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반복해보자. “소위 근본주의자의 테러라는 것도 실재계에 대한 열정의 표현이 아닐까?”(<실재계의 사막>, 35쪽)라는 것이 지젝의 물음이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는 많은 사례들을 동원하여 따져본다. 지젝의 주된 방식이지만 안팎을 뒤집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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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더 마인호프>(2008)를 통해서 우리가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던 풍경이지만 지젝은 먼저 1970년대 초 독일의 적군파(Red Army Faction) 테러의 배경에 주목한다. 신좌파 학생운동이 붕괴된 뒤 곁가지로 빠져나온 것이 적군파였는데, 그들은 학생운동 실패의 교훈을 이렇게 짚었다. (1) 대중이 비정치적 소비주의에 너무 깊이 침윤돼 있다. (2) 통상적인 정치 교육과 의식화로는 그들을 각성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3) 따라서 그들을 이데올로기적 무감각과 최면 상태에서 흔들어 깨우려면 더 폭력적인 개입이 필요하다(슈퍼마켓 폭파 같은). 이와 동일한 논리가 오늘날의 근본주의적 테러에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까? 이 역시도 일상적 이데올로기의 세계에 푹 빠져 있는 서방 시민들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 아닐까?
여기서 지젝이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실재에 대한 열정’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역설이다. 그러한 열정은 그 정반대의 ‘연극적 스펙터클’에서 절정에 도달한다는 점이 역설적인데, 바로 그런 맥락에서 ‘실재에 대한 열정’은 ‘가상(semblance)에 대한 열정’이기도 하다(<실재계의 사막>에서는 ‘모사에 대한 열정’으로 옮겨졌다). 실재=가상? 그래서 역설이다. 지젝은 이렇게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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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실재계에 대한 열정이 극적인 실재계 효과의 순수한 외관으로 끝난다면, 그와는 정반대로 외관에 대한 ‘포스트모던’의 열정은 실재계에 대한 열정으로의 맹렬한 회귀로 끝나게 된다.(<실재계의 사막>,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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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에서 ‘외관’은 ‘semblance’의 번역이다. ‘외형’ ‘외관’ ‘시늉’ ‘가장’ ‘유사’ 등을 가리키는 단어다. 여기서는 <탈이데올로기>에 따라 ‘가상’으로 옮긴다. ‘실재계에 대한 열정’을 ‘실재에 대한 열정’으로 바꿔서 다시 쓰면, 지젝이 말하는 건 마치 거울상처럼 교차하는 두 가지 과정이다. 실재에 대한 열정은 실재의 스펙터클한 효과라는 순수한 가상으로 귀결되고, 가상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열정은 결국엔 실재에 대한 열정으로의 폭력적인 회귀로 종결된다. 간단히 말해서 실재는 가상으로, 가상은 실재로 귀결된다. 지젝이 드는 예는 ‘자해자들(cutters)’이다. 대개는 여성들인데, 면도날로 손목을 긋는다든가 혹은 기타 방식으로 자해를 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실재계의 사막>에서는 ‘자르는 자’로 옮겼고, 자해 행위를 ‘절단(cutting)’이라고 옮겼는데, 면도날로 손목을 잘라내는 경우는 드물지 않을까? 게다가 보통은 상습적으로 자해를 하는데, 아예 잘라내버린다면 다음엔 무얼 ‘절단’해야 할지 상상하기 어렵다. 여하튼 우리 주변에서도 면도날이나 담뱃불로 자해하는 경우를 아주 드물지는 않게 볼 수 있다. 그건 어떤 의도에서인가? ‘현실 자체’를 주장하기 위해서, 단언하기 위해서다. 거꾸로 말하면, 뭔가 사는 것 같지 않고, 현실이란 실감이 나지 않아서다. 자해는 그런 가운데 자아를 신체적 현실 안에 확고하게 근거지우기 위한 시도이다. “면도칼 자해자들에 대한 표준적인 보고에 따르면, 스스로 자해한 상처에서 붉고 따듯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나면 느낌이 다시 살아나고 현실에 확고히 뿌리내린 기분이라는 것이다.”(<탈이데올로기>, 19쪽) 물론 이러한 자해 행위는 병리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어떤 정상성을 회복하고, 완전한 정신병적 붕괴를 피하기 위한 병리적 시도이다. 즉 자해자는 정신병자가 아니라, 정신병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하는 자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해 현상과 상관적인 것이 바로 우리 주변 환경의 ‘가상화(virtualization)’이다. 실체가 제거됨으로써 현실이 점점 더 가상현실화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예컨대 카페인 없는 커피, 지방을 뺀 크림, 알코올 없는 맥주 등등. 섹스 없는 섹스로서 가상섹스(혹은 사이버섹스)도 여기에 포함할 수 있고, 전쟁 없는 전쟁, 곧 아군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는 전쟁에 대한 콜린 파월의 독트린도 추가할 수 있다(<실재계의 사막>에서 ‘아무런 인과 관계도 없는 전쟁’은 ‘아무런 아군 사상자도 없는 전쟁(warfare with no casualties)’의 오역이다). 거기에 정치를 행정으로 대체한 ‘정치 없는 정치’와 타자성이 제거된 타자 경험으로서 관용적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까지 ‘가상화’는 전면적이다. 여기서 ‘타자성이 제거된 타자의 경험(experience of the Other deprived of its Otherness)’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두 가지 번역본이 모두 잘못 옮기고 있어서 잠시 짚고 넘어간다. 원문과 그에 대한 두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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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dealized Other who dances fascinating dances and has an ecologically sound holistic approach to reality, while practices like wife beating remain out of sight.”
“매혹적인 춤을 추고 현실에 대해 생태학적으로 건전한 심신상관학설의 접근 방법을 보이면서도 안 보이는 곳에서는 아내 구타를 일삼고…… 그러한 이상화된 대타”(<실재계의 사막>, 38쪽)
“그 타자는 매혹적인 춤을 추고 생태학적으로 건전하고 유기체적인 접근법을 통해 현실에 접근하지만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 등과 같은 모습에는 눈감고 있는 이상화된 타자다.”(<탈이데올로기>,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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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전체는 ‘타자성(Otherness)’이란 말 뒤에 괄호로 묶여서 등장한다. 그 타자성이란 어떤 타자성인가? ‘매혹적인 춤’을 춘다고 할 때 먼저 떠올리게 되는 건 서남아시아나 동남아시아의 춤이다. 뭔가 이국적인 춤. 동아시아의 춤이어도 무방하겠다. 그리고 ‘holistic approach’를 ‘심신상관학설의 접근 방법’이나 ‘유기체적인 접근법’이라고 옮긴 건 좀 한정적이다. 전체론적 접근, 전일론적 접근을 뜻하는데, 분리적 접근과 반대되는 의미다. 몸과 마음을 분리시켜 사고하지 않으며, 부분과 전체를 분리시켜 사고하지 않는다는 것도 포함하지만. 간단한 예를 들자면 수지침 같은 것이다. 손바닥에 전신의 부위에 해당하는 대응점이 있어서 여기에 자극을 주어 질병을 치료한다는 원리다. 발 마사지도 마찬가지다. 손이나 발은 몸의 일부이지만 전체를 반영한다는 것이 ‘전일론적 접근’이다. 서양의 기계론적, 분리론적 접근과는 다르기에 낯설고 ‘타자적’이다. 이 정도 타자성에 대해서는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다.
하지만 그 타자성에도 불편하고 께름칙한 게 있다. ‘아내 구타’ 같은 관습이다. ‘practices like wife beating remain out of sight’는 ‘아내 구타 같은 관습’이 ‘이상화된 타자’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관습은 배제된다. “안 보이는 곳에서는 아내 구타를 일삼고…… 그러한 이상화된 대타”는 “안 보이는 곳에서는 아내 구타를 일삼는 이상화된 타자”라는 식으로 이해되는데, ‘아내 구타’와 ‘이상화된 타자’는 서로 충돌한다.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 등과 같은 모습에는 눈감고 있는 이상화된 타자다”라는 번역도 ‘wife beating’이 어떻게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로 둔갑하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습에 ‘눈감는’ 주체는 ‘이상화된 타자’가 아니라 ‘우리(서양인)’다.
‘아내 구타’는 빼놓고 매혹적인 춤과 전일론적 현실관 같은 타자성만을 수용하는 것, 그것이 ‘타자성 없는 타자’의 경험이다. 거기엔 카페인 없는 커피나 알코올 없는 맥주처럼, 우리식 표현으로 ‘앙꼬 없는 찐빵’처럼 뭔가 실체가 빠져 있다. 그렇듯 뭔가 빠진 현실을 일반화한 것이 ‘가상현실’이다. “그것은 실체를 잃어버린 현실 그 자체를 제공하고 있는데, 다시 말해 실재계의 견고하고 저항적인 핵심을 잃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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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현실이 점차 이러한 가상현실로 대체되면서 벌어지는 일은 ‘진짜 현실(real reality)’ 혹은 ‘실재적인 현실’이 일종의 가상(virtual entity)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대다수 대중에게 세계무역센터(WTC)의 폭발과 붕괴는 텔레비전 화면상의 사건으로 지각됐다. 기념비적 건물이 주저앉고 거대한 먼지구름 속에서 사람들이 달려 나오는 장면의 반복적인 재생은 이미 대재난 영화의 장면들을 떠올려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세계무역센터의 폭발에 대해서 그것이 “우리의 착각과 미망의 영역을 산산조각 낸 실재의 침입”이었다고 보는 ‘표준적 해석’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지젝은 말한다(<탈이데올로기>, 21쪽). 우리는 이미 제3세계의 참상에 대해서 그것이 텔레비전 화면상으로나 출현하는, 곧 우리의 사회적 현실과는 무관한 것으로 지각해왔다(혹은 우리의 경우라면 그들은 연예인들의 자원봉사라는 프레임 속에서, 곧 ‘선행’의 배경으로만 출현해왔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9·11에 대해서도 다르게 말할 수 있다. “2001년 9월 11일에 일어난 사건은 이 화면상의 공상적 출현이 우리의 현실로 들어왔다는 데 있다. 결코 현실이 우리의 이미지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지가 우리의 현실로 들어와서 우리의 현실을 산산조각 낸 것”이라고 말이다(<탈이데올로기>, 21쪽). 이것이 가상은 실재가 되고, 실재는 가상이 되는 ‘가상과 실재의 변증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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