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는 법
엔도 슈사쿠 지음, 한유희 옮김 / 시아출판사 / 200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나를 사랑하는 법
엔도 슈사쿠, 한은미 시아출판사

1. 가치관과 비판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범들의 재판을 보면서 어떻게 그들을 비판하고 처벌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저자를 보면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다. 시대가 변하게 되면 과거의 사건에 대해서 평가와 비평, 비판, 반성등이 일어나기 마련이라고 본다. 그리고 시대의 변화는 사회가 가지고 잇는 특성이며 그 변화에 따른 가치관과 사상을 변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가치에 따른 판단에 의해 과거의 모습과 사건들을 재평가하여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다. 그런 변화의 모습에 의해 과거의 잘못된 점들을 시정하고 새 시대에 올바른 가치관를 수립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저자는 그런 과정이 자신이 보기에는 잘못되엇다고 생각하고 잇다. "어떤 이유로 사람이 사람을 평가할 수 잇는지?"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의 생각대로라면 과거는 그냥 지난 것이라는 말인가? 개개인의 입장을 고려하다면 누가 그 시대를 평가할 것인가?
 일본이라는 사회에서는 그런 인식이 어떨지는 모르겟다. 일제시대 이후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과거평가없이 보내었다. 현재처럼 과거의 기득권층(구 시대에 민족을 억압한)들이 다시 득세하고 있지 않은가? 구 시대에 자신만이 살겠다고 민족을 배신가고 남을 억압했던 사람들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저자의 말대로면 그 구시대의 기득권층의 사람들을 그대로 놔두어야 한다는 것인가? 물론 전쟁의 패전이후 어린 시절 자신이 돌아보는 일본사회가 누가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도 불분명한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혼란했던 그 시절을 회상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이가 든 시점에서 본다면 그 상황을 다시 보아야 하지 않을까?
 2차세계대전 이후에 프랑스는 독일지배하에 있던 시절 그들에게 협력적이었던 사람들을 철저히 검증하고 평가함으로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지 않았는가.
 이런 생각을 하는 저자가 무섭다. 이런 생각들이 일본사회에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기는 가치관이라면 일본은 또다시 과거의 전쟁을 또다시 일을킬수 있다는 생각이다. 또한 현재 일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역사교과서의 왜곡이라던지 과거의 행동들을 정당화하는 모습으로만 비쳐지기 때문이다.

 - 저자는 전범들의 재판을 보면서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누구의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서 정의인가 불의인가를 평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회법이 있고 그런 법치국가에서 법이 아닌 개인의 양심에 호소하고 있다. 물론 평가나 비판에 있어 양심이라는 것이 미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생계형 범죄의 경우에는 양심과법의 적용이 적절하게 필요하다. 하지만 전범의 경우에는 그게 생존을 위한 생계형이었을까? 그 전범이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생계형이었다고 보아질 수 있는가?

 - 일기를 쓰는 이유는 하루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올바른 모습과 잘못된 점들을 다시 판단함으로서 보다 자신을 좋은 모습으로 만들어가는데 목적이 있다고 본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사회는 일기를 쓰지 말라는 소리아닌가.

 - 전범의 재판 이야기를 하고 뒤에서는 생계를 위해서 빵을 훔지는 사람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는 전범들이 빵을 훔친 사람과 비슷한 상황은 아니었나 하고 유도하고 있는 듯이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그냥 생각없이 보면 전범들과 생계형 범죄를 동일하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2. 전반적인 책평가
 내용면 : 별다른 이야기는 없다. 특별한 내용도 없다. 참고할 만한 사항도 없다. 실천해볼 만한 사항도 없다. 저자의 생각(그냥 생각나는대로)을 담은 듯하다.

 편집 및 가격 : 적은 분량으로 책하나 말들어 보려는 출판사의 노력이 돋보인다. 큰글씨, 반쯤잡아 먹는 여백, 내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페이지짜리 삽화들 그리고 두께를 위한 150페이지의 양장본. 무슨 소장용 시집도 아닌데. 8700이라는 이상한 가격. 저자의 이름값을 가지고 장사해보려는 출판사의 노력 또한 봐줄만하다. (요즘의 책들이 대부분 그런게 책을 편집하기는 하지만 이책을 조금더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타 : 책을 살필요없고 별로 볼필요는 없을 것같다. 구지 보고 싶은 분이라면 서점에서 앉아서 보시길. 넉넉잡고 1시간이면 보실 수 있습니다.

 2005년 7월 27일 늦잠자서 1시간 늦게 가고 있는 출근 전철에서 씀.
 2005년 7월 29일 새벽에 정리함.
 
 선물받은 책이라 그냥 봤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2. 북벌 프로젝트
 내가 가진 생각들 중에서 나 혼자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을 없을까? 틀린 것이지만 억지로 부여잡고 그 생각을 고수하면서 아집까지 부리는 경우는 없을까? 어쩌면 잘못된 것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고치지 못하는 내 자신은 모습은 없을까?  그런 모습을 방치하는 것도 크나큰 잘못은 아닐까? (지금,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본다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있는 것도 같다. 대상이 어떤 것이고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 가에 따라서 달라지는 그런 문제들.)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못하는 것이 아닌) 사람이 있다. 그 의견이 일반적으로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가치를 적용할 때 올바르거나 그르다는 판단은 아직 없는 상태라고 할 때 그 의견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그 의견을 고수하는 사람이 있다. 또한 옳고 그름에 대해서 판단을 꺼리는 사람도 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며 자신만이 옳다고 하는 사람. 물론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 태도가 필요하다. 그런 경우에는 자존심이 걸린 문제일수 있고 자신의 강인함을 내세우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의견이나 생각이 올바른 것이어야 하며 객관적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에는 객관성과 보편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것일지라도 멀지 않은 미래에는 보편적인 가치가 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2가지의 경우가 아니라면 자신의 의견에 대해 정오를 가려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고치기 어렵다면 적어도 타인의 의견을 들어보고 자신의 의견을 스스로 평가라도 해봐야 할 것이다.
 자신의 의견을 고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슨 의견이든지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상대방의 의견에 대한 적절한 검증이나 뒷받침 없이 그냥 반대하는 경우이다. 더 심한 경우에는 자신의 반대의견이 옳지 않은 것이라고 판단된 경우에는 반대의 입장을 고수하는 경우도 있다. 혼자 사는 세상이라면 나만 알면 될 것이지만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사는 세상에 산다면 나와 타인 둘 다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인가?

 한국의 정치인들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그나마 좀 나은 게 민주노동당.
 지금의 회사와 대표이사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자신의 의견과 생각도 중요하겠지만 조금 더 타인의 의견을 조금 더 귀 기울이고 수렴하여 자신의 의견을 오라로 보았으면..
 그런데 말이다. 위 두 가지의 경우 다 왜 욕들어 먹으면서 뻔뻔하게 잘도 사는지?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많은지? 이렇게 사람들이 부를 축적하려하고 권력을 가지려고 하는 이유인가?

 2005년 7월 21일 퇴근 전철에서 씀.
 2005년 7월 26일 새벽에 정리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Review

1. 호삼다, 혹정 + 판첸라마 대소동
 배움이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배움이란 어디서부터 시작일까? 어떤 것들이 배움의 바탕이 될까?
 첫째는 가르침에 의한 배움이 아닐까? 그리고 다른 배움 하나는 스스로부터 터득하거나 타인으로부터 모법을 받는 경우도 해당될 것이다. 물론, 배우지도 않고도 타인을 추종하고 모범을 본받지도 않아도 아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호삼다라는 어린아이와 혹정이라는 노인사이의 배움과 가르침에 한번 감동한다. 73세의 노인이 어린아이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어쩌면 일종의 대단한 용기이다. 예전부터 생각하여왔다. 자신보다 겉으로 위의 사람이 아니라 내면에서의 배움의 대상은 단계가 위인 사람만이 될 수 있다고(물론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대상으로 해서 배우는 경우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나보다 못한 이를 보면서 '저렇게 되지는 말아야지'하는 마음이 생기는 경우).. 배움에 있어서는 어떤 대상이던 간에 자신을 낮추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또한 그 낮춤에는 공경과 존중의 자세를 포함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배움의 지식을 그저 알려주는 것에 그치면 안 될 것이다. 지식은 스스로 갈구하고 찾아서 습득해야 할 것이다. 현재 가진 지식을 점검하고 정리하며 새로운 지식으로 확장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저 주어진 지식에만 안주하며 편협한 생각만을 고집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가진 지식과 앎에 대해서 얼마나 점검하고 정리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나마 남은 지식들을 어떻게 불려가고 있는지? 마지막으로 그 배움에 있어 가르침의 대상은 특정한 사람이었는지? 이런 내 스스로 나에게 던지는 질문을 하여본다.
 판첸라마 대소동에서 열하의 일행이 하는 행동을 곰곰이 생각해본다.(일단은 부정적) 다른 이에게 머리를 조아린다는 것은 어쩌면 자존심이 상하는 것일 수 있다. 억압에 의한 경우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영화나 드라마는 가끔 이런 경우 배신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억압에 의한 경우가 아니라면 자존심이 그렇게 상하는 일일까 하는 것이다. 억압에 의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기존의 가치관이나 변화를 넘어서는 행동을 하는 경우에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이때에는 현실 안주의 의미가 조금 더 강할 것이다.
 판첸라마에게 머리를 숙일 수 없었던 것은 기존의 유교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것과 머리를 숙였을 경우 그 주변에서 자신에게 오는 시선의 날카로움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하비만, 변화나 새로운 가치관에 대해서 두려워 한다는 것은 자신을 더욱더 약하고 옹졸하게 만드는 것을 아닐까? 주어진 상황에 안주하는 그런 행동으로 빠지지는 않을까? 아마도 그게 좋은 일은 아닐 테지만 나라면 어땠을까?

 원래는 판첸라마 대소동을 보면서 "부정적이다"라는 의도로 쓰려고 했는데 쓰다가 보니 어느 정도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 일행 중에 내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을까?
 보편적으로 인식되어져 온 것들을 깬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이다. 하지만, 타인에 비해 조금 더 가진 부와 권력(보편적인 가치와 타당한 동의를 얻지 못한)을 쉬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을 기득권층의 지나친 욕심이며 없는 자에 대한 횡포는 아닐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욕들어 먹기 딱 좋은 모습은 아닐까? (물론, 보통사람이 가진 가치가 올바르고 정의스러워야 할 것이지만)

 2005년 7월 15일 출근 전철에서 씀.
 2005년 7월 26일 새벽에 정리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

뭐가 개츠비를 위대하다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부를 가진 것이 위대하다고 표현하다고 해야하나?
부이외에는 어떤 것도 제대로 갖지 못한 사람이 정말로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갖추지 못한 것에 대해서 집착증정도로 보이는 모습에서 그가 행복한 것일까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행복이라는 상대적인 가치인 것이다.
그냥 바램으로 남을 수도 있지만 다른 면에서 생각해보면 지금 현재가 행복한 상태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지금이 순간이 불행한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건 아마도 생각하는 사람들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이책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왜 이책이 고전으로 통하는 지도 잘 모르겠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20년대의 미국에 대해서 조금 알고 봐야 하지 않을까?

   씀 : 2005년 2월 14일
   읽음 : 2005년 1월 26일 ~ 2월 1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도를 기다리며
       사뮈엘 베케트


 책을 읽기전에는 고도라는 의미가 높이를 말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니까, 땅에서의 높이(해발고도, 비행고도)라는 의미로 생각되었다. 책제목에서 무슨 희망이라던가 아니면 어떤 이상이나 가치를 기다리는 의미로 생각했었다.

 책에서는 고도라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으로 표현되어진다. 물론 고도라는 의미가 우리가 쉬이 얻을 수 없는 희망이라던가 이상 가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한다. 주인공인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기다리는 고도는 끝까지 고도라는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꿈과 희망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는 않으며 우리가 쉽게 얻을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 것을 아닐까?

 책에는 에스트라공, 블라디미르, 포조, 럭키, 소년의 다섯인물이 나타난다. 하나같이 바보같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답답해보이기까지 하다. 어제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이나 말장난이나 하고 있는 모습들을 볼 때 특히나 그랬다. 어쩌면 고도를 기다리면서 무의미한 행동과 말로서 시간이나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소는 그 행동들과 말장난게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한다. 그냥 무턱대고 아무런 것들도 없이 그냥 희망과 이상을 쫓아다니는 것은 무의미한 행동이 아닐까하는. 물론 희망을 갈구하는 것이 맞는 일이다. 그러나, 그 희망을 위해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그냥 꿈이 뿐이지 않을까? 꿈을 쫓아서 노력하고 꿈을 현실로 이룩하려는 노력을 해야하지 않을까? 회사 화장실에 얼마전까지 붙어있던 글이 있었다.

 "꿈을 현실로 만들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언제나 꿈일 뿐이다."

     2005년 01월 26일 아침에 씀
     2005년 01월 24일 ~ 25일 읽음

 덧붙임 1
 책을 읽으면서 럭키가 그냥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는 너무 마음에 안들었다. "씨바"하고 포조에게 한바탕 욕이나 주먹이라도 휘둘렀을면 하는 바램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이 너무 아쉽다.

 덧붙임 2
 전날과는 다르게 포조가 장님이 되고 럭키가 벙어리가 된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인생의 덧없음일까? 하루를 알 수 없는 현실의 무의미, 꿈이라는 것 이상이라는 것을 쫓은 것이 덧없음을 암시하는 것일까? 아니면 장님이나 벙어리처럼 알 수 없는 인생이나 조용하게 다른 사람들틈에 뭍혀서 살라는 의미일까?

 덧붙임 3
 홀로 서기 1
  서정윤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가슴이 아프면
 아픈 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어디엔가 있을
 나의 한 쪽을 위해
 헤매이던 숱한 방황의 날들.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졌었다면,
 이제는 그를
 만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