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이 이데올로기의 허위적인 종언 이후의 ‘단순한 삶(mere life)’을 ‘진정한 삶(real life)’과 대비시킨다. ‘단순한 삶’은 ‘간소한 삶(simple life)’이 아니라 ‘그저 그런 삶’이다. 자신의 삶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하는 삶이며, 자신의 기득권이 아무 탈 없이 그대로 자자손손 보존되기를 매주 기도하는 삶이다. 그것의 정치적 버전이 자유민주주의인바, 지젝이 보기에 자유민주주의의 최대 관심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마하는 일이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는 무-사건의 당이다(Liberal democracy is the party of non-Event)”.

그러한 ‘그저 그런 삶’의 경제적 버전은 ‘아무 일 없는 삶’(흔히 ‘여유로운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열심히 일했다고 저 혼자 ‘떠나는 삶’이며, 무료한 삶을 명품 브랜드들로 치장하느라 등골이 빠지는 ‘럭셔리한 삶(luxurious life)’이다(이상은 지젝의 용어들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본질적으로 아무런 이벤트도 없는 삶을 끊임없이 이벤트화하고 스펙터클화하기 위해 난리법석을 떠는 것이 포스트모던한 후기 자본주의의 삶이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삶을 넘어서는 자리에서라야 우리가 진짜 살아 있는 거라면? 지젝의 질문은 이렇다.   

 

   
 

“만일 팔레스타인의 자살 공격자가 그 자신(그리고 타인들)을 폭파시키는 바로 그 순간에, 수백 마일 떨어진 적들에 대하여 컴퓨터 스크린 앞에서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미국의 병사들보다, 또한 균형 잡힌 몸매를 위해 허드슨 강변을 따라 조깅하고 있는 미국의 여피족보다 명확한 의미로서 ‘더욱 생기가 도는’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실재계 사막>, 161~162쪽)

 
   

 

이러한 대비는 신경증 환자와 정치적 노선에서도 식별된다. 가령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끊임없이 과도한 질문을 해대는 히스테리 환자는 ‘죽음 속에서의 삶(life in death)’, 어떠한 과잉도 경계하며 ‘죽어지내는 삶’의 모델 자체인 강박증 환자의 삶보다 훨씬 더 생기 넘치는 삶이다. 곧 ‘살아 있는 삶’이고 ‘삶다운 삶’이다. 강박증 환자의 삶이란 ‘무슨 일(thing)’이 일어나지 않도록 강박적인 주의를 기울이는 삶이다.

지젝이 들고 있는 사례는 아니만, 예컨대 제임스 브룩스의 영화 <이보다 더 좋은 순 없다>에서 중년의 강박증 소설가로 나오는 잭 니콜슨(멜빈 유달)은 어떤가. 남에게 독설이나 퍼붓는 것이 습성이자 유일한 낙인 것 같은 이 사내는 불 켤 때 다섯 번 껐다 켰다 하기를 반복하고, 손을 씻을 때는 화상을 입을 만큼 뜨거운 물을 쓴다. 한번 씻을 때마다 비누 두 개를 쓰고 한번 쓴 비누는 또 곧장 쓰레기통에 버린다. 보도블록 사이의 틈은 절대로 밟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작은 사이즈의 보도블록이 깔린 길이 나타나면 돌아서 간다. 사람들과의 신체 접촉을 병적으로 기피하는 그는 식사도 같은 식당, 같은 자리에서만 하고 식당 식기를 쓰지 않으며 항상 자신의 일회용 스푼, 포크, 나이프를 지퍼백에 넣어 다닌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기피하는 그 ‘무슨 일’이야말로 삶 자체의 과잉이면서 살아 있음의 표지 아닌가. 바로 그런 의미에서 강박증 환자의 삶은 죽은 삶이며 죽어지내는 삶이다. 그가 아무리 대단한 독설가라 하더라도.   

 

 

다행히 멜빈의 경우엔 옆집 동성애자의 강아지와 웨이트리스 헬렌 헌트(캐롤)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하면서 병증이 조금씩 치료된다. 문 잠그는 것도 깜빡하고, 자잘한 보도블록도 밟고, 끔찍하게 싫어하던 약도 먹기 시작한다. 그리고 캐롤에겐 “당신은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해”라고 말한다. 그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건 그렇게 ‘죽음 속에서의 삶’에서 벗어나 어떤 삶 자체의 어떤 과잉을 수용하면서부터다.

지젝은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를 가르는 차이도 바로 이러한 ‘삶’과 ‘죽음’ 사이의 차이가 아닌가라고 말한다. 어째서 그런가?  

 

   
 

스탈린식 공산주의자의 기본 태도는 우익 혹은 좌익의 일탈에 대항하여 올바른 당 노선을 따르는 태도이다. 간단히 말해 안전한 중간노선을 향하는 것이다. 그와는 뚜렷이 대조되는 진정한 레닌주의에서는 오로지 단 하나의 일탈이 있을 뿐인데, 그것이 바로 중도파이다. 그것은 ‘안전한 태도를 취하는’ 것, 다시 말해 분명하고도 지나치게 ‘편들기’ 하는 위험을 기회주의적으로 회피하려는 태도이다.(<실재계 사막>, 162쪽)

 
   

 

즉 스탈린주의가 좌우 양쪽 일탈에 거리를 두면서 ‘안전한 중간노선’을 취했다면(이것이 기회주의다), 레닌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그런 중간노선이야말로 유일하게 일탈적인 노선이다.  

 

   
 

‘투쟁 공산주의’로부터, 예를 들어 1921년의 ‘신경제정책’으로 소련 정책의 급작스런 변화에는 ‘더욱 심원한 역사적 필연성’이 없었다. 그것은 좌익노선과 우익노선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필사적인 전략적 지그재그였을 뿐이며, 1922년에 레닌 자신이 말했듯이 ‘온갖 가능한 실수들’을 모두 저질러놓은 볼셰비키였다.”(<실재계 사막>, 163쪽)

 
   

 

‘투쟁 공산주의’는 ‘전시공산주의(War Communism)’의 오역이다.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가 ‘전시공산주의’(좌익 노선)와 ‘신경제 정책’(우익 노선)을 왔다 갔다 한 것은 무슨 ‘심원한 역사적 필연성’ 때문이 아니라 전략적인 좌충우돌의 산물이자 실수였다는 것. 하지만, 그런 불균형한 지그재그 노선이 궁극적으론 (혁명적인 정치적) 삶 자체이다. “레닌주의자에게 있어서 반혁명적 우익의 궁극적인 이름이 바로 ‘중도파’로서, 사회 체제에 근본적인 불균형을 개입시키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다.” 즉 과감한 결단을 미루는 중도 노선이야말로 ‘반혁명’ 노선이라는 얘기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인가? “따라서 모든 초월적 대의에 반대하는 좌익의 이런 분명한 주장에서 최대의 패배자가 실제적인 삶 그 자체라는 것은 정확히 니체식의 역설이다.” 여기서 ‘모든 초월적 대의에 반대하는 좌익의 이런 분명한 주장’은 ‘삶(Life)’을 ‘좌익(Left)’으로 잘못 보아 생긴 전혀 엉뚱한 번역인데, 다시 옮기면 ‘모든 초월적 대의에 반대하여 삶 자체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주장’ 정도이다. 즉 ‘잃어버려도 좋은’ 대의(Cause)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는 그 대의와 함께 ‘실제의 삶(actual life)’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 니체적 역설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삶을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삶의 과잉이다. 즉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걸 만한 그 어떤 것(우리는 이런 과잉을 ‘자유’, ‘명예’, ‘존엄’, ‘자율’ 등등이라 부를 수 있다)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오로지 우리가 이런 위험을 감당할 때에만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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