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인 주체화(global subjectivization)’의 역설에서부터 시작해보자. 다른 게 아니다. 그러한 주체화의 결과로 ‘객관적 현실(objective reality)’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 그 자체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이 경우 ‘사회적 현실’은 제 갈 길을 간다. 지젝은 이러한 역설의 참고 사례로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한 장면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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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나는 빅브라더의 존재를 의심하는(“존재하지 않는 것은 바로 당신이오!”) 윈스턴 스미스에 대한 질문자의 그 유명한 대답을 바꿔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이데올로기적 대타자의 존재에 관한 포스트모던의 의심에 대해 할 수 있는 적절한 대답은 존재하지 않는 것은 바로 주체 그 자체라는 것이며(……).(<실재계 사막>, 157~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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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엔 착오가 있는데, “존재하지 않는 것은 바로 당신이오!”란 말은 윈스턴 스미스의 말이 아니라 심문자의 대꾸다. 빅브라더의 존재를 의심하는 윈스턴에게 건네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바로 당신이오!”인 것이다. 그걸 약간 변형시켜서 지젝은 오늘날 빅브라더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대타자(ideological big Other)’의 존재를 부인하는 포스트모던적 의심에 대한 대꾸로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바로 주체야!”
지젝이 드는 또 다른 사례는 오늘날의 가장 전형적인 삶의 태도 또는 자세를 보여주는 베스트셀러들이다. “내면으로부터 당신의 삶을 창조해나가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필립 맥그로의 <자아(Self Matters)> 같은 책이 대표적인데, 맥그로는 오프라 윈프리쇼의 ‘당신의 인생을 바꿔라(Change Your Life)’ 코너에서 인생 상담을 해주면서 큰 인기를 끈 저자라 한다. 이런 프로그램에서 강조하는 것은 ‘진정한 자아’ 찾기이다. 지젝은 <자아>의 논리적 보충항이 <어떻게 완전히 사라질 수 있을까> 같은 책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이전 존재의 모든 흔적을 지워버리고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재창조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안내서”, 말하자면 ‘완벽하게 사라지는 방법’ 매뉴얼이다. 자아와 망아(忘我)의 문제라면 뭔가 불교적인, 더 직접적으로는 선(禪)불교적인 주제 아닌가. 지젝도 곧바로 이 선의 문제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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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곳에서 우리는 진정한 선과 그의 서양식 변형 사이에 있는 차이점을 찾아내게 된다. 선의 진정한 위대성은 그것이 ‘진정한 자기’로의 ‘내적인 여행’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와 반대로 선(禪)명상의 목표는 자기를 완전히 비우는 일, 발견할 만한 ‘내면적 진실’, 즉 자기가 없다는 것을 수긍하는 일이다.(<실재계 사막>,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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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진정한 자아 찾기’는 선과 무관하다. 오히려 진정한 선사(禪師)들은 자유란 자기를 잊고 원초적 공(空)과 결합하는 데 있다고 가르쳤다. 지젝은 이러한 태도가 군사적 충성심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자신의 자아나 이해관계에 대한 고려 없이 무조건으로 명령에 따르고 의무를 수행하는 태도라는 점에서 그렇다.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군인의 태도를 꼭두각시와 같다고 비판하지만, 그것은 선의 깨달음과 일치한다. 알튀세르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주체라는 호명 행위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이나 주저함 없이 바로 그 역할을 받아들이는(수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젝은 이시하라 스미오의 말을 재인용하고 있는데, 이 대목은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에서도 인용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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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은 자신의 생각을 중단시키지 않으려는 욕구에 대해 매우 특별한 것이다. 부싯돌을 부딪치자마자 불꽃이 튀어나온다. 이런 두 가지 일들 사이에는 최소한의 순간적인 시간 간격조차 없다. 우로 보라는 명령을 받으면 단지 전광석화처럼 재빨리 우로 보고…… 예를 들어 “우에몬” 하고 자신의 이름이 불리면 단지 “예”라고 대답해야 하고, 자신의 이름이 왜 불렸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어떤 사람이 죽어야 한다면 그는 조금도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나는 믿는다.(<실재계 사막>, 159쪽; <죽은 신을 위하여>, 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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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에서의 자기 발견이란 공의 발견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자아 찾기’와 구별된다. ‘내적 여행’ 혹은 자기 내면으로의 여정이 궁극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주체성의 텅 비어 있음(the void of subjectivity)’이다. 그러한 여정의 끝에 이르러 봉착하는 일은 그러한 완전한 탈주체화(desubjectivization)를 떠맡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양의 불교가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은 것은 ‘자기 자신으로의 여행’의 궁극적인 희생자가 그 자신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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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교훈은 더 일반화될 수 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에 적용해보자면, “실증주의의 궁극적 희생물은 혼동된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니라 사실들 그 자체이다. 세속화의 철저한 추구, 즉 우리의 세속적인 삶으로의 전환은 이런 삶 그 자체를 ‘추상적인’ 빈혈 과정으로 변화시킨다.”(<실재계 사막>, 160쪽) ‘빈혈 과정’이란 ‘핏기 없는 삶의 과정’을 뜻한다. 정신적 초월성을 말끔하게 제거한 사드 식 성이 진정한 관능을 상실한 기계적 운동으로 변모하는 것과 마찬가지다(이런 경우 성행위는 기구나 기계를 이용한 인위적인 자극행동과 구별되지 않는다). 지젝은 이와 유사한 반전이 오늘날 니체 식의 ‘최후의 인간(Last Men)’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느냐고 묻는다. 오늘날 이 ‘말인(末人)’들이 봉착한 교착 상태, 그들의 딜레마는 무엇인가? 우리의 경우라면 ‘대한민국 0.1%’의 삶을 지향하지만,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자신의 삶을 특별한 삶으로 ‘증류’해내는 과정에서 점차 삶의 직접성과 실감을 상실하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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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포스트모던’의 개인들이며, 그런 개인들은 테러리스트로서 ‘더 높은’ 목표들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삶을 생존에만 바치는, 다시 말해 더욱더 세련되고 인위적으로 흥분되고/야기된 작은 쾌락들로 가득 찬 인생에 바치고 있다.(<실재계 사막>, 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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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 또는 이데올로기적 대의가 종언을 고한 시대는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이기도 하다. 즐거움을 얻기 위해선 ‘놀이공원’에 가고, 뭔가를 경험하게 위해선 ‘체험전’에 가야 하는 시대다. 이토록 즐거운 삶? 사도 바울의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누가 진정으로 살아 있는가?”
만약 우리가 ‘단순한 삶(mere life)’을 넘어서는 과도한 강렬함의 체험을 통해서만 진정 살아 있는 거라면? 단지 생존해 있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출 때, 비록 그것이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having a good time)’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궁극적으로 삶 자체를 잃어버리는 거라면? 이 문제에 대해선 다음 회에 조금 더 자세히 따져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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