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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이것은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유혹이다. 즉 정확하게 겉보기로 선택이 투명해지는 바로 그 순간에 신비화(속이기)는 완전해진다. 우리에게 제시된 선택은 진정한 선택이 아니다. 오늘날 더욱더 우리는 한발 뒤로 물러날 수 있는 힘을 모으고 그 상황의 배경에 대해 반성해봐야 한다.(<실재계 사막>, 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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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의 첫 문장은 “This, precisely, is the temptation to be resisted”를 옮긴 것이다. 좀 더 강하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저항해야만 하는 유혹이다”라고 옮기고 싶다. 즉 어떤 선택이 자명해질 때, 거기엔 항상 속임수가 개입하기 마련이다. 테러에 대한 찬반 선택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진정한 선택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황의 배경을 다시금 성찰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유혹에 이끌려 2002년 2월에는 미국인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50인의 지식인 선언이 발표되었다. 지젝이 보기에 “그것은 스스로 지워버린 칭호에 대한 실제적인 역설의 분명한 사례이다.” 그러한 서명 행위 자체가 ‘지식인’의 역할을 포기한 행위이므로 그것이 ‘지식인 선언’이라고 공표되는 것은 모순이고 역설이다. ‘실제적인 역설’은 ‘pragmatic paradox’를 옮긴 것인데, 언어학 용어로는 ‘화용론적 모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낙서 금지’라고 쓴 낙서 같은 걸 말한다.
상황의 배경에 대해서 다시금 성찰해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지젝은 두 가지 ‘complication’을 제시한다. 번역본에서는 ‘합병증’이라고 옮겼는데, ‘복잡화’, ‘곤란한 문제’ 등의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는 말이다. 그냥 ‘복잡한 문제’라고 해보자. 복잡한 문제란 물론 단순한 해법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더 복잡하게 생각해봐야 하는가? 반복하건대 첫째, 오늘날 중요한 선택은 진정으로 자유민주주의 대 근본주의(혹은 그 파생물) 사이의 선택일까, 라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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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세계화 상황의 복잡성과 이상한 뒤틀림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반세계화 운동처럼 막다른 흐름으로 표현되는 바로 이 순간에서) 자본주의와 그의 대타자 간의 선택이 진정한 선택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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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그의 대타자’는 ‘capitalism and its Other’의 번역이다. 그러니까 ‘자유민주주의 대 근본주의’라는 유사-선택지 대신에 ‘자본주의 대 그 타자’가 진정한 선택지라는 주장이다. 타자로서의 반자본주의는 현시점에서는 반세계화 운동 같은 흐름에 의해 대표되고 있다(물론 이때의 ‘현시점’은 2002년을 전후로 한 시점이다). 주의할 것은 ‘자본주의 대 반자본주의’가 구조적으로 부차적인 다른 현상에 의해 수반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대 그 과잉’이다. 20세기의 역사에서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패턴은 무엇이었나? 자본주의가 자신의 진정한 적을 깨부수기 위해 불장난을 시작하고 파시즘이라는 형태의 그의 외설적인 과잉을 동원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자체의 생명력을 갖게 된 이 과잉(파시즘)은 너무 강력해져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자신의 진정한 적인 공산주의와 힘을 합쳐서 그것을 억눌러야 했다. 그것이 2차 세계대전이다. 지젝은 의미심장하다고 덧붙였지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전쟁이 ‘냉전’이었던 데 반해서 거대한 ‘열전(Hot War)’은 파시즘과의 전쟁 곧, 자본주의 내부의 전쟁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지젝은 탈레반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묻는다. 실상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은 공산주의(소련)와의 전쟁을 위해 미국의 지원하에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그 적으로 변해버렸다. 그렇다면 테러리즘의 기세가 아무 등등하다 할지라도,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 내부의 전쟁이다. 따라서 “진보적 지식인의 첫 번째 의무는 그를 대신하여 적의 투쟁과 맞붙는 것이 아니다.”(109쪽) ‘적의 투쟁과 맞붙는다’는 ‘to fight the enemy's struggles’를 옮긴 것이다. ‘적의 전쟁’에 끼어드는 것으로 봐야겠다. 즉 ‘진보적 지식인’이 ‘자본주의와 투쟁하는 지식인’을 뜻한다면, 적(자본주의)의 전쟁을 도울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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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둘째,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그 자체를 ‘해체’해야 한다. 아프가니스탄은 그 자체로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시작부터 외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지젝은 아프가니스탄의 지리적 구획이 주변 강대국과 열강에 의해 어떻게 인위적으로 재단됐는지 나열한다. “따라서 근대화의 범위 밖에서 최근까지도 역사가 취급하지 않은 고대의 영역이기는커녕, 아프가니스탄의 존재 자체는 외세들 간 상호작용의 결과이다.”(109~10쪽) 즉 역사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근대화 바깥의 무슨 고대 왕국 같은 것이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은 순전히 근대 열강 사이의 역 학관계가 낳은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아프가니스탄의 처지는 유럽에서 보면 벨기에의 처지를 닮았다. 초콜릿과 아동 포르노로 유명한 벨기에는 ‘초콜릿 애용자’와 ‘아동학대자’란 상투적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 그것이 미디어가 만들어낸 조작적 이미지라면 아프가니스탄에 들씌워진 ‘아편과 여성억압의 나라’라는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그렇게 자신이 조작해낸 이미지와의 전쟁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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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역사로부터의 휴일’은 날조였다. 미국의 평화는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재난으로 사들인 것이었다. 오늘날 우세한 관점은 외부로부터 공격해오는 말할 수 없는 악과 대면하는 결백한 시선의 관점이며, 다시금 이런 시선에 관하여 우리는 도처에서 악을 지각하는 결백한 시선 그 자체에도 (역시) 악이 존재한다는 헤겔의 그 유명한 격언을 적용할 만한 힘을 불러일으켜야 한다.(<실재계 사막>, 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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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유명한 격언은 “Evil resides (also) in the innocent gaze itself which perceives Evil all around”를 가리킨다. 우리는 무고하고 결백하다는 시선으로 미국은 외부의 악을 응징하고자 하지만, 정작 악은 그러한 시선 자체에도 포함돼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물라 오마르의 교훈을 다시 되새겨보자. “당신네들은 당신네 정부의 말을 진실이든 허위든 받아들입니다. 당신네들은 스스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까?” 이때 스스로 생각한다는 자기 성찰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결백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자기 내부의 ‘악’에 대한 냉정한 응시를 포함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