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에서 아프간 ‘지역주민’이 호모 사케르의 형상이라는 대목까지 읽었다. 그 궁극적 이미지가 아프가니스탄의 하늘을 날면서 무엇을 떨어뜨릴지(폭탄일지 구호식량일지) 알 수 없는 미군기였다. 거기서 폭탄과 구호식량은 서로 대립적이면서 동일한 것이다. 그것이 소위 ‘대립물의 일치’ 혹은 ‘대립물의 통일성’이다. 그리고 2002년 4월 노르웨이의 한 의원이 조지 부시와 토니 블레어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제안했을 때 그러한 ‘대립물의 일치’는 정점에 도달한 것 아니냐고 지젝은 꼬집는다. 대테러 전쟁의 주동자 두 사람에게 노벨평화상을 주어야 한다는 제안은 “전쟁이 평화다”라는 조지 오웰식의 모토(<1984년>)가 실현된 게 아니냐는 것이다.  

 

 

 

상황을 고약하게 만드는 것은 대테러 전쟁의 ‘부수적 손상’이 아프간 난민이라는 점. 재난적인 식량난과 극도로 취약해진 보건이 이들 난민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탈레반 소탕을 위한 군사 행동이 ‘인도주의적 원조’의 안전한 배달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된다. 전쟁(군사 행동)과 인도주의적 원조는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것이다. 여기선 동일한 개입이 두 가지 수준에서 동시에 기능한다.   

 

   
 

탈레반 체제의 전복은 탈레반에 의해 압박받고 있는 아프간 국민들을 도와주는 작전의 일부로 제시되며, 토니 블레어가 말했듯이 우리는 아마도 식량의 안전한 수송과 분배를 위해 탈레반을 폭격해야 할 것이다.(<실재계 사막>, 170쪽)

 
   

 

‘호모 사케르로서 아프간 난민’이란 문제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는 무엇일까? 다시금 인권(human rights)과 시민권(rights of a citizen) 사이의 구분을 상기해야 하는 것일까?(난민은 같은 인류로서 인권은 갖지만 시민권은 박탈당한 존재다.) 하지만 지젝은 호모 사케르라는 문제의식에서 보다 급진적인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만일 진정한 문제가 제외된 자들의 허약한 신분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우리 모두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제외되어’ 있다는 사실이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즉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영(zero)’ 위치가 생체정치의 대상이라는 의미로 제외되고, 가능한 참정권과 시민권이 생체정치적 전략에 대한 고려에 의해 부차적인 제스처로 우리에게 부여된다는 그런 의미로 제외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후(後)정치학’이란 개념의 최종적인 결과라면 어찌 될 것인가? (<실재계 사막>, 171쪽)

 
   

 

즉 우리가 모두가 기본적인 수준에서 생체정치의 대상이라면, 즉 ‘벌거벗은 생명’이라면 호모 사케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호모 사케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민과 달리 우리에겐 참정권과 시민권이 주어져 있지 않느냐고? 맞다. 하지만 우리의 참정권과 시민권이라는 것이 생체정치의 전략적 고려에 따른 것이라면, 그래서 ‘부차적인 제스처’에 불과한 것이라면? 말하자면 일종의 ‘생색내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선거철에만 잠시 ‘주권자’ 대우를 받는 우리의 처지를 생각해보라!). ‘후정치학’은 ‘post-politics’의 번역인데, 보통 ‘탈정치’로 옮긴다. ‘정치 이후’란 뜻이다. 정치적 행위나 정치 과정을 번거로운 것으로 간주하고 ‘행정’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탈정치 시대’의 특징이다(우리의 경우로 치면, 이명박 정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다). 국민이 ‘주권자’가 아니라 복리·후생의 대상으로만 간주되는 것, 그것이 탈정치의 결과다.

아감벤이 <호모 사케르>에서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생체권력 혹은 생명관리권력의 궁극적 표현은 20세기의 강제수용소다. “여기서 근본적인 선택은 아도르노와 하버마스 가운데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아도르노’는 물론 ‘계몽의 변증법’을 주장하는, 즉 근대적 합리성이 결국 아우슈비츠로 귀결된 게 아닌가라고 근심하는 아도르노이고, ‘하버마스’는 아우슈비츠란 병리적 일탈일 뿐이고 아직 근대성의 기획이 미완인 상태로 남아 있는 게 문제라고 보는 하버마스다. 각각의 선택지가 보여주는 근대상은 어떤 것인가?  

 

 

먼저 아도르노: “(정치적인) 자유의 현대식 프로젝트는 가짜 모습일까? 그런데 그 가짜 모습의 ‘진실’은 후기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에 몰두함으로써 자율성의 마지막 한 조각마저 상실해버린 주체들에 의해 구체화된다.”(<실재계 사막>, 172쪽) 원문은 “is the modern project of (political) freedom a false appearance whose ‘truth’ is embodied by subjects who lost the last shred of autonomy in their immersion into the late-capitalist ‘administered world’.”이다. 아도르노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administered world’는 보통 ‘관리되는 세계’라고 옮긴다. 전체를 다시 옮기면, “정치적 자유라는 근대성의 기획은 거짓 외관일 뿐이고 그 ‘진리’는 후기 자본주의의 ‘관리되는 세계’에 침윤되어 자신의 자율성을 모두 상실한 주체들에 구현돼 있는 것 아닌가?” 즉 아도르노가 보기에 정치적 자유의 확장이라는 근대의 기획은 허울일 뿐이고 결과적으로 얻게 된 것은 자신의 자율성을 상실하고 ‘관리되는 세계’의 대상으로 전락한 주체들, 혹은 국민들(subjects)들이다.  

 

 

이어서 하버마스: “‘전체주의적’ 현상은 단지 현대성의 정치적인 프로젝트가 아직 끝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증언할 뿐인가?”(<실재계 사막>, 172쪽) 이 대목도 원문은 “do 'totalitarian' phenomena merely bear witness to the fact that the political project of modernity remains unfinished?”이다. 여기서 ‘전체주의’ 현상은 나치즘/파시즘을 가리킨다. 그것은 병리적 일탈에 불과하고, 오히려 근대성의 기획이 아직 미완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것 아니냐는 것이 하버마스의 관점이다.

두 사람 모두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이지만 근대(성)의 기획을 바라보는 관점은 ‘비관’과 ‘낙관’으로 나뉘며 서로 대척적이다. 하지만 이 두 입장이 “동일한 외상적 특징의 억압/배제에 기반을 두는 동전의 앞뒷면이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이 지젝의 문제의식이다. 어떤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바로 주관적 자유의 경험이 규율 메커니즘에 복종하는 외양의 형태가 되는 ‘지배되는 세계’라는 ‘전체주의적’ 개념은 결국 개인의 자율성과 자유의 ‘공식적인’ 대중 이데올로기(그리고 실천)의 역겨운 환상적 이면이 된다.(<실재계 사막>, 172~173쪽)

 
   

 

‘역겨운’은 지젝이 자주 쓰는 단어인 ‘obscene’의 번역이며 대개 ‘외설적’이라고 옮겨진다. 공식적인 이데올로기상으론 우리는 자율적이며 자유롭다. 하지만 ‘관리되는 세계’에서 우리의 주관적 자유 경험은 오직 우리가 규율 체계에 예속될 때 얻어진다. 즉 실제로는 자유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여기서 전체주의 사회와 ‘관리되는 사회’는 그다지 먼 거리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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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체정치’는 ‘biopolitics’의 번역어인데, 국내에선 ‘생명정치’, ‘삶정치’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제 이어지는 것은 이 생체정치의 변화와 실상이다. 지젝은 대테러 전쟁과 관련하여 두 가지 태도를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명백하게 인종 차별적인 ‘기독교 근본주의’다. 번역본에서는 ‘서양식 방어(defence of the West)’라고 옮겨졌는데, ‘서양 문명에 대한 방어’를 뜻한다. 물론 무슬림의 위협으로부터의 방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ism)’의 관용적 자유주의 버전이다. 이것이 의도하는 바는 근본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무슬림들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서양을 무슬림 문명으로부터 방어하는 것과 무슬림을 무슬림 근본주의로부터 보호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서로 다르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차이만큼 중요한 것이 그들 간의 공통점이라고 지젝은 지적한다. 둘 다 ‘자기 파괴적 변증법’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자기 파괴의 변증법이란, 삶에 위협적인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결국엔 진정한 삶 자체를 제거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도끼로 제 발등 찍기 같은 것이다.

두 가지 태도가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공시적일 뿐만 아니라 통시적이기도 하다. ‘기독교 근본주의’에서 ‘관용적 자유주의’로 변화해왔다는 말이다. 이것이 말하자면 생체정치의 물밑 변화(underlying shift)이다. 몇 가지 정치적 발언, 혹은 프로이트적 실언(말실수)은 이런 배경하에서 살펴볼 수 있다고 말한다. 실언의 대표 주자는 미국의 전 국방장관 럼즈펠드(럼스펠드)다. 그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폭격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음 그건, 가능하면 많은 수의 탈레반 병사들과 알카에다 요원들을 죽이는 겁니다.” 당연한 것인가?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군사작전의 정상적인 목표는 전쟁에 이기고, 적을 항복시키는 것이며, 대략파괴조차도 궁극적으로는 이런 목적의 한 가지 수단”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전쟁의 목표는 승리에 있는 것이지, 대량 살상에 있지 않다. 그러니 럼즈펄드의 발언은 적어도 ‘공식석상’에서는 수용하기 곤란한 ‘솔직한’ 발언이다.  

 

   
 

럼즈펠드의 솔직한 진술이 문제가 되는 것은 관타나모에 있는 아프간 포로들의 불확실한 신분과 같은 유사한 현상에서처럼 그들이 온전한 시민과 호모 사케르와의 사이에서 보는 아감벤의 구분을 직접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호모 사케르는 그 혹은 그녀가 한 인간으로서 살아 있더라도 국가의 일원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165~166쪽)

 
   

 

 

요컨대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된 아프간 포로들과 마찬가지로 탈레반이나 알케에다는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 사케르’ 형상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비록 인간으로 살아 있다곤 하더라도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으로는 간주되지 않는 ‘열외인간’이 호모 사케르다. 가령 2001년 미국의 탈레반 소탕 작전 시 체포된 ‘미국인 탈레반’ 존 워커의 신병은 어떻게 처리돼야 하나? ‘미국인’이니까 미국의 교도소에 수감되어야 하나, 아니면 ‘탈레반’이니까 탈레반 수용소에 수용되어야 하나? 그는 ‘합법적 범죄자(lawful criminal)’인가, 아니면 ‘비합법적 전투원(unlawful comba-tant)’인가?

‘비합법적 전투원’이란 말이 단순히 범죄적 테러 활동으로 인해 법적 보호를 박탈당한다는 의미만 갖는 것은 아니다. 미국 시민이 중대 범죄를 저지를 경우 그는 ‘합법적 범죄자’가 되며 법적인 처분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범죄자’와 ‘비범죄자’의 구분은 ‘합법적 범죄자’와 ‘비합법적 범죄자’의 구분과 일치하지 않는다. ‘비합법적 범죄자’는 주로 불법 체류자를 가리키는 프랑스어 ‘상파피에(서류가 없는 사람)’에 상응한다. 즉 법적 보호의 바깥에 놓인 자, 배제된 자를 뜻한다. 탈레반 테러리스트가 속하는 것은 바로 이 범주이다. 어디 그들뿐인가.  

 

   
 

제외된 사람은 테러리스트뿐만 아니라 인도주의적인 원조를 받는 쪽에 서 있는 사람들(르완다인, 보스니아인, 아프간인……)이기도 하다. 오늘날 호모 사케르는 인도주의적 생체정치의 특권을 받은 대상이다. 즉 그는 매우 생색내는 방식의 배려를 받고 있어서 인간성 전체를 박탈당하고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도주의적인 원조를 전달하는 강제수용소와 난민구호소가 동일한 사회-논리적 형식의 모체에서 ‘인간적’과 ‘비인간적’인 두 얼굴을 지닌다는 패러독스를 인식해야 한다.(<실재계 사막>, 165~166쪽)

 
   

 

여기서 요점은 얼핏 모순적으로 보이는 생체정치의 ‘두 얼굴’, 인간적인 얼굴과 비인간적인 얼굴이다(중요한 것은 이 둘이 같은 얼굴의 서로 다른 표정일 뿐이라는 점이다). 한편으론 탈레반 포로들을 배제․격리 수용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난민들에게 ‘인도주의적’ 원조를 베풀기도 한다. 공통적인 것은 두 경우 모두 ‘온전한 인간성(full humanity)’을 박탈당했다는 것. 그런 점에서 ‘강제수용소’와 ‘난민수용소’는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결국 하나다. 이 둘은 변증법적으로 통일된다.  

 

 

지젝은 에른스트 루비치의 고전영화 <사느냐 죽느냐(To Be or Not to Be)>에 등장하는 잔인한 농담이 이 두 경우에 모두 적용된다고 말한다. 폴란드에 건설된 독일의 강제수용소(concentration camps)에 대해 질문을 받자 수용소측은 이렇게 답한다. “우리는 정신집중(concentration)을 하고 폴란드인은 캠핑(camping)을 하고 있어요.”(<실재계 사막>, 167쪽) ‘정신집중’이란 말은 어색한데, ‘concentration camp(집결 캠프)’란 말을 분절해서 농담을 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집결시키고 폴란드인은 캠핑하는 거죠” 정도가 아닐까. 자기들은 폴란드 유대인들이 집단 캠핑을 하도록 잔뜩 모아놓기만 했다는 의미다. 법적 격리 대상이든 인도적 보호 대상이든, 두 경우 모두 주민은 생체정치의 대상으로 환원된다.  

 

   
 

아마도 ‘지역주민’을 호모 사케르로 취급하는 궁극적인 이미지는 아프가니스탄 하늘 위를 날아가는 미군 전투기의 이미지가 될 것이다. 즉 그것이 무엇을 떨어뜨릴지, 폭탄일지 혹은 음식 덩어리일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실재계 사막>, 169~170쪽)

 
   

 

요컨대 ‘폭탄이냐 구호식량이냐’는 ‘폭탄이나 구호식량이나’로 바꿔 읽을 수 있다. 그것이 오늘날의 생체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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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삶의 과잉이다. 즉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걸 만한 그 어떤 것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오로지 우리가 기꺼이 이런 위험을 감당할 때에만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163쪽)에서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뭔가 떠오르는 바가 없으신지? 혹 충무공 어록에 나오는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은 어떤가? “저만 살려고 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살 것이다.” 보통 그렇게 새기는 말씀이다. 병사들을 격려하고 독려하는 장군의 결기가 느껴진다. 거기서 ‘죽기를 각오하기’가 ‘삶의 과잉’이다. 삶을 내거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니 ‘과잉’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과잉이 없다면, 우리는 진정 살아 있는 게 아닐뿐더러 삶 자체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저만 살려고 하는 자들처럼. 충무공의 어록을 ‘용기의 역설’로 읽는다면, 지젝이 참조하는 체스터턴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적들에게 둘러싸인 어느 병사가 만일 탈출구를 열려고 한다면 살려고 하는 강렬한 욕망에다가 죽음에 대한 이상스런 무관심을 결합시킬 필요가 있다. 그가 단지 삶에 매달리기만 해서는 안 되는데, 그렇게 되면 그는 겁쟁이가 되어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죽음만을 기다려서도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살자가 되어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삶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의 정신으로 자신의 삶을 구해야 한다. 즉 그는 삶을 물처럼 욕망해야 하고 죽음을 포도주처럼 마셔야 한다.”(<실재계 사막>, 163~164쪽)

 
   

 

이 인용에 덧붙인 지젝의 설명은 이렇다. “최후의 인간들의 ‘후기 형이상학적’ 생존주의 자세는 결국 그 자신의 그림자처럼 질질 끌고 가는 삶의 애처로운 광경이 되고 만다.” ‘최후의 인간’은 따로 강조돼 있지 않은데, 니체가 말하는 ‘최후의 인간(the Last Men)’을 가리킨다. 루쉰은 이것을 ‘말인(末人)’이라고 옮겼는데, ‘초인’에 대응하는 말로는 더 유력해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가 보여주는 ‘최후의 인간’은 어떤 모습이었나?  

 

   
 

사랑이 무엇인가? 창조가 무엇인가? 동경이 무엇인가? 별이 무엇인가”―최후의 인간은 이렇게 묻고서 눈을 껌벅인다. 그 순간 대지는 작아지고, 대지 위에는 모든 것을 작아지게 만드는 최후의 인간이 뛰어다닐 것이다. 그 종족은 벼룩처럼 뿌리 뽑기 어려워서, 최후의 인간은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을 것이다. “우리는 행복을 고안해냈다.”―최후의 인간은 이렇게 말하고 눈을 껌벅인다.(펭귄클래식판, 63쪽)

 
   

 

사랑이 무엇이고, 창조가 무엇이며 동경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최후의 인간’이 바로 ‘형이상학 이후’의 인간이다. ‘후기 형이상학적’이라고 옮겨진 ‘post-metaphysical’이란 말은 ‘형이상학 이후’나 ‘탈형이상학적’이라고 옮겨지는 게 더 적절하다. ‘형이상학’이란 말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 ‘너머’에 대한 관심이고 동경이다. 그 형이상학적 관심은 주로 ‘그것은 무엇인가(What is it)?’라는 질문 형식으로 표현돼왔다. ‘사랑이 무엇인가? 창조가 무엇인가? 동경이 무엇인가? 별이 무엇인가?’ 같은 식의 물음이다. 요점은 이런 물음을 최후의 인간도 던진다는 게 아니라 이런 물음을 던지면서 그가 ‘눈을 껌벅인다’는 데 있다. 그건 그 물음들 자체가 왜 존재하며 또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다는 껌벅임이다.

그런 껌벅임과 함께 ‘대지는 작아진다’고 니체는 적었다. 세상에 궁금한 게 없으니, 대지도 작아질 수밖에. 요컨대, ‘최후의 인간’은 ‘눈을 껌벅이는 인간’이다. 이 ‘눈을 껌벅이는 인간’의 장기는 생존이다. 그들은 ‘생존주의’를 섬긴다(“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게 생존주의의 표어다. 이 표어는 어떠한 대의도 부정하는 한국식 허무주의를 집약하고 있지 않은지?). 그래서 결국은 벼룩만큼이나 오래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때의 삶은 ‘벼룩 같은 삶’이며 ‘산 것 같지 않은 삶’, 곧 ‘죽음 속의 삶’이다. 하지만 ‘눈을 껌벅이는 인간’은 그게 또 ‘행복’이라고 믿을지도 모른다. 이때의 행복은 ‘저만 살려고 하는 자’의 행복이다.

다시 지젝으로 돌아오면, “우리가 사형제도에 관한 오늘날 고조되고 있는 폐기운동을 이해해하는 것은 이런 지평에서이다. 우리는 이런 폐기를 지지하는 숨겨진 ‘생체정치’를 분간할 수 있어야 한다.” ‘사형제 폐기운동’은 ‘사형제 폐지운동’이다. 지젝은 사형제 폐지에 반대하는 쪽인데, 그것은 국가가 그런 처벌권을 가질 수 있다고 동의해서가 아니라 생명이 최고의 가치라는 ‘생체정치(biopolitics)’적 관점에 반대해서다.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믿음은 ‘그러므로 생명은 관리돼야 한다’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하는 것이 생명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생명관리권력(bio-power)’이다. 그렇게 관리․통제되는 삶은 어떤 모습의 삶인가?  

 

   
 

‘삶의 신성함’에 기식하고 있는 초월적인 세력의 위협에 대항하여 그를 방어하면서 그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결국에 우리가 고통 없이 안전하게, 그리고 지루하게 살아가게 될 ‘관리된’ 세상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 그 세상에서는 바로 그의 공인된 목표―장수하고 유쾌한 삶―를 위해 모든 현실적인 쾌락들이 금지되거나 엄격히 통제된다(흡연, 약물, 음식……).(<실재계 사막>, 164쪽)

 
   

 

‘초월적인 세력(transcendent powers)’은 개인․개체 단위를 넘어서는 힘이면서 ‘대의(Cause)’처럼 생명을 초과하는 ‘초월적 가치’를 뜻하는 것으로 읽어도 좋겠다. 그러한 ‘초월적 힘’에 대항하여 생명의 지고성을 옹호하고자 할 때 우리가 봉착하게 되는 것은 어떠한 위협이나 위험, 모험으로부터도 ‘면제된’ 삶이다. 혹은 면역된 삶. ‘장수하고 유쾌한 삶(a long and pleasurable life)’을 위해서 흡연, 마약, 음식 등은 모두 엄격하게 금지되거나 통제돼야 한다. 이른바 ‘웰빙(Well-being)’의 삶이다. 우리말로 ‘참살이’라고도 옮기는데, 절반 정도만 동의할 수 있다. ‘참’이 일반적으로는 ‘real’의 번역이기도 하다면, ‘웰’과 ‘참’은 서로 모순적이고 대립적이지 않을까. 하지만 ‘빙’의 번역어로 ‘살이’는 어울리는 듯싶다. ‘삶’이 아닌 ‘살이’. 명사 ‘삶’처럼 독립적이지 않고 접사로서만 기생하는 ‘살이’.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죽음에 대한 이런 생존주의의 태도의 가장 최근의 사례가 되는데, 거기에는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시킬 수 없는 무의미한 대량학살로서 전쟁에 대한 ‘탈신화화’가 제시되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우리 편에는 사상자 없음’이란 콜린 파월의 군사원리에 대해 가장 가능성이 큰 정당화를 제공해주고 있다.(<실재계 사막>, 165쪽)

 
   

 

물론 ‘최근’이라고 하기엔 좀 오래된 사례이긴 하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는 전쟁이 무의미한 학살일 뿐이라는 관점을 내비침으로써 전쟁에 관한 신화를 벗겨냈다는 것이다. 곧 전쟁에서 숭고한 죽음 따위는 없다는 것. 그리고 여기에 상응하는 것이 미국의 전 국무장관 콜린 파월의 군사독트린이다. 미국이 해외 분쟁에 개입할 경우 ‘압도적인 군사력’을 동원해 최단 기간에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아군 희생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독트린이었다. 하지만 적군은? 파월의 독트린은 ‘저만 살려고 하는 자’의 운명을 피해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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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옹 2010-12-08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삶을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삶의 과잉이다, 라는 문장을 읽고 있으려니 문득 '티핑 포인트'라는 단어가 떠오르네요. 삶에 티핑 포인트가 없다면, 삶에 과잉의 지점이 없다면, 삶이라 일컬어지는 무엇은 죽음의 영역으로 가라앉고 마는, 아니 죽음의 영역에서 솟아오르지 못하는 게 아닌지... 로쟈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지젝이 이데올로기의 허위적인 종언 이후의 ‘단순한 삶(mere life)’을 ‘진정한 삶(real life)’과 대비시킨다. ‘단순한 삶’은 ‘간소한 삶(simple life)’이 아니라 ‘그저 그런 삶’이다. 자신의 삶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하는 삶이며, 자신의 기득권이 아무 탈 없이 그대로 자자손손 보존되기를 매주 기도하는 삶이다. 그것의 정치적 버전이 자유민주주의인바, 지젝이 보기에 자유민주주의의 최대 관심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마하는 일이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는 무-사건의 당이다(Liberal democracy is the party of non-Event)”.

그러한 ‘그저 그런 삶’의 경제적 버전은 ‘아무 일 없는 삶’(흔히 ‘여유로운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열심히 일했다고 저 혼자 ‘떠나는 삶’이며, 무료한 삶을 명품 브랜드들로 치장하느라 등골이 빠지는 ‘럭셔리한 삶(luxurious life)’이다(이상은 지젝의 용어들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본질적으로 아무런 이벤트도 없는 삶을 끊임없이 이벤트화하고 스펙터클화하기 위해 난리법석을 떠는 것이 포스트모던한 후기 자본주의의 삶이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삶을 넘어서는 자리에서라야 우리가 진짜 살아 있는 거라면? 지젝의 질문은 이렇다.   

 

   
 

“만일 팔레스타인의 자살 공격자가 그 자신(그리고 타인들)을 폭파시키는 바로 그 순간에, 수백 마일 떨어진 적들에 대하여 컴퓨터 스크린 앞에서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미국의 병사들보다, 또한 균형 잡힌 몸매를 위해 허드슨 강변을 따라 조깅하고 있는 미국의 여피족보다 명확한 의미로서 ‘더욱 생기가 도는’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실재계 사막>, 161~162쪽)

 
   

 

이러한 대비는 신경증 환자와 정치적 노선에서도 식별된다. 가령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끊임없이 과도한 질문을 해대는 히스테리 환자는 ‘죽음 속에서의 삶(life in death)’, 어떠한 과잉도 경계하며 ‘죽어지내는 삶’의 모델 자체인 강박증 환자의 삶보다 훨씬 더 생기 넘치는 삶이다. 곧 ‘살아 있는 삶’이고 ‘삶다운 삶’이다. 강박증 환자의 삶이란 ‘무슨 일(thing)’이 일어나지 않도록 강박적인 주의를 기울이는 삶이다.

지젝이 들고 있는 사례는 아니만, 예컨대 제임스 브룩스의 영화 <이보다 더 좋은 순 없다>에서 중년의 강박증 소설가로 나오는 잭 니콜슨(멜빈 유달)은 어떤가. 남에게 독설이나 퍼붓는 것이 습성이자 유일한 낙인 것 같은 이 사내는 불 켤 때 다섯 번 껐다 켰다 하기를 반복하고, 손을 씻을 때는 화상을 입을 만큼 뜨거운 물을 쓴다. 한번 씻을 때마다 비누 두 개를 쓰고 한번 쓴 비누는 또 곧장 쓰레기통에 버린다. 보도블록 사이의 틈은 절대로 밟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작은 사이즈의 보도블록이 깔린 길이 나타나면 돌아서 간다. 사람들과의 신체 접촉을 병적으로 기피하는 그는 식사도 같은 식당, 같은 자리에서만 하고 식당 식기를 쓰지 않으며 항상 자신의 일회용 스푼, 포크, 나이프를 지퍼백에 넣어 다닌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기피하는 그 ‘무슨 일’이야말로 삶 자체의 과잉이면서 살아 있음의 표지 아닌가. 바로 그런 의미에서 강박증 환자의 삶은 죽은 삶이며 죽어지내는 삶이다. 그가 아무리 대단한 독설가라 하더라도.   

 

 

다행히 멜빈의 경우엔 옆집 동성애자의 강아지와 웨이트리스 헬렌 헌트(캐롤)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하면서 병증이 조금씩 치료된다. 문 잠그는 것도 깜빡하고, 자잘한 보도블록도 밟고, 끔찍하게 싫어하던 약도 먹기 시작한다. 그리고 캐롤에겐 “당신은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해”라고 말한다. 그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건 그렇게 ‘죽음 속에서의 삶’에서 벗어나 어떤 삶 자체의 어떤 과잉을 수용하면서부터다.

지젝은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를 가르는 차이도 바로 이러한 ‘삶’과 ‘죽음’ 사이의 차이가 아닌가라고 말한다. 어째서 그런가?  

 

   
 

스탈린식 공산주의자의 기본 태도는 우익 혹은 좌익의 일탈에 대항하여 올바른 당 노선을 따르는 태도이다. 간단히 말해 안전한 중간노선을 향하는 것이다. 그와는 뚜렷이 대조되는 진정한 레닌주의에서는 오로지 단 하나의 일탈이 있을 뿐인데, 그것이 바로 중도파이다. 그것은 ‘안전한 태도를 취하는’ 것, 다시 말해 분명하고도 지나치게 ‘편들기’ 하는 위험을 기회주의적으로 회피하려는 태도이다.(<실재계 사막>, 162쪽)

 
   

 

즉 스탈린주의가 좌우 양쪽 일탈에 거리를 두면서 ‘안전한 중간노선’을 취했다면(이것이 기회주의다), 레닌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그런 중간노선이야말로 유일하게 일탈적인 노선이다.  

 

   
 

‘투쟁 공산주의’로부터, 예를 들어 1921년의 ‘신경제정책’으로 소련 정책의 급작스런 변화에는 ‘더욱 심원한 역사적 필연성’이 없었다. 그것은 좌익노선과 우익노선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필사적인 전략적 지그재그였을 뿐이며, 1922년에 레닌 자신이 말했듯이 ‘온갖 가능한 실수들’을 모두 저질러놓은 볼셰비키였다.”(<실재계 사막>, 163쪽)

 
   

 

‘투쟁 공산주의’는 ‘전시공산주의(War Communism)’의 오역이다.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가 ‘전시공산주의’(좌익 노선)와 ‘신경제 정책’(우익 노선)을 왔다 갔다 한 것은 무슨 ‘심원한 역사적 필연성’ 때문이 아니라 전략적인 좌충우돌의 산물이자 실수였다는 것. 하지만, 그런 불균형한 지그재그 노선이 궁극적으론 (혁명적인 정치적) 삶 자체이다. “레닌주의자에게 있어서 반혁명적 우익의 궁극적인 이름이 바로 ‘중도파’로서, 사회 체제에 근본적인 불균형을 개입시키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다.” 즉 과감한 결단을 미루는 중도 노선이야말로 ‘반혁명’ 노선이라는 얘기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인가? “따라서 모든 초월적 대의에 반대하는 좌익의 이런 분명한 주장에서 최대의 패배자가 실제적인 삶 그 자체라는 것은 정확히 니체식의 역설이다.” 여기서 ‘모든 초월적 대의에 반대하는 좌익의 이런 분명한 주장’은 ‘삶(Life)’을 ‘좌익(Left)’으로 잘못 보아 생긴 전혀 엉뚱한 번역인데, 다시 옮기면 ‘모든 초월적 대의에 반대하여 삶 자체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주장’ 정도이다. 즉 ‘잃어버려도 좋은’ 대의(Cause)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는 그 대의와 함께 ‘실제의 삶(actual life)’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 니체적 역설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삶을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삶의 과잉이다. 즉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걸 만한 그 어떤 것(우리는 이런 과잉을 ‘자유’, ‘명예’, ‘존엄’, ‘자율’ 등등이라 부를 수 있다)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오로지 우리가 이런 위험을 감당할 때에만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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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인 주체화(global subjectivization)’의 역설에서부터 시작해보자. 다른 게 아니다. 그러한 주체화의 결과로 ‘객관적 현실(objective reality)’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 그 자체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이 경우 ‘사회적 현실’은 제 갈 길을 간다. 지젝은 이러한 역설의 참고 사례로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한 장면을 든다. 

 

   
 

여기서 나는 빅브라더의 존재를 의심하는(“존재하지 않는 것은 바로 당신이오!”) 윈스턴 스미스에 대한 질문자의 그 유명한 대답을 바꿔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이데올로기적 대타자의 존재에 관한 포스트모던의 의심에 대해 할 수 있는 적절한 대답은 존재하지 않는 것은 바로 주체 그 자체라는 것이며(……).(<실재계 사막>, 157~158쪽)

 
   

 

 

번역문엔 착오가 있는데, “존재하지 않는 것은 바로 당신이오!”란 말은 윈스턴 스미스의 말이 아니라 심문자의 대꾸다. 빅브라더의 존재를 의심하는 윈스턴에게 건네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바로 당신이오!”인 것이다. 그걸 약간 변형시켜서 지젝은 오늘날 빅브라더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대타자(ideological big Other)’의 존재를 부인하는 포스트모던적 의심에 대한 대꾸로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바로 주체야!”

지젝이 드는 또 다른 사례는 오늘날의 가장 전형적인 삶의 태도 또는 자세를 보여주는 베스트셀러들이다. “내면으로부터 당신의 삶을 창조해나가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필립 맥그로의 <자아(Self Matters)> 같은 책이 대표적인데, 맥그로는 오프라 윈프리쇼의 ‘당신의 인생을 바꿔라(Change Your Life)’ 코너에서 인생 상담을 해주면서 큰 인기를 끈 저자라 한다. 이런 프로그램에서 강조하는 것은 ‘진정한 자아’ 찾기이다. 지젝은 <자아>의 논리적 보충항이 <어떻게 완전히 사라질 수 있을까> 같은 책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이전 존재의 모든 흔적을 지워버리고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재창조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안내서”, 말하자면 ‘완벽하게 사라지는 방법’ 매뉴얼이다. 자아와 망아(忘我)의 문제라면 뭔가 불교적인, 더 직접적으로는 선(禪)불교적인 주제 아닌가. 지젝도 곧바로 이 선의 문제를 다룬다.  

  

   
 

바로 이곳에서 우리는 진정한 선과 그의 서양식 변형 사이에 있는 차이점을 찾아내게 된다. 선의 진정한 위대성은 그것이 ‘진정한 자기’로의 ‘내적인 여행’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와 반대로 선(禪)명상의 목표는 자기를 완전히 비우는 일, 발견할 만한 ‘내면적 진실’, 즉 자기가 없다는 것을 수긍하는 일이다.(<실재계 사막>, 158쪽)

 
   



즉 ‘진정한 자아 찾기’는 선과 무관하다. 오히려 진정한 선사(禪師)들은 자유란 자기를 잊고 원초적 공(空)과 결합하는 데 있다고 가르쳤다. 지젝은 이러한 태도가 군사적 충성심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자신의 자아나 이해관계에 대한 고려 없이 무조건으로 명령에 따르고 의무를 수행하는 태도라는 점에서 그렇다.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군인의 태도를 꼭두각시와 같다고 비판하지만, 그것은 선의 깨달음과 일치한다. 알튀세르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주체라는 호명 행위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이나 주저함 없이 바로 그 역할을 받아들이는(수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젝은 이시하라 스미오의 말을 재인용하고 있는데, 이 대목은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에서도 인용되는 대목이다.      

 

   
 

선은 자신의 생각을 중단시키지 않으려는 욕구에 대해 매우 특별한 것이다. 부싯돌을 부딪치자마자 불꽃이 튀어나온다. 이런 두 가지 일들 사이에는 최소한의 순간적인 시간 간격조차 없다. 우로 보라는 명령을 받으면 단지 전광석화처럼 재빨리 우로 보고…… 예를 들어 “우에몬” 하고 자신의 이름이 불리면 단지 “예”라고 대답해야 하고, 자신의 이름이 왜 불렸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어떤 사람이 죽어야 한다면 그는 조금도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나는 믿는다.(<실재계 사막>, 159쪽; <죽은 신을 위하여>, 49쪽)

 
   

 

선에서의 자기 발견이란 공의 발견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자아 찾기’와 구별된다. ‘내적 여행’ 혹은 자기 내면으로의 여정이 궁극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주체성의 텅 비어 있음(the void of subjectivity)’이다. 그러한 여정의 끝에 이르러 봉착하는 일은 그러한 완전한 탈주체화(desubjectivization)를 떠맡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양의 불교가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은 것은 ‘자기 자신으로의 여행’의 궁극적인 희생자가 그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교훈은 더 일반화될 수 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에 적용해보자면, “실증주의의 궁극적 희생물은 혼동된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니라 사실들 그 자체이다. 세속화의 철저한 추구, 즉 우리의 세속적인 삶으로의 전환은 이런 삶 그 자체를 ‘추상적인’ 빈혈 과정으로 변화시킨다.”(<실재계 사막>, 160쪽) ‘빈혈 과정’이란 ‘핏기 없는 삶의 과정’을 뜻한다. 정신적 초월성을 말끔하게 제거한 사드 식 성이 진정한 관능을 상실한 기계적 운동으로 변모하는 것과 마찬가지다(이런 경우 성행위는 기구나 기계를 이용한 인위적인 자극행동과 구별되지 않는다). 지젝은 이와 유사한 반전이 오늘날 니체 식의 ‘최후의 인간(Last Men)’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느냐고 묻는다. 오늘날 이 ‘말인(末人)’들이 봉착한 교착 상태, 그들의 딜레마는 무엇인가? 우리의 경우라면 ‘대한민국 0.1%’의 삶을 지향하지만,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자신의 삶을 특별한 삶으로 ‘증류’해내는 과정에서 점차 삶의 직접성과 실감을 상실하는 것은 아닌가.    

 

   
 

그들은 ‘포스트모던’의 개인들이며, 그런 개인들은 테러리스트로서 ‘더 높은’ 목표들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삶을 생존에만 바치는, 다시 말해 더욱더 세련되고 인위적으로 흥분되고/야기된 작은 쾌락들로 가득 찬 인생에 바치고 있다.(<실재계 사막>, 161쪽)

 
   

 

이데올로기, 또는 이데올로기적 대의가 종언을 고한 시대는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이기도 하다. 즐거움을 얻기 위해선 ‘놀이공원’에 가고, 뭔가를 경험하게 위해선 ‘체험전’에 가야 하는 시대다. 이토록 즐거운 삶? 사도 바울의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누가 진정으로 살아 있는가?”

만약 우리가 ‘단순한 삶(mere life)’을 넘어서는 과도한 강렬함의 체험을 통해서만 진정 살아 있는 거라면? 단지 생존해 있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출 때, 비록 그것이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having a good time)’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궁극적으로 삶 자체를 잃어버리는 거라면? 이 문제에 대해선 다음 회에 조금 더 자세히 따져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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