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에서 아프간 ‘지역주민’이 호모 사케르의 형상이라는 대목까지 읽었다. 그 궁극적 이미지가 아프가니스탄의 하늘을 날면서 무엇을 떨어뜨릴지(폭탄일지 구호식량일지) 알 수 없는 미군기였다. 거기서 폭탄과 구호식량은 서로 대립적이면서 동일한 것이다. 그것이 소위 ‘대립물의 일치’ 혹은 ‘대립물의 통일성’이다. 그리고 2002년 4월 노르웨이의 한 의원이 조지 부시와 토니 블레어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제안했을 때 그러한 ‘대립물의 일치’는 정점에 도달한 것 아니냐고 지젝은 꼬집는다. 대테러 전쟁의 주동자 두 사람에게 노벨평화상을 주어야 한다는 제안은 “전쟁이 평화다”라는 조지 오웰식의 모토(<1984년>)가 실현된 게 아니냐는 것이다.
상황을 고약하게 만드는 것은 대테러 전쟁의 ‘부수적 손상’이 아프간 난민이라는 점. 재난적인 식량난과 극도로 취약해진 보건이 이들 난민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탈레반 소탕을 위한 군사 행동이 ‘인도주의적 원조’의 안전한 배달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된다. 전쟁(군사 행동)과 인도주의적 원조는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것이다. 여기선 동일한 개입이 두 가지 수준에서 동시에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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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체제의 전복은 탈레반에 의해 압박받고 있는 아프간 국민들을 도와주는 작전의 일부로 제시되며, 토니 블레어가 말했듯이 우리는 아마도 식량의 안전한 수송과 분배를 위해 탈레반을 폭격해야 할 것이다.(<실재계 사막>, 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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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케르로서 아프간 난민’이란 문제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는 무엇일까? 다시금 인권(human rights)과 시민권(rights of a citizen) 사이의 구분을 상기해야 하는 것일까?(난민은 같은 인류로서 인권은 갖지만 시민권은 박탈당한 존재다.) 하지만 지젝은 호모 사케르라는 문제의식에서 보다 급진적인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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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진정한 문제가 제외된 자들의 허약한 신분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우리 모두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제외되어’ 있다는 사실이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즉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영(zero)’ 위치가 생체정치의 대상이라는 의미로 제외되고, 가능한 참정권과 시민권이 생체정치적 전략에 대한 고려에 의해 부차적인 제스처로 우리에게 부여된다는 그런 의미로 제외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후(後)정치학’이란 개념의 최종적인 결과라면 어찌 될 것인가? (<실재계 사막>, 1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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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우리가 모두가 기본적인 수준에서 생체정치의 대상이라면, 즉 ‘벌거벗은 생명’이라면 호모 사케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호모 사케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민과 달리 우리에겐 참정권과 시민권이 주어져 있지 않느냐고? 맞다. 하지만 우리의 참정권과 시민권이라는 것이 생체정치의 전략적 고려에 따른 것이라면, 그래서 ‘부차적인 제스처’에 불과한 것이라면? 말하자면 일종의 ‘생색내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선거철에만 잠시 ‘주권자’ 대우를 받는 우리의 처지를 생각해보라!). ‘후정치학’은 ‘post-politics’의 번역인데, 보통 ‘탈정치’로 옮긴다. ‘정치 이후’란 뜻이다. 정치적 행위나 정치 과정을 번거로운 것으로 간주하고 ‘행정’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탈정치 시대’의 특징이다(우리의 경우로 치면, 이명박 정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다). 국민이 ‘주권자’가 아니라 복리·후생의 대상으로만 간주되는 것, 그것이 탈정치의 결과다.
아감벤이 <호모 사케르>에서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생체권력 혹은 생명관리권력의 궁극적 표현은 20세기의 강제수용소다. “여기서 근본적인 선택은 아도르노와 하버마스 가운데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아도르노’는 물론 ‘계몽의 변증법’을 주장하는, 즉 근대적 합리성이 결국 아우슈비츠로 귀결된 게 아닌가라고 근심하는 아도르노이고, ‘하버마스’는 아우슈비츠란 병리적 일탈일 뿐이고 아직 근대성의 기획이 미완인 상태로 남아 있는 게 문제라고 보는 하버마스다. 각각의 선택지가 보여주는 근대상은 어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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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아도르노: “(정치적인) 자유의 현대식 프로젝트는 가짜 모습일까? 그런데 그 가짜 모습의 ‘진실’은 후기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에 몰두함으로써 자율성의 마지막 한 조각마저 상실해버린 주체들에 의해 구체화된다.”(<실재계 사막>, 172쪽) 원문은 “is the modern project of (political) freedom a false appearance whose ‘truth’ is embodied by subjects who lost the last shred of autonomy in their immersion into the late-capitalist ‘administered world’.”이다. 아도르노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administered world’는 보통 ‘관리되는 세계’라고 옮긴다. 전체를 다시 옮기면, “정치적 자유라는 근대성의 기획은 거짓 외관일 뿐이고 그 ‘진리’는 후기 자본주의의 ‘관리되는 세계’에 침윤되어 자신의 자율성을 모두 상실한 주체들에 구현돼 있는 것 아닌가?” 즉 아도르노가 보기에 정치적 자유의 확장이라는 근대의 기획은 허울일 뿐이고 결과적으로 얻게 된 것은 자신의 자율성을 상실하고 ‘관리되는 세계’의 대상으로 전락한 주체들, 혹은 국민들(subjects)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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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하버마스: “‘전체주의적’ 현상은 단지 현대성의 정치적인 프로젝트가 아직 끝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증언할 뿐인가?”(<실재계 사막>, 172쪽) 이 대목도 원문은 “do 'totalitarian' phenomena merely bear witness to the fact that the political project of modernity remains unfinished?”이다. 여기서 ‘전체주의’ 현상은 나치즘/파시즘을 가리킨다. 그것은 병리적 일탈에 불과하고, 오히려 근대성의 기획이 아직 미완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것 아니냐는 것이 하버마스의 관점이다.
두 사람 모두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이지만 근대(성)의 기획을 바라보는 관점은 ‘비관’과 ‘낙관’으로 나뉘며 서로 대척적이다. 하지만 이 두 입장이 “동일한 외상적 특징의 억압/배제에 기반을 두는 동전의 앞뒷면이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이 지젝의 문제의식이다. 어떤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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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주관적 자유의 경험이 규율 메커니즘에 복종하는 외양의 형태가 되는 ‘지배되는 세계’라는 ‘전체주의적’ 개념은 결국 개인의 자율성과 자유의 ‘공식적인’ 대중 이데올로기(그리고 실천)의 역겨운 환상적 이면이 된다.(<실재계 사막>, 172~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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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겨운’은 지젝이 자주 쓰는 단어인 ‘obscene’의 번역이며 대개 ‘외설적’이라고 옮겨진다. 공식적인 이데올로기상으론 우리는 자율적이며 자유롭다. 하지만 ‘관리되는 세계’에서 우리의 주관적 자유 경험은 오직 우리가 규율 체계에 예속될 때 얻어진다. 즉 실제로는 자유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여기서 전체주의 사회와 ‘관리되는 사회’는 그다지 먼 거리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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