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삶의 과잉이다. 즉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걸 만한 그 어떤 것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오로지 우리가 기꺼이 이런 위험을 감당할 때에만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163쪽)에서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뭔가 떠오르는 바가 없으신지? 혹 충무공 어록에 나오는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은 어떤가? “저만 살려고 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살 것이다.” 보통 그렇게 새기는 말씀이다. 병사들을 격려하고 독려하는 장군의 결기가 느껴진다. 거기서 ‘죽기를 각오하기’가 ‘삶의 과잉’이다. 삶을 내거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니 ‘과잉’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과잉이 없다면, 우리는 진정 살아 있는 게 아닐뿐더러 삶 자체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저만 살려고 하는 자들처럼. 충무공의 어록을 ‘용기의 역설’로 읽는다면, 지젝이 참조하는 체스터턴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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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들에게 둘러싸인 어느 병사가 만일 탈출구를 열려고 한다면 살려고 하는 강렬한 욕망에다가 죽음에 대한 이상스런 무관심을 결합시킬 필요가 있다. 그가 단지 삶에 매달리기만 해서는 안 되는데, 그렇게 되면 그는 겁쟁이가 되어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죽음만을 기다려서도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살자가 되어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삶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의 정신으로 자신의 삶을 구해야 한다. 즉 그는 삶을 물처럼 욕망해야 하고 죽음을 포도주처럼 마셔야 한다.”(<실재계 사막>, 163~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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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용에 덧붙인 지젝의 설명은 이렇다. “최후의 인간들의 ‘후기 형이상학적’ 생존주의 자세는 결국 그 자신의 그림자처럼 질질 끌고 가는 삶의 애처로운 광경이 되고 만다.” ‘최후의 인간’은 따로 강조돼 있지 않은데, 니체가 말하는 ‘최후의 인간(the Last Men)’을 가리킨다. 루쉰은 이것을 ‘말인(末人)’이라고 옮겼는데, ‘초인’에 대응하는 말로는 더 유력해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가 보여주는 ‘최후의 인간’은 어떤 모습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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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무엇인가? 창조가 무엇인가? 동경이 무엇인가? 별이 무엇인가”―최후의 인간은 이렇게 묻고서 눈을 껌벅인다. 그 순간 대지는 작아지고, 대지 위에는 모든 것을 작아지게 만드는 최후의 인간이 뛰어다닐 것이다. 그 종족은 벼룩처럼 뿌리 뽑기 어려워서, 최후의 인간은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을 것이다. “우리는 행복을 고안해냈다.”―최후의 인간은 이렇게 말하고 눈을 껌벅인다.(펭귄클래식판,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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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무엇이고, 창조가 무엇이며 동경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최후의 인간’이 바로 ‘형이상학 이후’의 인간이다. ‘후기 형이상학적’이라고 옮겨진 ‘post-metaphysical’이란 말은 ‘형이상학 이후’나 ‘탈형이상학적’이라고 옮겨지는 게 더 적절하다. ‘형이상학’이란 말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 ‘너머’에 대한 관심이고 동경이다. 그 형이상학적 관심은 주로 ‘그것은 무엇인가(What is it)?’라는 질문 형식으로 표현돼왔다. ‘사랑이 무엇인가? 창조가 무엇인가? 동경이 무엇인가? 별이 무엇인가?’ 같은 식의 물음이다. 요점은 이런 물음을 최후의 인간도 던진다는 게 아니라 이런 물음을 던지면서 그가 ‘눈을 껌벅인다’는 데 있다. 그건 그 물음들 자체가 왜 존재하며 또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다는 껌벅임이다.
그런 껌벅임과 함께 ‘대지는 작아진다’고 니체는 적었다. 세상에 궁금한 게 없으니, 대지도 작아질 수밖에. 요컨대, ‘최후의 인간’은 ‘눈을 껌벅이는 인간’이다. 이 ‘눈을 껌벅이는 인간’의 장기는 생존이다. 그들은 ‘생존주의’를 섬긴다(“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게 생존주의의 표어다. 이 표어는 어떠한 대의도 부정하는 한국식 허무주의를 집약하고 있지 않은지?). 그래서 결국은 벼룩만큼이나 오래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때의 삶은 ‘벼룩 같은 삶’이며 ‘산 것 같지 않은 삶’, 곧 ‘죽음 속의 삶’이다. 하지만 ‘눈을 껌벅이는 인간’은 그게 또 ‘행복’이라고 믿을지도 모른다. 이때의 행복은 ‘저만 살려고 하는 자’의 행복이다.
다시 지젝으로 돌아오면, “우리가 사형제도에 관한 오늘날 고조되고 있는 폐기운동을 이해해하는 것은 이런 지평에서이다. 우리는 이런 폐기를 지지하는 숨겨진 ‘생체정치’를 분간할 수 있어야 한다.” ‘사형제 폐기운동’은 ‘사형제 폐지운동’이다. 지젝은 사형제 폐지에 반대하는 쪽인데, 그것은 국가가 그런 처벌권을 가질 수 있다고 동의해서가 아니라 생명이 최고의 가치라는 ‘생체정치(biopolitics)’적 관점에 반대해서다.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믿음은 ‘그러므로 생명은 관리돼야 한다’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하는 것이 생명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생명관리권력(bio-power)’이다. 그렇게 관리․통제되는 삶은 어떤 모습의 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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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신성함’에 기식하고 있는 초월적인 세력의 위협에 대항하여 그를 방어하면서 그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결국에 우리가 고통 없이 안전하게, 그리고 지루하게 살아가게 될 ‘관리된’ 세상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 그 세상에서는 바로 그의 공인된 목표―장수하고 유쾌한 삶―를 위해 모든 현실적인 쾌락들이 금지되거나 엄격히 통제된다(흡연, 약물, 음식……).(<실재계 사막>, 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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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적인 세력(transcendent powers)’은 개인․개체 단위를 넘어서는 힘이면서 ‘대의(Cause)’처럼 생명을 초과하는 ‘초월적 가치’를 뜻하는 것으로 읽어도 좋겠다. 그러한 ‘초월적 힘’에 대항하여 생명의 지고성을 옹호하고자 할 때 우리가 봉착하게 되는 것은 어떠한 위협이나 위험, 모험으로부터도 ‘면제된’ 삶이다. 혹은 면역된 삶. ‘장수하고 유쾌한 삶(a long and pleasurable life)’을 위해서 흡연, 마약, 음식 등은 모두 엄격하게 금지되거나 통제돼야 한다. 이른바 ‘웰빙(Well-being)’의 삶이다. 우리말로 ‘참살이’라고도 옮기는데, 절반 정도만 동의할 수 있다. ‘참’이 일반적으로는 ‘real’의 번역이기도 하다면, ‘웰’과 ‘참’은 서로 모순적이고 대립적이지 않을까. 하지만 ‘빙’의 번역어로 ‘살이’는 어울리는 듯싶다. ‘삶’이 아닌 ‘살이’. 명사 ‘삶’처럼 독립적이지 않고 접사로서만 기생하는 ‘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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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죽음에 대한 이런 생존주의의 태도의 가장 최근의 사례가 되는데, 거기에는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시킬 수 없는 무의미한 대량학살로서 전쟁에 대한 ‘탈신화화’가 제시되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우리 편에는 사상자 없음’이란 콜린 파월의 군사원리에 대해 가장 가능성이 큰 정당화를 제공해주고 있다.(<실재계 사막>, 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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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최근’이라고 하기엔 좀 오래된 사례이긴 하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는 전쟁이 무의미한 학살일 뿐이라는 관점을 내비침으로써 전쟁에 관한 신화를 벗겨냈다는 것이다. 곧 전쟁에서 숭고한 죽음 따위는 없다는 것. 그리고 여기에 상응하는 것이 미국의 전 국무장관 콜린 파월의 군사독트린이다. 미국이 해외 분쟁에 개입할 경우 ‘압도적인 군사력’을 동원해 최단 기간에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아군 희생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독트린이었다. 하지만 적군은? 파월의 독트린은 ‘저만 살려고 하는 자’의 운명을 피해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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