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한 대로 오늘 다룰 주제는 ‘고문’이다. 지난 회에서 조나단 올터라는 칼럼니스트의 주장을 조금 인용하고 마무리했는데, 요점은 테러리즘에 대처하는 수단으로 고문도 배제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열린 마음’으로 말이다. 그의 주장은 이렇게 더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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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비록 위선이라 할지라도 어떤 용의자들을 덜 까다로운 우리 동료들한테 넘겨주는 일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어느 누구도 이것을 잘하는 짓이라고 말하지 않았다.(<실재계 사막>, 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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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덜 까다로운 동료들’은 ‘덜 까다로운 동맹국’을 가리킨다. 미국에서는 고문이 불법이고 합법화하기도 어려운 만큼 용의자들을 심문하기가 어려우니까 이들은 고문에 ‘덜 까다로운’ 국가에 보내 심문하도록 하자는 제안이다. ‘잘하는 짓’은 아니겠지만, 고려해봄직하다는 얘기. 하지만 지젝은 이런 주장이 대단히 ‘외설적’이라고 비난한다. 먼저, 어째서 WTC 공격이 정당화의 빌미가 되는가? 그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들도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둘째, 이런 생각이 뭐가 새로운가? 이미 미국은 CIA를 통해서 남미와 제3세계에 수십 년 동안 고문을 ‘수출’해왔는데 말이다.
이러한 ‘외설성’을 지젝은 자유주의 법학자이자 논객인 앨런 더쇼비츠(번역본에는 ‘더쇼위츠’라고 표기됐지만 국내엔 ‘더쇼비츠’라고 소개됐다. <선제공격>, <미래의 법률가에게> 등이 번역돼 있다)의 주장에서도 발견한다. “나는 고문에 찬성하지 않지만, 만일 당신이 그걸 할 생각이라면 틀림없이 법정 승인이 필요할 것이다”라는 게 더쇼비츠의 주장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의 주장은 고문 합법화에 대한 여지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의 요점은 “우리는 여하튼 그걸 하고 있기 때문에 그걸 합법화하는 것이 더 좋고, 그렇게 해서 과도한 것을 막을 수 있다!”라는 주장을 함축할 수 있다. 즉 (1) 우리는 여하튼 고문을 하고 있다, (2) 따라서 차라리 고문을 합법화하는 것이 더 낫다, (3) 그렇게 되면 과도한 고문을 오히려 막을 수 있다, 는 식이다.
더쇼비츠는 ‘째깍거리는 시계’ 상황, 곧 테러 공격이 예정돼 있다거나 하는 아주 긴박한 상황에서는 고문이란 수단이 죄수의 인권에 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그런 예외적인 상황에서는 고문이 허용될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다른 사람을 고문하는 일이 당연한 처벌로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들이 그 무엇을 알고 있기 때문에 허락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수백 명이나 되는 우리 군인들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는 정보를 가진 전쟁포로의 고문은 어째서 합법화하지 않을까?”(185쪽) 게다가 그런 식의 예외 상황은 언제든지 상시화․일반화될 수 있는 것 아닌가?(우리의 경우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같은 걸 떠올릴 수 있다.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긴박한 상황’에 우리는 항시 처해 있는 것 아닌가!) 더쇼비츠식의 ‘솔직한’ 자유주의 논변에 반대하여 지젝이 옹호하는 건 ‘위선적’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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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인 더쇼비츠의 정직함에 반대하는 우리는 역설적으로 외견상의 ‘위선’에 집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좋다. 우리는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 ‘(뭔가를) 알고 있는 죄수’이고, 그의 말이 수천 명을 구할 수 있는 그 유명한 죄수와 직면하게 되었을 때 우리가 쉽게 고문에 의지하게 되리라는 것을 한번 상상해볼 수 있다. 그러나 비단(아니, 오히려 정확히) 그런 경우에도 우리가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보편적인 원칙으로 끌어올리지 않는 일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긴급한 순간에서도 우리는 단지 그렇게 해야 한다.(<실재계 사막>, 184~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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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점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보편적 원칙으로 끌어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젝은 고문에 대한 찬성보다도 더 위험한 것이 고문을 ‘합법적인 논쟁거리’로 끌고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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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해서 그러한 논쟁, 즉 ‘결정하지 않고 있으라’는 그런 권고는 테러리스들이 쟁취하고 있는 진정한 모든 자유주의자에 대한 신호임에 틀림없다.(<실재계 사막>, 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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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해서’라고 돼 있지만 ‘간단히’ 이해되지는 않는 문장인데, 일단 ‘결정하지 않고 있으라’는 ‘열린 마음을 가지라(keep an open mind)’라고 옮기는 게 더 낫겠고, 나머지 부분은 오역이다. 원문은 “In short, such debates, such exhortations to 'keep an open mind', should be the sign for every authentic liberal that the terrorists are winning”이다. 다시 옮기면 “간단히 말해서, 그러한 논쟁이나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충고 따위는 진정한 자유주의자가 보기엔 테러리스트들이 승리하고 있다는 징후여야 한다”.
고문을 합법적인 논쟁거리로 만드는 것이 왜 위험한 일인가? “그것은 전반적인 영역을 변화시키는데, 이런 변화가 없다면 솔직한 옹호는 특이한 견해로 남게 된다.” 곧 문제의 지형을 바꿔놓는다는 뜻이다. 이미 예외적 상황이라는 게 상시화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지젝이 지적하는 것도 바로 그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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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근본적인 윤리적 전제의 문제이다. 당신은 당연히 (몇백 명의 생명을 구한다는) 단기간의 이득에 의해 고문을 합법화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상징세계에 미치는 장기간의 영향에 대해서는 어떠할까? 우리는 어디서 멈춰서야 할까? 어째서 고문은 범인들을, 이혼한 배우자한테서 자신의 아이를 납치한 부모를……단련시키지 못할까?(<실재계 사막>, 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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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대비되는 것은 ‘단기간의 이득(short-term gain)’과 ‘장기간의 영향(long-term consequences)’이다. ‘단기간의 이득’이 고문을 합법화할 수 있는 명분이 된다면, ‘장기간의 영향’, 곧 장기적으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행위에 대한 처벌로서 고문을 허용하는 것은 어떤지를 물을 수 있다. 고문은 어디서 중단되어야 하는가? 마지막 “어째서 고문은 범인들을, 이혼한 배우자한테서 자신의 아이를 납치한 부모를……단련시키지 못할까?”는 어이없는 오역인데, 원문은 “Why not torture hardened criminals, a parent who kidnaps his child from a divorced spouse……?”이다. 여기서 ‘hardened criminals’는 ‘범인들을 단련시키다’가 아니라 ‘상습범’이란 뜻이다. 다시 옮기면 “상습범들, 이혼한 배우자에게서 아이를 납치하는 부모 등을 왜 고문하면 안 되는가?”이다. 그러니까 ‘째깍거리는 시계’를 고문을 합법화하기 위한 논변에 끌어올 경우에 그 한계를 지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다.
9․11 테러 이후에 고문은 미국 사회에서 2002년 내내 사회적 이슈가 됐다. 한 가지 사례. “미군이 알카에다의 부사령관으로 생각한 아부 주바이다(Abu Zubaydah)를 체포했던 4월 초에 ‘그가 과연 고문을 당했을까?’라는 의문이 대중매체에서 공개적으로 논의되고 있었다.”(187쪽) 여기서도 ‘그가 과연 고문을 당했을까?’는 ‘그를 고문해야 할까?’(Should he be tortured?)의 오역이다. 고문 문제가 ‘공론 영역’에서까지 이슈화된 것이고, 럼즈펠드는 자신의 우선순위는 미국 국민의 생명이지 테러리스트의 인권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공개적으로 고문으로 가는 길을 열어젖혔다. 하지만 지젝이 이보다 더 문제적이라고 보는 것은 고문을 합법적인 토론 논제로 수용하는 더쇼비츠의 논변이다. 그에 대한 비판은 다음 회에서 따라가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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