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이 제1세계와 제3세계의 경계를 배경으로 해서 설명될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두 세계, 곧 서양의 소비주의적 생활방식과 무슬림 급진주의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에 관해 두 가지 직접적인 철학적 참조점이 있다. 바로 헤겔과 니체다. 니체식으로 말하면, 이것은 ‘수동적’ 니힐리즘과 ‘능동적’ 니힐리즘의 대립이다.  

 

   
 

서양에 사는 우리는 어리석은 일상의 쾌락에 빠져 있는 니체의 ‘최후의 인간’이지만, 무슬림의 급진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의 자기 파괴에 이르도록 투쟁에 관련됨으로써 모든 것을 기꺼이 걸어보려고 한다.(<실재계 사막>, 87쪽)

 
   

 

그리고 헤겔식으로 말하면, 주인과 하인 사이의 투쟁이다. 보통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서양인이 주인이고, 무슬림이 하인인가? 아니다, 거꾸로다.  

 

   
 

비록 서양에 사는 우리가 착취하는 주인으로 인식된다 할지라도 하인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들 자신이다. 하인은 삶과 그 쾌락에 매달리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내걸 수가 없지만, 불쌍한 무슬림 급진주의자들은 자기네들의 목숨을 기꺼이 내걸고 있으며…….(<실재계 사막>, 87쪽)

 
   

 

주인과 노예의 투쟁은 생사를 건 투쟁인데, 아군의 사상자가 전혀 없는 하이테크 전쟁에 대한 콜린 파월의 옹호에서 ‘생사를 건다’는 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때문에 ‘노예’이고 ‘하인’이라는 것이다.     

 

 

한편 ‘문명의 충돌’이란 개념은 거부되어야만 한다고 지젝은 말한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건 각 ‘문명 내의 충돌’이지 문명 사이의 충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역사를 비교해보더라도 더 관용적인 것은 이슬람이었다. 서구에서 고대 그리스의 문화적 유산에 다시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중세의 아랍인들에 의해 마련됐다는 사실도 특기할 만한 것이다. 비록 오늘날의 테러 행위에 대한 책임이 면제되지는 않지만 이슬람 자체에 그러한 폭력성이 새겨져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근대의 사회정치적 상황의 결과일 뿐이다.

그렇다면 문명의 충돌이란 무엇인가. 현실 생활에서의 모든 ‘충돌’은 지구적 자본주의와 연계돼 있다. 무슬림 ‘근본주의’의 표적은 사회적 삶을 침식해가는 지구적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등의 부패한 ‘전통주의’ 체제이기도 하다. 르완다와 콩고, 시에라리온의 끔찍한 학살도 동일한 ‘문명’ 내에서 벌어진 일일 뿐더러 지구적 차원에서 경제적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보스니아와 코소보, 그리고 남부 수단에서처럼 ‘문명의 충돌’에 잘 부합하는 사례들에서도 다른 이해관계를 식별하는 건 어렵지 않다. ‘경제적 환원주의’가 너무도 잘 들어맞는 경우이다. 때문에 이슬람 근본주의의 불관용이나 기타 ‘문명의 충돌’ 같은 화제를 끊임없이 분석하는 대신에 이러한 갈등의 배경이 되는 경제적 이해관계의 충돌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럴 때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 같은 국가들이다. 이들은 ‘자유주의 대 근본주의’나 ‘맥월드 대 지하드’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도를 벗어나는 제3항이다. 이들은 매우 보수적인 군주제 국가이지만, 동시에 미국의 경제적 동맹국이며 서양식 자본주의에 완전히 동화돼 있다. 여기서 미국의 이해관계는 간명하다. 석유 자원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선 이들 국가들의 비민주적 체제가 유지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53년 민주적으로 선출된 이란의 헤다야트 모사데그 수상을 CIA를 조종한 쿠데타를 통해서 축출한 전력이 있다. ‘근본주의’도 ‘소련의 위협’도 없는 상태에서 단지 국가가 석유 자원을 통제하고 서방 석유 회사들의 독점을 끝내야 한다는 민주적 각성만이 일어난 상태였는데, 미국은 그런 상황을 용인하지 않았다. 어떤 교훈을 끌어낼 수 있는가?  

 

   
 

진정한 ‘근본주의의’ 보수적인 아랍 체제들의 ‘정도에서 벗어난’ 위치는 중동지역에서 미국 정책의 (간혹은 희극적인)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된다. 그들은 미국이 민주주의보다는 경제에 우선권을 두고 있음을 솔직히 인정하도록 강요되는 그 지점을 보여주고 있다.(<실재계 사막>, 90쪽)

 
   

 

“‘정도에서 벗어난’ 위치”는 “‘perverted’ position”을 옮긴 것이다. 사우디나 쿠웨이트의 ‘도착적’ 위치는 미국의 관심사가 민주주의보다는 경제에 두어져 있음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즉 ‘민주주의와 인권’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이루어진 미국의 군사적 개입은 언제나 허울이었다. 적어도 경제적 이해관계에 비하면 부차적인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사정은 아프가니스탄도 마찬가지였다. 초강대국들 간의 갈등에 휩싸이기 전 아프간은 가장 관용적인 무슬림 사회의 하나였고, 수도 카불은 활기찬 문화적․정치적 삶의 도시였다. 아프간에서 이슬람 근본주의와 탈레반의 득세는 순전히 파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미국 같은 외세의 개입이 낳은 결과이다.  

 

 

‘문명의 충돌’ 전도사들의 주장과는 달리, 사실 미국 내에서 ‘근본주의’의 위협은 오히려 내부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오늘날 미국에는 200만 명 이상의 우익 포퓰리스트와 근본주의자들이 있으며, 이들은 기독교 교리에 의해 정당화되는 각종 테러를 자행한다. 그들은 9·11 사건을 “미국인들의 죄 많은 삶 때문에 하나님이 미국에 대한 보호를 철수해 간 신호”로 간주하며, 물질적 쾌락주의와 자유주의, 문란한 섹스가 넘쳐나는 미국 사회에 응분이 대가를 치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유주의’에 대한 비난은 ‘무슬림 대타자’가 아닌 ‘아메리카의 심장부’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9·11 이후에 벌어진 탄저균 공격 소동도 무슬림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미국 내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소행임을 미국 정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진정한 충돌은 문명들 간의 충돌이 아니라 ‘문명 내부의 충돌’이라는 것을 한 번 더 확인시켜주는 사례다.

“9·11 이후에는 그 어떤 것도 예전과 똑같을 수 없다(Nothing will ever be the same after September 11)”라는 문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지만, 정작 획기적인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지젝의 판단이다. 왜냐하면 미국은 이 사건을 기화로 미국의 이데올로기와 패권을 재단언하는 쪽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즉 반세계화와 여타의 비판들에 맞서 그 기본적인 이데올로기적 좌표를 거듭 단언했을 뿐이다.  

 

   
 

미국은 9월 11일에 그가 어떤 종류의 세계의 일부인지 그것을 실감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그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적 관련에 대한 재주장을 선택하고 말았다. 가난한 제3세계에 대한 책임과 죄책감이 드러나면서 이제 우리는 피해자가 되고 만다!(<실재계 사막>, 96쪽)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은 “out with feelings of responsibility and guilt towards the impoverished Third World, we are the victims now!”를 옮긴 것이다. 여기서 ‘out’은 ‘드러나면서’가 아니라 ‘벗어나서’란 뜻으로 읽어야 할 듯싶다. 가난한 제3세계에 대한 책임과 죄의식을 갖는 대신에 미국의 선택은 “이제 우리가 피해자다!”라는 자의식을 갖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새로운 자의식으로 무장하고 어떠한 변화도 부인하기 위한 대테러 전쟁에 나섰다. 미국이 앞세운 ‘무한한 정의’는 한갓 냉소적인 난센스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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