주택, 공공기관에 많은 영향을 준 팔라디오의 건축은 사진에서 전하듯 주택, 건물의 정면에 신전의 정면을 사용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빌라 로톤다의 모든 장식을 떼어낸 재해석. 주택 옆에 나란한 부속건물...... 대통령이자 아마추어 건축가이기도 했던 토머스 제퍼슨은 자신의 건축 경전이라고까지 부른 '건축사서'에 따라 자신의 가족 사유지와 버지니아 대학교를 설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심지어 백악관도 팔라디오주의의 아일랜드풍 변형임을 이 책을 통하여 알게 되었는데, 건축이든 미술이든 어떠한 사조의 중요성은 후세에 끼친 영향이 그 맥락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기준 삼아 판단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내가 느끼는 미국의 이미지가 팔라디아니즘에 따른 것이었다니!






그런데 이러한 건축사조가, 아카데믹한 양식이 그 양식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위의 설계도를 통해 알 수 있다. 보자르, 프랑스어 그대로 옮기자면 BEAUX-ARTS. 이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의 장 니콜라 루이는 1830년 출간한 그의 저서에서 저 설계도를 통해 다양한 교회 설계가 비교하고 있다. 화려한 장식, 엄격한 방법론. 초점을 고전주의 미술과 건축에 두고 회화, 조각, 건축으로 교육과정을 나누고 당시 건축 실무를 가르친 프랑스 국립토목햑교는 지금에도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보자르를 굳이 지금에 와서 다시 떠올리는 것은 그 명맥을 짚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현재 주요 공과대학의 교육 시스템(아이디어 구성, 에스키스, 부공간과 주공간 개념)에 영향을 주었고 뉴욕 그랜드 센트럴역, 버클리의 대학 건물과 파리 오페라 극장을 둘러보는 작업의 일환이다. 즉, 현재를 훑어보는 일이다.





그리고 여기에 시대정신, 세계의 계획을 각 시대가 펼쳐나가는 것이 역사라고 보았던 칸트, 특정 사회나 문명의 정신을 형성하고 진보에 그 위치를 규정하는 능동적인 힘이 시대정신이라 보았던 헤겔의 철학이 있었다. 신고전주의자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의 물음. '모든 중요한 시기는 후에 그 시기의 고유한 건축 양식을 남겼다. 우리는 왜 우리만의 양식을 찾으려 노력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건축의 영역에서 근대를 향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교장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바우하우스 건축 디자인 학교의 건물을 들여다보면 그 어느 건물보다도 당시 기계시대의 정신을 형상화하려 했던 의지가 느껴진다. 기계의 효율성, 수공예품의 대량생산. 이 지점에서 나타난 기계시대라는 낱말. 강철, 철근 콘크리트, 유리. 벽을 아예 전면 유리로 대체한 저 바우하우스 작업장 건물을 실제로 보면 어떨까. 투과와 반사를 동시에 하는 유리를 전면에 두른 저 구조를 보노라면 생각지 못했던 생동감이 느껴진다. 1920년대 초반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말이 떠오르는 순간.


"건축은 공간으로 변환된 시대의 의지이다. 건축은 살아있고, 변화하며, 늘 새롭다.'






르 코르뷔지에의 빌라 사보아. 독창적이고 아름답다. 왜 아름다우며 왜 독창적인 것일까? 이 책에서 저자는 르 코르뷔지에 건축의 아름다움을 다섯 가지 특징에서 찾는다. 자유로운 기둥의 필로티, 옥상정원, 자유로운 평면, 가로로 긴 창, 전면부의 자유로움. 강화 콘크리트로 만든 기둥, 추상적으로 존재하던 '공간 블록'에의 표현, 기계적인 효율성을 벗어난 생활을 위한 설계. 활짝 열려있으면서도 사생활이 보장되는 공간. 르 코르뷔지에의 양식은 참신하며 명료하며 정확한 형태를 보인다. 잰슨의 말을 빌리자면, 어쩌면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이 지은 주택에 의해 하나의 새로운 인간이 창조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설계 개념이 전통적인 주택 개념과 다르다는 점을 표명하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서양미술사 참조).






회화와 건축을 따로 떼어 볼 수 없음은 자명한 이치이지만, 앞서 고딕을 살펴보며 건축에서 시작된 이 이름표가 회화로 넘어갔음을 다시 생각해본다면, 이 반대의 현상이 추상에서 드러난다. 이 책에서 68번째 아이디어로 다룬 '순수한 형태 언어', 추상.


추상을 처음으로 옹호한 선언은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가 1912년에 출간한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에 담겨있다. 당시 칸딘스키는 독일 표현주의 집단에서 활동했는데, 이 집단을 통하여 처음으로 온전하게 만들어 낸 추상적인 건축물이 바로 에리히 멘델존의 설계로 등장한 아인슈타인 탑이다. ... 추상은 급진적인 새로운 표현 형식일 뿐만 아니라 영국 비평가 허버트 리드가 1935년 글로 썼던 표현을 빌자면 예술과 건축의 영원한 성질을 '신성하게 유지하는' 수단으로서도 간주되었다. 이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새로운 개념에 대해 주장하면서 스스로 왜 '보수파'라고 묘사했는지, 그리고 르 코르뷔지에는 '로마의 교훈을 끝없이 격찬하면서도 어떻게 건축 혁명을 주창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대답이었다.-책속에서


추상, 그 비구상적 작품. 근대주의의 특징, 그 개념 중의 하나. 어쩌면 이는 어떠한 연관도 없는 새로운 건축일 것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유니티 템플에서는 정방형 격자가 등장한다. 비율과 구조를 통제하는 이 격자는 추상의 특징이 건축에 어떻게 투영될 수 있는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앞서 말한 순수 형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하나의 언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르 코르뷔지에가 하나의 새로운 인간이 탄생할 수도 있는 건축을 생각했다면, 스위스 발스에 있다는 피터 줌터의 온천 욕장은 모든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건축이 아닐까. 인간이 자신의 신체로 느낄 수 있는 모든 강렬한 느낌. 신체로 경험하는 건축물을 소개하면서 저자는 후설, 하이데거, 메를로 퐁티가 이야기하는 현상학을 설명한다. 체화된 존재의 경험, 형태의 복잡함과 규모를 강조하던 건축이 이제는 경험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일부러 노력하지 않고도 느끼는 감각과 삶의 문맥, 일상과 마주하는 공감적 태도를 통한 현상학적 환원.


줌터가 설계한 온천욕장에는 설재 벽과 콘크리트 지붕 사이의 빛이 있다. 공기의 흐름이 보일 것이다. 아마도,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이 생활세계에서 열릴 것 같은 느낌이다.






보는 순간 '지금' 볼 수 있는 건축이라는 느낌이 든다 했는데, 설명을 보니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캘리포니아 과학 아카데미. 초록 융단을 덮은 지붕, 에너지 효율, 자연순응형 설계. 이제는 건축물의 생애주기와 생태 발자국을 전체적으로 바라보고 평가하고자 하는 시기. 급격한 오염, 급속한 인구 증가. 지속가능한 개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경제학자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 그러나 렌조 피아노의 설계를 본다 하여도, 이 쟁점에 체계적으로 대응하는 시스템은 아직 찾아보기 어렵다고 저자는 판단한다. 이를테면 '옛날 수도자가 털이 섞인 거친 천으로 만든 옷을 입듯이, 친한경 자격증처럼 식물을 담고 있는 노골적인 생태 건축물을 넘어 건축의 질을 혁신하는 지속 가능한 건축물을 찾아내기란 아직도 어려운 실정이다.'와 같은 문장을 읽노라면 환경 건축, 지속가능성, 건축물이 신축 건축물에는 효과적일지도 몰라도 기존 건축물에서는 적용하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이 보인다. 특징과 맥락을 짚고자 하는 평가기준.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 이 사진의 왼편에는 발바오의 구겐하임이 있었다. 수평의 바닥과 수직의 벽, 직교 구조에 대한 공격이라는 이름표를 단 '해체', 는 이 챕터의 이름이 그러하듯 순수한 형태를 위한 꿈의 파괴이다. 저자가 붙인 이름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다 펠릭스 누스바움관을 떠올렸다. 내부의 불안정한 구조, 지하 요새를 연상시키는 공간. 다니엘 리베스킨트는 당시 펠릭스 누스바움관을 설계하며 진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생애와 작품을 이어주는 비극적 관련성을 표현하고 건물 자체가 기념물과 같은 상징성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른 책을 잠시, 서경식의 '고뇌의 원근법'에서 서경식은 '경사와 비스듬히 날카롭게 뻗어 나가는 평생선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극히 기능적이면서도 방문자의 심리를 끊임없이 불안감과 위기감에 몰아넣는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이 책의 사진으로 눈을 돌려 본 베를린의 유대인 박물관.


무너질 듯 말 듯 보이는 선. 직교와 질서에 대한 도전. 어쩌면 데리다가 말한, 군림, 지배, 권력, 해체와 타자, 대립항이 분해와 탈중심화, 불연속으로 드러난 것일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던 해체와 구성의 특징은 렘 쿨하스의 머리를 거치면 이렇게, 직물과도 같은 형태를 드러낸다. 주름이 있는 건물. 캐드와 3D 모델링, 스플라인 기법의 패키지를 이용한 이러한 설계는 구성요소에의 관심과 주름 잡힌 형태, 다양한 요소의 복잡한 결합과 구조체의 생성을 가능케 했다. 그리하여 사진의 시애틀공공도서관. 구체적이고 기술적인 이러한 기술은 미국의 디지털 건축분야의 선구자 그렉 린이 '디지털 고딕'이라고 칭한 이러한 형상의 구현에 일조하고 있다. 이질적인 장비로 둘러싸인 친숙한 주름을 보노라면 사람이 생각하는 복잡하고 다양한 구상이 느껴진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이 만드는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된다. 개념과 아이디어는 다른 시공간 속의 서로 다른 사람들 속에서 생겨난 것. 어떻게 처음 반짝였을까. 그 '어떻게'를 이 책을 읽는다 하여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도 말하였듯, 앞으로도 그것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함께 길을 걷듯 같이 호흡하는 철학과 회화, 조각과 건축의 대화 도중 탄생한 사진의 아름답고 놀라운 건축을 바라보노라면 평범하지만 특색있는 흐름이 엿보인다. 저자는 전문용어를 최대한 덜 사용해가며, 그러나 굳이 사용해야 할 때에는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며 자신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백 가지의 재료와 역학, 특성과 개념을 설명한다. 다양한 아이디어의 유형, 연대순 정렬, 그리하여 나타나는 이 흐름. 개념과 개념 사이를 오가는 친절한 설명. 세심하면서도 친숙하고 일상적으로 보이면서도 전문가의 기술이 엿보이는 건축의 한 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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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3-09-15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사놓고 안읽고 있다가, 올초에 집에 놀러온 조카에게 줬어요. 이제 막 건축학과에 들어간 신입생이라 관심을 보이더군요. 그 이후 다시 구입하진 않았는데.. 새롭게 관심이 가네요.

오늘 막 읽은 유하니 팔라스마의 '건축과 감각'을 보면, 고딕성당의 기둥배치는 그레고리오 성가와 관련이 깊다네요. 건축은 늘 흥미로워요. 10대 후반에 누군가 또는 뭔가가 자극이 되었다면, 저도 건축학도가 되었을지도...

Jeanne_Hebuterne 2013-09-17 12:40   좋아요 0 | URL
dreamout님, 저는 이 책을 처음 접했는데, 역시 먼저 알고 계셨군요! 개념을 쉽게 풀어나가면서도 전문용어를 알맞게 써서 관심있는 일반인도, 전공자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개념을 다 읽지 않고 사진과 간략한 설명만 읽는다 해도 시간가는 줄 몰랐지 뭡니까.

고딕성당의 기둥배치가 그러했군요! 이 책에서는 계속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회화와 건축, 철학을 넘나드는 시도가 보이는데 저는 서양미술사와 함께 훑었답니다. 어떤 분야이든 그 하나만 외따로 있지는 않은 것 같아요.

덧-이미 dreamout님께서 10대 후반에 받으신 자극이 지금의 dreamout님을 만들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제가 dreamout님을 잘 모릅니다만 아쉬워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곧, 추석, 잘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2013-10-02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16 1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국 장식미술 기행
최지혜 지음 / 호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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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샤를 불의 서랍장 코모, 페트워스 하우스 수집품>



말없이 자리잡은 도자기, 태피스트리, 창틀, 의자, 테이블, 이런 것에서 우리가 무엇을 보아야 할까?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 영국의 어느 곳에 깃든 그 흔적을 찾으면, 무엇이 손에 잡힐까? 장식 미술은 무엇일까? 너무 멀리 있는 것을 섣불리 궁금해한 것은 아닐까?


이 책을 집어들기 전 내 머릿속에 스친 생각. 장식 미술은 차치하더라도 그 단어의 묘한 조합, 장식+미술이라는 개념조차 의문스러웠던 상황. 이 책은 1800년대 영국의 저택을 답사하며 사진과 간단한 설명으로 마치 여행지 안내자를 옆에 둔 것 마냥 술술 책장이 넘어갔다. 처음의 의문은 아마 저자도 가졌던 듯, 책 앞머리에서 발견된다.



"순수와 장식의 차이가 무엇인가?" 이 애매한 선 긋기를 확실하게 정하는 것이 가능할까마는, 굳이 그것을 나눈다면 가장 중요한 잣대는 '아름다움'외에 '쓰임'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아름다움 그 자체의 자율성, 미적 가치의 산출이 목적이면 순수미술이고, 쓰임이라는 효용 가치가 목적이면 장식미술이라고 나눌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것이 두부 모 자르듯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처음부터 감상하기 위해서 만든 도기 접시는 순수미술품인가 아니면 자식미술품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본디 목적으로 보면 순수미술품인데 실생활에서 쓰일 수도 있는 그릇이니 말이다.-책속에서


순수와 장식, 혹은 일상에 스며든 그 흔적을 이야기하는 책. '그 너머' 혹은 '이곳에' 있는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는 저자의 노력은 런던과 런던 외곽의 박물관과 컬렉션, 하우스, 홀을 둘러보며 남긴 곳곳의 사진과 디테일에서 드러난다. 400년간 영국 중산층의 삶을 한눈에 보여주는 제프리 박물관, 프랑스 장식미술품의 메카 월리스 컬렉션. 자기 인형 컬렉션이 있는 펜튼 하우스. 화가 레이튼의 집 레이튼 하우스, 모더니즘 건축의 윌로우 로드 2번지 하우스 2, 여러 번의 결혼을 통해 신분의 사다리를 오르며 유리성을 지은 베스 오브 하드윅의 하드윅 홀. 신고전주의 디자인의 절정을 보여주는 오스털리 하우스, 미술공예운동으로 러스킨과 그 이름을 함께 하는 윌리엄 모리스의 레드 하우스까지, 저자가 다녀간 곳곳에는 건축, 공예, 회화, 작가, 정치의 흔적이 있다.



기록, 쓰임, 감상, 소통, 가치, 효용. 이런 단어들이 두서없이 머릿속을 오가도 책장은 잘만 넘어갔다. 쉬엄쉬엄 구경하게 만드는 사진과 설명. 구분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머리 후 드러나는 흔적. 기능을 버리지 않은 아름다움, 아름다움 그 자체로 존재하는 무엇, 무엇보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아름다움에 관한 생각. 아름다움은 계속 그 그림자를 바꾼다. 심지어 개념도 그 그림자를 숨겼다 드러내기를 반복한다. 달라지는 경계, 그를 기점으로 드러난 흔적을 따라가는 여행이 이 책을 펼치면서 시작된다.



<제프리 박물관, 1745년 거실>


제프리 하우스는 400년간 영국 중산층 가정의 거실을 한눈에 보여준다.
참나무 식탁과 의자가 있는 1630년대의 홀. 바닥에는 골풀을 엮어 만든 자리가 있고 수납장과 벽난로가 있다.
시간을 건너뛰어 1745년의 거실에는 중국 명나라의 영향이 보인다. 참나무는 마호가니로 바뀌었고 중국식 찻잔과 주전자가 있다.




<제프리 박물관, 1910년 거실>


이로부터 45년을 더 나아가면 이제 벽에 나무판 대신 벽지가 보인다.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판화 액자, 치펀데일 스타일의 책상. 소박한 느낌을 주는 가구의 1910년의 거실, 이케아의 조언을 받아들였는지 마침내 꽃무늬가 사라진 현대의 거실이 차례로 등장한다.



<제프리 박물관, 1998년 다락방을 개조한 거실>


어느 소박한 가족의 일상이, 어쩌면 돈에는 쪼들리지는 않았을 듯한, 당대의 분위기가 녹아든 생활 공간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제프리 하우스를 둘러보면 생각보다 다양한 흐름이 보인다. 델프트 도기, 본차이나, 치펜데일, 신고전주의, 그리스 양식, 영국 전통의 느낌. 시간의 흐름이 눈에 보인다. 앞으로 이 책에서 속속 드러날 흐름을 간단하게 소개하는 제프리 하우스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보여주는 이 책의 분위기를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맨체스터 스퀘어의 월리스 컬렉션, 큰 거실 전경>




<월리스 컬렉션의 일부, 코담배 갑>



화려한 호사스러움은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프랑스 장식 미술의 메카라는 소제목을 붙인 이 챕터를 들여다보면 내도록 눈이 호사를 누린다. 금을 입힌 청동 장식, 프랑스 루이 15세의 애첩 퐁파두르 부인이 후원하던 세브르 고앙의 자기, 또한 그녀가 직접 부셰에게 주문한 그림, 붉은 색에서 초록색으로 색감이 달라지고 직각에서 타원형으로 형상이 바뀐다. 칠기, 크리스탈, 조개, 귀갑, 대리석, 도자기. 이 다양하고 값비싼 재료가 작은 코담배 갑 스너프 박스에 담겨 있다. 바라보노라면 영국 하트퍼드 가문이 소집한 후 국가에 헌납한 이 컬렉션 속에 있으면 아마도 시간과 공간을 혼동할 것만 같다. 이런 것이 로코코인가. 감미롭고 달콤한 저녁의 시간. 자그마한 은밀함, 경쾌한 향수의 잔향. 이 화려함이 이후 계몽주의와 신고전주의의 등장으로 막을 내린 것이 잠시 아쉬워지기까지 하는 순간.




<치즈윅 하우스>


치즈윅 저택에는 일체의 허세가 없다. 서양미술사-잰슨의 설명을 잠시 참조하자면 밀집된 기하학적인 구성으로, 이 건축 양식이 이전의 고전주의 양식과 다른 점은 건물의 외형이 아닌 설계의 동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 결과 바로크 양식과 비교하면 훨씬 편안해 보이고 평면적이고 균일하다. 저택 안을 들여다 보면 로마 신전을 본뜬 듯한 장식이 보인다.
당시의 고전을 되살리려는 복고의 경향이 계몽주의와 결합하는 순간은 이런 것이 아닐까. 귀족과 왕족의 화려한 로코코에의 반발. 자연과 이성으로의 회귀. 독일의 미술사학자 빙켈만이 제시한 그리스의 고결한 단순성, 조용한 위대함. 치즈윅 하우스의 구석을 훑는 사진을 들여다 보면 이런 것들이 보인다. 어느 장식 하나도 저 홀로가 아니며 전체가 하나를 이룬다. 저택을 나오면 깍거나 다듬지 않은 자연으로 돌아간 듯한 영국식 정원이 펼쳐진다고 한다. 당시 벌링턴 경과 윌리엄 켄트가 치즈윅 저택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장식과 표현을 넘어선 그들의 생각이었을 듯하다.




<페트워스 하우스, 화가 터너가 작업실로 사용한 서재>



런던 근교로 나가면 페트워스 하우스가 있다.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 필사본이 있는 곳. 1250여 권의 방대한 개인 소장 도서가 있는 곳. 페트워스 가문의 10대 공작은 궁정 초상화과 반 다이크를 후원했으며 11대 공작 다음의 엘리자베스 퍼시는 치정 살인을 주도하기도 했다. 프라우드 공작이라고도 불린 6대 서머싯 공작은 어린 딸이 자신이 잠든 새 건방지게 의자에 앉았다는 이유로 우산 2만 파운드를 깎았으며......이 책에는 이러한 뒷이야기가 있다.
배경이 안개처럼 자욱이 깔린 다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저택, 건축가, 후원자와 후원을 받던 예술가이다. 컨스터블, 게인즈버러, 터너 등의 예술가들의 이름이 저자의 설명에 등장한다. 이 곳에 아직도 보존 터너의 작업실과 벽에 걸린 그의 풍경화를 보노라면 귀족의 예술품 수집, 예술가 후원 등의 활동이 눈에 보인다. 아마 이곳은 건축 양식, 가구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조각과 회화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방문하는 이도 많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윌리엄 모리스의 레드 하우스>


라파엘 전파의 화가였다가 실용을 위한 예술로 관심 분야를 바꾼 문학가이자 광고전문가, 화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그 이름을 남긴 윌리엄 모리스. 그의 신혼집은 건물 외관에서부터 커튼, 소파의 천 등 실내 장식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심을 그대로 드러낸다.



'모리스는 기계의 사용을 철저히 배제했고, 중세의 장인정신을 이어받아 손으로 정성껏 깎고 다듬었다. 아름답고 실용적인 디자인이 널리 쓰이길 바랐던 모리스의 희망과는 달리, 모든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진 그의 제품은 서민에게는 부담스런 가격이 되고 말았다. ... '나는 아름답거나 유용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곁에 둘 이유가 없다'고 강조한 그의 '아름다움'과 '유용함'의 원칙은 마음에 새겨둘 만 하다.'-책속에서.



<윌리엄 모리스의 레드 하우스, 현관에서 바라본 복도>


'Art for use'를 외친 그가 관심을 가진 분야는 즉 실제 사용하는 벽지, 가구, 의자, 장식장 등이다. 차분하고 친근하며 부담스럽지 않다. 그의 레드 하우스는 불순물을 걸러낸 담백하고 순수한 형상이지만 윤곽선에 준 변화가 느껴진다. 식물무늬 커튼, 대담하고 풍성한 문양의 균형감 있는 배치.
이 책에 따르면 그는 이러한 디자인을 전통적인 염료, 염색 방법으로 제작할 것을 고집하여 더욱 섬세한 색조를 만들었다고 한다. 필요한 요소는 숨기지 않아 오히려 드러나는 장식 효과는 나무 막대기를 이어 뼈대를 삼고 골풀로 엉덩이 받침을 만든, 손으로 깎고 다듬은 단순한 선의 의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서식스 의자, by 윌리엄 모리스>



이러한 러스킨의 유기적인 일관성의 구석구석을 훑다 보면 디자인은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닌 생활 속의 모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산업화 이전의 수공예품을 부활시키고 천박한 생산품을 대체하려 했던 그의 작품은 하나같이 환상을 배제한 단순함, 평면성, 따스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대중을 위해 대중이 만든 미술로서 제작자와 사용자에게 동시에 행복감을 주는 미술을 추구했으나 역설적으로 돈이 없는 사람은 살 수 없는 상품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어쩌면, 어떤 사물과 어떤 형상은 저 홀로 불쑥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시대와 호흡하고 답장을 보내고 응답하다가 꽃을 피우기도 하고 저물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가 접하는 유용성과 탐미를 아우르는 아름다움의 자취 중 한 가닥이 아닐까.



<윌로우 로드 2번지>


햄스테드의 윌로우 로드 2번지. 잠시 고개를 갸웃,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조지 왕조 시대, 빅토리아 시대의 집이 죽 늘어선 햄스테드에 골드핑거의 현대 건축이라니! 예상대로, 지역 신문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고 골드핑거는 디자인을 여러 번 수정했다 한다. 오죽하면 007 시리즈의 작가 이언 플레밍은 골드핑거의 디자인이 못마땅한 나머지 악당의 이름을 골드핑거라고 지었다고 한다. 007 골드핑거. 가십, 이야깃거리는 그러나 역설적으로 화제성을 불러일으키며 한 번 더 대상을 바라보게 하는 파급효과를 지녔다. 아니, 파급효과를 지녔기에 이야깃거리가 되는 뫼비우스의 띠같은 것인지도.




<윌로우 로드 2번지, 벽난로가 설치된 오목한 흰 벽이 있는 거실 전경>


저택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구조를 최대한 활용한 합리주의, 기하학적인 형태가 눈에 들어온다. 윌로우 로드 2번지의 경우 주변 환경과의 이질감을 최소화하기 위해 벽돌을 사용했다고 한다. 계단은 철제이고 지그재그로 엮였으며 막힘과 트임을 자유자재로 조절했다. 흰 벽면과 검은색 벽난로. 사각 액자. 저자의 설명으로는 이러한 액자 속의 액자 장치는 초현실주의 미술에서 즐겨 사용하던 방식이라고 한다. 르네 마그리트의 회화처럼, 그림 안과 밖이 헛갈리는 구분. 경계의 이러한 구분은 때로는 경쾌한 유머로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윌로우 로드 2번지, 3층의 침실>



지금 보아도 전혀 이질감이 없는 이 집이 1939년 완공되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르 코르브지에와 함께 가구를 제작한 샬롯 페리앙, 미스 반 데 로에, 알바 알토와 같은 유명한 디자인 가구를 떠올리게 하는 골드핑거의 디자인은 공간의 확장,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보여주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지은 다른 복합 사무용 빌딩은 '영혼이 빠진 건물'로 불리기도 했다니 사람이 인지하는 아름다움은 저마다 다를 수가 있으며 어느 것도 정답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보게 한다.




이렇게 다양한 공간을 저자의 설명을 들으며 따라가다 보면 각각의 공간이 당시 아름답다고 생각한 개념을 얼마나 잘 보존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집의 외관. 구조. 벽. 창틀. 커튼. 장식품. 가구. 큰 것에서 작은 것까지.
바깥에서 안으로. 안에서 바깥으로. 천천히 마음을 비우고 구경하다 보면 슬며시 따라오는 당시의 생각. 각기 다른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 정치, 철학과 떼어 생각할 수 없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생각들.



만약 이곳으로 휴가를 떠난다면 챕터마다 저자가 실어둔 주소와 전화번호를 활용해서 몇몇 곳을 방문해도 좋지 않을까? 그만큼 현장감이 있는 책이다. 물론, 방대한 미술사, 건축사 등등을 모두 다 다룬 것은 아니며 미술 사조에 관한 설명이나 찾아보기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아 그야말로 아는 만큼 보인다는 아쉬운 점도 조금은 있다. 찾아보기 부록이 별도로 없어 한 번 지나치면 애써 다시 되돌아가야 한다. 또한, 직접 관여한 제작자, 건축가, 예술가의 일화와 간략한 설명은 본문에 몇몇 각주로 표기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자세한 사항은 읽는 자의 부지런함에 달려 있다는 점도 조금 아쉽지만, 어쩌면 이것은 나의 게으름 혹은 무지 탓인지도 모르겠다. 찾는 것은 금방이고 망각 역시 금방이니까.


다 읽고 난 다음 한 번 책장을 스르륵 바람에 넘기니 내가 보았다고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다채로운 풍경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영국 장식미술을 다루었지만 다양한 수집품과 영향을 받은 작품을 함께 다루어서 이 책에서 다룬 면면은 영국의 장식미술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러한 점이 이 책의 장점일 것이다. 다양한 관점을 부분부분 때로는 돋보기로, 때로는 안경으로 보여주는, 건축과 일상에 관심이 많은 어떤 이의 여름철 휴가 여행을 떠올리게 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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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스미스 스타일 - 가장 영국적인 디자인 폴 스미스 A to Z
폴 스미스, 올리비에 위케르 지음, 김이선 옮김 / 아트북스 / 2012년 12월
절판




태초에 실루엣과 색상이, 동세와 질감이, 직선과 비정형 움직임이 나타나기 이전에 어떠한 특징이 있었다. 샤넬만 입는 여자를 보면 강한 자존심이 느껴진다. 망가진 구두 코는 가난한 마음이었다. 피케 셔츠는 각고의 생각 혹은 무개성이었다. 샤넬은 한때 꽃핀 여성의 사회참여 정신의 계승인가, 천민자본주의 특성인가, 혹은 강한 자존심의 표출인가. 모두가 입고 있는 옷, 구두, 가방, 이런 것들은 어떤 의미일까? 패션과 생활의 창조자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 책은 '창조'의 관점에서 본 폴 스미스의 특징을 간략히 보여준다.




책의 느낌은 상당히 가볍다. 1946년 영국 태생 폴 스미스가 직접 찍은 사진과 알파벳 A부터 Z까지 떠오르는 단어에 관한 생각을 짤막하게 나열했다.

A
애비 로드
자크 앙크틸
건축
예술

에서 시작하여

Z
얼룩말까지.





평범한 검은색 반지갑이었는데 펼치는 순간 화려한 스트라이프 무늬를 배경으로 자동차가 나타나는 지갑이 있었다. 무난한 엷은 하늘색 셔츠에는 베이지색 단추들이 줄지어 있는데 아래에서 세 번째 단추만 색상이 진한 파랑이었다. 이런 그의 디자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상품을 선택함에 고려하는 많은 사항 중 하나는 바로 만든 이의 의도와 구입하는 이의 취향일 것이다. 그것은 재활용 아크릴 원단으로 만든 오천 원짜리 스카프일 수도, 라벨이 붙은 몇십만 원짜리 디자이너 슈즈일 수도 있다. 왜 그것을 돈을 내고 사서 몸에 걸칠까? 나는 왜 지금 이 옷을 입었나?




이 책은 가볍지만 아무렇게나 만든 것은 아니다. 스타일에 관한 키워드를 툭툭 던진다. 이 책을 읽어도 옷 잘 입는 법을, 혹은 폴 스미스 라벨 옷을 저렴하게 구할 방법은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옷을, 주변 사물을, 나아가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의 생각하는 방식을 살짝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감히 이 책이 육천 원 가량의 광고 전단 묶음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생각의 갈래, 아이디어의 구현.




어느 오후, 당신은 길을 걷고 있다. 그곳은 혼잡한 광화문 대로일 수도, 빈의 슈테판슈트라세일 수도, 창원의 주택가일 수도 있다. 눈은 무언가를 바라보고 귀는 어떤 소리를 듣는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이러한 상황이었다. 왜 어떤 이는 길에 지나가는 개미를 보는데 어떤 이는 자동차의 반짝이는 유리창을 보게 될까? 무심히 지나치는 사물이 우리에게 남기는 흔적은 어떻게 되살아날까? '기껏해야 옷 쪼가리 주제에!' 와 '패션의 관심은 오직 미래'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모든 질문이 이 책에서는 버겁지 않다. 훑는 데 걸리는 시간은 사람에 따라 30분에서 한 시간. 사진이 대부분이고 글은 짧다. 폴 스미스는 짧고 간결하고 간단하다. 그러나 라일락색 셔츠에 진회색 바지에 에메랄드빛 구두를 신는 그의 스타일링이 나오기까지 그의 생각의 흐름은 예상외로 다채로웠다.




무엇보다도 그의 디자인에는 코드가 있다. 그 스스로 밝혔듯 그의 디자인은 영국적인 스타일의 극대화에 그 특징이 있었다. 수트는 전통적인 영국 스타일, 새빌 로 스타일을 따른다. 과장없이 자연스러운 윤곽선, 조화와 균형. 아르마니처럼 극단으로 치닫지도, 비비안 웨스트우드처럼 아나키스트의 전복성을 구현하지도 않는다. 폴 스미스의 검은색은 튀는 디테일과 과감한 라인 없이 입은 사람의 윤곽선을 부드럽게 드러낸다. '옷이 사람을 입고 다닌다'는 느낌을 없애고서도 디자이너의 터치를 잊지 않는다. 소재에 집중하여 그 특성을 살리고 윤곽선을 살리는, 기본에 충실한 그의 디자인은 모즈 룩, 여피 룩이 그의 손을 거치면 영국이 존중하는 장인정신, 수공예, 예로부터 이어진 기본과 현대적인 감성의 표현으로 드러난다. 물론 아내 폴린의 도움이 있었지만(지대했지만) 그는 정식 리테일링 수업을 받지도 않았다. 지금도 사이클에의 열정이 대단하며 17세 교통사고가 아니었다면 사이클러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의 작업실에 있는 사이클은 그 열정의 증거인 동시에 그의 디자인 철학의 단면을 보여준다.




무관한 듯한 사물이 디자이너의 머릿속에서 직조하는 창의력의 산물, 그것이 폴 스미스의 디자인이다. 역설적으로 영국적 스타일의 뛰어난 해설자는 미국인, 랄프 로렌이었다. 그에 대한 화답은 핀 스트라이프, 즈크 신, 비정형의 색상 배합을 담은 폴 스미스였다. 아르마니, 레이 가와쿠보, 랄프 로렌. 이들이 폴 스미스 런칭 당시 가볍게, 우아하게, 구조를 파괴하거나 혹은 클래식을 당시 상황에 맞추어 재현하던 이들이었다. 반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 영국적인 감각-프린스 오브 웨일즈 스타라이프, 유니언잭, 이케아가 갖다 버리라고까지 한 꽃무늬까지!-에 기반을 둔 폴 스미스의 디자인은 어떠한가. 그는 전통을 존중하되 젊음을 잃지 않는다. 격식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 비싸 보이는 제품이 아닌 비판감각과 균형감각을 지닌 제품은 그의 시그니처 스타일인 멀티 스트라이프로 다시 태어났다. 한마디로 자신의 직관을 새로운 형상으로 살려낸 그의 아이디어 창조와 구현의 과정이 이 책에서 스치듯 펼쳐진다. 읽는 이가 품은 의문에 다라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천만 갈래의 과정을 안내해 줄 수도 있는 지도.




이 책에서 드러내는 것은 이러한 디자이너의 감수성과 지향점이다. 그는 컬렉터임을 부정하며 난독증을 그대로 활용한다. 준비된 종이 한 장 없이 애플에 강의하러 가고 언제나 머릿속에 모든 것을 다 준비하고 펼쳐 보이게 해주는 것이 그의 난독증이었다. 데이빗 보위, 패티 스미스, 카오스 같은 사무실, 아이디어를 그대로 써두는 쌓여있는 너덜너덜한 포스트잇. 그는 가장 보스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인물인 가운데 타고난 협상가이다. 자기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닌 서로의 의견의 균형점을 찾아간다고 밝힌 대목에서는 위트있고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구현해나가는 동시에 자신의 디자인 철학을 담은 제품을 판매하는 능력이 보인다.




무언가를 관찰하여 깨닫고 그것을 제품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손끝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디자인은 관찰력, 깨달음, 상상력, 창조력, 비판정신, 직관, 기억력, 호소력을 바탕으로 나타난다. 아무리 훌륭한 생각도 구현되지 않으면 상상에 그칠 뿐이며 자신의 그 어느 줄무늬 하나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홀로 나타나지 않은 것임을, 충분한 고민과 수정, 비판과 절제를 거쳐 나온 것임을 폴 스미스는 분명하고 간결하게 보여준다. 이 책에서 만난 그는 친절하고 조용한 안내자였다. 칼 라거펠트가 '패션의 관심은 오직 미래'라고 하였듯 폴 스미스도 '패션은 어제에 관한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얼룩말은 꼭 파자마를 입은 말 같다'고 말하는 그를 보노라면 사람들이 입은 옷과 구두, 자동차와 생수병, 바지 끝단과 도시의 윤곽선이 조금은 다르게 눈에 들어온다. 눈에 담기는 풍광, 그것을 어느 순간에는 다시 꺼내어 차를 한 모금 삼키듯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분명 무언가를 머릿속에 담아두었다가 자기 생각대로 다시 창조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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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3-03-11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이 책 정말 궁금했는데 쥬드님의 리뷰로 정말 깔끔하고 쉬크하게^^;; 정리가 되네요. 눈호사 하고 갑니다.

Jeanne_Hebuterne 2013-03-18 17:57   좋아요 0 | URL
폴 스미스는 디테일에 퍼스널리티의 엣지를 살려 옴므 룩에도 브리티쉬의 스트라이프를 가미하기로 유명한 디자이너지요. 그의 센서티브한 감성이 포토그래퍼의 열정으로 되살아난, 크리에이티브란 무엇인가를 이번 스프링을 맞아 슬쩍 엿보기에 좋은 책입니다.
아, 보그체 따라하기 정말 힘들군요. 전 포기하렵니다. 가볍게 보려면 가볍게, 뭔가를 좀 더 보려면 비밀의 문이 열리는 신기한 책이어요. 블랑카님께서 읽으시면 꽤 흥미로운 리뷰가 나올 듯 합니다.

dreamout 2013-03-11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패션으로는 모르겠지만, 책으로는 폴 스미스의 이 책이 크리스틴 녹스의 '알렉산더 매퀸 : 이 시대의 천재' 보다는 나아 보이네요. ㅋ

Jeanne_Hebuterne 2013-03-18 12:32   좋아요 0 | URL
이 시대의 천재라니 알렉산더 매퀸이 궁금해지는 제목임에는 분명하군요!

다크아이즈 2013-03-18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뷔테른님하고 무척 어울리는 리뷰네요.^^*
저얼대로 이런 섬세한 코드와는 먼 저 같은 사람은 그저 신기할 뿐인 걸요.
폴 스미스를 소개한 님 글의 궤적을 찬찬히 훑는 중입니다. 님 글 읽으니 디자인은 과학이자 예술이군요. 머리 회전력도 좋고 창의력도 있어야 하네요.
새로운 한 주 잘 지내시어요. 에뷔테른님...~~~

Jeanne_Hebuterne 2013-03-20 23:25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폴 스미스의 정신없는 사무실과 제가 좀 잘 어울리기는 합니다 ^^*
화보집처럼 한번 쓰윽 훑고 덮어두었는데 다시 한번 보니 폴 스미스가 어떻게 작업하는지, 아이디어를 어떻게 활용하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적용하는지가 보였어요. 어쩌면 이건 그의 디자인을 좋아해서 억지로 끼워맞춘 것일 수도 있겠으나, 하나하나 뜯어보면 폴 스미스는 분명 기분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옷이나 잡화를(이렇게 말하니 참..하지만 맞지요! 구두, 지갑, 가방, 잡화. 1층 코너)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이 보였어요.

제가 뒤늦게 댓글의 댓글을 다는 지금은 이제 거의 주말을 향하고 있어요. 한 주 무사히 즐겁게 보내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팜므 느와르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