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테러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라는 이분법적 선택지가 유사-선택이라는 주장에서 다시 시작해보자. 그것은 ‘강요된 선택’이다. 아무도 공개적으로 테러를 지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 경우 그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경우조차도 테러에 찬성하는 것으로 내몰린다. “그래서, 당신의 입장은 ‘정확히’ 어느 쪽이란 얘기냐?”라는 것이 되돌아올 수 있는 반응이다.  

 

   
 

정확히 이것은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유혹이다. 즉 정확하게 겉보기로 선택이 투명해지는 바로 그 순간에 신비화(속이기)는 완전해진다. 우리에게 제시된 선택은 진정한 선택이 아니다. 오늘날 더욱더 우리는 한발 뒤로 물러날 수 있는 힘을 모으고 그 상황의 배경에 대해 반성해봐야 한다.(<실재계 사막>, 107쪽)

 
   

 

인용문의 첫 문장은 “This, precisely, is the temptation to be resisted”를 옮긴 것이다. 좀 더 강하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저항해야만 하는 유혹이다”라고 옮기고 싶다. 즉 어떤 선택이 자명해질 때, 거기엔 항상 속임수가 개입하기 마련이다. 테러에 대한 찬반 선택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진정한 선택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황의 배경을 다시금 성찰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유혹에 이끌려 2002년 2월에는 미국인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50인의 지식인 선언이 발표되었다. 지젝이 보기에 “그것은 스스로 지워버린 칭호에 대한 실제적인 역설의 분명한 사례이다.” 그러한 서명 행위 자체가 ‘지식인’의 역할을 포기한 행위이므로 그것이 ‘지식인 선언’이라고 공표되는 것은 모순이고 역설이다. ‘실제적인 역설’은 ‘pragmatic paradox’를 옮긴 것인데, 언어학 용어로는 ‘화용론적 모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낙서 금지’라고 쓴 낙서 같은 걸 말한다.

상황의 배경에 대해서 다시금 성찰해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지젝은 두 가지 ‘complication’을 제시한다. 번역본에서는 ‘합병증’이라고 옮겼는데, ‘복잡화’, ‘곤란한 문제’ 등의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는 말이다. 그냥 ‘복잡한 문제’라고 해보자. 복잡한 문제란 물론 단순한 해법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더 복잡하게 생각해봐야 하는가? 반복하건대 첫째, 오늘날 중요한 선택은 진정으로 자유민주주의 대 근본주의(혹은 그 파생물) 사이의 선택일까, 라는 점.  

 

   
 

오늘날의 세계화 상황의 복잡성과 이상한 뒤틀림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반세계화 운동처럼 막다른 흐름으로 표현되는 바로 이 순간에서) 자본주의와 그의 대타자 간의 선택이 진정한 선택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108쪽)

 
   

  

 

‘자본주의와 그의 대타자’는 ‘capitalism and its Other’의 번역이다. 그러니까 ‘자유민주주의 대 근본주의’라는 유사-선택지 대신에 ‘자본주의 대 그 타자’가 진정한 선택지라는 주장이다. 타자로서의 반자본주의는 현시점에서는 반세계화 운동 같은 흐름에 의해 대표되고 있다(물론 이때의 ‘현시점’은 2002년을 전후로 한 시점이다). 주의할 것은 ‘자본주의 대 반자본주의’가 구조적으로 부차적인 다른 현상에 의해 수반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대 그 과잉’이다. 20세기의 역사에서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패턴은 무엇이었나? 자본주의가 자신의 진정한 적을 깨부수기 위해 불장난을 시작하고 파시즘이라는 형태의 그의 외설적인 과잉을 동원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자체의 생명력을 갖게 된 이 과잉(파시즘)은 너무 강력해져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자신의 진정한 적인 공산주의와 힘을 합쳐서 그것을 억눌러야 했다. 그것이 2차 세계대전이다. 지젝은 의미심장하다고 덧붙였지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전쟁이 ‘냉전’이었던 데 반해서 거대한 ‘열전(Hot War)’은 파시즘과의 전쟁 곧, 자본주의 내부의 전쟁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지젝은 탈레반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묻는다. 실상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은 공산주의(소련)와의 전쟁을 위해 미국의 지원하에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그 적으로 변해버렸다. 그렇다면 테러리즘의 기세가 아무 등등하다 할지라도,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 내부의 전쟁이다. 따라서 “진보적 지식인의 첫 번째 의무는 그를 대신하여 적의 투쟁과 맞붙는 것이 아니다.”(109쪽) ‘적의 투쟁과 맞붙는다’는 ‘to fight the enemy's struggles’를 옮긴 것이다. ‘적의 전쟁’에 끼어드는 것으로 봐야겠다. 즉 ‘진보적 지식인’이 ‘자본주의와 투쟁하는 지식인’을 뜻한다면, 적(자본주의)의 전쟁을 도울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그리고 둘째,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그 자체를 ‘해체’해야 한다. 아프가니스탄은 그 자체로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시작부터 외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지젝은 아프가니스탄의 지리적 구획이 주변 강대국과 열강에 의해 어떻게 인위적으로 재단됐는지 나열한다. “따라서 근대화의 범위 밖에서 최근까지도 역사가 취급하지 않은 고대의 영역이기는커녕, 아프가니스탄의 존재 자체는 외세들 간 상호작용의 결과이다.”(109~10쪽) 즉 역사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근대화 바깥의 무슨 고대 왕국 같은 것이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은 순전히 근대 열강 사이의 역 학관계가 낳은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아프가니스탄의 처지는 유럽에서 보면 벨기에의 처지를 닮았다. 초콜릿과 아동 포르노로 유명한 벨기에는 ‘초콜릿 애용자’와 ‘아동학대자’란 상투적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 그것이 미디어가 만들어낸 조작적 이미지라면 아프가니스탄에 들씌워진 ‘아편과 여성억압의 나라’라는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그렇게 자신이 조작해낸 이미지와의 전쟁이기도 했다.  

 

   
 

미국의 ‘역사로부터의 휴일’은 날조였다. 미국의 평화는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재난으로 사들인 것이었다. 오늘날 우세한 관점은 외부로부터 공격해오는 말할 수 없는 악과 대면하는 결백한 시선의 관점이며, 다시금 이런 시선에 관하여 우리는 도처에서 악을 지각하는 결백한 시선 그 자체에도 (역시) 악이 존재한다는 헤겔의 그 유명한 격언을 적용할 만한 힘을 불러일으켜야 한다.(<실재계 사막>, 110쪽)

 
   

 

헤겔의 유명한 격언은 “Evil resides (also) in the innocent gaze itself which perceives Evil all around”를 가리킨다. 우리는 무고하고 결백하다는 시선으로 미국은 외부의 악을 응징하고자 하지만, 정작 악은 그러한 시선 자체에도 포함돼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물라 오마르의 교훈을 다시 되새겨보자. “당신네들은 당신네 정부의 말을 진실이든 허위든 받아들입니다. 당신네들은 스스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까?” 이때 스스로 생각한다는 자기 성찰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결백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자기 내부의 ‘악’에 대한 냉정한 응시를 포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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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공격에 대하여 “미국은 억울하다!”와 “미국은 당해도 싸다!”라는 두 가지 입장이 대립한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여기서 가능한 유일한 해결책은 바로 이런 대립을 거부하고서 두 가지 입장들을 동시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떻게? ‘전체성(totality)’이라는 변증법적 범주에 기댐으로써다. 이 두 입장 각각은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일면적이고 틀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마주치게 되는 것은 도덕적 추론의 한계다. 도덕적 관점에서 보자면, 9·11의 희생자들은 무고하고, 공격 행위는 증오할 만한 범죄다. 하지만 그렇듯 무고하다는 것은 오늘날의 세계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능하지 않은 위치다. 곧 허위적 추상화에 불과하다.

이데올로기적 해석상의 충돌도 마찬가지다. 한쪽에선 9·11 공격이 자유민주주의적 가치에 대한 공격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선 세계금융자본주의의 중심과 상징에 대한 공격이라고 말한다. 이런 경우 테러리스트들도 잘못했지만, 미국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책임을 나눠가져야 할까? 하지만 지젝이 보기에 그 두 입장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곧 우리는 테러리즘에 맞서야 할 필요성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그 테러리즘이란 용어의 의미를 확장하여 미국과 서구의 패권적 행위 또한 테러리즘에 포함시켜야 한다.   

 

 

 

   
 

“부시와 빈 라덴 간의 선택은 우리들의 선택이 아니다. 그들 모두는 우리와 맞서는 ‘그들’이다. 세계 자본주의가 전체성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그 자체와 그의 타자의 변증법적 통일체, 즉 ‘근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기반 위에서 그것에 저항하는 세력들의 변증법적 통일체라는 것을 의미한다.”((실재계 사막>, 102쪽)

 
   

 

즉 부시와 빈 라덴이 표면상 대립적으로 보일지라도 세계자본주의의 전체성이란 관점에서 보자면 변증법적 통일체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9·11 이후에 등장한 두 가지 주된 내러티브는 모두 부정적이다. 하나는 미국식 애국주의 내러티브다. 무고하게 포위 공격을 당했으니 애국심을 되찾아 떨쳐나서자, 라는 식. 하지만 반대로, 미국은 과거 수십 년간 저지른 죄과에 대한 당연한 대가를 지불한 것이라는 좌파적 내러티브가 과연 그보다 더 나은 것인가, 라는 게 지젝의 질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좌파들의 반응까지도 모두 수치스러운 것이었다고 그는 평한다. WTC의 쌍둥이 빌딩이 거세(파괴)를 기다리는 두 남근 상징이었다는 페미니즘적 해석까지 동원되었고, 르완다, 콩고 등지에서 수백만 명이 학살당했던 것과 비교하면 9·11의 희생자 3,000명 정도는 별로 대수로울 게 없다는 대응도 제기되었다. 그리고 어차피 탈레반과 빈 라덴을 키운 건 미국의 CIA이므로 자업자득이란 주장도 나왔고. 이런 대응은 어떤가. “그렇습니다. WTC 붕괴는 하나의 비극이지만 우리는 그 희생자들과 완전히 결속되지 않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미국의 제국주의에 대한 지지를 의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야말로 지젝이 보기엔 윤리적 파국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장 적합한 자세인가. 그것은 모든 희생자들과의 무조건적인 연대이다. 만약 당신이 “그렇기는 하지만, 아프리카에서는 고통 받고 있는 수백만 명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식으로 이러한 연대를 내키지 않아 한다면, 그것은 제3세계에 대한 동정심을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제3세계 희생자들에 대한 은근한 인종차별적 태도를 드러내는 자기기만에 불과하다. 좌파의 대응에 대한 지젝의 또 다른 비판은 9·11 공격 이후 몇 주간에 걸쳐서 “평화에 기회를! 전쟁은 폭력을 종식시키지 못한다!(Give peace a chance! War does not stop violence!)” 같은 낡은 주문만을 되뇌었던 행태를 향한다. 공격 이후의 새롭고 복잡한 상황에 대한 분석 대신에 ‘전쟁 반대!’라는 맹목적인 구호에만 매달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점은 부시 정부도 시인한 것이니 좌파로선 맥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WTC 공격이 일종의 범죄 행위이며 그것을 감행한 하수인들이 범죄자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편 좌파도 있었는데, 이런 경우엔 ‘테러’가 지닌 정치적 차원을 완전히 놓친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맥없는 좌파들 덕분에 9·11의 비극에 대한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의 전유가 훨씬 쉬워졌다는 게 지젝의 분석이다. 모든 것을 테러에 찬반으로만 몰고 간 것이다. 하지만 테러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는 진정한 선택지가 아니며, 그러한 선택에 대한 유혹은 기각되어야 한다. 문제는 좀 더 복잡하다. 지젝이 던지는 두 가지 질문 혹은 요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오늘날 중요한 선택은 진정으로 자유민주주의 대 근본주의(혹은 그 파생물) 사이의 선택일까? 둘째,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자체를 ‘해체’해야 한다. 이 각각이 갖는 의미에 대해선 다음 회에 마저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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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이 ‘제20차 아메리칸 드림 전당대회’였다고 하면, 그것이 갖는 교훈이 무엇이어야 할까? 이 대목은 조금 자세히 읽기로 한다.  

 

   
 

9월 11일은 이미 이데올로기적 대의를 위해 도용되고 있다. 반세계화는 이제 한물갔다는 모든 매스 미디어의 주장으로부터, WTC 공격의 충격으로 포스트모던 문화 연구에 내용이 없다는, 즉 ‘현실 생활’과의 접촉이 결여되어 있다는 그런 특징을 내보이게 되었다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그렇다. 두 번째 생각은 잘못된 추론 때문에 (부분적으로) 옳다고 할 수 있지만 첫 번째 생각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실재계 사막>, 98쪽)

 
   

 

 

지젝이 완전히 잘못됐다고 지적한 첫 번째 생각이란 건 “반세계화가 이제 한물갔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현실 생활(real life)’과 동떨어진 포스트모던 문화 연구에 대한 자성이 부분적으로나마 옳다고 지적한다. 일종의 아카데미 트렌드로서 전형적인 문화 연구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이 다루는 주제들이 얼마나 사소한가, 라는 것이다. 가령 “수천 명의 끔찍한 죽음과 비교해서 있음직한 인종차별주의적 기조를 깔고 있는 정치적으로 부적당한 표현의 사용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비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건 9·11에서와 같은 수천 명의 끔찍한 죽음과 인종차별적인 뉘앙스를 깔고 있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표현들이다. 문화 연구는 이 사안의 경중을 판단하는 데 무능력한 건 아닌가라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문화 연구의 딜레마인데, 압제에 대한 투쟁이 제1세계의 자본주의 세계 내에서의 투쟁이라는 점을 곧바로 인정하면서 그것이 과연 동일한 논제에 충실하게 될 것인가? 여기서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서양의 제1세계와 그에 대한 외부의 위협 사이에 벌어진 더 큰 갈등 속에서 미국의 기본적인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자신의 충실성을 재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98~99쪽)

 
   

 

번역문은 초점이 어긋나 있는데, 다시 정리해본다. 문화 연구의 딜레마는 무엇인가? “압제에 대한 투쟁이 제1세계의 자본주의 세계 내에서의 투쟁이라는 점을 곧바로 인정하면서 그것이 과연 동일한 논제에 충실하게 될 것인가(will they stick to the same topics, directly admitting that their fight against oppression is a fight within First World capitalism's universe)?”라는 의문이다. 즉 문화 연구의 지향이 ‘억압에 대한 투쟁’이라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것이 고작 제1세계 자본주의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투쟁에 불과하다면, 9·11이 상기시켜주는 바대로 정작 문제가 되는 제1세계와 제3세계 간의 적대에 대해서는 아무런 할 말이 없지 않을까. 그런 사실을 인정한 이후에도 여전히 똑같은 주제들에 집착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어떤 함축을 갖는가?

마지막 인용문의 원문은 이렇다. “which means that, in the wider conflict between the Western First World and the outside threat to it, one should reassert one's fidelity to the basic American liberal-democratic framework?” 번역문에서처럼 평서문이 아니라 의문문이다. 서양의 제1세계와 그것을 위협하는 외부 사이의 갈등이라는 보다 넓은 맥락을 우리가 인지한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라는 기본 틀에 대한 충실해야만 하는가라는 것이 의문의 골자다. 물론 대답은 부정적이다.

다르게 말해본다면 이런 것이다. “또는 그것이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비판적 자세의 과격화를 향해 한걸음 내디딜 것인가? 다시 말해 이런 체제 그 자체를 문제화하게 될 것인가?” 여기서도 ‘그것’이 가리키는 건 ‘문화 연구’이다. 문화 연구가 본래 지향하는 비판적 태도 혹은 입장이 한 걸음 더 과격화할 수 있을까라는 것. 즉 제1세계 내부의 억압을 문제 삼는 ‘사소한’ 행태에서 벗어나 문화연구는 전 지구적 적대 관계로 관심을 확장해나갈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도 9·11은 문화 연구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반세계화의 종말에 대해서는 9월 11일 이후 처음 며칠 동안 그 공격이 반세계화 테러리스트들의 소행일 수 있다는 애매한 힌트는 당연히 노골적인 조작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9월 11일에 벌어졌던 일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세계 자본주의에 대한 적대감의 문맥 속에 그것을 위치시키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99쪽)

 
   

 

이어서 “반세계화는 한물갔다”는 주장, 곧 ‘반세계화의 종말’론에 대한 반박이 이어진다. 9·11 공격이 벌어지고 나자 이것이 반세계화를 주장하는 테러리스트들의 소행이라는 암시(dark hint)가 제기됐었지만, 모두 조잡한 조작에 불과하다는 것. 문제는 9·11의 핵심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고, 그것은 그 사건을 “세계 자본주의의 적대들이라는 문맥 속에 위치시키는 것(the only way to conceive of what happened on September 11 is to locate it in the context of the antagonisms of global capitalism)”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역사상 처음으로 본토에 대한 공격을 받은 미국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양자택일에 직면하도록 한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권역’을 더욱 더 방비할 것인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로부터 걸어 나올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가?”

이 선택지를 조금 더 풀어보자. “자신들의 권역을 더욱 더 방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어째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야 한단 말인가? 이와 같은 일들이 ‘여기’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거야!”라는 부도덕한 태도를 반복하거나 강화하는 것이다. ‘여기’는 물론 ‘미국’이다. 다른 곳은 몰라도 미국에서만큼은 그런 일을 허용할 수 없다는 ‘미국 예외주의’가 이러한 태도를 떠받치고 있다. 이것은 곧 외부의 위협에 대한 공격을 더 강화하는 쪽으로 나가게 된다. 편집증적 행동화로 빠지는 것이다. 반면에 “그런 함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자신을 외부 세계로부터 분리시켜준 ‘환상적인 스크린’에서 빠져나와 ‘실재계의 세계(the Real world)’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한걸음은 이런 구호의 변화로 표현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일이 여기서는 일어나서는 안 돼!(A thing like this shouldn't happen here!)”에서 “이와 같은 일이 그 어디에서도 일어나서는 안 돼!(A thing like this shouldn't happen anywhere!)”로. 이것이 9·11에서 얻을 수 있는 진정한 교훈이다.  

 

   
 

다시 말해 그런 일이 여기서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보증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런 일이 그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책임을 져야 하는 자들을 유쾌한 복수로서가 아니라 애석한 의무로 징계하면서 미국은 이 세계의 일부로서 그 자신의 취약성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실재계 사막>, 100쪽)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것은 정반대였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오히려 9·11을 초래한 미국식 패권주의를 더 강화하는 쪽으로 나간 것이다. 마치 미국에 대한 원한이 미국이 가진 힘의 ‘과잉’ 때문이 아니라 그 ‘결여’ 때문에 빚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 대신 우리가 취하고 있는 것은 이 세계의 경찰로서 미국의 예외적인 역할에 대해 강력히 재주장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치 미국에 대한 원한을 야기하는 것이 그가 가진 힘의 과잉 때문이 아니라 그의 결여 때문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실재계 사막>, 100쪽)

 
   

 

무엇이 바람직한 태도일까? ‘미국의 결백’이라는 뻔뻔스러운 이데올로기적 입장과 미국은 “그렇게 당해도 싸다!”라는 편향적 태도 사이에서 어떤 해결책이 가능한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다음 회에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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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의 경험이 궁극적으로 미국의 이데올로기를 ‘기본으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데 불과했다면 결국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일까? 지젝은 1990년 동유럽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를 다시금 상기해보자고 제안한다.  

 

   
 

정치체제의 붕괴, 이를테면 1990년 동구라파에서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에 대해 생각해 보라. 어느 순간에 갑자기 사람들은 게임이 끝났음을, 공산주의가 패배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 변화는 순전히 상징적이다. ‘실제로는’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바로 그 순간으로부터 체제의 최종적인 붕괴는 단 며칠 내에 벌어졌고……. 동일한 순서로 어떤 것이 9월 11일에 발생했다면 어찌 하겠는가?(<실재계 사막>, 97쪽)

 
   

 

그 어떤 것이란 ‘미국 권역(American Sphere)’이라는 어떤 대타자 형상의 붕괴라고 지젝은 말한다. 이러한 지적에 이어서 지젝이 곧바로 떠올리는 것은 미국의 ‘파트너’였던 러시아(과거 소련)이다. 말하자면 ‘소비에트 권역(Soviet Sphere)’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때는 1956년 2월 제20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때 스탈린의 사망(1953) 이후 당의 제1서기였던 흐루시초프는 비밀 연설(비공개 연설)을 통해서 절대 권력자였던 스탈린의 과오(!)를 비판한다. 흐루시초프의 연설문을 옮긴 <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책세상, 2006)를 참고하면, 제17차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당 중앙위원회 위원과 후보위원 139명 중 98명, 즉 70퍼센트가 (주로 1937~38년에) 체포되어 총살당했으며, 표결권과 심의권을 지닌 제7차 전당대회 대의원 1,966명 중 절반이 훨씬 넘는 1,108명이 반혁명 범죄로 고발되어 체포되었다.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긴 하지만, 대략 스탈린 시대에 처형되거나 감옥에서 죽은 이들의 숫자는 2,000~2,5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체포된 사람은 4,000만 명에 이른다. 이것이 소위 ‘스탈린의 공포정치’이고 ‘스탈린 체제’였다. 이 체제의 가장 큰 문제는 국가와 당의 기간요원들이 느꼈던 신분의 불안정이었고, 이미 상당한 규모로 팽창한 관료 계층은 신분 안전과 업무의 자율성 보장을 기대했다. 그렇게 해서 스탈린 사후에 형성된 것이 안정적인/특권적인 거대 관료 조직이다. 이것은 이후에 ‘노멘클라투라’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그러니까 “스탈린 시대에서 포스트-스탈린 시대로의 이행”은 (라캉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주인-담론에서 대학-담론으로의 이행”에 대응한다[“라캉의 관심은 현대 사회에서 헤게모니적 담론이 주인-담론에서 대학-담론으로 이행한다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지젝, <이라크>, 171쪽)].  

 

 

서구의 경우 그러한 이행이 표시되는 지점이 1968년 혁명이었다면, 소련의 경우에는 이보다 앞선 1956년 제20차 공산당 전당대회(2월 14일~25일)에서 흐루시초프가 행한 반스탈린 비밀 연설이었다. 요컨대 서구의 68혁명에 짝이 되는 것은 소련의 1956년 비밀 연설이다. 참고로 스탈린의 개인숭배로 인한 과오들을 적시한 가운데, 흐루시초프의 연설의 말미에서 제시고 있는 결론은 세 가지다(<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 111~112쪽).

첫째, 개인숭배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신과 무관하며, 당의 지도원칙과 당의 생활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서 볼셰비키답게 비난하고 근절해야 하며, 그것을 부활시키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맞서 철저히 투쟁해야 한다.  
둘째, 위에서 아래까지 당의 모든 조직에서 레닌의 당 지도 원칙, 무엇보다도 최고원칙인 집단 지도 원칙의 매우 엄격한 준수, 당헌에 규정된 당 생활규범의 준수, 비판과 자기비판의 강화 등과 관련하여 당 중앙위원회는 최근 몇 년간 시행해온 사업을 일관성 있고 끈기 있게 지속해야 한다.  
셋째, 소련 헌법에 표현된 사회주의적 소비에트 민주주의에 관한 레닌의 원칙을 전부 다시 내세우며, 권력을 남용하는 자들의 전횡에 맞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개인숭배의 부정적인 영향 때문에 오랜 기간에 걸쳐 계속되어온 혁명적 사회주의 준법성의 침해 행위를 반드시 끝까지 바로잡아야 한다.

이러한 결론에 명시돼 있지만, 흐루시초프가 다시금 강조한 것은 레닌주의로의 회귀다. 하지만 이 연설은 ‘레닌주의 만세!’로 봉합될 수 없는, 시대적 단절을 낳았다. 흐루시초프가 비밀 연설을 행하는 동안 12명 정도의 대표자들이 신경쇠약을 앓게 되어 밖으로 옮겨져 의사의 치료를 받았고, 폴란드 공산당의 총서기장은 며칠 뒤 심장발작으로 사망하기까지 했다는 에피소드는 그 충격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시사해준다. 지젝은 <이라크>에서 이 연설을 ‘본래적인 정치적 행위’의 사례로 들고 있기도 하다.  

 

   
 

본래적인 정치적 행위는, 그것의 형식과 관련해서, 민주적인 것과 동시에 비민주적인 것일 수 있다. (……) 다른 한편 대중적 의지의 본래적 행위는 폭력적 혁명이나 진보적 군부 독재 등의 형식에서 발생할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스탈린의 범죄를 비난하는 흐루시초프의 1956년의 연설은 진정한 정치적 행위였다.(<이라크>, 116~117쪽)

 
   

 

이러한 언급은 <실재의 사막>에서 잠깐 언급된 내용을 보다 확장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해빙>(중앙일보사, 1990)의 작가 일리야 에렌부르그(1981~1967의 회고에 따르면 “2월 25일 비공개회의에서 흐루시초프가 보고할 때, 몇몇 대의원들은 실신했다. 그 보고문을 읽으면서 나는 충격을 받았다. 정말 이것을 복권된 사람이 친구들 사이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중앙위원회 제1서기(=흐루시초프)가 전당대회에서 말했단 말인가. 1956년 2월 25일은 나에게, 그리고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들에게 위대한 날이 되었다.” 물론 이 ‘연설’의 효과가 문학에 직접적으로 반영되는 것은 몇 년이 지난 후다. 수용소에서 돌아온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발표되는 것이 1962년이니까.

<이라크>에서 지젝을 조금 더 따라가본다. “이 대담한 조치의 기회주의적 동기들은 뻔한 것이지만, 여기엔 분명 단순한 계산 이상의 것이 있었으며, 전략적 추론에 의해 설명될 수 없는 일종의 무모한 과잉이 있었다. 이 연설 이후에 사태는 다시는 전과 같지 않았으며, 지도자의 무오류성이라는 근본적 도그마는 침식되었고 따라서 연설에 대한 반응으로서 노멘클라투라 전체가 잠시 마비 상태에 빠진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117쪽) 사실, 이 연설을 계기로 흐루시초프는 당권을 장악한다. 그러니 흐루시초프가 1956년 봄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하게 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겠다(그는 1955년 2월에도 표지를 장식했었다).  

 

 

기본적으로 지젝의 이러한 지적에 동의할 수 있지만, 그가 사용한 ‘노멘클라투라’란 말에 대해서 조금 유보하고 싶다. 스탈린의 최측근들조차도 그가 신임하는 동안에만 생존할 수 있었던 시대에 (안정적인) ‘사회 계급’으로서의 ‘노멘클라투라’라는 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련에 노멘클라투라가 사회 계급으로 부상하는 것은 흐루시초프 이후에 들어선 브레즈네프 시대에 와서다. 따라서 표면적으론 ‘소프트 스탈린’ 시대처럼 보이지만, 브레즈네프의 시대는 주인-담론의 시대(=스탈린 시대)가 아니라 대학-담론, 혹은 관료-담론의 시대다. 라캉의 용어인 ‘대학-담론(University Discourse)’을 소련의 상황에 맞는 보다 적절한 용어로 바꾸자면, ‘관료-담론(Bureaucracy Discourse)’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실제로 자가용 운전을 즐겼던 브레즈네프는 출근길에 곧잘 자신이 직접 관용차를 몰았다고 한다. 운전기사는 조수석에 태우고……. 요컨대 제20차 당 대회에서 흐루시초프의 비밀 연설이 끼친 파문들이 대단했다는 얘기다. 요점은 무엇인가?  

 

   
 

그 요점은 그들이 ‘성실한 공산주의자’였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 대부분은 소비에트 체제의 특성에 대한 어떤 주관적인 착각도 없는 잔혹한 조정자였다. 깨져버린 것은 그들의 ‘객관적인’ 착각인 ‘대타자’의 모습인데, 그를 배경으로 삼아 그들은 권력에 대한 무자비한 욕동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신념을 옮겨놓은 대타자, 말하자면 그들을 대신하여 믿었던 대타자, 그들의 믿을-것으로-가정된-주체가 붕괴된 것이다. 그리고 9월 11일의 여파로 유사한 어떤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2001년 9월 11일은 제20차 미국의 꿈대회가 아니었을까?(<실재계 사막>, 98쪽)

 
   

 

‘제20차 미국의 꿈대회(the Twentieth Congress of the American Dream)’란 표현은 ‘제20차 아메리칸 드림 전당대회’라고 읽어도 좋겠다. 물론 여기서 ‘전당대회’가 뜻하는 것은 제20차 소비에트의 전당대회가 의미했던 바대로,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대타자’의 붕괴이고 파국이다. 9·11에 관한 온갖 이데올로기적 주장과 담론들이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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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이 제1세계와 제3세계의 경계를 배경으로 해서 설명될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두 세계, 곧 서양의 소비주의적 생활방식과 무슬림 급진주의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에 관해 두 가지 직접적인 철학적 참조점이 있다. 바로 헤겔과 니체다. 니체식으로 말하면, 이것은 ‘수동적’ 니힐리즘과 ‘능동적’ 니힐리즘의 대립이다.  

 

   
 

서양에 사는 우리는 어리석은 일상의 쾌락에 빠져 있는 니체의 ‘최후의 인간’이지만, 무슬림의 급진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의 자기 파괴에 이르도록 투쟁에 관련됨으로써 모든 것을 기꺼이 걸어보려고 한다.(<실재계 사막>, 87쪽)

 
   

 

그리고 헤겔식으로 말하면, 주인과 하인 사이의 투쟁이다. 보통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서양인이 주인이고, 무슬림이 하인인가? 아니다, 거꾸로다.  

 

   
 

비록 서양에 사는 우리가 착취하는 주인으로 인식된다 할지라도 하인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들 자신이다. 하인은 삶과 그 쾌락에 매달리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내걸 수가 없지만, 불쌍한 무슬림 급진주의자들은 자기네들의 목숨을 기꺼이 내걸고 있으며…….(<실재계 사막>, 87쪽)

 
   

 

주인과 노예의 투쟁은 생사를 건 투쟁인데, 아군의 사상자가 전혀 없는 하이테크 전쟁에 대한 콜린 파월의 옹호에서 ‘생사를 건다’는 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때문에 ‘노예’이고 ‘하인’이라는 것이다.     

 

 

한편 ‘문명의 충돌’이란 개념은 거부되어야만 한다고 지젝은 말한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건 각 ‘문명 내의 충돌’이지 문명 사이의 충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역사를 비교해보더라도 더 관용적인 것은 이슬람이었다. 서구에서 고대 그리스의 문화적 유산에 다시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중세의 아랍인들에 의해 마련됐다는 사실도 특기할 만한 것이다. 비록 오늘날의 테러 행위에 대한 책임이 면제되지는 않지만 이슬람 자체에 그러한 폭력성이 새겨져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근대의 사회정치적 상황의 결과일 뿐이다.

그렇다면 문명의 충돌이란 무엇인가. 현실 생활에서의 모든 ‘충돌’은 지구적 자본주의와 연계돼 있다. 무슬림 ‘근본주의’의 표적은 사회적 삶을 침식해가는 지구적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등의 부패한 ‘전통주의’ 체제이기도 하다. 르완다와 콩고, 시에라리온의 끔찍한 학살도 동일한 ‘문명’ 내에서 벌어진 일일 뿐더러 지구적 차원에서 경제적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보스니아와 코소보, 그리고 남부 수단에서처럼 ‘문명의 충돌’에 잘 부합하는 사례들에서도 다른 이해관계를 식별하는 건 어렵지 않다. ‘경제적 환원주의’가 너무도 잘 들어맞는 경우이다. 때문에 이슬람 근본주의의 불관용이나 기타 ‘문명의 충돌’ 같은 화제를 끊임없이 분석하는 대신에 이러한 갈등의 배경이 되는 경제적 이해관계의 충돌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럴 때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 같은 국가들이다. 이들은 ‘자유주의 대 근본주의’나 ‘맥월드 대 지하드’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도를 벗어나는 제3항이다. 이들은 매우 보수적인 군주제 국가이지만, 동시에 미국의 경제적 동맹국이며 서양식 자본주의에 완전히 동화돼 있다. 여기서 미국의 이해관계는 간명하다. 석유 자원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선 이들 국가들의 비민주적 체제가 유지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53년 민주적으로 선출된 이란의 헤다야트 모사데그 수상을 CIA를 조종한 쿠데타를 통해서 축출한 전력이 있다. ‘근본주의’도 ‘소련의 위협’도 없는 상태에서 단지 국가가 석유 자원을 통제하고 서방 석유 회사들의 독점을 끝내야 한다는 민주적 각성만이 일어난 상태였는데, 미국은 그런 상황을 용인하지 않았다. 어떤 교훈을 끌어낼 수 있는가?  

 

   
 

진정한 ‘근본주의의’ 보수적인 아랍 체제들의 ‘정도에서 벗어난’ 위치는 중동지역에서 미국 정책의 (간혹은 희극적인)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된다. 그들은 미국이 민주주의보다는 경제에 우선권을 두고 있음을 솔직히 인정하도록 강요되는 그 지점을 보여주고 있다.(<실재계 사막>, 90쪽)

 
   

 

“‘정도에서 벗어난’ 위치”는 “‘perverted’ position”을 옮긴 것이다. 사우디나 쿠웨이트의 ‘도착적’ 위치는 미국의 관심사가 민주주의보다는 경제에 두어져 있음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즉 ‘민주주의와 인권’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이루어진 미국의 군사적 개입은 언제나 허울이었다. 적어도 경제적 이해관계에 비하면 부차적인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사정은 아프가니스탄도 마찬가지였다. 초강대국들 간의 갈등에 휩싸이기 전 아프간은 가장 관용적인 무슬림 사회의 하나였고, 수도 카불은 활기찬 문화적․정치적 삶의 도시였다. 아프간에서 이슬람 근본주의와 탈레반의 득세는 순전히 파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미국 같은 외세의 개입이 낳은 결과이다.  

 

 

‘문명의 충돌’ 전도사들의 주장과는 달리, 사실 미국 내에서 ‘근본주의’의 위협은 오히려 내부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오늘날 미국에는 200만 명 이상의 우익 포퓰리스트와 근본주의자들이 있으며, 이들은 기독교 교리에 의해 정당화되는 각종 테러를 자행한다. 그들은 9·11 사건을 “미국인들의 죄 많은 삶 때문에 하나님이 미국에 대한 보호를 철수해 간 신호”로 간주하며, 물질적 쾌락주의와 자유주의, 문란한 섹스가 넘쳐나는 미국 사회에 응분이 대가를 치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유주의’에 대한 비난은 ‘무슬림 대타자’가 아닌 ‘아메리카의 심장부’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9·11 이후에 벌어진 탄저균 공격 소동도 무슬림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미국 내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소행임을 미국 정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진정한 충돌은 문명들 간의 충돌이 아니라 ‘문명 내부의 충돌’이라는 것을 한 번 더 확인시켜주는 사례다.

“9·11 이후에는 그 어떤 것도 예전과 똑같을 수 없다(Nothing will ever be the same after September 11)”라는 문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지만, 정작 획기적인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지젝의 판단이다. 왜냐하면 미국은 이 사건을 기화로 미국의 이데올로기와 패권을 재단언하는 쪽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즉 반세계화와 여타의 비판들에 맞서 그 기본적인 이데올로기적 좌표를 거듭 단언했을 뿐이다.  

 

   
 

미국은 9월 11일에 그가 어떤 종류의 세계의 일부인지 그것을 실감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그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적 관련에 대한 재주장을 선택하고 말았다. 가난한 제3세계에 대한 책임과 죄책감이 드러나면서 이제 우리는 피해자가 되고 만다!(<실재계 사막>, 96쪽)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은 “out with feelings of responsibility and guilt towards the impoverished Third World, we are the victims now!”를 옮긴 것이다. 여기서 ‘out’은 ‘드러나면서’가 아니라 ‘벗어나서’란 뜻으로 읽어야 할 듯싶다. 가난한 제3세계에 대한 책임과 죄의식을 갖는 대신에 미국의 선택은 “이제 우리가 피해자다!”라는 자의식을 갖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새로운 자의식으로 무장하고 어떠한 변화도 부인하기 위한 대테러 전쟁에 나섰다. 미국이 앞세운 ‘무한한 정의’는 한갓 냉소적인 난센스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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