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세기>라는 책에서 20세기의 특징으로 ‘실재계에 대한 열정(passion for the Real)’을 지목한다. 불어본은 2005년, 영역본은 2007년에 나왔지만 아직 우리말 번역본은 나오지 않았고, 지젝이 참고한 건 책의 초고다. 바디우의 주장을 지젝은 이렇게 정리한다.     

 

   
 

유토피아적인 혹은 ‘과학적인’ 프로젝트와 이상들, 즉 미래에 대한 계획들을 목표로 삼던 19세기와는 대조적으로, 20세기는 물(物) 그 자체의 전달에 그 목표를 두고 있다. 20세기의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것은 일상적인 사회적 현실과 대조되는 실재계의 직접적인 경험이었으며, 실재계라는 것은 현실의 현혹적인 껍질 층들을 벗겨낸 작업에 대해 지불해야 될 대가로서의 극단적인 폭력 속에 있다.(<실재계 사막>, 30쪽)

 
   

   
무슨 말인가? 19세기와 20세기는 뭔가 대조적이며, 20세기에 중요한 것은 ‘실재계의 직접적인 경험’이었다, 정도인가? 조금 더 읽어내기 위해 다른 번역도 참고해본다.     

  

   
 

19세기가 유토피아적이거나 ‘과학적인’ 기획과 이상들을 꿈꾸고 미래를 설계했다면, 그와는 반대로 20세기가 겨냥한 것은 사물 자체가 나타나도록 하고 새로운 질서에 대한 갈망을 직접적으로 실현하는 데 있다. 20세기를 규정하는 궁극적 경험은 실재에 대한 직접적 경험이다. 이때 실재는 일상의 사회적 현실에 대립하는 것이고, 이런 실재는 환멸을 낳는 현실의 층위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에 해당하는 극단적 폭력 안에서 경험된다.(<탈이데올로기>, 16쪽)

 
   

 

‘물(物)’과 ‘사물’로 옮겨진 단어는 독어 ‘das Ding’의 번역어인 ‘the thing’이다. <실재계의 사막>의 역주에는 “언어의 밖에 존재하고 무의식의 외부에 위치하여 상징화를 넘어서는 알 수 없는 x로서 칸트의 물자체와 매우 유사한 개념”이라고 설명돼 있다. 상징계 바깥에 있는 것이란 점에서 ‘실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겠다. 그러한 ‘사물’을 전달하거나, 갈망하던 새로운 질서(New Order)를 직접 실현하려고 한 것이 20세기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실재를 직접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일상의 사회적 현실(everyday social reality)’과 대립하는 어떤 것을 경험한다는 의미다.  

  

    

브레히트의 경험을 예로 들면, 그는 1953년 7월 극장에 가던 길에 노동자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진주한 소련 탱크들의 대열과 마주치게 됐다. 일상적으로 경험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현실과 직면하자, 당원이 아니었던 그는 생애 처음으로 공산당에 가입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미래에 대한 전망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이 ‘가혹한 폭력’이 어떤 진정성의 표지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실재’는 그렇게 기만적인 ‘현실’의 더께를 벗겨내는 폭력으로 경험된다.  

그런 경험의 맥락에서 보자면 ‘현실 대 실재’의 대립은 ‘가짜 대 진짜’의 대립이라고 할 만하다. 현실에서 우리는 각자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지만, 어느 순간 그런 건 다 연기일 뿐이고 진정성이 결여된 것으로 비칠 때가 있다. 대신 계급장 떼고 맞장 뜨는 것이 ‘진짜’처럼 여겨진다. 혹은 폭탄주를 돌려 마시고 바지는 걷어붙인 채 넥타이를 머리에 동여매는 수준에 도달해야 ‘진짜’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전장에서라면 일 대 일 육박전으로 맞붙는 것이야말로 ‘진짜’라고 고집할 수도 있다. 가볍게 입 맞추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서 아예 입술을 깨물어준다거나 긁어도 피가 나게 긁는 것 따위도 이런 ‘진짜 경험’의 목록에 올려놓을 수 있겠다. 이렇듯 ‘진짜’라고, 어떤 진정한 무엇의 경험이라고 간주되는 것, 그것이 바로 ‘실재의 열망’이고 ‘실재의 경험’이다. 지젝 자신의 경험담을 덧붙이자면 그는 1990년대 초에 슬로베니아 대선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 자신도 실재에 대한 열정을 느꼈다고 한다. 다른 게 아니라 정부에서 장관직이나 어떤 고위직을 맡게 된다면 단연코 내무장관이나 정보기관장을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거야 물론 직접적인 물리력을 동원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리야말로 경찰이나 요원들을 거느린 권력 실세가 아닌가. 그에 비하면 문화부 장관이나 교육부 장관, 과학기술부 장관이니 하는 직책은 우스꽝스러울뿐더러 일고의 가치도 없는 자리다. 지젝의 그런 바람이 혹 현실화했더라면 슬로베니아 국민들은 지젝식 ‘공포정치’를 경험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젝은 실재에 대한 이러한 열정의 또 다른 예를 쿠바 혁명에서 찾는다. “사회적 현실에서 ‘물자 공급’과 대조되는 ‘실재계에 대한 열정’의 또 다른 변형은 쿠바 혁명에서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다.”(<실재계 사막>, 31쪽) 이 대목에서 ‘물자 공급’은 ‘servicing of goods’의 번역이다. <탈이데올로기>에서는 ‘선의(善意)의 봉사’라고 옮겼는데, ‘선의’의 오역이 아닌가 싶다. 쿠바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선 <실재계의 사막>이 <탈이데올로기>보다 조금 더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공통되는 결론은 이런 것이다. 

  

   
 

쿠바에서는 단념 그 자체가 혁명적인 사건에 대한 진실성의 증거로 경험되고 강요되는데, 그것을 정신분석에서는 거세의 논리라고 부른다. 쿠바의 전반적인 정치-이데올로기적 동일성은 거세(castration)에 대한 충성(fidelity)에 놓여 있다(지도자를 Fidel Castro라고 부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실재계의 사막>, 33~34쪽)

 
   

  

   
 

쿠바에서는 포기 승인장 자체가 혁명적 사건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증거물로 경험,부과되고 있는데, 이는 정신분석에서 거세의 논리라 불리는 것에 해당한다. 쿠바의 정치-이데올로기적 정체성 전체는 충실한 거세(fidelity of castration)에 기초하고 있다(그러므로 지도자의 이름이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라는 것은 하등 놀라운 일이 아니다!).(<탈이데올로기>, 17쪽)

 
   

 

‘단념’ 혹은 ‘포기 승인장’은 ‘renunciations’의 번역이다. 욕망의 ‘자제’나 ‘금욕’도 가리키는 단어다. 구체적으로 쿠바에서는 “폐기물과 계획된 진부화라는 자본주의적 논리(the capitalist logic of waste and planned obsolescence)”를 계속해서 영웅적으로 거부하고 있음을 염두에 둔 말이다. ‘계획된 진부화’ 혹은 ‘계획적 구식화’란 제품이 계획적으로 구식이 되도록 하는 걸 말한다. 제품의 평균 수명이 정해져 있어서, 가령 냉장고의 수명이 10년이라고 하면 사용자는 10년 정도 사용한 이후에 새 냉장고로 교체하는 식이다. 그렇게 제품을 폐기하고 제때 새로운 걸 구매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을 것이다. 너무 튼튼한 물건을 만들었다가 망했다는 기업들은 이런 ‘자본주의적 논리’를 간과했던 게 된다. 하지만 쿠바에서는 그렇게 쓰레기로 폐기처분됐을 만한 물건들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1950년대 미국산 자동차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캐나다산 노란색 스쿨버스가 돌아다닌다. 그래서 쿠바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역동성(dynamics)이 아니라 혁명적 정체(standstill)다. 벤야민이 말하는 ‘정체 변증법(Dialektik im Stillstand)’ 혹은 ‘정지 변증법’을 떠올릴 정도다.

이러한 포기와 단념이 쿠바에서는 ‘혁명적 사건에 대한 진정성’으로, 곧 ‘진짜’로 경험되며, 정신분석 용어를 갖다 쓰자면 이런 게 ‘거세의 논리’다. 즉 쿠바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은 ‘거세에 대한 충실성(fidelity to castration)’에 놓인다. ‘피델리티 투 카스트레이션’이란 말에서 음성적으로 쿠바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를 연상하게 되는 것은 우연의 일치이긴 하지만 절묘하다(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우리는 은연중 ‘거세’를 상기하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이러한 ‘충실성’의 이면에는 낡아가는 건물들과 함께 사회적 삶이 점점 더 타성과 무력증에 빠져든다는 문제가 있다. 역설적인 것은 이것이 혁명을 배반한 결과가 아니라 그 혁명적 사건에 오히려 충실한 결과라는 점이다. “이런 더렵혀진 타성이 혁명적인 숭고함의 ‘진실’이다.” 
 




이 대목에서 지젝은 쿠바 혁명의 특수성에 대해 각주로 보충하고 있는데, 그것은 “피델과 체 게바라라는 이원성”에 의해서 가장 잘 표현된다. “실제적인 지도자이고 국가의 최고 권위로서의 피델은 체와 대조되는데, 체는 국가 경영을 포기할 수 없었던 영원한 혁명적인 반항아가 된다.”(<실재계의 사막>, 35쪽) 국가 경영을 포기할 수 없었던 영원한 반항아?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데 그건 오역 때문이다. 원문은 “the eternal revolutionary rebel who could not resign himself to just running a state”이고, “단지 국가 경영을 위해 물러날 수는 없었던 영원한 혁명적 반항아”를 뜻한다. 거기에 덧붙는 지젝의 지적은 ‘소련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란 것이다. 물론 트로츠키가 혁명의 반역자로 숙청되지 않았더라면, 이란 가정하에서다(실제로는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했지만). 지젝이 상상하는 시나리오는 이런 것이다. 체와 피델 대신에 트로츠키와 스탈린을 대입한 시나리오다. 

 

   
 

1920년대 중반에 트로츠키는 다른 나라로 이주하면서 소련 시민권을 포기했는데, 그것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영원한 혁명을 선동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 뒤에 곧 죽고 말았는데, 그의 사후에 스탈린은 그를 숭배자로 격상시켰을 것이다.

 
   


그랬다면 오늘날 체 게바라의 티셔츠만큼이나 트로츠키의 티셔츠도 유행을 탔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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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실재에 대한 열정과 쿠바 혁명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9-02 11:52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8회를 발췌해놓는다. '실재에 대한 열정'이 어떤 의미인지 다루면서 그것이 쿠바 혁명의 경우엔 어떻게 나타나는지, 까지가 따라 읽은 대목이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세기>라는 책에서 20세기의 특징으로 ‘실재계에 대한 열정(passion for the Real)’을 지목한다. 불어본은 2005년, 영역본은 2007년에 나왔지만 아직 우리말 번역본은 나오지 않은 책이고, 지젝이 참고한 건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