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에서 긴급사태와 예외상태의 논리가 ‘긴급’과 ‘예외’를 상시화함으로써 오히려 진정한 긴급사태에 대한 필사적인 방어책으로 기능한다는 주장까지 봤었다. 지젝은 유사한 사례를 더 든다. 먼저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천명한 잠재적인 표적국가들(이란, 이라크와 북한,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까지 포함한다)의 목록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기저의 원칙이라는 점. 냉전 시대에는 초강대국이 어떤 경우라도 핵무기를 먼저 사용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일종의 황금률이다. 그런 황금률이 작동한 것은 핵무기의 사용이 결과적으론 모두를 파멸로 몰고 갈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그것이 핵무기가 갖고 있는 MADness(Mutually Assured Destruction)이다.

상호 파괴가 궁극적인 결과라면 핵무기 사용은 ‘미친 짓’에 불과하다. 거꾸로 이러한 인식 때문에 강대국의 핵무장은 서로 경계하는 핵 억지력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앞세우면서 “이제 미국은 이런 언질을 파기했으며, 테러에 대한 전쟁의 일부로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첫 번째 국가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한 셈이 됐다. 핵전쟁과 통상적인 전쟁 사이의 구분을 없애버린 것이다. 지젝은 칸트 철학의 용어를 빌려서 설명하는데, 과거 핵무기의 지위가 ‘초월적’이었다면 이제는 ‘경험적’ 혹은 ‘병리적’ 차원으로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2002년 2월에 미국 정부가 설립하려다 보류한 ‘전략영향국(Office of Strategic Influence)’에서도 감지된다는 게 또한 지젝의 지적이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2001년 10월 30일에 설립됐다가 2002년 2월 그 존재 사실이 공표되어 논란을 일으킨 기구인데,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는 “미국의 이미지를 세계에 퍼뜨리기 위해 외국 매체에 허위를 살포하는 것”이었다. 가짜 정보를 흘리는 ‘군사적 속임수(military deception)’을 전담하는 부서다. 합법적인 국가 기관이 거짓말을 해도 되느냐는 논란을 불러일으키자 국방장관이었던 럼즈펠드는 2월 말 이 부서를 폐쇄했다고 발표한다. 지젝은 이 사안이 단순히 거짓말을 공개적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문제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젝은 “거짓말하는 사람보다 더 나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거짓말을 고수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한 인간이라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진술을 끌어들이는데(출처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유명하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애인에 대한 어떤 여자의 반응을 가리킨다. 그 애인은 직접적인 삽입 이외의 모든 섹스를 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그 남자는 아내한테 거짓말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즉 그는 다른 여자와 성교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는데, 간단히 말해 그는 그녀한테 클린턴 같은 사람을 끌어들이고 싶었다. 그런 상황에서 공공연한 거짓말―자신의 아내한테 혼외 성관계의 부정―이 그가 선택한 진실을 가장한 거짓말이란 전략보다 훨씬 더 정직했을 것이라고 그 여자가 주장하는 데에는 충분한 정당성이 있어 보인다.(<실재계 사막>, 193~194쪽)

 
   

   

 

 

다소 부정확하게 옮겨진 대목이 있는데, 정황 설명을 하자면 이렇다. 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의 유부남 정부는 온갖 성적 접촉을 시도하면서 직접적인 삽입만은 피하려고 했다. 이유는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 “난 결코 그녀와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라고 변명할 때, 그게 거짓말이 아니려면 좁은 의미의 ‘성관계’가 뜻하는 삽입 행위는 배제해야 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케이스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인물이 백악관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 빌 클린턴이기 때문에 “클린턴 같은 사람”을 갖다 대고자 했다는 표현이 나왔다. 하지만 여자는 정부에게 이렇게 대꾸했다. 당신의 ‘진실을 가장한 거짓말(lying in the guise of truth)’, 곧 “결코 성관계는 없었다”라고 둘러대는 전략보다는 ‘솔직한 거짓말(outright lie)', 곧 “만난 적도 없다”라고 말하는 편이 훨씬 더 정직한 태도라고.

그렇다면 OSI(전략영향국)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 계획이 신속하게 보류되었다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정부 기관이 그의 목표 가운데 특히 거짓말을 퍼뜨리는 일이 자멸적인 것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던 것이다.”(<실재계 사막>, 194쪽) 뒤 문장은 “a government agency announcing openly that its goal is, among others, to disseminate lies is self-defeating”을 옮긴 것인데, 전체 술어는 ‘선언했다’가 아니라 ‘자멸적이다’이다. 다시 옮기면, “국가 기관이 다른 것도 아니고 거짓말을 유포하는 일이 주된 목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멸적이다.” 자기 존재 근거를 허무는 것이기에 ‘자멸적’이다. 그런 기관을 두겠다는 발상 자체가 대단히 노골적이면서도 순진한데, 실상 거짓말을 효과적으로 퍼뜨리기 위해서라도 그런 기관의 존재는 부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젝은 여기서 카를 슈미트의 교훈을 되새겨보자고 말한다. 정치란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일이라고 정의한 정치철학자 말이다. 그때 친구/적의 구분이 사실적인 차이를 재현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누가 친구이고 누가 적인지 눈에 보이는 대로 분류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적은 그 정의상, 언제나, 적어도 어떤 관점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는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직접 인식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정치투쟁의 커다란 문제와 임무가 알아볼 수 있는 적의 이미지를 구성하고 제공하는 일이 되는 까닭이다.”(<실재계 사막>, 194쪽)

 
   




그렇게 적의 이미지가 구성․제공된다고 할 때 왜 걸핏하면 유대인이 ‘적’으로 등장하는지가 설명된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자신의 진짜 이미지나 윤곽을 숨겨서가 아니다. 사실은 그들의 거짓 외관 밑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들에겐 고유한 민족적 정체성을 담고 있는 ‘내적 형식’이 결여돼 있다. 그래서 말하자면 “민족 가운데 비민족이다(they are a non-nation among nations).” 곧 실체가 없으니 내키는 대로 조작하고 가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적으로의 인식’은 항상 수행적 과정이며, 그 과정이 거짓 외관과는 대조적으로 적의 ‘진짜 얼굴’을 구성해주고 폭로시킨다”. 여기서 ‘수행적(performative)’은 ‘공연’이란 뜻도 갖는다. 그래서 ‘폭로시킨다(light)’는 ‘빛을 비춘다’라는 뜻도 된다.  

 

 

냉전 시대에는 물론 소련과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이 서구에는 ‘적’의 형상이 돼주었다. 하지만 그들 국가들이 붕괴․해체되면서 적에 대한 서구의 상상력도 혼란스러워졌는데, 9․11 이후에 비로소 제대로 된 ‘적’을 발견하게 된 형국이다. “오직 9․11과 함께 이슬람의 탁월한 근본주의자인 오사마 빈 라덴과 눈에 안 보이는 그의 네트워크인 알카에다라는 이미지를 구성해냄으로써 이런 상상력은 제 힘을 되찾게 되었다.”(<실재계 사막>, 195쪽) 지젝이 보기에, 이러한 상황이 뜻하는 바는 “우리의 다원적이고 관용적인 자유민주주의가 철저히 슈미트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부연 설명은 다음 회에서 다루기로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