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aladin.co.kr/fckeditor/editor/Images/quote_start.gif) |
|
|
|
9월 11일은 이미 이데올로기적 대의를 위해 도용되고 있다. 반세계화는 이제 한물갔다는 모든 매스 미디어의 주장으로부터, WTC 공격의 충격으로 포스트모던 문화 연구에 내용이 없다는, 즉 ‘현실 생활’과의 접촉이 결여되어 있다는 그런 특징을 내보이게 되었다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그렇다. 두 번째 생각은 잘못된 추론 때문에 (부분적으로) 옳다고 할 수 있지만 첫 번째 생각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실재계 사막>, 98쪽)
|
|
|
|
![](http://blog.aladdin.co.kr/fckeditor/editor/Images/quote_end.gif) |
![](http://image.aladin.co.kr/Community/mypaper/pimg_746829117598388.jpg)
지젝이 완전히 잘못됐다고 지적한 첫 번째 생각이란 건 “반세계화가 이제 한물갔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현실 생활(real life)’과 동떨어진 포스트모던 문화 연구에 대한 자성이 부분적으로나마 옳다고 지적한다. 일종의 아카데미 트렌드로서 전형적인 문화 연구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이 다루는 주제들이 얼마나 사소한가, 라는 것이다. 가령 “수천 명의 끔찍한 죽음과 비교해서 있음직한 인종차별주의적 기조를 깔고 있는 정치적으로 부적당한 표현의 사용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비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건 9·11에서와 같은 수천 명의 끔찍한 죽음과 인종차별적인 뉘앙스를 깔고 있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표현들이다. 문화 연구는 이 사안의 경중을 판단하는 데 무능력한 건 아닌가라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http://blog.aladin.co.kr/fckeditor/editor/Images/quote_start.gif) |
|
|
|
이것이 바로 문화 연구의 딜레마인데, 압제에 대한 투쟁이 제1세계의 자본주의 세계 내에서의 투쟁이라는 점을 곧바로 인정하면서 그것이 과연 동일한 논제에 충실하게 될 것인가? 여기서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서양의 제1세계와 그에 대한 외부의 위협 사이에 벌어진 더 큰 갈등 속에서 미국의 기본적인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자신의 충실성을 재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98~99쪽)
|
|
|
|
![](http://blog.aladdin.co.kr/fckeditor/editor/Images/quote_end.gif) |
번역문은 초점이 어긋나 있는데, 다시 정리해본다. 문화 연구의 딜레마는 무엇인가? “압제에 대한 투쟁이 제1세계의 자본주의 세계 내에서의 투쟁이라는 점을 곧바로 인정하면서 그것이 과연 동일한 논제에 충실하게 될 것인가(will they stick to the same topics, directly admitting that their fight against oppression is a fight within First World capitalism's universe)?”라는 의문이다. 즉 문화 연구의 지향이 ‘억압에 대한 투쟁’이라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것이 고작 제1세계 자본주의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투쟁에 불과하다면, 9·11이 상기시켜주는 바대로 정작 문제가 되는 제1세계와 제3세계 간의 적대에 대해서는 아무런 할 말이 없지 않을까. 그런 사실을 인정한 이후에도 여전히 똑같은 주제들에 집착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어떤 함축을 갖는가?
마지막 인용문의 원문은 이렇다. “which means that, in the wider conflict between the Western First World and the outside threat to it, one should reassert one's fidelity to the basic American liberal-democratic framework?” 번역문에서처럼 평서문이 아니라 의문문이다. 서양의 제1세계와 그것을 위협하는 외부 사이의 갈등이라는 보다 넓은 맥락을 우리가 인지한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라는 기본 틀에 대한 충실해야만 하는가라는 것이 의문의 골자다. 물론 대답은 부정적이다.
다르게 말해본다면 이런 것이다. “또는 그것이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비판적 자세의 과격화를 향해 한걸음 내디딜 것인가? 다시 말해 이런 체제 그 자체를 문제화하게 될 것인가?” 여기서도 ‘그것’이 가리키는 건 ‘문화 연구’이다. 문화 연구가 본래 지향하는 비판적 태도 혹은 입장이 한 걸음 더 과격화할 수 있을까라는 것. 즉 제1세계 내부의 억압을 문제 삼는 ‘사소한’ 행태에서 벗어나 문화연구는 전 지구적 적대 관계로 관심을 확장해나갈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도 9·11은 문화 연구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http://blog.aladin.co.kr/fckeditor/editor/Images/quote_start.gif) |
|
|
|
반세계화의 종말에 대해서는 9월 11일 이후 처음 며칠 동안 그 공격이 반세계화 테러리스트들의 소행일 수 있다는 애매한 힌트는 당연히 노골적인 조작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9월 11일에 벌어졌던 일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세계 자본주의에 대한 적대감의 문맥 속에 그것을 위치시키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99쪽)
|
|
|
|
![](http://blog.aladdin.co.kr/fckeditor/editor/Images/quote_end.gif) |
이어서 “반세계화는 한물갔다”는 주장, 곧 ‘반세계화의 종말’론에 대한 반박이 이어진다. 9·11 공격이 벌어지고 나자 이것이 반세계화를 주장하는 테러리스트들의 소행이라는 암시(dark hint)가 제기됐었지만, 모두 조잡한 조작에 불과하다는 것. 문제는 9·11의 핵심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고, 그것은 그 사건을 “세계 자본주의의 적대들이라는 문맥 속에 위치시키는 것(the only way to conceive of what happened on September 11 is to locate it in the context of the antagonisms of global capitalism)”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역사상 처음으로 본토에 대한 공격을 받은 미국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양자택일에 직면하도록 한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권역’을 더욱 더 방비할 것인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로부터 걸어 나올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가?”
이 선택지를 조금 더 풀어보자. “자신들의 권역을 더욱 더 방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어째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야 한단 말인가? 이와 같은 일들이 ‘여기’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거야!”라는 부도덕한 태도를 반복하거나 강화하는 것이다. ‘여기’는 물론 ‘미국’이다. 다른 곳은 몰라도 미국에서만큼은 그런 일을 허용할 수 없다는 ‘미국 예외주의’가 이러한 태도를 떠받치고 있다. 이것은 곧 외부의 위협에 대한 공격을 더 강화하는 쪽으로 나가게 된다. 편집증적 행동화로 빠지는 것이다. 반면에 “그런 함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자신을 외부 세계로부터 분리시켜준 ‘환상적인 스크린’에서 빠져나와 ‘실재계의 세계(the Real world)’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한걸음은 이런 구호의 변화로 표현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일이 여기서는 일어나서는 안 돼!(A thing like this shouldn't happen here!)”에서 “이와 같은 일이 그 어디에서도 일어나서는 안 돼!(A thing like this shouldn't happen anywhere!)”로. 이것이 9·11에서 얻을 수 있는 진정한 교훈이다.
![](http://blog.aladin.co.kr/fckeditor/editor/Images/quote_start.gif) |
|
|
|
다시 말해 그런 일이 여기서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보증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런 일이 그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책임을 져야 하는 자들을 유쾌한 복수로서가 아니라 애석한 의무로 징계하면서 미국은 이 세계의 일부로서 그 자신의 취약성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실재계 사막>, 100쪽)
|
|
|
|
![](http://blog.aladdin.co.kr/fckeditor/editor/Images/quote_end.gif) |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것은 정반대였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오히려 9·11을 초래한 미국식 패권주의를 더 강화하는 쪽으로 나간 것이다. 마치 미국에 대한 원한이 미국이 가진 힘의 ‘과잉’ 때문이 아니라 그 ‘결여’ 때문에 빚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http://image.aladin.co.kr/Community/mypaper/pimg_746829117598389.jpg)
![](http://blog.aladin.co.kr/fckeditor/editor/Images/quote_start.gif) |
|
|
|
그 대신 우리가 취하고 있는 것은 이 세계의 경찰로서 미국의 예외적인 역할에 대해 강력히 재주장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치 미국에 대한 원한을 야기하는 것이 그가 가진 힘의 과잉 때문이 아니라 그의 결여 때문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실재계 사막>, 100쪽)
|
|
|
|
![](http://blog.aladdin.co.kr/fckeditor/editor/Images/quote_end.gif) |
무엇이 바람직한 태도일까? ‘미국의 결백’이라는 뻔뻔스러운 이데올로기적 입장과 미국은 “그렇게 당해도 싸다!”라는 편향적 태도 사이에서 어떤 해결책이 가능한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다음 회에 다루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