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계 사막’에서 우리가 어디쯤 있는지 궁금해하시는 분들을 위해 잠시 ‘위치 확인’을 하도록 한다. 모래바람이 세차기 때문에, 사막에서는 길을 잃기 십상이다. 혹 중간부터 무작정 읽기 시작한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다. ‘사막’에 불시착한 걸로 간주하시면 된다. 동행 안내를 하자면, 현재 지젝의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인간사랑, 2003)의 1장을 원저를 참고해 읽어나가고 있으며, 지젝의 강연록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철학과현실사, 2005)에서 내용이 얼마간 중복되는 1장(제1강연)도 참고하고 있다.

이제 지난 회에서 다룬 ‘가상과 실재의 변증법’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들어보자. 9·11 사건이 “현실이 우리의 이미지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지가 우리의 현실로 들어와서 우리의 현실을 산산조각 낸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까지 인용했는데, 이에 대한 설명을 보충하기로 한다. 물론 지젝의 설명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가상(semblance)과 실재의 변증법이 일상적 삶의 가상화(virtualization)와는 다른 문맥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하루가 다르게 일상적 삶이 가상화되고 우리가 갈수록 인공적으로 구성된 세계에 살게 되었다는 경험은 “실재로 복귀하고” 어떤 “실재적인 현실”에 굳건히 뿌리를 다시 내리고자 하는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낳는 것이지만, 가상과 실재의 변증법은 이런 초보적인 사실로 모두 환원되거나 설명될 수 없다. 다시 돌아오는 실재는 어떤 (다른) 가상의 지위에 있다. 정확히 말해서 실재는 바로 실재적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외상적이고 과도한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실재를 우리의 현실 안으로 통합해낼 수 없고, 그래서 그 실재를 어떤 악몽의 출현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다.(<탈이데올로기>, 21~22쪽; <실재계 사막>, 52쪽)

 
   

 

일상적 삶이 가상화되고 있어서 더욱 확고한 ‘실재적 현실’에 뿌리내리고자 하는 충동을 갖게 된다는 점은 ‘자해자들’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초보적인 사실’이고 지젝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돌아오는 실재’, 다시 ‘귀환하는 실재’는 좀 다른 가상의 지위를 갖는다는 것이다. ‘실재’란 정의상 외상적이면서 과잉적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현실’로 통합할 수 없다. 즉 현실이란 틀에 다 담을 수가 없다. 그것은 넘쳐난다. 때문에 실재는 언제나 악몽 같은 것으로 경험될 수밖에 없다. 9·11 때 무너진 쌍둥이빌딩의 이미지가 바로 그렇다. 그것은 ‘이미지’이자 ‘가상’이고 어떤 ‘효과’였지만, 동시에 ‘사물 자체(the thing itself)’였다.  

 

 

만약 실재가 가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고 악몽으로서만 경험된다면, 거기서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인가? “허구를 현실로 오인하지 말라”라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주장을 정확하게 뒤집어서, “현실을 허구로 오인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현실의 어떤 부분이 환상을 통해 ‘기능 변화’를 겪는지 식별하고, 그래서 그것이 현실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허구적인 양태로 지각되고 있음을 제대로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라는 뜻이다. ‘실재적인 현실(real reality)’ 속에서 허구의 부분을 알아내는 것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 허구의 가면임을 폭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지젝은 덧붙인다. 라캉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동물들은 가짜를 진짜로 속일 수 있지만, 유일하게도 인간은 진짜를 가짜로 속일 수 있다고. 그러니 중요한 것은 그 진짜 속에서 가짜를 가려내는 것이다. 실재적 현실 속에서 허구를 식별해낸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그런 관점에서 지젝은 면도칼(면도날) 자해자들의 사례도 다시 해석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실재의 참된 대립 항이 현실이라면, 면도칼로 스스로 자해할 때 이들이 실제로 도망치고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비현실성에 빠져 있다는 느낌이나 일상적 삶의 인공적 가상성이 주는 느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실재 자체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이고, 이 실재는 우리가 현실에 내린 닻이나 뿌리를 상실하는 순간 출몰하기 시작하는 통제 불가능한 환각의 형태를 띠면서 터져 나오는 것이다.(<탈이데올로기>, 23쪽, <실재계 사막>, 53쪽)

 
   

 

요컨대 신체 자해자들이 회피하고자 하는 것은 비현실성이 아니라 오히려 실재라는 것이다. ‘현실’에 내린 닻을 잃어버리자마자 우리에게 출몰하기 시작하는 이 실재의 환각에 대해서는 헤겔이 말하는 ‘세계의 밤’에서 기원적 이미지를 찾을 수 있을 듯싶다. 지젝이 자주 인용하는 대목이기도 한데, 참고삼아 인용한다(이 대목에 대한 설명은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를 참고할 수 있다).   

 

   
 

인간은 이런 밤, 즉 모든 것을 단순한 상태로 포함하고 있는 이 텅 빈 무이다. 무수히 많은 표상들, 이미지들이 풍부하게 있지만, 이들 중 어느 것도 곧장 인간에게 속해 있지 않다. 이런 밤, 여기 실존하는 자연의 내부, 순수 자기(self)는 환영적 표상들 속에서 주변이 온통 밤이며, 그때 이쪽에선 피 흘리는 머리가, 저쪽에선 또 다른 흰 유령이 갑자기 튀어나왔다가 또 그렇게 사라진다. 무시무시해지는 한밤이 깊어가도록 인간의 눈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 밤을 목격한다.(<까다로운 주체>에서 재인용)

 
   

 

 

여기서 좋은 사례가 돼주는 것은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 <피아니스트>(2001)이다. 노벨상 수상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문학동네)를 원작으로 한 영화로 젊은 피아니스트와 연상의 여자 선생님 사이에 벌어진 ‘정열적이지만 도착증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자벨 위페르가 문제의 선생님 역을 맡아 뛰어난 연기를 선보였고,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원래는 19세기 말 빈에서 상류 가정의 성적으로 억압된 여성이 자신의 피아노 선생과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다는 상투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이것이 한 세기 뒤에는 남녀의 성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의 관용적․방임적 시대에는 이런 이야기 자체도 도착적으로 비틀리게 된다는 점이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이 성적으로 구애를 해오자 ‘억압돼 있던’ 피아노 선생은 그녀의 요구조건을 상세하게 적은 편지를 그에게 보냄으로써 자신을 폭력적일 만큼 격렬하게 내보인다. 편지의 내용은 자신을 묶는 법, 항문을 강제로 핥게 하기, 그리고 따귀를 때리고 매질하기 등등, 기본적으로 피학증적 성관계의 시나리오를 담은 것이다. 그녀의 이 가장 내밀한 환상 자체는 너무 외설적이고 외상적이어서 입에 담을 수 없기에 글로 쓰였다. 이러한 환상의 직접적 노출은 남자에게 그녀의 지위를 ‘매혹적인 사랑의 대상’에서 ‘혐오스러운 실체’로 변환시키지만, 그는 처음엔 거부감을 느낀 그 시나리오에 몰입한다. 그녀의 뺨을 때려서 코피가 나게 하고 난폭하게 걷어찬다. 그러고 나서는?   

 

   
 

그녀가 환상의 실현으로부터 움츠러들면서 쓰러져갈 때, 그는 그녀에 대한 승리를 확인하기 위해 그녀에게 행위로의 이행과 구애를 한다.(55~56쪽)

 
   

 

이 대목은 “when she breaks down, withdrawing from the realization of her fantasy, he passes to the act and makes love to her in order to seal his victory over her.”을 옮긴 것이다. ‘he passes to the act’가 ‘행위로의 이행’이란 술어로 번역됐는데, 여기서는 그렇게 거창한 의미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폭력적이고 범죄적인 속성의 충동적 행위”(역주)를 가리키는 ‘행위로의 이행’은 ‘passage to the act’ 혹은 ‘passage a l'acte’라는 고정적 표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녀의 환상을 거쳐서 그는 직접적인 성행위(삽입)로 넘어갔지만, 그녀에게 환상에 의해 지탱되지 않는 성행위 자체는 아주 혐오스러운 경험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 혐오스러움은 그녀를 다시금 냉담하게 만들고 자살로 내몬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녀의 환상의 노출을 진정한 성적인 행위에 대한 방어 형성으로 해석하고 그 행위를 즐기러 갈 수 없게 만든 그녀의 무능함의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해석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그와 반대로 노출된 환상은 그녀 존재의 핵심을 형성하는데, 그것은 ‘그녀 안에 있는 그녀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이다. 실제로 환상 속에 구체화된 위협에 대한 방어 형성이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성적인 행위이다.”

‘그녀 안에 있는 그녀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은 ‘in her more than herself’의 번역이다. 이전에 한번 다룬 대로, 그녀 안에 있는 ‘사물’ 혹은 ‘괴물’이라고 해석해도 좋겠다. 우리에게 이질적이고 낯설지만 우리 안에 있으면서 우리 존재의 핵심에 더 가까운 어떤 것을 가리킨다. ‘환상’이 형태로 삐져나오긴 했지만, 그것이 핵심이고 실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실재의 위협에 비하면 실제 성행위란 그에 대한 방어 형성물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 <피아니스트>에서 얻을 수 있는 메시지다. 현실을 허구(환상, 가상)로 오인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댓글(0) 먼댓글(1)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현실을 허구로 오인하지 말라”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9-09 18:43 
    진도가 안 나가는 원고를 오래 붙들고 있다 보니 포스팅이 늦었다. 오늘 아침에 원고를 보낸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10회를 발췌해놓는다. 아직 '실재계 사막'을 못 벗어나고 있으며,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 <피아니스트> 얘기를 약간 다루고 있다.   (...) 이제 지난 회에서 다룬 ‘가상과 실재의 변증법’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들어보자. 9.11 사건이 “현실이 우리의 이미지로 들어온 것이 아니
 
 
 


 

다시 반복해보자. “소위 근본주의자의 테러라는 것도 실재계에 대한 열정의 표현이 아닐까?”(<실재계의 사막>, 35쪽)라는 것이 지젝의 물음이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는 많은 사례들을 동원하여 따져본다. 지젝의 주된 방식이지만 안팎을 뒤집어가면서.   

 

 

 

영화 <바더 마인호프>(2008)를 통해서 우리가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던 풍경이지만 지젝은 먼저 1970년대 초 독일의 적군파(Red Army Faction) 테러의 배경에 주목한다. 신좌파 학생운동이 붕괴된 뒤 곁가지로 빠져나온 것이 적군파였는데, 그들은 학생운동 실패의 교훈을 이렇게 짚었다. (1) 대중이 비정치적 소비주의에 너무 깊이 침윤돼 있다. (2) 통상적인 정치 교육과 의식화로는 그들을 각성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3) 따라서 그들을 이데올로기적 무감각과 최면 상태에서 흔들어 깨우려면 더 폭력적인 개입이 필요하다(슈퍼마켓 폭파 같은). 이와 동일한 논리가 오늘날의 근본주의적 테러에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까? 이 역시도 일상적 이데올로기의 세계에 푹 빠져 있는 서방 시민들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 아닐까?

여기서 지젝이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실재에 대한 열정’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역설이다. 그러한 열정은 그 정반대의 ‘연극적 스펙터클’에서 절정에 도달한다는 점이 역설적인데, 바로 그런 맥락에서 ‘실재에 대한 열정’은 ‘가상(semblance)에 대한 열정’이기도 하다(<실재계의 사막>에서는 ‘모사에 대한 열정’으로 옮겨졌다). 실재=가상? 그래서 역설이다. 지젝은 이렇게 정리한다.  

 

   
 

만일 실재계에 대한 열정이 극적인 실재계 효과의 순수한 외관으로 끝난다면, 그와는 정반대로 외관에 대한 ‘포스트모던’의 열정은 실재계에 대한 열정으로의 맹렬한 회귀로 끝나게 된다.(<실재계의 사막>, 37쪽)

 
   

 

인용문에서 ‘외관’은 ‘semblance’의 번역이다. ‘외형’ ‘외관’ ‘시늉’ ‘가장’ ‘유사’ 등을 가리키는 단어다. 여기서는 <탈이데올로기>에 따라 ‘가상’으로 옮긴다. ‘실재계에 대한 열정’을 ‘실재에 대한 열정’으로 바꿔서 다시 쓰면, 지젝이 말하는 건 마치 거울상처럼 교차하는 두 가지 과정이다. 실재에 대한 열정은 실재의 스펙터클한 효과라는 순수한 가상으로 귀결되고, 가상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열정은 결국엔 실재에 대한 열정으로의 폭력적인 회귀로 종결된다. 간단히 말해서 실재는 가상으로, 가상은 실재로 귀결된다. 지젝이 드는 예는 ‘자해자들(cutters)’이다. 대개는 여성들인데, 면도날로 손목을 긋는다든가 혹은 기타 방식으로 자해를 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실재계의 사막>에서는 ‘자르는 자’로 옮겼고, 자해 행위를 ‘절단(cutting)’이라고 옮겼는데, 면도날로 손목을 잘라내는 경우는 드물지 않을까? 게다가 보통은 상습적으로 자해를 하는데, 아예 잘라내버린다면 다음엔 무얼 ‘절단’해야 할지 상상하기 어렵다. 여하튼 우리 주변에서도 면도날이나 담뱃불로 자해하는 경우를 아주 드물지는 않게 볼 수 있다. 그건 어떤 의도에서인가? ‘현실 자체’를 주장하기 위해서, 단언하기 위해서다. 거꾸로 말하면, 뭔가 사는 것 같지 않고, 현실이란 실감이 나지 않아서다. 자해는 그런 가운데 자아를 신체적 현실 안에 확고하게 근거지우기 위한 시도이다. “면도칼 자해자들에 대한 표준적인 보고에 따르면, 스스로 자해한 상처에서 붉고 따듯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나면 느낌이 다시 살아나고 현실에 확고히 뿌리내린 기분이라는 것이다.”(<탈이데올로기>, 19쪽) 물론 이러한 자해 행위는 병리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어떤 정상성을 회복하고, 완전한 정신병적 붕괴를 피하기 위한 병리적 시도이다. 즉 자해자는 정신병자가 아니라, 정신병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하는 자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해 현상과 상관적인 것이 바로 우리 주변 환경의 ‘가상화(virtualization)’이다. 실체가 제거됨으로써 현실이 점점 더 가상현실화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예컨대 카페인 없는 커피, 지방을 뺀 크림, 알코올 없는 맥주 등등. 섹스 없는 섹스로서 가상섹스(혹은 사이버섹스)도 여기에 포함할 수 있고, 전쟁 없는 전쟁, 곧 아군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는 전쟁에 대한 콜린 파월의 독트린도 추가할 수 있다(<실재계의 사막>에서 ‘아무런 인과 관계도 없는 전쟁’은 ‘아무런 아군 사상자도 없는 전쟁(warfare with no casualties)’의 오역이다). 거기에 정치를 행정으로 대체한 ‘정치 없는 정치’와 타자성이 제거된 타자 경험으로서 관용적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까지 ‘가상화’는 전면적이다. 여기서 ‘타자성이 제거된 타자의 경험(experience of the Other deprived of its Otherness)’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두 가지 번역본이 모두 잘못 옮기고 있어서 잠시 짚고 넘어간다. 원문과 그에 대한 두 번역이다.   

 

  

   
 

“the idealized Other who dances fascinating dances and has an ecologically sound holistic approach to reality, while practices like wife beating remain out of sight.”

“매혹적인 춤을 추고 현실에 대해 생태학적으로 건전한 심신상관학설의 접근 방법을 보이면서도 안 보이는 곳에서는 아내 구타를 일삼고…… 그러한 이상화된 대타”(<실재계의 사막>, 38쪽)

“그 타자는 매혹적인 춤을 추고 생태학적으로 건전하고 유기체적인 접근법을 통해 현실에 접근하지만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 등과 같은 모습에는 눈감고 있는 이상화된 타자다.”(<탈이데올로기>, 20쪽)

 
   

 

인용문 전체는 ‘타자성(Otherness)’이란 말 뒤에 괄호로 묶여서 등장한다. 그 타자성이란 어떤 타자성인가? ‘매혹적인 춤’을 춘다고 할 때 먼저 떠올리게 되는 건 서남아시아나 동남아시아의 춤이다. 뭔가 이국적인 춤. 동아시아의 춤이어도 무방하겠다. 그리고 ‘holistic approach’를 ‘심신상관학설의 접근 방법’이나 ‘유기체적인 접근법’이라고 옮긴 건 좀 한정적이다. 전체론적 접근, 전일론적 접근을 뜻하는데, 분리적 접근과 반대되는 의미다. 몸과 마음을 분리시켜 사고하지 않으며, 부분과 전체를 분리시켜 사고하지 않는다는 것도 포함하지만. 간단한 예를 들자면 수지침 같은 것이다. 손바닥에 전신의 부위에 해당하는 대응점이 있어서 여기에 자극을 주어 질병을 치료한다는 원리다. 발 마사지도 마찬가지다. 손이나 발은 몸의 일부이지만 전체를 반영한다는 것이 ‘전일론적 접근’이다. 서양의 기계론적, 분리론적 접근과는 다르기에 낯설고 ‘타자적’이다. 이 정도 타자성에 대해서는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다.

하지만 그 타자성에도 불편하고 께름칙한 게 있다. ‘아내 구타’ 같은 관습이다. ‘practices like wife beating remain out of sight’는 ‘아내 구타 같은 관습’이 ‘이상화된 타자’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관습은 배제된다. “안 보이는 곳에서는 아내 구타를 일삼고…… 그러한 이상화된 대타”는 “안 보이는 곳에서는 아내 구타를 일삼는 이상화된 타자”라는 식으로 이해되는데, ‘아내 구타’와 ‘이상화된 타자’는 서로 충돌한다.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 등과 같은 모습에는 눈감고 있는 이상화된 타자다”라는 번역도 ‘wife beating’이 어떻게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로 둔갑하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습에 ‘눈감는’ 주체는 ‘이상화된 타자’가 아니라 ‘우리(서양인)’다.

‘아내 구타’는 빼놓고 매혹적인 춤과 전일론적 현실관 같은 타자성만을 수용하는 것, 그것이 ‘타자성 없는 타자’의 경험이다. 거기엔 카페인 없는 커피나 알코올 없는 맥주처럼, 우리식 표현으로 ‘앙꼬 없는 찐빵’처럼 뭔가 실체가 빠져 있다. 그렇듯 뭔가 빠진 현실을 일반화한 것이 ‘가상현실’이다. “그것은 실체를 잃어버린 현실 그 자체를 제공하고 있는데, 다시 말해 실재계의 견고하고 저항적인 핵심을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의 현실이 점차 이러한 가상현실로 대체되면서 벌어지는 일은 ‘진짜 현실(real reality)’ 혹은 ‘실재적인 현실’이 일종의 가상(virtual entity)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대다수 대중에게 세계무역센터(WTC)의 폭발과 붕괴는 텔레비전 화면상의 사건으로 지각됐다. 기념비적 건물이 주저앉고 거대한 먼지구름 속에서 사람들이 달려 나오는 장면의 반복적인 재생은 이미 대재난 영화의 장면들을 떠올려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세계무역센터의 폭발에 대해서 그것이 “우리의 착각과 미망의 영역을 산산조각 낸 실재의 침입”이었다고 보는 ‘표준적 해석’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지젝은 말한다(<탈이데올로기>, 21쪽). 우리는 이미 제3세계의 참상에 대해서 그것이 텔레비전 화면상으로나 출현하는, 곧 우리의 사회적 현실과는 무관한 것으로 지각해왔다(혹은 우리의 경우라면 그들은 연예인들의 자원봉사라는 프레임 속에서, 곧 ‘선행’의 배경으로만 출현해왔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9·11에 대해서도 다르게 말할 수 있다. “2001년 9월 11일에 일어난 사건은 이 화면상의 공상적 출현이 우리의 현실로 들어왔다는 데 있다. 결코 현실이 우리의 이미지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지가 우리의 현실로 들어와서 우리의 현실을 산산조각 낸 것”이라고 말이다(<탈이데올로기>, 21쪽). 이것이 가상은 실재가 되고, 실재는 가상이 되는 ‘가상과 실재의 변증법’이다. 
 

 


댓글(7) 먼댓글(1)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가상과 실재의 변증법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9-07 13:49 
    제목에서 이미 눈치챈 분들이 많은 텐데,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9회를 발췌해놓는다. 연재를 시작한 지 한 달이 됐지만, 아직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의 첫 장도 다 읽지 못했다. 예상보다 진도가 더딘 편인데, 초반에 개념 설명이 좀 들어가서 그런 걸로 봐주셔야겠다. 그렇다고 이후엔 진도가 더 빨라질지 아직은 장담할 수 없다. 아무튼 다음주까지는 1장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실재계의 사막>은 총 5개의 장
 
 
마테호른 2010-09-10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적군파의 영문표기에 오자가 있네요.

로쟈 2010-09-10 06:36   좋아요 0 | URL
지적 감사합니다. 영어로는 Red Army Fraction과 Red Army Faction을 같이 쓰고, 책에 있는 표기를 따랐습니다...

마테호른 2010-09-11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가 반 쪽 지식을 가지고 아는 척 했네요.^^

지나가다 2010-11-16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스텍터클은 스펙터클이겠죠?;

자음과모음 2010-12-21 15:40   좋아요 0 | URL
오타, 수정하였습니다.

nana35 2010-12-21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 9.11도 2002년이 아니라 2001년이네요.

완전 어렵고 흥미로운 퍼즐입니다.
내용에 들어간 것 같은데 아직 밖이고, 밖에 서 있다 보면 안에 포섭되네요.

자음과모음 2010-12-21 15:39   좋아요 0 | URL
오타, 수정하였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세기>라는 책에서 20세기의 특징으로 ‘실재계에 대한 열정(passion for the Real)’을 지목한다. 불어본은 2005년, 영역본은 2007년에 나왔지만 아직 우리말 번역본은 나오지 않았고, 지젝이 참고한 건 책의 초고다. 바디우의 주장을 지젝은 이렇게 정리한다.     

 

   
 

유토피아적인 혹은 ‘과학적인’ 프로젝트와 이상들, 즉 미래에 대한 계획들을 목표로 삼던 19세기와는 대조적으로, 20세기는 물(物) 그 자체의 전달에 그 목표를 두고 있다. 20세기의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것은 일상적인 사회적 현실과 대조되는 실재계의 직접적인 경험이었으며, 실재계라는 것은 현실의 현혹적인 껍질 층들을 벗겨낸 작업에 대해 지불해야 될 대가로서의 극단적인 폭력 속에 있다.(<실재계 사막>, 30쪽)

 
   

   
무슨 말인가? 19세기와 20세기는 뭔가 대조적이며, 20세기에 중요한 것은 ‘실재계의 직접적인 경험’이었다, 정도인가? 조금 더 읽어내기 위해 다른 번역도 참고해본다.     

  

   
 

19세기가 유토피아적이거나 ‘과학적인’ 기획과 이상들을 꿈꾸고 미래를 설계했다면, 그와는 반대로 20세기가 겨냥한 것은 사물 자체가 나타나도록 하고 새로운 질서에 대한 갈망을 직접적으로 실현하는 데 있다. 20세기를 규정하는 궁극적 경험은 실재에 대한 직접적 경험이다. 이때 실재는 일상의 사회적 현실에 대립하는 것이고, 이런 실재는 환멸을 낳는 현실의 층위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에 해당하는 극단적 폭력 안에서 경험된다.(<탈이데올로기>, 16쪽)

 
   

 

‘물(物)’과 ‘사물’로 옮겨진 단어는 독어 ‘das Ding’의 번역어인 ‘the thing’이다. <실재계의 사막>의 역주에는 “언어의 밖에 존재하고 무의식의 외부에 위치하여 상징화를 넘어서는 알 수 없는 x로서 칸트의 물자체와 매우 유사한 개념”이라고 설명돼 있다. 상징계 바깥에 있는 것이란 점에서 ‘실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겠다. 그러한 ‘사물’을 전달하거나, 갈망하던 새로운 질서(New Order)를 직접 실현하려고 한 것이 20세기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실재를 직접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일상의 사회적 현실(everyday social reality)’과 대립하는 어떤 것을 경험한다는 의미다.  

  

    

브레히트의 경험을 예로 들면, 그는 1953년 7월 극장에 가던 길에 노동자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진주한 소련 탱크들의 대열과 마주치게 됐다. 일상적으로 경험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현실과 직면하자, 당원이 아니었던 그는 생애 처음으로 공산당에 가입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미래에 대한 전망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이 ‘가혹한 폭력’이 어떤 진정성의 표지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실재’는 그렇게 기만적인 ‘현실’의 더께를 벗겨내는 폭력으로 경험된다.  

그런 경험의 맥락에서 보자면 ‘현실 대 실재’의 대립은 ‘가짜 대 진짜’의 대립이라고 할 만하다. 현실에서 우리는 각자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지만, 어느 순간 그런 건 다 연기일 뿐이고 진정성이 결여된 것으로 비칠 때가 있다. 대신 계급장 떼고 맞장 뜨는 것이 ‘진짜’처럼 여겨진다. 혹은 폭탄주를 돌려 마시고 바지는 걷어붙인 채 넥타이를 머리에 동여매는 수준에 도달해야 ‘진짜’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전장에서라면 일 대 일 육박전으로 맞붙는 것이야말로 ‘진짜’라고 고집할 수도 있다. 가볍게 입 맞추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서 아예 입술을 깨물어준다거나 긁어도 피가 나게 긁는 것 따위도 이런 ‘진짜 경험’의 목록에 올려놓을 수 있겠다. 이렇듯 ‘진짜’라고, 어떤 진정한 무엇의 경험이라고 간주되는 것, 그것이 바로 ‘실재의 열망’이고 ‘실재의 경험’이다. 지젝 자신의 경험담을 덧붙이자면 그는 1990년대 초에 슬로베니아 대선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 자신도 실재에 대한 열정을 느꼈다고 한다. 다른 게 아니라 정부에서 장관직이나 어떤 고위직을 맡게 된다면 단연코 내무장관이나 정보기관장을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거야 물론 직접적인 물리력을 동원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리야말로 경찰이나 요원들을 거느린 권력 실세가 아닌가. 그에 비하면 문화부 장관이나 교육부 장관, 과학기술부 장관이니 하는 직책은 우스꽝스러울뿐더러 일고의 가치도 없는 자리다. 지젝의 그런 바람이 혹 현실화했더라면 슬로베니아 국민들은 지젝식 ‘공포정치’를 경험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젝은 실재에 대한 이러한 열정의 또 다른 예를 쿠바 혁명에서 찾는다. “사회적 현실에서 ‘물자 공급’과 대조되는 ‘실재계에 대한 열정’의 또 다른 변형은 쿠바 혁명에서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다.”(<실재계 사막>, 31쪽) 이 대목에서 ‘물자 공급’은 ‘servicing of goods’의 번역이다. <탈이데올로기>에서는 ‘선의(善意)의 봉사’라고 옮겼는데, ‘선의’의 오역이 아닌가 싶다. 쿠바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선 <실재계의 사막>이 <탈이데올로기>보다 조금 더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공통되는 결론은 이런 것이다. 

  

   
 

쿠바에서는 단념 그 자체가 혁명적인 사건에 대한 진실성의 증거로 경험되고 강요되는데, 그것을 정신분석에서는 거세의 논리라고 부른다. 쿠바의 전반적인 정치-이데올로기적 동일성은 거세(castration)에 대한 충성(fidelity)에 놓여 있다(지도자를 Fidel Castro라고 부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실재계의 사막>, 33~34쪽)

 
   

  

   
 

쿠바에서는 포기 승인장 자체가 혁명적 사건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증거물로 경험,부과되고 있는데, 이는 정신분석에서 거세의 논리라 불리는 것에 해당한다. 쿠바의 정치-이데올로기적 정체성 전체는 충실한 거세(fidelity of castration)에 기초하고 있다(그러므로 지도자의 이름이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라는 것은 하등 놀라운 일이 아니다!).(<탈이데올로기>, 17쪽)

 
   

 

‘단념’ 혹은 ‘포기 승인장’은 ‘renunciations’의 번역이다. 욕망의 ‘자제’나 ‘금욕’도 가리키는 단어다. 구체적으로 쿠바에서는 “폐기물과 계획된 진부화라는 자본주의적 논리(the capitalist logic of waste and planned obsolescence)”를 계속해서 영웅적으로 거부하고 있음을 염두에 둔 말이다. ‘계획된 진부화’ 혹은 ‘계획적 구식화’란 제품이 계획적으로 구식이 되도록 하는 걸 말한다. 제품의 평균 수명이 정해져 있어서, 가령 냉장고의 수명이 10년이라고 하면 사용자는 10년 정도 사용한 이후에 새 냉장고로 교체하는 식이다. 그렇게 제품을 폐기하고 제때 새로운 걸 구매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을 것이다. 너무 튼튼한 물건을 만들었다가 망했다는 기업들은 이런 ‘자본주의적 논리’를 간과했던 게 된다. 하지만 쿠바에서는 그렇게 쓰레기로 폐기처분됐을 만한 물건들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1950년대 미국산 자동차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캐나다산 노란색 스쿨버스가 돌아다닌다. 그래서 쿠바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역동성(dynamics)이 아니라 혁명적 정체(standstill)다. 벤야민이 말하는 ‘정체 변증법(Dialektik im Stillstand)’ 혹은 ‘정지 변증법’을 떠올릴 정도다.

이러한 포기와 단념이 쿠바에서는 ‘혁명적 사건에 대한 진정성’으로, 곧 ‘진짜’로 경험되며, 정신분석 용어를 갖다 쓰자면 이런 게 ‘거세의 논리’다. 즉 쿠바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은 ‘거세에 대한 충실성(fidelity to castration)’에 놓인다. ‘피델리티 투 카스트레이션’이란 말에서 음성적으로 쿠바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를 연상하게 되는 것은 우연의 일치이긴 하지만 절묘하다(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우리는 은연중 ‘거세’를 상기하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이러한 ‘충실성’의 이면에는 낡아가는 건물들과 함께 사회적 삶이 점점 더 타성과 무력증에 빠져든다는 문제가 있다. 역설적인 것은 이것이 혁명을 배반한 결과가 아니라 그 혁명적 사건에 오히려 충실한 결과라는 점이다. “이런 더렵혀진 타성이 혁명적인 숭고함의 ‘진실’이다.” 
 




이 대목에서 지젝은 쿠바 혁명의 특수성에 대해 각주로 보충하고 있는데, 그것은 “피델과 체 게바라라는 이원성”에 의해서 가장 잘 표현된다. “실제적인 지도자이고 국가의 최고 권위로서의 피델은 체와 대조되는데, 체는 국가 경영을 포기할 수 없었던 영원한 혁명적인 반항아가 된다.”(<실재계의 사막>, 35쪽) 국가 경영을 포기할 수 없었던 영원한 반항아?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데 그건 오역 때문이다. 원문은 “the eternal revolutionary rebel who could not resign himself to just running a state”이고, “단지 국가 경영을 위해 물러날 수는 없었던 영원한 혁명적 반항아”를 뜻한다. 거기에 덧붙는 지젝의 지적은 ‘소련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란 것이다. 물론 트로츠키가 혁명의 반역자로 숙청되지 않았더라면, 이란 가정하에서다(실제로는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했지만). 지젝이 상상하는 시나리오는 이런 것이다. 체와 피델 대신에 트로츠키와 스탈린을 대입한 시나리오다. 

 

   
 

1920년대 중반에 트로츠키는 다른 나라로 이주하면서 소련 시민권을 포기했는데, 그것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영원한 혁명을 선동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 뒤에 곧 죽고 말았는데, 그의 사후에 스탈린은 그를 숭배자로 격상시켰을 것이다.

 
   


그랬다면 오늘날 체 게바라의 티셔츠만큼이나 트로츠키의 티셔츠도 유행을 탔을지 모를 일이다……. 

 



댓글(0) 먼댓글(1)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실재에 대한 열정과 쿠바 혁명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9-02 11:52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8회를 발췌해놓는다. '실재에 대한 열정'이 어떤 의미인지 다루면서 그것이 쿠바 혁명의 경우엔 어떻게 나타나는지, 까지가 따라 읽은 대목이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세기>라는 책에서 20세기의 특징으로 ‘실재계에 대한 열정(passion for the Real)’을 지목한다. 불어본은 2005년, 영역본은 2007년에 나왔지만 아직 우리말 번역본은 나오지 않은 책이고, 지젝이 참고한 건 책
 
 
 


 

로버트 미지크의 <좌파들의 반항>(들녘, 2010)을 보면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나온다. 2005년에 독일에서 출간된 책인데, 슬라보예 지젝을 소위 ‘래디컬 시크(Radical Chic)’라고 보는 부정적인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독일 일간지 <차이트(Zeit)>의 문화부 편집장이자 중도파 지식인 외르크 라우가 막 출간된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2002)에 자극을 받아 그를 가리켜 ‘선량한 테러’를 꿈꾸는 위험한 인물이며 ‘겉멋만 부리는 영웅(Radical Chic)’이 되려 한다고 비난했다는 것이다.

‘겉멋만 부리는 영웅’이란 표현은 ‘시크’하지 못한 번역인데, 아마도 그냥 음역하는 게 나을 듯싶다. 이 말의 저작권자는 뉴욕의 저널리스트 톰 울프다. 1960년대 후반 미국 상류사회의 좌파 자유주의자가 블랙 팬더당(흑인 과격파) 기금 모집 파티를 열었을 때 그걸 비꼬는 의미로 처음 쓴 표현이라 한다. “한가한 부르주아지들과 아무런 의무감도 없이 반항이라는 몸짓으로 스릴을 즐기며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는 중산층 젊은이에 대한 조롱”을 담고 있다고. ‘반항의 이미지’를 과시하고 소비할 따름인데, 가장 비근한 예는 체 게바라의 얼굴이 인쇄된 티셔츠 같은 것이다. 

    

 

지젝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는 눈에 띄지 않는 걸로 보아 아직 ‘래디컬 시크’는 못 되는 듯싶지만(래디컬 시크가 되려 한다?), 좌파 상업주의 혹은 ‘유행 좌파’에 대해 미심쩍은 시선은 온당하다. 그들의 제스처가 기껏해야 공허한 반항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것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하지만 미지크는 이 문제를 라우보다 좀더 복잡하게 생각한다.   

 

   
 

체 게바라의 얼굴이 인쇄된 티셔츠를 입었다고 놀림감이 되는 젊은이들이 만일 바리케이드를 치고 방화를 한다면 좋게 받아들여질까? 무엇이 과연 공허하지 않은 몸짓일까? 그 몸짓은 대체 언제쯤 완벽하게 공허해질 수 있을까? 애석하게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차이트>와 <뉴욕 타임스>처럼 세계적인 유력지의 문화부에 근무하는 전문가들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유명인사들이 반항의 몸짓을 보이고 반항아들이 유명인사가 된다는 사실에 그저 놀랄 뿐이다.(13~14쪽)

 
   

 

그러니까 지젝과 같은 ‘과격한 급진주의자’가 유명인사가 되는 것도 한갓 유행에 불과하며 알고 보면 그 또한 자본주의 상품화에서 포섭된다는 비판은 절반만 옳다. 네 책이 많이 팔렸으니 너도 자본주의의 수혜자가 아니냐는 비판이다. 대개 그런 비판은 근엄한 온건 좌파에게서 나온다. “적지 않은 주류가 그를 허풍을 심하게 떨면서 공허한 제스처 속으로 빠지고 마는 래디컬 시크와 학문적으로 잘난 체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혐오감을 주는 인물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99쪽) 독일 지식 사회에서 지젝에 대한 숭배 못지않게 반감도 크다는 걸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미지크의 판단은 양가적이며 유보적인 것처럼 보인다. 다소 길지만, “그들은 지젝을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하시는 분들을 위해(이건 대타자의 시각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세 가지 단락을 인용해본다.   

 

   
 

지젝은 잘 나가는 급진 좌파들 가운데에서 놀라울 정도로 ‘이성적’이며, 테제의 소실점으로 빠져들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균형과 중도를 유지하는 사람으로 꼽힌다.

지젝이 세계화된 이론의 상류계층의 진귀한 현상 중의 하나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냉소가이며 광적이며 정치적으로 오류를 지닌 그는 한편으로 위대한 도덕주의자이기도 하다.

지젝은 진지한 사고의 물꼬를 터주기 위해 진지하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총명한 그가 종종 어릿광대짓을 하는 까닭은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지 않으려는 순간을 역으로 이용해서 원하는 바를 이끌어내는 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동의할 수 있는 구석이 많다. 특히 마지막 인용이 그러한데, 지젝의 ‘어릿광대짓’이 전술적이라는 것이다. 영어권에서는 ‘MTV 철학자’로 불린 그가 독일에서는 ‘래디컬 시크’로 비꼼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지젝은 그것을 ‘의도와 다르다’며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그러한 상황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하려 한다. 한 연극의 대사를 빌리자면,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자본주의를 몰아낼 수 없다”라고 말한다. “자본주의의 바깥은 없다!”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겠다. “반항의 제스처만 가지고는 우리에게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라는 엄포도 들린다. 체계(시스템)는 물론 막강하다. “시민들의 권리는 편협한 논리에 따른 생산 시스템, 말하자면 경제 체계에 편입된다는 이유 때문에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라는 점도 맞다. 하지만 아킬레스건이 없는 건 아니다. “어떠한 시스템이든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으려면 제반 조건들이 주체의 결정권을 장악해서는 안 된다”라는 점이 그러하다. 지젝이 노리는 바도 바로 그 점이다. 주체가 문제라는 것.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네오에겐 빨간 약과 파란 약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주체적 결단의 순간이 주어졌다. 시스템은 막강하지만 그 자체로 완벽하진 않다. 거꾸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시스템이라는 너무 비효율적이어서 제대로 작동할 수 없을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들고 있는 말벌(나나니벌)의 사례를 떠올려본다.   

 

   
 

말벌 암컷은 먹이를 쏘아서 마취시킨 후 집으로 끌고 온다. 그런 다음 그것을 밖에 놓아둔 채, 집안으로 들어가서 이상이 없는지를 확실하게 확인하고 나서 먹이를 끌고 들어가려고 다시 나타난다. 땅에 구멍을 파서 만든 집 속에 말벌이 들어가 있는 동안에, 실험자는 먹이를 말벌이 놓아둔 곳에서 몇 센티미터 정도 멀리 떼어놓는다. 말벌이 다시 나타나면 먹이가 없어진 것을 알아채고 그것을 재빨리 다시 찾는다. 그런 다음 그것을 끌고 와서 자기 집 입구에 다시 갖다 놓는다. 말벌이 집안을 조사한 지 몇 초밖에는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말벌의 행동 프로그램은 초기 단계로 다시 넘어간다. 말벌은 먹이를 굴 입구에 다시 놔두고 집안을 한 번 더 조사한다. 실험자는 싫증이 나서 그만둘 때까지 이 짓을 40번이나 되풀이했다. 말벌은 이미 40번이나 빨래를 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프로그램의 초기 단계로 다시 돌아가 자동세탁기처럼 행동했다.(<에덴 밖의 강>)

 
   

 

물론 재밌고 우스운 사례다. ‘자동세탁기’처럼 행동하는 이 말벌의 행동 프로그램이 엉성하고 뭔가 모자란 듯 보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는 이 말벌보다는 더 ‘똑똑하게’ 행동한다고 생각해서다. 하지만 말벌이 자기가 이미 ‘빨래’를 했다는 사실을 인식할 만큼의 인지 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그쪽으로 엄청난 ‘투자’를 해야 했을 것이고, 그만큼 다른 쪽을 희생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 선택이 말벌의 진화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성싶지 않다. 자기 집에 갖다 놓은 먹이가 40번이나 집 바깥으로 옮겨지는 ‘미스터리한’ 일이 자연계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터인데, 그에 대한 대응 매뉴얼을 미리 마련하는 것은 너무 소모적이고 낭비적이지 않겠는가. 하여 이러한 불비함, 혹은 불완전성이 오히려 본성과 시스템의 작동 조건이다. 그 불완전성의 효과가 주체이고 주체의 결정권(자유)이다. 그것은 오작동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체계의 일부이자 과잉이다.   

 

 

잠시 우회하였는데, 다시금 방향을 <실재계의 사막>으로 틀어본다. 1장의 제목은 ‘실재계에 대한 열정, 모사에 대한 열정’이라고 붙어 있는데, 이 대목은 지젝의 2003년 방한 강연을 담은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철학과현실사, 2005)의 제1강연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많은 부분이 겹친다. 그래서 같이 참조하면 도움이 된다. 이미 실재(계)에 대한 예비적 설명은 앞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실재계에 대한 열정’ 혹은 ‘실재의 열망’이 어떤 의미인지는 대충 짐작하실 수 있을 터이다. 그래도 지젝은 실재에 대한 열정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브레히트보터 에른스트 융어, 오시마 나기사 등의 많은 사례를 동원하고 있는데, 오시마 나기사는 <감각의 제국>의 감독으로서 오시마를 가리킨다. 두 연인의 성애 관계가 서로를 고문할 정도로 과격해지다가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컬트영화’였다. 이런 것이 말하자면 ‘실재에 대한 열정’이다. 그 궁극의 형상으로 지젝은 여성의 성기를 보여주는 포르노영화의 장면도 예시한다.   

 

   
 

가령 여자 성기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장면, 게다가 진입 중의 남자 성기의 머리에 설치된 소형 카메라의 눈으로 들여다보는 장면을 생각해보라.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지점에서는 어떤 전회가 일어난다. 욕망의 대상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게 되면, 성적 매혹은 구토로 전환된다. 고기 덩어리의 실재 앞에서 구토하게 되는 것이다.(<탈이데올로기>, 16쪽)

 
   

 

다른 대목의 번역은 <탈이데올로기>가 <실재계 사막>보다 수월하지만 이 대목만은 그렇지 않은데, 소형 카메라를 ‘남자 성기의 머리’에 설치했다고 옮겼기 때문이다(그런 설정이 엽기적이다). 그것은 실제 성기가 아니라 ‘모조 음경(dildo)’을 가리킨다. 과연 여성적인 것의 핵심에 무엇이 있을까라는 호기심에 그 ‘욕망의 대상’에 가까이 근접하지만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살의 실재계(the Real of the bare flesh)’일 뿐이다(‘고기 덩어리’도 좀 과도한 번역이다). 요는 9·11 테러, 곧 “근본주의적 테러라는 것도 실재계에 대한 열정의 표현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지는 다음 회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댓글(0) 먼댓글(1)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그들은 지젝을 어떻게 생각할까?"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31 20:14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7호를 발췌해 놓는다. 어젯밤에 시작을 했지만 대부분은 오늘 아침에 쓴 것이다. 외출에서 돌아와 저녁에서나 연재된 글을 읽었다. 지난주에 나온 <좌파들의 반항>(들녘, 2010)이란 책에 지젝에 대한 언급이 있어서 주말에 읽어봤는데, 그 내용이 서두를 차지하고 있다.      로버트 미지크의 <좌파들의 반항>(들녘, 2010)을 보면 흥미로운 에피소
 
 
 


 

<실재계 사막>의 서문에서 지젝이 자주 드는 예를 만날 수 있다(다큐 영화 <지젝!>에도 인용된다). 구동독의 농담인데, 이런 것이다. 한 노동자가 시베리아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는 친구한테 이렇게 미리 일러둔다. “모든 우편물이 검열될 테니까 암호를 정하자. 나한테 받은 편지가 파란 잉크로 쓰여 있으면 진실이고, 빨간 잉크로 쓰여 있으면 거짓이야.” 친구는 한 달 후에 파란 잉크로 쓰인 편지를 받게 된다. 시베리아의 친구는 모든 것이 풍부하고 쾌적하며 만족스럽다고 적는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훌륭해. 가게에는 상품들이 가득하고, 음식이 풍부하며, 아파트는 크고 난방도 적절해. 영화관에서는 서양 영화를 보여주고 관심을 끌 만한 아가씨도 많고…….” 그러고는 끝에 가서 한 가지를 덧붙인다. “단 하나 빨간 잉크만 없어.”

영화 <식스 센스> 마지막 장면의 반전이 연상되지 않는지? “단 하나 빨간 잉크만 없어”라는 마지막 멘트가 앞에 나오는 모든 메시지를 무효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란 잉크로 썼기 때문에 모든 것이 진실인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는 빨간 잉크로 쓰였어야 한다는 걸 암시함으로써 이 노동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의 진실을 친구에게 성공적으로 전달한다. 설사 “빨간 잉크를 사용할 수 있었을지라도, 사용할 수 없다는 거짓말이 이런 특수한 검열 상황에서 진실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라고 지젝은 덧붙인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이야말로 이데올로기 비판의 효과적인 모체(matrix)이며, 전체주의가 아닌 자유주의적 검열 상황에서, 곧 우리의 현실에서 더 효과적이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우리의 부자유를 표명할 수 있는 바로 그 언어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바로 이런 빨간 잉크의 결여가 의미하는 바는 오늘날 우리가 ‘테러와의 전쟁’이라든가,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 등등과 같은 현금의 갈등을 지칭하는 데 사용하는 모든 주요 용어들이 거짓된 용어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 상황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끔 허용하는 대신에 우리의 상황인식을 신비화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정확한 의미에서 우리의 ‘자유’ 그 자체는 우리의 좀더 내밀한 부자유를 가려버리고 지속시켜준다.(<실재계 사막>, 25쪽)

 
   

  

 

우리에게 ‘자유’란 말이 오히려 현실 인식을 오도하고 ‘내밀한 부자유’를 은폐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지적은 이미 G. K. 체스터턴(1874~1936)이 100년 전에 한 것이다. <브라운 신부> 시리즈로 유명한 영국 작가 체스터턴은 언론인이자 평론가, 그리고 기독교 변증가이기도 했다. 그는 <정통신앙(Orthodoxy)>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이단(Heretics)>이란 책과 짝을 이루고 있기에 <정통신앙>이라고 옮겼다. 우리말 번역본은 <오소독시>(이끌리오, 2003)이고, <실재계 사막>에서는 제목을 <정설>이라고 옮겼다).   

 

   
 

우리는 자유사상이 자유를 지켜내는 가장 안전한 보호물이라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현대 스타일로 말해서, 노예의 마음의 해방이 노예해방을 가로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가 자유롭게 되길 원하는지 어떤지 그에 대해 고민하라고 가르쳐라. 그러면 그는 스스로를 해방시키지 않을 것이다.

 
   

 

첫 문장은 “We may say broadly that free thought is the best of all safeguards against freedom”의 번역이라서 오해의 소지가 있다. “against freedom”을 옮길 때 “자유를 지켜내는”보다 “자유를 막아내는”이라고 표현해야 맞다. 번역본 <오소독시>에서는 이 대목을 “우리는 대체로 자유사상이 자유를 방지하는 안전장치 중에서 으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제대로 옮겼다. 여기서의 역설은 물론 ‘자유사상’이 실제적인 ‘자유’의 장애물이라는 주장에 놓인다. 자유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도록 하면 오히려 자신이 자유롭다는 환상을 갖게 돼 더 이상의 요구를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노예로 하여금 자신이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에 관해 고민하도록 가르쳐라. 그러면 그는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오소독시>, 204쪽)

 
   

 

여담을 덧붙이자면, ‘역설의 대가’로도 불리는 체스터턴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극작가 버나드 쇼(1856~1950)와 동시대인이었다. 체스터턴과 비교하자면 쇼는 ‘독설의 대가’로 명성이 높았는데, 어느 날 두 사람이 거리에서 만났다. 버나드 쇼는 말라깽이였고 체스터턴은 한 덩치 하는 뚱보여서 서로 대조적이었다. 체스터턴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선생님을 보면 지금 영국이 기근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알 것 같군요.” 쇼가 응수했다. “그렇지. 그러나 그 원인은 자네 때문이 아니겠나?” 두 사람이 서로 만만찮은 호적수였을 법하다. 참고로 국역본 <오소독시>는 현재 품절 상태인데, 교정해서 읽을 대목이 있어 막간에 지적해둔다. 서문에서 체스터턴이 자신의 책을 누가 읽어야 하는지를 밝히고 있는 대목이다.   

 

   
 

꽃밭의 꽃이나 저작집 한 권 속의 문장들, 정치적 사건과 젊은 날의 고통이 어떤 질서 체계 속에 함께 모여, 어떻게 그리스도교 정통신앙에 대한 어떤 확실한 신념을 낳았는지 알아가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그에 합당한 노동이 따르기 마련이다. 나는 이 책을 썼다. 그러므로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18쪽)

 
   

 

체스터턴은 이 책에서 자신이 어떻게 하여 정통 기독교인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데, 그런 과정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읽어봐도 좋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읽지 않겠다고? 인용문 후반부의 원문은 이렇다. “But there is in everything a reasonable division of labor. I have written the book, and nothing on earth would induce me to read it.” 번역문에서 생략된 건 ‘분업(division of labor)’이란 말이다. 모든 일에는 합당한 분업이라는 게 있고, 자신은 책을 썼으니 읽는 일에서는 면제된다는 논리가 거기에서 나온다. 체스터턴의 은근한 유머가 배여 있는 대목이다.

다시 자유의 문제로 돌아오면, 지젝은 체스터턴의 말이 우리의 ‘포스트모던’ 시대에, 스스로를 해체하고 의심하고 거리를 두려는 시대에 더없이 잘 들어맞는 게 아닌가라고 말한다. 가령 “생각하지 말고 복종하라!(Don't think, obey!)”라는 낡은 모토(이건 전형적인 군대식 모토인데)는 요즘 같으면 오히려 역효과만 낼 뿐이다(물론 아직도 이런 것이 통용되는, 강요되는 나라가 없지는 않다. 대낮에도 군대처럼 조인트 까고 까이는 나라 말이다). 이럴 때 사회적 예속 상태를 안전하게 지속시킬 수 있는 방책은 사상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다(다시 말하지만, 이런 건 언론의 자유가 뒷걸음치고 있는 한국보다는 미국 사회에 더 적합한 지적이다). 물론 그런 예속에서의 탈피, 곧 자유를 위한 투쟁을 의심하기 어려운 ‘도그마’를 참조해야 한다는 것이 체스터턴의 또 다른 역설적 주장이다. 정리하면, 체스터턴의 역설은 상호 연계적이며 양면적이다. (1) 자유사상은 진정한 자유의 장애물이다. (2) 진정한 자유는 도그마를 필요로 한다.   

 

 

할리우드의 스크루볼 코미디의 고전적인 장면들을 예로 들어보자. 여자가 남자 친구에게 묻는다. “나랑 결혼하고 싶어?” “아니!” “둘러대지 마! 솔직히 말해봐!” 여기서 유일하게 수용될 수 있는 ‘솔직한 대답(straight answer)’은 “응!”이다. 그밖에 모든 대답은 이 “응!”으로부터의 회피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된다. 여자는 이미 상황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라곤 하지만, 네가 날 사랑하는 걸 다 알아.” “너에겐 나 말고 다른 여자는 상상할 수도 없어.” “어서 용기를 내, 뭘 망설이는 거야!” 남자의 우물쭈물하는 태도가 자유주의적이라면 여자의 단호한 태도는 도그마적이며 근본주의적이다.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글쎄, 사랑은 하지만, 어떨 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자유주의적 사랑법이란 혹 이런 우유부단과 책임 회피를 미화한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민주주의냐 근본주의냐’라는 선택지는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는 게 지젝의 주장이다. 오늘날 이데올로기적으로 민주주의 대신에 근본주의를 선택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남한이냐 북한이냐’라는 선택지를 생각해보라). 하지만 문제는 ‘근본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 그 자체’이다. 자명한 듯 보이는 ‘자유주의적 의회민주주의’야말로 재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흠, 여기까지가 <실재계 사막>의 서문이다. ‘실재에 대한 열정’을 다루기로 했는데, 그건 내주로 넘겨야 할 듯하다. 이런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우물쭈물 둘러대지 말고, 어서 실재에 대해 말해봐!”  

 


댓글(1) 먼댓글(1) 좋아요(4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빨간 잉크와 체스터턴의 역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27 12:59 
    지난 주 이사로 원고들이 밀린 데다가 외부 일정들까지 겹쳐서 아주 긴 한 주를 보내고 있다. 점심을 먹고 이번주 마지막 원고에 들어가기 전에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6회를 발췌해놓는다. 부산에 내려가기 전 어제 새벽에 쓴 글이다.    <실재계 사막>의 서문에서 지젝이 자주 드는 예를 만날 수 있다(다큐영화 <지젝!>에도 인용된다). 구동독의 농담인데, 이런 것이다. 한 노동자가 시베리아
 
 
빠삐용 2010-10-04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유행하는 '공정한 사회'라는 말. 불공정을 은폐하는 공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