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의 경험이 궁극적으로 미국의 이데올로기를 ‘기본으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데 불과했다면 결국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일까? 지젝은 1990년 동유럽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를 다시금 상기해보자고 제안한다.  

 

   
 

정치체제의 붕괴, 이를테면 1990년 동구라파에서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에 대해 생각해 보라. 어느 순간에 갑자기 사람들은 게임이 끝났음을, 공산주의가 패배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 변화는 순전히 상징적이다. ‘실제로는’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바로 그 순간으로부터 체제의 최종적인 붕괴는 단 며칠 내에 벌어졌고……. 동일한 순서로 어떤 것이 9월 11일에 발생했다면 어찌 하겠는가?(<실재계 사막>, 97쪽)

 
   

 

그 어떤 것이란 ‘미국 권역(American Sphere)’이라는 어떤 대타자 형상의 붕괴라고 지젝은 말한다. 이러한 지적에 이어서 지젝이 곧바로 떠올리는 것은 미국의 ‘파트너’였던 러시아(과거 소련)이다. 말하자면 ‘소비에트 권역(Soviet Sphere)’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때는 1956년 2월 제20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때 스탈린의 사망(1953) 이후 당의 제1서기였던 흐루시초프는 비밀 연설(비공개 연설)을 통해서 절대 권력자였던 스탈린의 과오(!)를 비판한다. 흐루시초프의 연설문을 옮긴 <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책세상, 2006)를 참고하면, 제17차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당 중앙위원회 위원과 후보위원 139명 중 98명, 즉 70퍼센트가 (주로 1937~38년에) 체포되어 총살당했으며, 표결권과 심의권을 지닌 제7차 전당대회 대의원 1,966명 중 절반이 훨씬 넘는 1,108명이 반혁명 범죄로 고발되어 체포되었다.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긴 하지만, 대략 스탈린 시대에 처형되거나 감옥에서 죽은 이들의 숫자는 2,000~2,5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체포된 사람은 4,000만 명에 이른다. 이것이 소위 ‘스탈린의 공포정치’이고 ‘스탈린 체제’였다. 이 체제의 가장 큰 문제는 국가와 당의 기간요원들이 느꼈던 신분의 불안정이었고, 이미 상당한 규모로 팽창한 관료 계층은 신분 안전과 업무의 자율성 보장을 기대했다. 그렇게 해서 스탈린 사후에 형성된 것이 안정적인/특권적인 거대 관료 조직이다. 이것은 이후에 ‘노멘클라투라’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그러니까 “스탈린 시대에서 포스트-스탈린 시대로의 이행”은 (라캉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주인-담론에서 대학-담론으로의 이행”에 대응한다[“라캉의 관심은 현대 사회에서 헤게모니적 담론이 주인-담론에서 대학-담론으로 이행한다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지젝, <이라크>, 171쪽)].  

 

 

서구의 경우 그러한 이행이 표시되는 지점이 1968년 혁명이었다면, 소련의 경우에는 이보다 앞선 1956년 제20차 공산당 전당대회(2월 14일~25일)에서 흐루시초프가 행한 반스탈린 비밀 연설이었다. 요컨대 서구의 68혁명에 짝이 되는 것은 소련의 1956년 비밀 연설이다. 참고로 스탈린의 개인숭배로 인한 과오들을 적시한 가운데, 흐루시초프의 연설의 말미에서 제시고 있는 결론은 세 가지다(<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 111~112쪽).

첫째, 개인숭배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신과 무관하며, 당의 지도원칙과 당의 생활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서 볼셰비키답게 비난하고 근절해야 하며, 그것을 부활시키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맞서 철저히 투쟁해야 한다.  
둘째, 위에서 아래까지 당의 모든 조직에서 레닌의 당 지도 원칙, 무엇보다도 최고원칙인 집단 지도 원칙의 매우 엄격한 준수, 당헌에 규정된 당 생활규범의 준수, 비판과 자기비판의 강화 등과 관련하여 당 중앙위원회는 최근 몇 년간 시행해온 사업을 일관성 있고 끈기 있게 지속해야 한다.  
셋째, 소련 헌법에 표현된 사회주의적 소비에트 민주주의에 관한 레닌의 원칙을 전부 다시 내세우며, 권력을 남용하는 자들의 전횡에 맞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개인숭배의 부정적인 영향 때문에 오랜 기간에 걸쳐 계속되어온 혁명적 사회주의 준법성의 침해 행위를 반드시 끝까지 바로잡아야 한다.

이러한 결론에 명시돼 있지만, 흐루시초프가 다시금 강조한 것은 레닌주의로의 회귀다. 하지만 이 연설은 ‘레닌주의 만세!’로 봉합될 수 없는, 시대적 단절을 낳았다. 흐루시초프가 비밀 연설을 행하는 동안 12명 정도의 대표자들이 신경쇠약을 앓게 되어 밖으로 옮겨져 의사의 치료를 받았고, 폴란드 공산당의 총서기장은 며칠 뒤 심장발작으로 사망하기까지 했다는 에피소드는 그 충격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시사해준다. 지젝은 <이라크>에서 이 연설을 ‘본래적인 정치적 행위’의 사례로 들고 있기도 하다.  

 

   
 

본래적인 정치적 행위는, 그것의 형식과 관련해서, 민주적인 것과 동시에 비민주적인 것일 수 있다. (……) 다른 한편 대중적 의지의 본래적 행위는 폭력적 혁명이나 진보적 군부 독재 등의 형식에서 발생할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스탈린의 범죄를 비난하는 흐루시초프의 1956년의 연설은 진정한 정치적 행위였다.(<이라크>, 116~117쪽)

 
   

 

이러한 언급은 <실재의 사막>에서 잠깐 언급된 내용을 보다 확장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해빙>(중앙일보사, 1990)의 작가 일리야 에렌부르그(1981~1967의 회고에 따르면 “2월 25일 비공개회의에서 흐루시초프가 보고할 때, 몇몇 대의원들은 실신했다. 그 보고문을 읽으면서 나는 충격을 받았다. 정말 이것을 복권된 사람이 친구들 사이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중앙위원회 제1서기(=흐루시초프)가 전당대회에서 말했단 말인가. 1956년 2월 25일은 나에게, 그리고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들에게 위대한 날이 되었다.” 물론 이 ‘연설’의 효과가 문학에 직접적으로 반영되는 것은 몇 년이 지난 후다. 수용소에서 돌아온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발표되는 것이 1962년이니까.

<이라크>에서 지젝을 조금 더 따라가본다. “이 대담한 조치의 기회주의적 동기들은 뻔한 것이지만, 여기엔 분명 단순한 계산 이상의 것이 있었으며, 전략적 추론에 의해 설명될 수 없는 일종의 무모한 과잉이 있었다. 이 연설 이후에 사태는 다시는 전과 같지 않았으며, 지도자의 무오류성이라는 근본적 도그마는 침식되었고 따라서 연설에 대한 반응으로서 노멘클라투라 전체가 잠시 마비 상태에 빠진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117쪽) 사실, 이 연설을 계기로 흐루시초프는 당권을 장악한다. 그러니 흐루시초프가 1956년 봄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하게 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겠다(그는 1955년 2월에도 표지를 장식했었다).  

 

 

기본적으로 지젝의 이러한 지적에 동의할 수 있지만, 그가 사용한 ‘노멘클라투라’란 말에 대해서 조금 유보하고 싶다. 스탈린의 최측근들조차도 그가 신임하는 동안에만 생존할 수 있었던 시대에 (안정적인) ‘사회 계급’으로서의 ‘노멘클라투라’라는 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련에 노멘클라투라가 사회 계급으로 부상하는 것은 흐루시초프 이후에 들어선 브레즈네프 시대에 와서다. 따라서 표면적으론 ‘소프트 스탈린’ 시대처럼 보이지만, 브레즈네프의 시대는 주인-담론의 시대(=스탈린 시대)가 아니라 대학-담론, 혹은 관료-담론의 시대다. 라캉의 용어인 ‘대학-담론(University Discourse)’을 소련의 상황에 맞는 보다 적절한 용어로 바꾸자면, ‘관료-담론(Bureaucracy Discourse)’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실제로 자가용 운전을 즐겼던 브레즈네프는 출근길에 곧잘 자신이 직접 관용차를 몰았다고 한다. 운전기사는 조수석에 태우고……. 요컨대 제20차 당 대회에서 흐루시초프의 비밀 연설이 끼친 파문들이 대단했다는 얘기다. 요점은 무엇인가?  

 

   
 

그 요점은 그들이 ‘성실한 공산주의자’였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 대부분은 소비에트 체제의 특성에 대한 어떤 주관적인 착각도 없는 잔혹한 조정자였다. 깨져버린 것은 그들의 ‘객관적인’ 착각인 ‘대타자’의 모습인데, 그를 배경으로 삼아 그들은 권력에 대한 무자비한 욕동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신념을 옮겨놓은 대타자, 말하자면 그들을 대신하여 믿었던 대타자, 그들의 믿을-것으로-가정된-주체가 붕괴된 것이다. 그리고 9월 11일의 여파로 유사한 어떤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2001년 9월 11일은 제20차 미국의 꿈대회가 아니었을까?(<실재계 사막>, 98쪽)

 
   

 

‘제20차 미국의 꿈대회(the Twentieth Congress of the American Dream)’란 표현은 ‘제20차 아메리칸 드림 전당대회’라고 읽어도 좋겠다. 물론 여기서 ‘전당대회’가 뜻하는 것은 제20차 소비에트의 전당대회가 의미했던 바대로,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대타자’의 붕괴이고 파국이다. 9·11에 관한 온갖 이데올로기적 주장과 담론들이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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