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체정치’는 ‘biopolitics’의 번역어인데, 국내에선 ‘생명정치’, ‘삶정치’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제 이어지는 것은 이 생체정치의 변화와 실상이다. 지젝은 대테러 전쟁과 관련하여 두 가지 태도를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명백하게 인종 차별적인 ‘기독교 근본주의’다. 번역본에서는 ‘서양식 방어(defence of the West)’라고 옮겨졌는데, ‘서양 문명에 대한 방어’를 뜻한다. 물론 무슬림의 위협으로부터의 방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ism)’의 관용적 자유주의 버전이다. 이것이 의도하는 바는 근본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무슬림들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서양을 무슬림 문명으로부터 방어하는 것과 무슬림을 무슬림 근본주의로부터 보호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서로 다르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차이만큼 중요한 것이 그들 간의 공통점이라고 지젝은 지적한다. 둘 다 ‘자기 파괴적 변증법’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자기 파괴의 변증법이란, 삶에 위협적인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결국엔 진정한 삶 자체를 제거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도끼로 제 발등 찍기 같은 것이다.

두 가지 태도가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공시적일 뿐만 아니라 통시적이기도 하다. ‘기독교 근본주의’에서 ‘관용적 자유주의’로 변화해왔다는 말이다. 이것이 말하자면 생체정치의 물밑 변화(underlying shift)이다. 몇 가지 정치적 발언, 혹은 프로이트적 실언(말실수)은 이런 배경하에서 살펴볼 수 있다고 말한다. 실언의 대표 주자는 미국의 전 국방장관 럼즈펠드(럼스펠드)다. 그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폭격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음 그건, 가능하면 많은 수의 탈레반 병사들과 알카에다 요원들을 죽이는 겁니다.” 당연한 것인가?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군사작전의 정상적인 목표는 전쟁에 이기고, 적을 항복시키는 것이며, 대략파괴조차도 궁극적으로는 이런 목적의 한 가지 수단”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전쟁의 목표는 승리에 있는 것이지, 대량 살상에 있지 않다. 그러니 럼즈펄드의 발언은 적어도 ‘공식석상’에서는 수용하기 곤란한 ‘솔직한’ 발언이다.  

 

   
 

럼즈펠드의 솔직한 진술이 문제가 되는 것은 관타나모에 있는 아프간 포로들의 불확실한 신분과 같은 유사한 현상에서처럼 그들이 온전한 시민과 호모 사케르와의 사이에서 보는 아감벤의 구분을 직접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호모 사케르는 그 혹은 그녀가 한 인간으로서 살아 있더라도 국가의 일원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165~166쪽)

 
   

 

 

요컨대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된 아프간 포로들과 마찬가지로 탈레반이나 알케에다는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 사케르’ 형상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비록 인간으로 살아 있다곤 하더라도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으로는 간주되지 않는 ‘열외인간’이 호모 사케르다. 가령 2001년 미국의 탈레반 소탕 작전 시 체포된 ‘미국인 탈레반’ 존 워커의 신병은 어떻게 처리돼야 하나? ‘미국인’이니까 미국의 교도소에 수감되어야 하나, 아니면 ‘탈레반’이니까 탈레반 수용소에 수용되어야 하나? 그는 ‘합법적 범죄자(lawful criminal)’인가, 아니면 ‘비합법적 전투원(unlawful comba-tant)’인가?

‘비합법적 전투원’이란 말이 단순히 범죄적 테러 활동으로 인해 법적 보호를 박탈당한다는 의미만 갖는 것은 아니다. 미국 시민이 중대 범죄를 저지를 경우 그는 ‘합법적 범죄자’가 되며 법적인 처분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범죄자’와 ‘비범죄자’의 구분은 ‘합법적 범죄자’와 ‘비합법적 범죄자’의 구분과 일치하지 않는다. ‘비합법적 범죄자’는 주로 불법 체류자를 가리키는 프랑스어 ‘상파피에(서류가 없는 사람)’에 상응한다. 즉 법적 보호의 바깥에 놓인 자, 배제된 자를 뜻한다. 탈레반 테러리스트가 속하는 것은 바로 이 범주이다. 어디 그들뿐인가.  

 

   
 

제외된 사람은 테러리스트뿐만 아니라 인도주의적인 원조를 받는 쪽에 서 있는 사람들(르완다인, 보스니아인, 아프간인……)이기도 하다. 오늘날 호모 사케르는 인도주의적 생체정치의 특권을 받은 대상이다. 즉 그는 매우 생색내는 방식의 배려를 받고 있어서 인간성 전체를 박탈당하고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도주의적인 원조를 전달하는 강제수용소와 난민구호소가 동일한 사회-논리적 형식의 모체에서 ‘인간적’과 ‘비인간적’인 두 얼굴을 지닌다는 패러독스를 인식해야 한다.(<실재계 사막>, 165~166쪽)

 
   

 

여기서 요점은 얼핏 모순적으로 보이는 생체정치의 ‘두 얼굴’, 인간적인 얼굴과 비인간적인 얼굴이다(중요한 것은 이 둘이 같은 얼굴의 서로 다른 표정일 뿐이라는 점이다). 한편으론 탈레반 포로들을 배제․격리 수용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난민들에게 ‘인도주의적’ 원조를 베풀기도 한다. 공통적인 것은 두 경우 모두 ‘온전한 인간성(full humanity)’을 박탈당했다는 것. 그런 점에서 ‘강제수용소’와 ‘난민수용소’는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결국 하나다. 이 둘은 변증법적으로 통일된다.  

 

 

지젝은 에른스트 루비치의 고전영화 <사느냐 죽느냐(To Be or Not to Be)>에 등장하는 잔인한 농담이 이 두 경우에 모두 적용된다고 말한다. 폴란드에 건설된 독일의 강제수용소(concentration camps)에 대해 질문을 받자 수용소측은 이렇게 답한다. “우리는 정신집중(concentration)을 하고 폴란드인은 캠핑(camping)을 하고 있어요.”(<실재계 사막>, 167쪽) ‘정신집중’이란 말은 어색한데, ‘concentration camp(집결 캠프)’란 말을 분절해서 농담을 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집결시키고 폴란드인은 캠핑하는 거죠” 정도가 아닐까. 자기들은 폴란드 유대인들이 집단 캠핑을 하도록 잔뜩 모아놓기만 했다는 의미다. 법적 격리 대상이든 인도적 보호 대상이든, 두 경우 모두 주민은 생체정치의 대상으로 환원된다.  

 

   
 

아마도 ‘지역주민’을 호모 사케르로 취급하는 궁극적인 이미지는 아프가니스탄 하늘 위를 날아가는 미군 전투기의 이미지가 될 것이다. 즉 그것이 무엇을 떨어뜨릴지, 폭탄일지 혹은 음식 덩어리일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실재계 사막>, 169~170쪽)

 
   

 

요컨대 ‘폭탄이냐 구호식량이냐’는 ‘폭탄이나 구호식량이나’로 바꿔 읽을 수 있다. 그것이 오늘날의 생체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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