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에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엄격한 훈육과 처벌로 다스려야 하는 ‘악동’처럼 취급한다는 지젝의 지적까지 언급했는데,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본다.  

 

   
 

다음과 같은 상황의 웃음거리를 한번 생각해보라. 즉 팔레스타인 보안군이 폭파당하고 있는데 그와 동시에 하마스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엄한 조치를 취하라는 압력이 그들에게 가해진다. 그들이 공격을 받고 더 나아가 이런 공격을 그저 견디어낼 것으로 기대됨으로써 매일처럼 굴욕을 당하고 있다면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눈에 그들이 최소한의 권위라도 보유할 것으로 어떻게 기대될 수 있을까? 그런데 만일 그들이 반격함으로써 자신들을 방어한다면 그들은 다시금 테러리스트로 취급되어 해산되고 만다.(<실재계 사막>, 202~203쪽)

 
   

 

어떤 상황인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보안대를 일상적으로 모욕하고 무력화시키는 가운데, 그들에게 한편으론 대 이스라엘 강경파인 하마스를 통제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노릇인가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자신들의 보안대가 그렇게 무기력하고 스스로를 방비할 수도 없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다른 노선’에 의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한데, 또 그렇게 다른 노선으로 기울려 하면 다시금 테러리트로 내몰아 맹포격을 가하곤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대처법이다.  

 

 

이러한 부조리한 상황의 정점은 2002년 3월 말 자치정부의 수반인 아라파트를 연금시켜놓고 그에게 테러를 중단시키라고 요구한 사실이다. 이스라엘군의 통제하에 놓여 있는 ‘무기력한’ 아라파트에게 한편으론 팔레스타인 강경파를 통제할 만큼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하라고 요구한다는 건 난센스 아닌가? 이런 것이 소위 ‘화용론적 역설(pragmatic paradox)’이다. 뱀이 자기 꼬리를 물고 있듯이 말이 자기 말을 집어삼킨다는 뜻이다. ‘낙서금지’라고 써놓은 ‘낙서’처럼. 그러한 행위의 진짜 메시지는 무엇일까?  

 

   
 

암묵적인 진짜 명령이 오히려 정반대라는 것은 아닐까? 즉 우리는 너희들에게 우리에게 저항하도록 명령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너희들을 분쇄시킬 수 있으니까. 달리 말해서,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영토로 침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진짜 목적이 앞으로 있을지 모를 테러리스트의 공격을 막아내기보다는 오히려 ‘배수진을 친다’는 사실, 가까운 장래에는 평화로운 해결을 방해하게 될 그럴 수준까지 증오심을 높여둔다는 사실이라면 어찌 되겠는가? (<실재계 사막>, 203~204쪽)

 
   

 

그러니까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 공격의 진짜 목표는 테러 공격에 대한 예방이 아니라 오히려 평화적 해결의 봉쇄에 있다는 점. 도발하고 저항하도록 유인함으로써 공격의 빌미를 얻어내고, 또 군사 작전을 수시로 감행함으로써 이 지역의 평화가 아직 요원하다는 인식을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주변 세계가 갖게끔 하는 것이 그들의 전략이다.

이와 관련한 미국의 태도는 무엇인가? 지젝은 2002년 4월 1일 미국 TV에 방영된 깅그리치의 논평이 정확하게 표현해준다고 말한다. 깅그리치는 이렇게 말했다. “아라파트가 실질적으로 테러 집단의 우두머리니까 우리는 그를 끌어내리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새로운 지도자로 바꿔서 이스라엘 국가와 타협할 준비가 갖춰지길 바랍니다.” 소위 이것이 미국의 ‘부조리한’ 견해이고 입장이다. 하지만 정작 미국은 그렇게 ‘민주적으로 선출된 새로운 지도자’를 맞이할 준비가 돼 있을까? 실제적인 문제는 이런 것이다.  

 

   
 

‘진정으로 민주적인’ 팔레스타인의 침묵하는 다수라는 것이 단지 없을 뿐이라면 어찌 되겠는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새로운 지도자’가 훨씬 더 반이스라엘적이라면 어찌 하겠는가?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집단적인 책임과 처벌의 논리를 체계적으로 적용시켜서 혐의가 가는 테러리스트의 대가족이 살고 있는 모든 집까지 파괴하게 되기 때문이다.(<실재계 사막>, 205쪽)

 
   

 

인용문의 뒷부분은 인과 관계가 전도돼 있는데, ‘민주적으로 선출된 새로운 지도자’가 반이스라엘적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은 이스라엘군의 폭력적인 행태 때문이다. 이스라엘군은 연대 책임을 물어서 테러 혐의자 가족의 집까지 파괴하고 나섰는데, 팔레스타인인 다수가 그런 이스라엘을 지지할 가능성이 과연 있겠는가? 그러니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로 교체되길 바란다는 미국식 수사는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속 빈 수사’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렇듯 이스라엘의 ‘잔인하고 독단적인 처우’가 요점은 아니다. 요점은 이스라엘 점령지 팔레스타인인의 처지가 호모 사케르의 그것이라는 것이다. 즉 그들은 ‘온전한 시민’이 아니라 훈육적 처벌 대상이거나 인도주의적 원조의 대상일 뿐이다. 처벌 대상과 원조 대상이라는 일견 모순적인 지위는 하지만 생체 정치의 대상으로서 호모 사케르가 갖는 양면성일 뿐이다. 이스라엘군의 일부 ‘명령 거부자들’이 거부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이주 금지자가 성취했던 것은 호모 사케르로부터 ‘이웃’으로의 통과이다”(205쪽)라고 돼 있는 대목은 그래서 “명령 거부자들이 달성한 것은 ‘호모 사케르에서 이웃으로의 이행’이다”로 이해하는 게 좋겠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동등한 완전한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유대-기독교적 의미에서의 이웃들로 취급한다. 그리고 사실은 그것이 오늘날의 이스라엘인들한테 어려운 윤리적 시험이 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팔레스타인 사람을 사랑하라!”를 의미하는데(그들의 탁월한 이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실재계 사막>, 205~206쪽)

 
   

 

즉 이스라엘인에게 가장 전범적인 이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인 만큼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계명은 곧바로 “팔레스타인 사람을 사랑하라!”로 치환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계명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과연 그러한 사랑의 역사(役事)을 성취할 준비가 돼 있는 것일까? 그런 사랑이야말로 또한 현실의 좌표계를 변화시키는 진정한 기적이 아닐까?  

 

 

진도를 더 나가기 전에 지젝의 각주 하나만 같이 읽어본다. 유대-기독교적 사랑과 불교적 자비의 차이점에 대해 지적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웃에 대한 유대-기독교적인 사랑과 고통에 대한 불교적 자비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이런 자비는 대타자의 욕망이 갖는 불안-야기의 심연이란 의미에서의 이웃에 관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이 동물과 함께 공유하는 고통에 관한 것이다.”(205쪽) 즉 그 차이란 유대-기독교적 사랑이 ‘이웃’ 사랑인데 반해서 불교의 자비는 ‘고통’에 대한 자비(동정)라는 점이다. ‘이웃’은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대타자의 욕망의 심연을 가리킨다. 그런 ‘심연’에 대한 의식을 불교는 갖고 있지 않다. 환생론에 따르면 그래서 인간은 동물로도 얼마든지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