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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안 보이는 적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적절한 형상을 제공하기 위해 그들은 정치적인 상상력에 계속 의존하게 된다. 이러한 적이 다원적인 관용의 근본주의적 적대자로 규정된다는 사실은 친구와 적이라는 ‘이원론적’ 논리를 잠시 중지시키기는커녕 단지 그에 대해 반사적인 비틀림만 덧붙이고 있다.(<실재계 사막>, 195~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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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적 관용주의가 얼핏 ‘관용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주의를 적대자로 규정함으로써 ‘친구냐 적이냐’라는 슈미트식 이분법을 그대로 고수한다는 얘기다. 그러한 이분법을 중단시키기는커녕 약간 비틀기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재정상화’의 대가로 적의 형상은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다. 이러한 변화의 내용과 그 귀결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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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더 이상 악의 제국, 즉 다른 영토상의 실체가 아니라 불법적이고 비밀스런, 거의 가상적인,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로서, 그 안에서는 무법성(범죄성)이 ‘근본주의적인’ 윤리-종교적 광신과 일치하며, 이런 실체가 긍정적인 법적 신분을 갖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새로운 형상화는 적어도 현대의 시초에는 국가들 간의 관계를 조정했던 국제법의 종말을 초래하게 된다.(<실재계 사막>, 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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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의 유명한 호명대로 냉전 시대에는 ‘악의 제국’이라는 명백한 적이 규정돼 있었다(‘악의 제국’은 당시 소련을 지칭한 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적은 더 이상 어떤 영토를 점유하고 있는 실체가 아니다. 국가도 아니고 국가들의 연합도 아니다. 그것은 알카에다처럼 “거의 가상적인,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일 따름이다. 그리고 이런 ‘실체’는 법적 신분을 갖지 않기 때문에, 당연한 말이지만 국가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탄생한 국제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국제법의 종말’도 함축한다는 얘기다.
오늘날 테러와의 전쟁에서 ‘적의 형상’은 무엇인가? 지젝은 ‘반동적 근본주의자’와 ‘좌파 시위자’의 압축이 아닌가라고 지적한다(물론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이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서로 대립적인 형상이지만, ‘적’이란 기표는 실제적인 정적들을 통합하는, 한데 묶어주는 ‘누빔점’ 역할을 한다. <뉴욕 타임스 매거진>에 실린 한 기사의 제목이 ‘국내 테러리즘의 색깔은 녹색이다’라는 사실이 모든 걸 말해준다고 지젝은 꼬집는다. 한 사람도 죽인 적이 없는 녹색당원들에게 오클라호마 폭파 테러나 탄저균 소동 등의 모든 원인을 덮어씌우는 식이다. 2002년의 일이니만큼 현재의 정세와는 약간 차이가 나겠지만, 당시엔 모든 현상들이 기저에서 ‘테러’와의 연관성을 찾아내려고 했다. 기표의 은유적 보편화다. “당신이 약물을 구입하면 테러리스트한테 돈을 지불하게 됩니다!”라는 TV캠페인 광고까지 나왔다고 하는데, 여기서 ‘약물’은 물론 ‘마약류’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제 <실재계 사막> 읽기도 막바지다. 예상보다 길게, 더디게 진행되는 바람에 <이라크>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까지 갈 길이 아직 멀다. 그전에 먼저 둘러봐야 할 것은 ‘이웃’이다. 호모 사케르의 문제를 다룬 4장에 이어서 5장의 제목은 ‘호모 사케르에서 이웃으로(From Homo Sacer to the Neighbour)’이다. 지젝은 서두에서 자신이 베를린에서 직접 목격한 인종차별적 폭력을 떠올린다. 한 독일인이 베트남인의 길을 가로막으며 괴롭히는 장면을 목격한 것인데, 이 독일인은 신체적 위해는 전혀 가하지 않으면서 단지 베트남인이 가려던 길만 막아섰다. 그리고 베를린 번화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음에도 다른 행인들은 모두 무시하는 척하면서 그냥 지나갔다. 이러한 ‘부드러운’ 괴롭힘이 신나치 스킨헤드들의 잔인한 신체 공격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어쩌면 더 나쁜 것은 아닐까라고 지젝은 질문한다. 왜냐하면 이런 괴롭힘은 행인들의 반응이 보여주듯이 그냥 ‘일상적인 일’로 수용되기 때문이다(스킨헤드들이 직접 폭력을 휘둘렀다면 행인들의 반응은 달라졌을 것이다). 지젝의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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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호모 사케르로 취급하게 될 때 유사한 무지, 즉 일종의 윤리시대가 가동된다고 주장하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곤경을 탈출하게 되는 것일까?(<실재계 사막>, 200~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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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대목이긴 한데, ‘윤리시대’란 말은 ‘ethical epoche’의 오역이다(역자가 ‘epoch’로 잘못 본 것이다). ‘에포케’는 ‘판단중지’란 뜻이므로 ‘윤리적 판단중지’라고 해야겠다. ‘부드러운 괴롭힘’이 사례에 대해 무감각하게 반응하는 일이 그러한 판단중지의 사례다. 이러한 ‘곤경’을 어떻게 돌파해야 하는가? 지젝은 이스라엘에서 벌어진 한 가지 사례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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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월과 2월에 이스라엘에서 획기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수백 명이나 되는 예비군들이 점령지에서 근무하기를 조직적으로 거부한 사건이었다. 이런 이주 금지자들(그들을 그렇게 불렀다)이 단순히 ‘평화주의자’는 아니다. 그들은 공개선언에서 이스라엘을 위한 아랍국가들과의 전쟁에서 그들의 의무를 다했음을 강조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높은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들이 주장하는 (그리고 어떤 윤리적 행위에는 항상 단순한 그 어떤 것이 있다) 것은 단지 그들이 “어떤 국민 전체를 지배하고 쫓아내고 굶기고 창피를 주기 위해서” 사우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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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을 ‘refuseniks’라고 불렀다는데, ‘이주 금지자들’보다는 ‘명령 거부자들’이라고 옮기는 게 낫겠다. 점령지에서 근무하라는 명령을 조직적으로 거부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랍 국가들과 전쟁을 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조국을 위해 나가 싸우겠지만, 점령지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개의 윤리적 행위를 낳는 ‘단순한’ 이유다.
현실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겪고 있는 곤경은 어떤 것인가? 지젝은 ‘심리적 굴욕의 미시정치학’이라고 부르는데, “기본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엄격한 훈육과 처벌로서 정직한 삶으로 되돌릴 수밖에 없는 악동처럼 다뤄지고 있다.”(202쪽)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기본 전략이 ‘악동 길들이기’이라는 것인데, 어떤 점에서 그러한지 그 구체적인 사례부터 다음 회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