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Review

1. 호삼다, 혹정 + 판첸라마 대소동
 배움이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배움이란 어디서부터 시작일까? 어떤 것들이 배움의 바탕이 될까?
 첫째는 가르침에 의한 배움이 아닐까? 그리고 다른 배움 하나는 스스로부터 터득하거나 타인으로부터 모법을 받는 경우도 해당될 것이다. 물론, 배우지도 않고도 타인을 추종하고 모범을 본받지도 않아도 아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호삼다라는 어린아이와 혹정이라는 노인사이의 배움과 가르침에 한번 감동한다. 73세의 노인이 어린아이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어쩌면 일종의 대단한 용기이다. 예전부터 생각하여왔다. 자신보다 겉으로 위의 사람이 아니라 내면에서의 배움의 대상은 단계가 위인 사람만이 될 수 있다고(물론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대상으로 해서 배우는 경우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나보다 못한 이를 보면서 '저렇게 되지는 말아야지'하는 마음이 생기는 경우).. 배움에 있어서는 어떤 대상이던 간에 자신을 낮추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또한 그 낮춤에는 공경과 존중의 자세를 포함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배움의 지식을 그저 알려주는 것에 그치면 안 될 것이다. 지식은 스스로 갈구하고 찾아서 습득해야 할 것이다. 현재 가진 지식을 점검하고 정리하며 새로운 지식으로 확장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저 주어진 지식에만 안주하며 편협한 생각만을 고집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가진 지식과 앎에 대해서 얼마나 점검하고 정리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나마 남은 지식들을 어떻게 불려가고 있는지? 마지막으로 그 배움에 있어 가르침의 대상은 특정한 사람이었는지? 이런 내 스스로 나에게 던지는 질문을 하여본다.
 판첸라마 대소동에서 열하의 일행이 하는 행동을 곰곰이 생각해본다.(일단은 부정적) 다른 이에게 머리를 조아린다는 것은 어쩌면 자존심이 상하는 것일 수 있다. 억압에 의한 경우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영화나 드라마는 가끔 이런 경우 배신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억압에 의한 경우가 아니라면 자존심이 그렇게 상하는 일일까 하는 것이다. 억압에 의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기존의 가치관이나 변화를 넘어서는 행동을 하는 경우에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이때에는 현실 안주의 의미가 조금 더 강할 것이다.
 판첸라마에게 머리를 숙일 수 없었던 것은 기존의 유교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것과 머리를 숙였을 경우 그 주변에서 자신에게 오는 시선의 날카로움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하비만, 변화나 새로운 가치관에 대해서 두려워 한다는 것은 자신을 더욱더 약하고 옹졸하게 만드는 것을 아닐까? 주어진 상황에 안주하는 그런 행동으로 빠지지는 않을까? 아마도 그게 좋은 일은 아닐 테지만 나라면 어땠을까?

 원래는 판첸라마 대소동을 보면서 "부정적이다"라는 의도로 쓰려고 했는데 쓰다가 보니 어느 정도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 일행 중에 내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을까?
 보편적으로 인식되어져 온 것들을 깬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이다. 하지만, 타인에 비해 조금 더 가진 부와 권력(보편적인 가치와 타당한 동의를 얻지 못한)을 쉬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을 기득권층의 지나친 욕심이며 없는 자에 대한 횡포는 아닐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욕들어 먹기 딱 좋은 모습은 아닐까? (물론, 보통사람이 가진 가치가 올바르고 정의스러워야 할 것이지만)

 2005년 7월 15일 출근 전철에서 씀.
 2005년 7월 26일 새벽에 정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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