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오리새끼의 출근
메트 노가드 지음, 안진환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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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미운 오리새끼의 출근
메트 노가드 지음, 안진환 옮김, 생각의 나무

이야기 둘
직장과 집을 챗바퀴처림 돌면서 사는 현재의 나의모습을 한번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나의 이상향은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내가 바라는 꿈은? 1년 안에 뭘 할 것이며 10년, 20년 후에는 어떤 모습일지? 직장에서는 어느 위치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현재로서는 잘 알 수 없는 것들이기는 하지만..
예전부터 나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처럼 말은 쉽지만 이해하고 파악하기에는 어려운...
모든 일에 있어 기본적인 요건은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과 의미 부여이다. 그리고 그 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자신 스스로의 깨우침이지 않을까?
저저의 생각과 나의 생각은 위에서 말한 것들처럼 거의 비슷했다. 작가는 조금 더 쉽게 이해를 돕고 있다. 하지만 이 책 또한 나의 요구를 채워주기에는 보족했다.(100%라는 책이 있는지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작가의 생각에는 대부분 옳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특별하게 틀린 말도 없다. 내가 바라던 것은 방법론적인 부분이었는데..(하기야 이런 종류의 책들은 방업에 대해서는 말하기가 어렵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스스로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좀 더 자신을 열정적인 모습으로 바꾸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런 일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결코 아니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나 또한 그러고 싶어도 못했었다. 이 기회에 한 번 더 나를 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해바라기 씨는 누가 먹었을까", "겅호",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성공하는 시간관리와 인생관리를 위한 10가지 자연법칙"처럼 거의 같은 책들에게서 느꼈던 비슷한 느낌.

2005년 08월 06일 출근 전철에서 씀
2005년 08월 09일 새벽에 정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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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피천득 지음 / 샘터사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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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느낌. 강물에 조약돌을 던졌을 때 둥근원을 그리며 퍼지는 물결같은...

피천득이라는 사람을 처’六?국어책인가, 철학도서에서 본적이 있다. 그때는 국어학자로서 그저 말만 연구하는 사람인줄 알았다. 하기야, 그때는 이 사람에 대한 어떤 정보도 그가 쓴 책을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은 전혀하지 않았었다.

예전에 이 책을 읽었었다. KBS에서 하는 [TV책을 말하다]라는 책 소개 프로그램에서 이 책이 나오길래 다음날 선듯 구입했다. 그때는 책의 내용보다는 짧게 구성된 드라마를 보고 구입해야 겠다는 마음을 가졌었다. 그리고 구입한 책을 어떤 느낌으로 읽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은 그저 잔잔하게 퍼지는 물결처럼 내 가슴 어느 구석을 은근히 일렁이게 한다. 사람, 가족, 친구 그리고 일상의 이런 저런 느낌들을 써내려간 것이 좋은 느낌으로 내게 다가온다. 참으로 감각작이고 감칠맛나는 글들이다.

삶의 여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삶에 대해 저자처럼 생각하려면 여유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저 불만과 욕심이라는 것에 짜증이라는 감정으로 일관하는 지금의 나는 아닌지? 삶을 느낀다는 것이 여유라는 것과 관계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재 나는 참을 빡빡하다.(나의 게으름에 비롯된 것일 수도 있ㅈ겠지만) 조금 더 삶의 느낌을 느끼기 위해 여유있는 나를 찾아야 겠다. 가끔씩, 이런 저런 것들에 글쓰는 것도 좋을 것이다.....

책을 보면서 저자는 참으로 가슴이 따뜻한 사람일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뭔지 모르게 아주 인간적이고 풀냄새 풀풀하는 싱그러운 사람일 것이라는 느낌들도... 언젠가 보았던 책 "혼자만 잘살면 무슨 재민겨"라는 책의 저자 전우익 님과 비슷하게 풋풋한 사람,삶의 향기를 사진 사람이라는 느낌..

저자는 얼음처럼 차갑지 않고 불처럼 뜨겁지 않으며
       태풍처럼 격하지 아니하고 웅덩이 물처럼 고여있지 아니하고
       그저 아랫묵 밥한사발의 따스함과 시냇물처럼 유순하고 시원한 사람은 아닐런지?

피천득이라는 사람을 전져 보지 않고 만나지도 않고 책으로 접해본 저자는 이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모른다. 글과는 다르게 포악하고 성깔이 있을지도....

    2005년 9월 10일 퇴근전철에서 씀.
    2005년 9월 12일 회사출근해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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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는 법
엔도 슈사쿠 지음, 한유희 옮김 / 시아출판사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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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는 법
엔도 슈사쿠, 한은미 시아출판사

1. 가치관과 비판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범들의 재판을 보면서 어떻게 그들을 비판하고 처벌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저자를 보면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다. 시대가 변하게 되면 과거의 사건에 대해서 평가와 비평, 비판, 반성등이 일어나기 마련이라고 본다. 그리고 시대의 변화는 사회가 가지고 잇는 특성이며 그 변화에 따른 가치관과 사상을 변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가치에 따른 판단에 의해 과거의 모습과 사건들을 재평가하여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다. 그런 변화의 모습에 의해 과거의 잘못된 점들을 시정하고 새 시대에 올바른 가치관를 수립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저자는 그런 과정이 자신이 보기에는 잘못되엇다고 생각하고 잇다. "어떤 이유로 사람이 사람을 평가할 수 잇는지?"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의 생각대로라면 과거는 그냥 지난 것이라는 말인가? 개개인의 입장을 고려하다면 누가 그 시대를 평가할 것인가?
 일본이라는 사회에서는 그런 인식이 어떨지는 모르겟다. 일제시대 이후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과거평가없이 보내었다. 현재처럼 과거의 기득권층(구 시대에 민족을 억압한)들이 다시 득세하고 있지 않은가? 구 시대에 자신만이 살겠다고 민족을 배신가고 남을 억압했던 사람들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저자의 말대로면 그 구시대의 기득권층의 사람들을 그대로 놔두어야 한다는 것인가? 물론 전쟁의 패전이후 어린 시절 자신이 돌아보는 일본사회가 누가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도 불분명한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혼란했던 그 시절을 회상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이가 든 시점에서 본다면 그 상황을 다시 보아야 하지 않을까?
 2차세계대전 이후에 프랑스는 독일지배하에 있던 시절 그들에게 협력적이었던 사람들을 철저히 검증하고 평가함으로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지 않았는가.
 이런 생각을 하는 저자가 무섭다. 이런 생각들이 일본사회에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기는 가치관이라면 일본은 또다시 과거의 전쟁을 또다시 일을킬수 있다는 생각이다. 또한 현재 일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역사교과서의 왜곡이라던지 과거의 행동들을 정당화하는 모습으로만 비쳐지기 때문이다.

 - 저자는 전범들의 재판을 보면서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누구의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서 정의인가 불의인가를 평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회법이 있고 그런 법치국가에서 법이 아닌 개인의 양심에 호소하고 있다. 물론 평가나 비판에 있어 양심이라는 것이 미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생계형 범죄의 경우에는 양심과법의 적용이 적절하게 필요하다. 하지만 전범의 경우에는 그게 생존을 위한 생계형이었을까? 그 전범이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생계형이었다고 보아질 수 있는가?

 - 일기를 쓰는 이유는 하루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올바른 모습과 잘못된 점들을 다시 판단함으로서 보다 자신을 좋은 모습으로 만들어가는데 목적이 있다고 본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사회는 일기를 쓰지 말라는 소리아닌가.

 - 전범의 재판 이야기를 하고 뒤에서는 생계를 위해서 빵을 훔지는 사람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는 전범들이 빵을 훔친 사람과 비슷한 상황은 아니었나 하고 유도하고 있는 듯이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그냥 생각없이 보면 전범들과 생계형 범죄를 동일하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2. 전반적인 책평가
 내용면 : 별다른 이야기는 없다. 특별한 내용도 없다. 참고할 만한 사항도 없다. 실천해볼 만한 사항도 없다. 저자의 생각(그냥 생각나는대로)을 담은 듯하다.

 편집 및 가격 : 적은 분량으로 책하나 말들어 보려는 출판사의 노력이 돋보인다. 큰글씨, 반쯤잡아 먹는 여백, 내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페이지짜리 삽화들 그리고 두께를 위한 150페이지의 양장본. 무슨 소장용 시집도 아닌데. 8700이라는 이상한 가격. 저자의 이름값을 가지고 장사해보려는 출판사의 노력 또한 봐줄만하다. (요즘의 책들이 대부분 그런게 책을 편집하기는 하지만 이책을 조금더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타 : 책을 살필요없고 별로 볼필요는 없을 것같다. 구지 보고 싶은 분이라면 서점에서 앉아서 보시길. 넉넉잡고 1시간이면 보실 수 있습니다.

 2005년 7월 27일 늦잠자서 1시간 늦게 가고 있는 출근 전철에서 씀.
 2005년 7월 29일 새벽에 정리함.
 
 선물받은 책이라 그냥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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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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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론
연암에게 있어서도 우정론은 윤리학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이미 [방격각외전]의 [마장전]서에서 "벗이 오륜의 끝에 자리 잡은 것은 결코 낮은 위치여서가 아니라, 마치 흙이 오행중에서 끝에 있으나, 실은 사시의 어느 것에 흙이 해당치 않음이 없는 것과 같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부자가 친함이 있고, 군신이 정의를 지니고, 부부가 분별이 있고, 장유가 차례가 있다더라도 붕우의 믿음이 없다면 아니될 것이다. 그러므로 벗의 위치가 비록 오륜의 끝에 있으나 실은 그 넷을 통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연암 특유의 우정론을 펼친 바 있다. 이 우정론은 단순한 우정예찬이 아니라, 우도를 중심으로 나머지 사륜의 윅계를 전복한다는 점에서 파격적이다.
이후 그의 우정론은 한결 깊고 넓어진다. 한 에세이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벗이란 '제2의 나'다. 벗이 없다면 대체 누구와 더불어 보는 것을 함께 하며, 누구와 더불어 듣는 것을 함께 하며, 누구와 더불어 냄새 맡는 것을 함께 하며, 장차 누구과 더불어 질혜와 깨달음을 나눌수 있겠는가? 아내는 잃어도 다시 구할 수 있지만 친구는 한 번 잃으면 결코 다시 구할 수 없는 법, 그것은 존재의 기반이 소욷리째 무너지는 절대적 비극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정의 성리학적 표상인 '천고의 옛날을 벗삼는다'는 말을 조문하고, '아득한 후세에 나를 알아주는 이를 기다린다'는 형이상학적 명제를 비웃는다. 즉 그가 말하는 바'우도'란초월적 원리에 종속된 도덕적 규범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생을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것이자 '나'의 경계를 넘어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변이되는 능력의 다른 이름이다.-64쪽

돈키호테와 연암
...
마치 돈키호테가 시종 산초 판사와 애마 로시난테만을 데리고 천하를 주유하듯, 그 또한 '두 뒤가 쫑긋'하고 '정강이가 날씬한' 말과 우직한 하인 창대, 장복이만을 동반한다. 돈키호테는 머릿속에 온갖 '기사담'을 다 집어 넣고서 길을 나서지만, 연암은 이제 마주체게 될 미지의 세계를 낱낱이 담기 위해 붓과 먹, 공책 등을 들고서 여행을 떠난다. 전자는 텍스트를 구현하기 위해 떠나지만, 후자는 텍스트를 채우기 위해 떠난다. 전자의 여행이 이미 완결된 세계를 현실에서 확인하고 구현하기 위한 것이라면, 후자의 혀앵은 예정도, 목적도 없이 낯설과 이질적인 모험 속으로 무작정 몸을 날리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연암이 더 '돈키호테적'인게 아닐까.
하긴, 그렇기도 하다. '돈키호테팀'과 '연암팀'이 겉보기에는 유사해 보이지만, 사실 이들은 매우 상이한 배치로 이루어져 있다. 전자의 경우, 돈키호테는 기사담의 세계에 푹 빠져 현실을 도통 보려 하지 않는 데 반해 산초 판사가 온갖 재치오 익살로 돈키호테의 엄숙주의를 깨뜨리는 구조라면, 후자의 경우 오히려 장복이나 창대가 철저한 소중화주의에 물들어 있고 연암이 그 경직된 선분을 라고지르며 온갖 '해프닝'을 일으키는 식이다. 기묘한 대칭!
그러나 아무리 몸이 가볍고 경쾌하다 해도 먼길을 떠나는 자의 심정은 착잡하다. 두려움 혹은 설레임이 어찌 없으랴.........
-149쪽

이별론
사람과 말을 점고해 보니, 사람은 발이 모두 부르트고, 말은 여위고 병들어서 실로 대어갈 것 같지가 않다. 이에 일행이 모두 마두를 없애고 견마잡이만 데리고 가기로 하여, 연암도 하는 수 없이 장복이를 떨어뜨리고 창대만 데려가기로 했다. '환상의 2인조'가 생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고지식학 융통성이 없어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기는 하나, 그래도 산전수전을 함께 겪어왔는데, 막상 떼어놓으려니 연암의 가슴이 미어진다. 장복이는 또 어떤가. 머나먼 이국땅에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두 사람과 생이별을 하게 되었으니 창자가 끊어질 듯이 서러워한다. "장복은 말 등자를 붙잡고 흐느껴 울며 차마 헤어지기 어려워한다. 내가 돌아가라 타이른즉 또 창대의 손목을 잡고 서로 슬피 우는데 눈물이 마치 비내리듯 한다."
연암은 문득 말 위에서 생각한다. "인간의 가장 괴로운 일은 이별이요, 이별 중에서도 생이별보다 괴로운 것으 없을 것"이라고. 하나는 살고 또 하나는 죽는 그 순가느이 이별이야 구태여 괴로움이라 할 것이 못 된다. 그거야 사람마다 겪는 것이고, 천하의 순리가 아니가. 또 죽은 이에겐 괴로움이 없을 터. 그러나 하나는 가고 하나는 떨어지는 때, 그것도 흘러가는 물을 사잉에 두고 헤어질 때의 그 애닯음을 무엇에 비할 것이가. 이런 식을 연암의 '이별론'은 시작된다. 어떤 소재든 그에 알맞은 리듬과 악센트를 부여하는 것이 연암의 장기 아니던가.
-180쪽

호삼다, 일흔세살노인
그 숱한 엑스트라들 중에 아역이 없을 리가 없다. 호삼다(胡三多)라는 꼬맹이 친구가 바로 그다. 나이는 열두살. 얼굴이 맑고 깨끗하며 예도에 익숙하다. 일흔 세 살된 노인과 함께 혹정 왕민호에게 글을 배운다. 매일 새벽이면 삼다는 노인과 함께 책을 끼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걸음을 맞추어 와선 혹정을 뵙니다. 혹정이 바쁠 때면, 노인는 즉시 몸을 돌려 동자인 삼다에게 고개를 숙이고 강의를 받고 선 간다. 돌아가선 여러 손자들에게 다시 배운 바를 가르쳐 준다고 한다. 노인은 스스럼없이 어린 삼다를 동학(同學) 혹은 아우라 부른다. 연암은 이들 짝궁을 보고, "늙은이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어린이는 업신여김이 없다"는 변방의 질박한 풍속에 감탄해 마지않는다.
-274쪽

판첸라마 대소동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판첸라마 대소동!'이다. 천신만고 끝에 열하에 도착한 일행에게 또 하나의 '불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티베트의 판첸라마를 만나 예를 표하라는 황제의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춘추대의(春秋大義)'로 무장한 그들로선 만주족보다 더 망측한 서버의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린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날벼락'이었다. "사신들은 얼굴을 수심을 띠었고, 당번 역관들은 황황히 분주하여 마치 숙취가 덜 깬 사람 같았다. 비장들은 성을 내어 "황저의 일 괴악하거든. 반드시 망할거야"라는 극단적 발언이 오고가는 그 아수라장 속에서 연암은 무얼 했던가?-2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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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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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북벌 프로젝트
 내가 가진 생각들 중에서 나 혼자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을 없을까? 틀린 것이지만 억지로 부여잡고 그 생각을 고수하면서 아집까지 부리는 경우는 없을까? 어쩌면 잘못된 것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고치지 못하는 내 자신은 모습은 없을까?  그런 모습을 방치하는 것도 크나큰 잘못은 아닐까? (지금,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본다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있는 것도 같다. 대상이 어떤 것이고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 가에 따라서 달라지는 그런 문제들.)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못하는 것이 아닌) 사람이 있다. 그 의견이 일반적으로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가치를 적용할 때 올바르거나 그르다는 판단은 아직 없는 상태라고 할 때 그 의견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그 의견을 고수하는 사람이 있다. 또한 옳고 그름에 대해서 판단을 꺼리는 사람도 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며 자신만이 옳다고 하는 사람. 물론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 태도가 필요하다. 그런 경우에는 자존심이 걸린 문제일수 있고 자신의 강인함을 내세우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의견이나 생각이 올바른 것이어야 하며 객관적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에는 객관성과 보편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것일지라도 멀지 않은 미래에는 보편적인 가치가 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2가지의 경우가 아니라면 자신의 의견에 대해 정오를 가려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고치기 어렵다면 적어도 타인의 의견을 들어보고 자신의 의견을 스스로 평가라도 해봐야 할 것이다.
 자신의 의견을 고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슨 의견이든지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상대방의 의견에 대한 적절한 검증이나 뒷받침 없이 그냥 반대하는 경우이다. 더 심한 경우에는 자신의 반대의견이 옳지 않은 것이라고 판단된 경우에는 반대의 입장을 고수하는 경우도 있다. 혼자 사는 세상이라면 나만 알면 될 것이지만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사는 세상에 산다면 나와 타인 둘 다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인가?

 한국의 정치인들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그나마 좀 나은 게 민주노동당.
 지금의 회사와 대표이사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자신의 의견과 생각도 중요하겠지만 조금 더 타인의 의견을 조금 더 귀 기울이고 수렴하여 자신의 의견을 오라로 보았으면..
 그런데 말이다. 위 두 가지의 경우 다 왜 욕들어 먹으면서 뻔뻔하게 잘도 사는지?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많은지? 이렇게 사람들이 부를 축적하려하고 권력을 가지려고 하는 이유인가?

 2005년 7월 21일 퇴근 전철에서 씀.
 2005년 7월 26일 새벽에 정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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