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에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엄격한 훈육과 처벌로 다스려야 하는 ‘악동’처럼 취급한다는 지젝의 지적까지 언급했는데,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본다.  

 

   
 

다음과 같은 상황의 웃음거리를 한번 생각해보라. 즉 팔레스타인 보안군이 폭파당하고 있는데 그와 동시에 하마스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엄한 조치를 취하라는 압력이 그들에게 가해진다. 그들이 공격을 받고 더 나아가 이런 공격을 그저 견디어낼 것으로 기대됨으로써 매일처럼 굴욕을 당하고 있다면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눈에 그들이 최소한의 권위라도 보유할 것으로 어떻게 기대될 수 있을까? 그런데 만일 그들이 반격함으로써 자신들을 방어한다면 그들은 다시금 테러리스트로 취급되어 해산되고 만다.(<실재계 사막>, 202~203쪽)

 
   

 

어떤 상황인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보안대를 일상적으로 모욕하고 무력화시키는 가운데, 그들에게 한편으론 대 이스라엘 강경파인 하마스를 통제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노릇인가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자신들의 보안대가 그렇게 무기력하고 스스로를 방비할 수도 없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다른 노선’에 의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한데, 또 그렇게 다른 노선으로 기울려 하면 다시금 테러리트로 내몰아 맹포격을 가하곤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대처법이다.  

 

 

이러한 부조리한 상황의 정점은 2002년 3월 말 자치정부의 수반인 아라파트를 연금시켜놓고 그에게 테러를 중단시키라고 요구한 사실이다. 이스라엘군의 통제하에 놓여 있는 ‘무기력한’ 아라파트에게 한편으론 팔레스타인 강경파를 통제할 만큼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하라고 요구한다는 건 난센스 아닌가? 이런 것이 소위 ‘화용론적 역설(pragmatic paradox)’이다. 뱀이 자기 꼬리를 물고 있듯이 말이 자기 말을 집어삼킨다는 뜻이다. ‘낙서금지’라고 써놓은 ‘낙서’처럼. 그러한 행위의 진짜 메시지는 무엇일까?  

 

   
 

암묵적인 진짜 명령이 오히려 정반대라는 것은 아닐까? 즉 우리는 너희들에게 우리에게 저항하도록 명령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너희들을 분쇄시킬 수 있으니까. 달리 말해서,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영토로 침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진짜 목적이 앞으로 있을지 모를 테러리스트의 공격을 막아내기보다는 오히려 ‘배수진을 친다’는 사실, 가까운 장래에는 평화로운 해결을 방해하게 될 그럴 수준까지 증오심을 높여둔다는 사실이라면 어찌 되겠는가? (<실재계 사막>, 203~204쪽)

 
   

 

그러니까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 공격의 진짜 목표는 테러 공격에 대한 예방이 아니라 오히려 평화적 해결의 봉쇄에 있다는 점. 도발하고 저항하도록 유인함으로써 공격의 빌미를 얻어내고, 또 군사 작전을 수시로 감행함으로써 이 지역의 평화가 아직 요원하다는 인식을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주변 세계가 갖게끔 하는 것이 그들의 전략이다.

이와 관련한 미국의 태도는 무엇인가? 지젝은 2002년 4월 1일 미국 TV에 방영된 깅그리치의 논평이 정확하게 표현해준다고 말한다. 깅그리치는 이렇게 말했다. “아라파트가 실질적으로 테러 집단의 우두머리니까 우리는 그를 끌어내리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새로운 지도자로 바꿔서 이스라엘 국가와 타협할 준비가 갖춰지길 바랍니다.” 소위 이것이 미국의 ‘부조리한’ 견해이고 입장이다. 하지만 정작 미국은 그렇게 ‘민주적으로 선출된 새로운 지도자’를 맞이할 준비가 돼 있을까? 실제적인 문제는 이런 것이다.  

 

   
 

‘진정으로 민주적인’ 팔레스타인의 침묵하는 다수라는 것이 단지 없을 뿐이라면 어찌 되겠는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새로운 지도자’가 훨씬 더 반이스라엘적이라면 어찌 하겠는가?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집단적인 책임과 처벌의 논리를 체계적으로 적용시켜서 혐의가 가는 테러리스트의 대가족이 살고 있는 모든 집까지 파괴하게 되기 때문이다.(<실재계 사막>, 205쪽)

 
   

 

인용문의 뒷부분은 인과 관계가 전도돼 있는데, ‘민주적으로 선출된 새로운 지도자’가 반이스라엘적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은 이스라엘군의 폭력적인 행태 때문이다. 이스라엘군은 연대 책임을 물어서 테러 혐의자 가족의 집까지 파괴하고 나섰는데, 팔레스타인인 다수가 그런 이스라엘을 지지할 가능성이 과연 있겠는가? 그러니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로 교체되길 바란다는 미국식 수사는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속 빈 수사’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렇듯 이스라엘의 ‘잔인하고 독단적인 처우’가 요점은 아니다. 요점은 이스라엘 점령지 팔레스타인인의 처지가 호모 사케르의 그것이라는 것이다. 즉 그들은 ‘온전한 시민’이 아니라 훈육적 처벌 대상이거나 인도주의적 원조의 대상일 뿐이다. 처벌 대상과 원조 대상이라는 일견 모순적인 지위는 하지만 생체 정치의 대상으로서 호모 사케르가 갖는 양면성일 뿐이다. 이스라엘군의 일부 ‘명령 거부자들’이 거부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이주 금지자가 성취했던 것은 호모 사케르로부터 ‘이웃’으로의 통과이다”(205쪽)라고 돼 있는 대목은 그래서 “명령 거부자들이 달성한 것은 ‘호모 사케르에서 이웃으로의 이행’이다”로 이해하는 게 좋겠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동등한 완전한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유대-기독교적 의미에서의 이웃들로 취급한다. 그리고 사실은 그것이 오늘날의 이스라엘인들한테 어려운 윤리적 시험이 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팔레스타인 사람을 사랑하라!”를 의미하는데(그들의 탁월한 이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실재계 사막>, 205~206쪽)

 
   

 

즉 이스라엘인에게 가장 전범적인 이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인 만큼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계명은 곧바로 “팔레스타인 사람을 사랑하라!”로 치환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계명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과연 그러한 사랑의 역사(役事)을 성취할 준비가 돼 있는 것일까? 그런 사랑이야말로 또한 현실의 좌표계를 변화시키는 진정한 기적이 아닐까?  

 

 

진도를 더 나가기 전에 지젝의 각주 하나만 같이 읽어본다. 유대-기독교적 사랑과 불교적 자비의 차이점에 대해 지적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웃에 대한 유대-기독교적인 사랑과 고통에 대한 불교적 자비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이런 자비는 대타자의 욕망이 갖는 불안-야기의 심연이란 의미에서의 이웃에 관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이 동물과 함께 공유하는 고통에 관한 것이다.”(205쪽) 즉 그 차이란 유대-기독교적 사랑이 ‘이웃’ 사랑인데 반해서 불교의 자비는 ‘고통’에 대한 자비(동정)라는 점이다. ‘이웃’은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대타자의 욕망의 심연을 가리킨다. 그런 ‘심연’에 대한 의식을 불교는 갖고 있지 않다. 환생론에 따르면 그래서 인간은 동물로도 얼마든지 다시 태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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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에서 “우리의 다원적이고 관용적인 자유주의가 철저히 슈미트적인 것”이란 지적까지 다루었다. 어째서 그런지 지젝의 설명을 조금 더 들어본다.  

 

   
 

눈에 안 보이는 적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적절한 형상을 제공하기 위해 그들은 정치적인 상상력에 계속 의존하게 된다. 이러한 적이 다원적인 관용의 근본주의적 적대자로 규정된다는 사실은 친구와 적이라는 ‘이원론적’ 논리를 잠시 중지시키기는커녕 단지 그에 대해 반사적인 비틀림만 덧붙이고 있다.(<실재계 사막>, 195~196쪽)

 
   

 

다원적 관용주의가 얼핏 ‘관용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주의를 적대자로 규정함으로써 ‘친구냐 적이냐’라는 슈미트식 이분법을 그대로 고수한다는 얘기다. 그러한 이분법을 중단시키기는커녕 약간 비틀기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재정상화’의 대가로 적의 형상은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다. 이러한 변화의 내용과 그 귀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더 이상 악의 제국, 즉 다른 영토상의 실체가 아니라 불법적이고 비밀스런, 거의 가상적인,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로서, 그 안에서는 무법성(범죄성)이 ‘근본주의적인’ 윤리-종교적 광신과 일치하며, 이런 실체가 긍정적인 법적 신분을 갖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새로운 형상화는 적어도 현대의 시초에는 국가들 간의 관계를 조정했던 국제법의 종말을 초래하게 된다.(<실재계 사막>, 196쪽)

 
   

  

 

 

레이건의 유명한 호명대로 냉전 시대에는 ‘악의 제국’이라는 명백한 적이 규정돼 있었다(‘악의 제국’은 당시 소련을 지칭한 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적은 더 이상 어떤 영토를 점유하고 있는 실체가 아니다. 국가도 아니고 국가들의 연합도 아니다. 그것은 알카에다처럼 “거의 가상적인,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일 따름이다. 그리고 이런 ‘실체’는 법적 신분을 갖지 않기 때문에, 당연한 말이지만 국가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탄생한 국제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국제법의 종말’도 함축한다는 얘기다.

오늘날 테러와의 전쟁에서 ‘적의 형상’은 무엇인가? 지젝은 ‘반동적 근본주의자’와 ‘좌파 시위자’의 압축이 아닌가라고 지적한다(물론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이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서로 대립적인 형상이지만, ‘적’이란 기표는 실제적인 정적들을 통합하는, 한데 묶어주는 ‘누빔점’ 역할을 한다. <뉴욕 타임스 매거진>에 실린 한 기사의 제목이 ‘국내 테러리즘의 색깔은 녹색이다’라는 사실이 모든 걸 말해준다고 지젝은 꼬집는다. 한 사람도 죽인 적이 없는 녹색당원들에게 오클라호마 폭파 테러나 탄저균 소동 등의 모든 원인을 덮어씌우는 식이다. 2002년의 일이니만큼 현재의 정세와는 약간 차이가 나겠지만, 당시엔 모든 현상들이 기저에서 ‘테러’와의 연관성을 찾아내려고 했다. 기표의 은유적 보편화다. “당신이 약물을 구입하면 테러리스트한테 돈을 지불하게 됩니다!”라는 TV캠페인 광고까지 나왔다고 하는데, 여기서 ‘약물’은 물론 ‘마약류’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제 <실재계 사막> 읽기도 막바지다. 예상보다 길게, 더디게 진행되는 바람에 <이라크>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까지 갈 길이 아직 멀다. 그전에 먼저 둘러봐야 할 것은 ‘이웃’이다. 호모 사케르의 문제를 다룬 4장에 이어서 5장의 제목은 ‘호모 사케르에서 이웃으로(From Homo Sacer to the Neighbour)’이다. 지젝은 서두에서 자신이 베를린에서 직접 목격한 인종차별적 폭력을 떠올린다. 한 독일인이 베트남인의 길을 가로막으며 괴롭히는 장면을 목격한 것인데, 이 독일인은 신체적 위해는 전혀 가하지 않으면서 단지 베트남인이 가려던 길만 막아섰다. 그리고 베를린 번화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음에도 다른 행인들은 모두 무시하는 척하면서 그냥 지나갔다. 이러한 ‘부드러운’ 괴롭힘이 신나치 스킨헤드들의 잔인한 신체 공격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어쩌면 더 나쁜 것은 아닐까라고 지젝은 질문한다. 왜냐하면 이런 괴롭힘은 행인들의 반응이 보여주듯이 그냥 ‘일상적인 일’로 수용되기 때문이다(스킨헤드들이 직접 폭력을 휘둘렀다면 행인들의 반응은 달라졌을 것이다). 지젝의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나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호모 사케르로 취급하게 될 때 유사한 무지, 즉 일종의 윤리시대가 가동된다고 주장하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곤경을 탈출하게 되는 것일까?(<실재계 사막>, 200~201쪽)

 
   

 

중요한 대목이긴 한데, ‘윤리시대’란 말은 ‘ethical epoche’의 오역이다(역자가 ‘epoch’로 잘못 본 것이다). ‘에포케’는 ‘판단중지’란 뜻이므로 ‘윤리적 판단중지’라고 해야겠다. ‘부드러운 괴롭힘’이 사례에 대해 무감각하게 반응하는 일이 그러한 판단중지의 사례다. 이러한 ‘곤경’을 어떻게 돌파해야 하는가? 지젝은 이스라엘에서 벌어진 한 가지 사례를 든다.  

 

   
 

2002년 1월과 2월에 이스라엘에서 획기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수백 명이나 되는 예비군들이 점령지에서 근무하기를 조직적으로 거부한 사건이었다. 이런 이주 금지자들(그들을 그렇게 불렀다)이 단순히 ‘평화주의자’는 아니다. 그들은 공개선언에서 이스라엘을 위한 아랍국가들과의 전쟁에서 그들의 의무를 다했음을 강조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높은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들이 주장하는 (그리고 어떤 윤리적 행위에는 항상 단순한 그 어떤 것이 있다) 것은 단지 그들이 “어떤 국민 전체를 지배하고 쫓아내고 굶기고 창피를 주기 위해서” 사우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201쪽)

 
   


 

 

자신들을 ‘refuseniks’라고 불렀다는데, ‘이주 금지자들’보다는 ‘명령 거부자들’이라고 옮기는 게 낫겠다. 점령지에서 근무하라는 명령을 조직적으로 거부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랍 국가들과 전쟁을 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조국을 위해 나가 싸우겠지만, 점령지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개의 윤리적 행위를 낳는 ‘단순한’ 이유다.

현실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겪고 있는 곤경은 어떤 것인가? 지젝은 ‘심리적 굴욕의 미시정치학’이라고 부르는데, “기본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엄격한 훈육과 처벌로서 정직한 삶으로 되돌릴 수밖에 없는 악동처럼 다뤄지고 있다.”(202쪽)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기본 전략이 ‘악동 길들이기’이라는 것인데, 어떤 점에서 그러한지 그 구체적인 사례부터 다음 회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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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에서 긴급사태와 예외상태의 논리가 ‘긴급’과 ‘예외’를 상시화함으로써 오히려 진정한 긴급사태에 대한 필사적인 방어책으로 기능한다는 주장까지 봤었다. 지젝은 유사한 사례를 더 든다. 먼저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천명한 잠재적인 표적국가들(이란, 이라크와 북한,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까지 포함한다)의 목록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기저의 원칙이라는 점. 냉전 시대에는 초강대국이 어떤 경우라도 핵무기를 먼저 사용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일종의 황금률이다. 그런 황금률이 작동한 것은 핵무기의 사용이 결과적으론 모두를 파멸로 몰고 갈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그것이 핵무기가 갖고 있는 MADness(Mutually Assured Destruction)이다.

상호 파괴가 궁극적인 결과라면 핵무기 사용은 ‘미친 짓’에 불과하다. 거꾸로 이러한 인식 때문에 강대국의 핵무장은 서로 경계하는 핵 억지력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앞세우면서 “이제 미국은 이런 언질을 파기했으며, 테러에 대한 전쟁의 일부로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첫 번째 국가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한 셈이 됐다. 핵전쟁과 통상적인 전쟁 사이의 구분을 없애버린 것이다. 지젝은 칸트 철학의 용어를 빌려서 설명하는데, 과거 핵무기의 지위가 ‘초월적’이었다면 이제는 ‘경험적’ 혹은 ‘병리적’ 차원으로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2002년 2월에 미국 정부가 설립하려다 보류한 ‘전략영향국(Office of Strategic Influence)’에서도 감지된다는 게 또한 지젝의 지적이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2001년 10월 30일에 설립됐다가 2002년 2월 그 존재 사실이 공표되어 논란을 일으킨 기구인데,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는 “미국의 이미지를 세계에 퍼뜨리기 위해 외국 매체에 허위를 살포하는 것”이었다. 가짜 정보를 흘리는 ‘군사적 속임수(military deception)’을 전담하는 부서다. 합법적인 국가 기관이 거짓말을 해도 되느냐는 논란을 불러일으키자 국방장관이었던 럼즈펠드는 2월 말 이 부서를 폐쇄했다고 발표한다. 지젝은 이 사안이 단순히 거짓말을 공개적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문제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젝은 “거짓말하는 사람보다 더 나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거짓말을 고수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한 인간이라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진술을 끌어들이는데(출처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유명하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애인에 대한 어떤 여자의 반응을 가리킨다. 그 애인은 직접적인 삽입 이외의 모든 섹스를 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그 남자는 아내한테 거짓말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즉 그는 다른 여자와 성교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는데, 간단히 말해 그는 그녀한테 클린턴 같은 사람을 끌어들이고 싶었다. 그런 상황에서 공공연한 거짓말―자신의 아내한테 혼외 성관계의 부정―이 그가 선택한 진실을 가장한 거짓말이란 전략보다 훨씬 더 정직했을 것이라고 그 여자가 주장하는 데에는 충분한 정당성이 있어 보인다.(<실재계 사막>, 193~194쪽)

 
   

   

 

 

다소 부정확하게 옮겨진 대목이 있는데, 정황 설명을 하자면 이렇다. 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의 유부남 정부는 온갖 성적 접촉을 시도하면서 직접적인 삽입만은 피하려고 했다. 이유는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 “난 결코 그녀와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라고 변명할 때, 그게 거짓말이 아니려면 좁은 의미의 ‘성관계’가 뜻하는 삽입 행위는 배제해야 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케이스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인물이 백악관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 빌 클린턴이기 때문에 “클린턴 같은 사람”을 갖다 대고자 했다는 표현이 나왔다. 하지만 여자는 정부에게 이렇게 대꾸했다. 당신의 ‘진실을 가장한 거짓말(lying in the guise of truth)’, 곧 “결코 성관계는 없었다”라고 둘러대는 전략보다는 ‘솔직한 거짓말(outright lie)', 곧 “만난 적도 없다”라고 말하는 편이 훨씬 더 정직한 태도라고.

그렇다면 OSI(전략영향국)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 계획이 신속하게 보류되었다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정부 기관이 그의 목표 가운데 특히 거짓말을 퍼뜨리는 일이 자멸적인 것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던 것이다.”(<실재계 사막>, 194쪽) 뒤 문장은 “a government agency announcing openly that its goal is, among others, to disseminate lies is self-defeating”을 옮긴 것인데, 전체 술어는 ‘선언했다’가 아니라 ‘자멸적이다’이다. 다시 옮기면, “국가 기관이 다른 것도 아니고 거짓말을 유포하는 일이 주된 목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멸적이다.” 자기 존재 근거를 허무는 것이기에 ‘자멸적’이다. 그런 기관을 두겠다는 발상 자체가 대단히 노골적이면서도 순진한데, 실상 거짓말을 효과적으로 퍼뜨리기 위해서라도 그런 기관의 존재는 부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젝은 여기서 카를 슈미트의 교훈을 되새겨보자고 말한다. 정치란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일이라고 정의한 정치철학자 말이다. 그때 친구/적의 구분이 사실적인 차이를 재현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누가 친구이고 누가 적인지 눈에 보이는 대로 분류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적은 그 정의상, 언제나, 적어도 어떤 관점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는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직접 인식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정치투쟁의 커다란 문제와 임무가 알아볼 수 있는 적의 이미지를 구성하고 제공하는 일이 되는 까닭이다.”(<실재계 사막>, 194쪽)

 
   




그렇게 적의 이미지가 구성․제공된다고 할 때 왜 걸핏하면 유대인이 ‘적’으로 등장하는지가 설명된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자신의 진짜 이미지나 윤곽을 숨겨서가 아니다. 사실은 그들의 거짓 외관 밑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들에겐 고유한 민족적 정체성을 담고 있는 ‘내적 형식’이 결여돼 있다. 그래서 말하자면 “민족 가운데 비민족이다(they are a non-nation among nations).” 곧 실체가 없으니 내키는 대로 조작하고 가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적으로의 인식’은 항상 수행적 과정이며, 그 과정이 거짓 외관과는 대조적으로 적의 ‘진짜 얼굴’을 구성해주고 폭로시킨다”. 여기서 ‘수행적(performative)’은 ‘공연’이란 뜻도 갖는다. 그래서 ‘폭로시킨다(light)’는 ‘빛을 비춘다’라는 뜻도 된다.  

 

 

냉전 시대에는 물론 소련과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이 서구에는 ‘적’의 형상이 돼주었다. 하지만 그들 국가들이 붕괴․해체되면서 적에 대한 서구의 상상력도 혼란스러워졌는데, 9․11 이후에 비로소 제대로 된 ‘적’을 발견하게 된 형국이다. “오직 9․11과 함께 이슬람의 탁월한 근본주의자인 오사마 빈 라덴과 눈에 안 보이는 그의 네트워크인 알카에다라는 이미지를 구성해냄으로써 이런 상상력은 제 힘을 되찾게 되었다.”(<실재계 사막>, 195쪽) 지젝이 보기에, 이러한 상황이 뜻하는 바는 “우리의 다원적이고 관용적인 자유민주주의가 철저히 슈미트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부연 설명은 다음 회에서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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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더쇼비츠에 대한 지젝의 비판부터 시작해보자. 테러리스트의 인권보다는 미국인의 생명이 우선이라고 주장하면서 럼즈펠드가 고문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면, 곧 ‘인권침해’ 비난 같은 장애물을 제거했다면 지젝이 보기에 더쇼비츠가 한 일은 더 나쁜 쪽이다. “그는 럼즈펠드에 대해 자유주의적 반응을 가장하여 고문을 합법적인 토론논제로 받아들이면서 사실상 반제 컨퍼런스에서 유대인의 전멸에 대한 법률 존중주의적 반대자처럼 주장하였다.”(<실재계 사막>, 187쪽)

더쇼비츠는 ‘법률 존중주의자’의 입장에서 럼즈펠드가 은연중에 옹호하는 고문에 반대한다. 체포된 알카에다 부사령관 아부 주바이다에 대한 고문에 반대하는 이유로 그는 두 가지를 든다. (1) 주바이다의 경우는 ‘째깍거리는 시계’ 상황의 사례가 아니다, (2) 그를 고문하는 것은 합법적이지 못하다. 만약 고문을 합법화하려면 미국이 포로의 지위에 관한 제네바 협정을 더 이상 준수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해야 한다. 지젝이 보기엔 이러한 입장이 자유주의의 궁극적인 윤리적 실패를 보여준다. 어째서 그런가. ‘무지’하기 때문이다.  

 

 

‘반제 컨퍼런스(Wannsee Conference)’는 보통 ‘반제 회의’라고 칭하는데, 히틀러의 명령으로 베를린 근교 그로센반제에서 소집된 회의로 중앙안보국의 유대인 문제 담당국장 아돌프 아이히만을 비롯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이끄는 15명의 나치 관료가 참석했다고 한다. 이 회의에서 소위 유럽 유대인을 절멸시키는 ‘최종해결책(final solution)’이 결정되었다. 본격적인 홀로코스트의 서막이었던 셈이다. 지젝은 고문에 대한 더쇼비츠의 반대는 ‘불법적’이라는 이유로 유대인 절멸 계획에 반대했던 반제회의 법률가를 떠올려준다고 말한다.  

 

   
 

이 법률가는 이렇게 항의했다고 한다. “저는 일주일 전에 총통을 찾아가 뵈었습니다. 그는 어떠한 유대인도 불법적인 난폭한 조치로 고통 받지 않을 것임을 저한테 진지하게 보장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회의를 주재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조롱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답했다. “당신이 총통께 똑같은 질문을 다시 물어본다고 해도 그는 당신에게 똑같이 대답하실 거요.” 요점은 무엇인가? “나치의 담론은 두 가지 수준에서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 명백한 진술의 수준은 알려지지 않은 역겨운 뒷면에 의해 보충되었다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188~189쪽)

 
   

 

‘명백한 진술(explicit statements)’은 겉으로 드러난 진술, 공식적으로 말해진 진술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에 대한 불법적인 조치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같은 히틀러의 보장이 그런 ‘명백한 진술’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거기엔 ‘알려지지 않은 역겨운 뒷면(obscene unacknowledged underside)’이 깔려 있다. 말하지는 않지만 암묵적인 이면이 있는 것이다. ‘법률 존중주의자’와 강경노선 간부 사이의 의견 차이는 거기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명백한 진술’만을 되뇌며 항의하는 법률가를 조롱하는 것도 어떻게 해서 그런 ‘이면’에 대해 무지할 수 있느냐는 판단에서이다.

법률가의 입장은 어떤가. 그는 자신 또한 유대인들을 아주 미워하지만 그들에게 극단적인 조처를 가한 법적 근거가 없다는 쪽이다. “그들은 법의 대타자, 즉 합법성의 법적인 허구에 의해 메워지지 않는 판결의 심연과 직면하게 되어 두려워하게 되었다.”(<실재계 사막>, 189쪽) 여기서 ‘판결(decision)’은 ‘결정’이라고 옮기는 게 낫겠다. ‘최종 해결책’처럼 법에 의해 보증되지 않는, 법이라는 대타자에 의해 지지되지 않는 결정에 ‘법률 존중주의자’들이 매우 당혹스러워했다는 얘기다.  

 

   
 

“오늘날 호모 사케르의 삶에 대한 후정치적 통제와 함께 나치의 법률 존중주의자들의 이런 마지막 보류도 사라져가게 되었다.”(<실재계 사막>, 189쪽)

 
   

 

호모 사케르의 삶에 대한 탈정치적 통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지젝은 이 탈정치 시대에는 그나마 그 ‘법률 존중주의자’들마저 사라지고 없다고 말한다. 번역본에는 이어지는 한 문장이 누락돼 있는데, 이런 내용이다. “행정적 조치가 법이라는 대타자를 통해 보증하는 일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there is no longer any need to cover administrative measures with the legal big Other).”

번역본에서는 이어지는 대목이 “행정적인 조치가 차츰 법의 지배로 대체되어가는”이라고 돼 있는데, 거꾸로 옮긴 것이다. 행정적인 조치가 차츰 법의 지배를 대체해가는 과정이 ‘생체정치’의 과정이다. 이런 과정의 전조는 1960~1970년대에 파라과이에서 있었다고 한다. 알프레도 스트뢰스너가 이끄는 권위주의 우파 체제는 예외 상태에 대한 논리를 극단까지 밀어붙였다(최근 위헌판결을 받은 우리의 유신시대 긴급조치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당시 파라과이는 ‘정상적인’ 의회민주주의 국가였지만, 스트뢰스는 예외 상태론을 제기했다. “우리 모두는 자유와 공산주의 간의 전 세계적인 갈등 때문에 긴급사태 속에서 살고 있는데, 헌법의 이행이 무기한 연기되고 영구적인 긴급사태가 선포되었다.”(<실재계 사막>, 190쪽) 그리고 이런 긴급사태는 4년에 한번 선거일에만 정지됐다. ‘정상적인’ 민주주의적 자유가 오히려 ‘예외’가 돼버린 것이다.

이러한 역전은 9․11 이후의 미국 사회에서도 감지된다. 테러리스트로부터 우리를 방어하기 위해선 우리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논리는 ‘긴급사태’의 논리, 예외 상태의 논리를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긴급사태인가? 당시 부시 대통령의 표현을 빌면 미국이 ‘전쟁 상태’에 놓여 있어서다. 하지만 어떤 전쟁인가? 절대 다수의 국민이 일상생활을 유지하고 있다면 전쟁은 어디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그런 상황을 ‘전쟁 상태’로 간주한다면, 전쟁과 평화의 구분 자체가 희미해져가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뜻이 된다. 평화 상태 자체가 동시에 위급한 긴급사태로 간주될 수 있는 시대 말이다.  

 

 

여기서 구별이 필요한 것은 ‘테러와의 전쟁’을 앞세우는 자유주의적-전체주의(전체주의화하는 자유주의)의 긴급사태와 진정 혁명적인 긴급사태다(이것은 사도 바울이 ‘종말’이라고 말한 긴급사태다). 이 둘은 어떤 관계에 놓이는가?    

 

   
 

국가기관이 긴급사태를 선언할 때는 정의상 진정한 긴급사태를 회피하고 ‘사태의 정상적인 추이’로 되돌려놓으려는 필사적인 전략의 일부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긴급사태’라는 반작용의 모든 선언들은 공통된 특징 한 가지를 갖고 있다. 그들은 모두 대중의 불안(‘혼란’)을 막으려는 쪽으로 향해왔고, 정상을 되찾으려는 결정을 제시해왔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그리스, 칠레, 터키에서 군부는 총체적 정치화의 ‘대혼란’을 억누르기 위해 긴급사태를 선포했다.(<실재계 사막>, 191~192쪽)

 
   

 

물론 이 국가들이 리스트에 한국 또한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반작용의’는 ‘반동적’으로 읽으면 되고, ‘정치화’라는 건 복수의 정치적 입장과 의견이 경합과 쟁투를 벌이는 ‘정상적인’ 정치 현상으로 이해하면 된다. 모든 반동적 독재 정권과 권위주의적 권력은 그러한 정상성을 억압하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구호. “이런 광기는 중단되어야 합니다. 국민들은 그들의 정상적인 직업으로 되돌아가야 하고 일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요컨대, 긴급사태라는 반동적 선포는 진정한 긴급사태 자체에 대한 필사적인 방어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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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 2011-01-07 0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밑의 사진 윗윗 단락의 오타. '헌법의 이행이 무기한 영구되고 영구적인 긴급사태가'->"무기한 연기되고"

자음과모음 2011-01-07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정하였습니다. 관심 감사합니다^^
 


 

예고한 대로 오늘 다룰 주제는 ‘고문’이다. 지난 회에서 조나단 올터라는 칼럼니스트의 주장을 조금 인용하고 마무리했는데, 요점은 테러리즘에 대처하는 수단으로 고문도 배제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열린 마음’으로 말이다. 그의 주장은 이렇게 더 이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비록 위선이라 할지라도 어떤 용의자들을 덜 까다로운 우리 동료들한테 넘겨주는 일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어느 누구도 이것을 잘하는 짓이라고 말하지 않았다.(<실재계 사막>, 183쪽)

 

여기서 ‘덜 까다로운 동료들’은 ‘덜 까다로운 동맹국’을 가리킨다. 미국에서는 고문이 불법이고 합법화하기도 어려운 만큼 용의자들을 심문하기가 어려우니까 이들은 고문에 ‘덜 까다로운’ 국가에 보내 심문하도록 하자는 제안이다. ‘잘하는 짓’은 아니겠지만, 고려해봄직하다는 얘기. 하지만 지젝은 이런 주장이 대단히 ‘외설적’이라고 비난한다. 먼저, 어째서 WTC 공격이 정당화의 빌미가 되는가? 그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들도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둘째, 이런 생각이 뭐가 새로운가? 이미 미국은 CIA를 통해서 남미와 제3세계에 수십 년 동안 고문을 ‘수출’해왔는데 말이다.  

 

 

이러한 ‘외설성’을 지젝은 자유주의 법학자이자 논객인 앨런 더쇼비츠(번역본에는 ‘더쇼위츠’라고 표기됐지만 국내엔 ‘더쇼비츠’라고 소개됐다. <선제공격>, <미래의 법률가에게> 등이 번역돼 있다)의 주장에서도 발견한다. “나는 고문에 찬성하지 않지만, 만일 당신이 그걸 할 생각이라면 틀림없이 법정 승인이 필요할 것이다”라는 게 더쇼비츠의 주장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의 주장은 고문 합법화에 대한 여지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의 요점은 “우리는 여하튼 그걸 하고 있기 때문에 그걸 합법화하는 것이 더 좋고, 그렇게 해서 과도한 것을 막을 수 있다!”라는 주장을 함축할 수 있다. 즉 (1) 우리는 여하튼 고문을 하고 있다, (2) 따라서 차라리 고문을 합법화하는 것이 더 낫다, (3) 그렇게 되면 과도한 고문을 오히려 막을 수 있다, 는 식이다.

더쇼비츠는 ‘째깍거리는 시계’ 상황, 곧 테러 공격이 예정돼 있다거나 하는 아주 긴박한 상황에서는 고문이란 수단이 죄수의 인권에 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그런 예외적인 상황에서는 고문이 허용될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다른 사람을 고문하는 일이 당연한 처벌로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들이 그 무엇을 알고 있기 때문에 허락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수백 명이나 되는 우리 군인들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는 정보를 가진 전쟁포로의 고문은 어째서 합법화하지 않을까?”(185쪽) 게다가 그런 식의 예외 상황은 언제든지 상시화․일반화될 수 있는 것 아닌가?(우리의 경우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같은 걸 떠올릴 수 있다.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긴박한 상황’에 우리는 항시 처해 있는 것 아닌가!) 더쇼비츠식의 ‘솔직한’ 자유주의 논변에 반대하여 지젝이 옹호하는 건 ‘위선적’ 태도이다.  

 

자유주의자인 더쇼비츠의 정직함에 반대하는 우리는 역설적으로 외견상의 ‘위선’에 집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좋다. 우리는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 ‘(뭔가를) 알고 있는 죄수’이고, 그의 말이 수천 명을 구할 수 있는 그 유명한 죄수와 직면하게 되었을 때 우리가 쉽게 고문에 의지하게 되리라는 것을 한번 상상해볼 수 있다. 그러나 비단(아니, 오히려 정확히) 그런 경우에도 우리가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보편적인 원칙으로 끌어올리지 않는 일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긴급한 순간에서도 우리는 단지 그렇게 해야 한다.(<실재계 사막>, 184~195쪽)

 

요점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보편적 원칙으로 끌어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젝은 고문에 대한 찬성보다도 더 위험한 것이 고문을 ‘합법적인 논쟁거리’로 끌고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러한 논쟁, 즉 ‘결정하지 않고 있으라’는 그런 권고는 테러리스들이 쟁취하고 있는 진정한 모든 자유주의자에 대한 신호임에 틀림없다.(<실재계 사막>, 185쪽)

 

‘간단히 말해서’라고 돼 있지만 ‘간단히’ 이해되지는 않는 문장인데, 일단 ‘결정하지 않고 있으라’는 ‘열린 마음을 가지라(keep an open mind)’라고 옮기는 게 더 낫겠고, 나머지 부분은 오역이다. 원문은 “In short, such debates, such exhortations to 'keep an open mind', should be the sign for every authentic liberal that the terrorists are winning”이다. 다시 옮기면 “간단히 말해서, 그러한 논쟁이나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충고 따위는 진정한 자유주의자가 보기엔 테러리스트들이 승리하고 있다는 징후여야 한다”.

고문을 합법적인 논쟁거리로 만드는 것이 왜 위험한 일인가? “그것은 전반적인 영역을 변화시키는데, 이런 변화가 없다면 솔직한 옹호는 특이한 견해로 남게 된다.” 곧 문제의 지형을 바꿔놓는다는 뜻이다. 이미 예외적 상황이라는 게 상시화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지젝이 지적하는 것도 바로 그 대목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근본적인 윤리적 전제의 문제이다. 당신은 당연히 (몇백 명의 생명을 구한다는) 단기간의 이득에 의해 고문을 합법화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상징세계에 미치는 장기간의 영향에 대해서는 어떠할까? 우리는 어디서 멈춰서야 할까? 어째서 고문은 범인들을, 이혼한 배우자한테서 자신의 아이를 납치한 부모를……단련시키지 못할까?(<실재계 사막>, 186쪽)

 

여기서 대비되는 것은 ‘단기간의 이득(short-term gain)’과 ‘장기간의 영향(long-term consequences)’이다. ‘단기간의 이득’이 고문을 합법화할 수 있는 명분이 된다면, ‘장기간의 영향’, 곧 장기적으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행위에 대한 처벌로서 고문을 허용하는 것은 어떤지를 물을 수 있다. 고문은 어디서 중단되어야 하는가? 마지막 “어째서 고문은 범인들을, 이혼한 배우자한테서 자신의 아이를 납치한 부모를……단련시키지 못할까?”는 어이없는 오역인데, 원문은 “Why not torture hardened criminals, a parent who kidnaps his child from a divorced spouse……?”이다. 여기서 ‘hardened criminals’는 ‘범인들을 단련시키다’가 아니라 ‘상습범’이란 뜻이다. 다시 옮기면 “상습범들, 이혼한 배우자에게서 아이를 납치하는 부모 등을 왜 고문하면 안 되는가?”이다. 그러니까 ‘째깍거리는 시계’를 고문을 합법화하기 위한 논변에 끌어올 경우에 그 한계를 지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다.  

 

 

9․11 테러 이후에 고문은 미국 사회에서 2002년 내내 사회적 이슈가 됐다. 한 가지 사례. “미군이 알카에다의 부사령관으로 생각한 아부 주바이다(Abu Zubaydah)를 체포했던 4월 초에 ‘그가 과연 고문을 당했을까?’라는 의문이 대중매체에서 공개적으로 논의되고 있었다.”(187쪽) 여기서도 ‘그가 과연 고문을 당했을까?’는 ‘그를 고문해야 할까?’(Should he be tortured?)의 오역이다. 고문 문제가 ‘공론 영역’에서까지 이슈화된 것이고, 럼즈펠드는 자신의 우선순위는 미국 국민의 생명이지 테러리스트의 인권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공개적으로 고문으로 가는 길을 열어젖혔다. 하지만 지젝이 이보다 더 문제적이라고 보는 것은 고문을 합법적인 토론 논제로 수용하는 더쇼비츠의 논변이다. 그에 대한 비판은 다음 회에서 따라가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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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 2011-01-05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로쟈님은, 이 글을 연재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지젝을 쉽게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까?
자신의 블로그에서 필명을 날린 것처럼, '오역을 짚어내고, 망신주기'를 위한 것입니까?

전자라면, 번역본에서 인용할 부분이 혹 틀리거나 어색하다면,
자신이 번역해서 고친 번역을 제시하고, 번역본의 페이지를 기입하고
'필자(인용자) 수정'이라고 표시하면 될 것입니다.

번역에서 '오역'된 부분을 다시 반복하고, 빈정거리고, 원문 기입하고,
다시 번역한 것을 길게 나열하고 하는,
이런것이 짧은 연재란에서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시나요?
그런 것을 독자들이 보고 싶어할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렇게 오역이 많은 책이라면, 그 책이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블로그의 연재를 따라가며, 어차피 책을 따라 읽어야할 독자를 위해
그 책을 선정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오역이 많은 책을- 로쟈님은 이 책의 번역의 문제가 많다는 서평을 오래전에 작성했지요-
무책임하게 선정해놓고 그 책의 번역의 문제점을 나열하는데
글의 상당부분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독자들이 이 책이 얼마나 형편없는 책인지, 그 형편없는 번역의 책을 새로 수정하고
올바로 읽어가는 로쟈가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 궁금해서
이 연재물을 읽는다고 생각하시나요?

이 창작 블로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하셔서
그러한 오역 지적, 또는 빈정거림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하시면 안될까요?

40회가 넘도록 그러한 빈정거림을 듣는 것이 한두번도 아니고,
또 블로그에 묶은 글을 수정이나 정정도 하지 않고 묶어낸
'로쟈의 인문학 서재'나 '책을 읽을 자유'처럼
--도대체 편집자는 무엇을 하는겐가? 글만 모은다고 편집자는 아니다--
그대로 묶어낼 것 같아, 안쓰러워서 한마디 남깁니다.

이 연재글의 조회수가 처음의 4분의 1로 줄어든게 로쟈님의 글이 어렵거나,
심오해서 독자들이 못따락가서라고만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지젝식으로 하자면,
로쟈의 번역 수정과 그에 대한 빈정거림에 기인하는 유머는,
지젝에 대한 주해를 위해 지젝의 농담을 원환론적으로 반복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식을 찾지 못한고 있는 곤궁을 피해가고 위한 것은 아닌가?

로쟈님,
남이 해놓은 번역을 지적하는 것처럼 손쉬운 일은 없습니다.
직접 번역도 해 보신 분이니 아실 것입니다.
이 창작 블로그의 목적을 분명히 하셔서 앞으로 지젝에 대한 좋은 연재로 진행되길 바랍니다.

지나는이 2011-01-06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연재의 목적이 어찌 오역에 대한 빈정거림에 있을까요. 로쟈님 문투가 다정다감하기보다는 정확하게 분별하고 지시하려는 쪽이라서 그런 오해를 살 수도 있다고 봅니다. 처음엔 저도 그런 느낌을 받았죠. 하지만 번역문과 원문의 비교를 통해 분명해지는 개념과 의미들이 있고, 그런 충돌을 통해 이야기가 이어져 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냥 저는 사다리님과는 좀 다른 생각이 들어서요^^

사다리 2011-01-06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해'가 아닙니다.
'번역문과 원문의 비교' 좋습니다.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지젝의 글에 대한 해설이라는 연재글의 목적과 성격상,그리고 분량이라는 경제성에서
틀린 번역이 있다면 수정한 것을 제시하고, '인용자 수정'이라고 표기해주면 됩니다.

41회에서는 좀 덜한 편인데, 초반 연재(1~10회) 정도에는 '빈정거림'이 꽤 신랄하지요.
그것은 '번역문과 원문의 비교' 정도의 의도가 아닙니다.

저에게 의아한 것은, 이런 연재글이 거의 수정없이--로쟈님의 전작 2권처럼--
책으로 묶여 나온다는 것입니다.

번역에 어느 정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해 문제 제기를 했고,
로쟈님 정도의 알라딘 포함 온라인 서점 등에서의 영향력이면
충분히 판매에도 타격을 줄 것이기 때문에
출판사나 번역자 역시 문제를 인식, 반성, 개선을 하려고 할 것임도
때린 데 또 때리는 것처럼, 일부러 창피를 주는 것도 아니고
이런 연재글을 통해, 그리고 책으로 묶어
빈정거리는 것은 무슨 의도일까요.
저는 정말 그것이 궁금합니다.

저는 굳이 로쟈님의 의도를 추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로쟈님 식의 번역에 대한 문제 제기는 번역에 대해 많은 문제를 제기했고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실천할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를 분명히 적시하고, 개선해 나가는 데에 의의가 있는 것이지,
이 연재글에서 꾸준히 제기되는 것처럼
역자에 대한 '빈정거림'이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로쟈님은 번역에 대한 문제 제기를,
일단 책을 사서 읽은 소비자로서 당연한 문제 제기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듯이,
저 역시 알라딘에서 책을 사서 읽고 연재글을 읽는 소비자로서
이 지적 행위를 하는 생산자(로쟈님)에게 하나의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연재란이 로쟈님 개인 서재라는 사적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연락처(메일 주소)가 '자음과모음'으로 되어 있는 것처럼-- 주지해달라는 것이지요.
이런 소비자의 이의 제기가 반영되고 안되고는 생산자인 로쟈님과 '자음과 모음'의
입장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의 문제 제기가 단순히 '다른 생각' 정도인지는
앞으로 계속 지켜볼 생각입니다.

도다리맨 2011-01-15 0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비자라고? 당신이 돈내고 이 글"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보는거요? 어이가 없구만.
그리고 편집글을 묶어내는 게 왜 나쁜지 이야기 해보쇼.
또 남이 한 번역을 지적하는 것만큼 손 쉬운게 없다고? 까지마쇼.
별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자신이 이해못한 것을 번역이 이상하다고 나대는 것은 쉽겠지만 로쟈가 근거를 대지 않고 지적만 했소? 원문 일일이 보고 해석해서 잘못했다는 거 아니오? 그것이 쉬운 것 같소?
읽다가 힘들면 인터넷 여기저기서 번역 비평 조사하고 몇 명이 나쁘다고 하면 툴툴거리는 그런 쌈마이들이랑 로쟈가 하는 것은 다른 것이므니다.

도다리맨 2011-01-15 0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빈정거림이야 로쟈 스타일이지 뭐. 애초에 자신의 노동력을 투여한 상품을 시장에 내놓은 것 자체가 무슨 비판이듯 받겠다는 얘기아니오? 그러니까 로쟈가 비판하고 있는 역자도 그 정도 각오는 했을 것 아니오. 무슨 애를 쓰고 신경을 썼다고 해서 죄가 면해지는 건 아니잖소
그런 인간적인 감정으로 접근하는 것 보다는 좀 엄격해질 필요가 있소.
그리고 내 생각에 로쟈가 여전히 빈정거리고 있지만 한편으론 역자를 존중해 주는 것 같기도 한 것 같소. 형편없는 번역본이니 아예 쌩까면 될텐데도 오역이 많은 번역본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 아니오? 로쟈가 무슨 신랄한 소리를 하든, 어쨌거나 이 연재의 교과서는 저 오역 많은 번역본인 것이오.

정말 오랜만에 아주 '상상적인' 분을 만난 것 같소. 아 진짜 실제로 님 같은 분 보면 아주 그냥 ^&$#*%$#(@#)%@#*%@#해버릴텐데... 휴우 웃자 웃자

사다리 2011-01-17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도다리님께선 왜 이리 발끈하시는게요^^?
이 곳은 로쟈님의 개인 블로그인'로쟈의 저공비행'이 아니요.
로쟈님이 이 연재를 공으로 하는 것 같소?
'자음과 모음'과 연재 계약 맺고, (아마도) 이 후 출판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일게요.
일종의 생산과 판매 행위 아니요?
도다리님같은 분의 지적 고투를 돕기 위해 '재능 기부'라도 하는거요^^?

로쟈님을 수신 대상으로 삼았지만, 나의 건의는 '자음과모음'이라는 곳을 향해 있기도 하오.
실질적 구매 행위자가 아니기에- 책으로 묶이면 구입할 용의가 있는 '잠재적 구매 용의자'
정도는 될 수 있을게요- 건의가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오.
도다리맨님이 왜 이렇게 삐딱하게 발끈하고 난리인게요^^

도다리맨님은 모르는 것 같지만, 42~3회 연재부터 로쟈님이 나의 건의를 의식, 받아들인 것인지 이전과 같은 번역에 대한 빈정거림은 현저하게 줄어 들었음을 느낄 수 있을게요.

내가 잘못된 번역 지적하는 것에 대해 나쁘다고 그랬오?
짧은 연재난의 4분의 1이 넘는 지문을 번역 씹고,빈정되는 데에 쓸 필요가 있는지 묻지 않았오.
잘못된 번역이 문제라면, 박스에 처음부터 직접 고친 번역을 제시하고, 페이지 적고, '인용자 수정'이라고 표기하면, 번역 빈정거리는 부분, 원문 따로 가져와서 다시 이렇게 번역되어야 한다는 부분이 대폭 줄어들 것 아니오.
그럼 아마 연재되는 분량이 두배는 늘어날 것이오.

도다리맨님 말처럼, 빈정거리는 것이 진정 '로쟈의 스타일'인게요?
그런 것도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밥맛인 스타일일게요.
도다리맨님처럼 그런 '스타일'을 아무렇지도 않거나,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게요.
사람들은 그런 도다리맨님같은 사람을 '빠'라고 부르곤하오.
그러나 안타깝게도 '빠'는 다른 사람에게 공감도, 보편성도 불러일으키지 못하오.
그저 조롱과 회의의 대상이 될 분이오.
도다리맨님은 위의 두 댓글로 스스로 자기가 로쟈'빠'임을 공표한 것에 불과하오.

그리고,님은 오역 많은 번역본을 교재로 선택한 것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오?
이 블로그의 연재의 목적이 뭔지 한번 생각해보시오.
독자들은 그 번역 안 좋다는 '김종주 번역본'을 읽어가야 하오.
로쟈님이 지적한 부분에만 오역이 있다고 생각하시오?
로쟈님이 읽지 않고 넘어가는 부분은, 다른 독자들도 안 읽고 넘어가도 되는 것이오?
그런 것까지 다 고려해서 교재를 고르는게 당연한 것 아니겠오?
자기가 잘 아는 책을 골라서 설명만 잘 하는 게 다라면 그건 강의같은 데서나 하면 될 것 아니오?
이 곳이 '연재'라는 지면상의 한계가 있다는 점, 지젝이라는 철학자를 일반인을 대상으로 삼아 연재한다는 매체의 특성을 잘 헤아려보기 바라오.
이 연재도 어렵다고 하는 댓글이 여러 개 달리고, 조회수가 처음보다 4분의 1로 줄어든 것을 보면 이러한 매체의 특성을 로쟈님이나, 연재측이 잘 파악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지않소?
지젝 초보자를 위한 연재를 해놓고, 오역이 많은 책들을 선택해 놓으면
사람들보고 무엇을 읽으라는게요?
모든 사람들이 로쟈님처럼 영어본으로 오역 고쳐가며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오?
로쟈님 사정만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느낀 점을 이야기해 보시오?

이런 연재가, 이전의 <로쟈의 저공비행>,<책을 읽는 자유>처럼
책으로 그대로 묶여진다고 해 보시오.
난 참 끔찍한 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오.
위의 두 책이 아무리 블로그의 글을 모아놨다 쳐도, 책은 블로그 게시글이 아니오.
블로그 게시글 그대로 순서대로 모아놓으면, 블로그의 시간성이 그대로 책에 묻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을 것이고, 책을 만드는 사람의 자유겠지만,
그런 책이 나오는 건 참 불성실한 행위라는 것은 지적할 수 있을 것이오.

일례로, 위의 책에는, 이 연재의 앞부분처럼, 번역을 지적하고 나서 원문을 번역하여 설명하는 부분들이 있소.
나는 로쟈님이나, 편집자에게 묻고 싶소.
로쟈님이 블로그 연재할 때 번역을 지적하고 난 다음,
그 책이 지적을 받고 난 다음 고쳐졌는지, 그래서 개정본을 펴냈는지에 대해
로쟈님이 지적한 부분을 그대로 책으로 실을 때
로쟈님이나 편집자분께서 한번이라도 확인해 보았는지 묻고 싶소.

확인하고 고쳐진 것이 없어서 그대로 실었다면, 번역에 대한 지적으로 그럴 수 있다고 보오.
그러나 확인도 하지 않고 블로그의 번역 지적 글을 그대로 실었다면, 그것은 그런 지적을 통해 오역 지적이 번역 문화에 대한 긍정적 효과를 내기보다는
다른 부정적 효과를 내거나, 부정적 의도를 의심받을 수도 있다고 보오.
내가 로쟈님의 두 서평집을 읽으며 확인 해 본 바에 의하면, 두 책에는 날짜 부분부터 해서 소소한 오류가 대부분 블로그 글 그대로 수정없이 개재되어 있소.
그것이 블로그의 시간성을 그대로 책으로 옮겼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유일 것이나,
블로그와 책의 매체의 특징과, 책이 가지는 영구성을 간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오.

뭐, 이 것도 나의 하나의 의견일 뿐이오.
이 정도면 왠만한 컨설팅 한건 정도의 아이디어를 낸 것인데
이런 것을 보고도 도다리맨님처럼 발끈한 분들이 있을 것을 생각하니
이런 데에 헛 시간 들이는 자신이 한심하다고 생각되오.
그럼 로쟈님 편이나 어설프게 들지 말고 자신의 생각이나 한번 말해보시오.
도다리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