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적 정치의 한계에 대한 지적과 더불어 지젝이 제시하는 것은 체스터턴의 비판이다. <정통>에서 인용한 대목이다.  

 


  

   
 

단두대에는 수많은 죄가 있지만 그것을 올바로 평가하려는 데 있어 그에 대한 진화론적인 것은 찾아볼 수 없다. 마음에 드는 진화론적 논의는 도끼에서 가장 좋은 해답을 찾아내게 된다. 진화론자는 “당신은 어디에 선을 긋습니까?”라고 묻는다. 혁명론자는 “나는 바로 여기에 선을 긋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어떤 광풍이 불어닥친다면 어떤 주어진 순간에 옳거나 틀린 개요가 있게 마련이다. 돌연한 어떤 것이라도 있을 것 같으면 영원한 어떤 것이 반드시 있게 된다.(<실재계 사막>, 181쪽)

 
   


전후 맥락을 모르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인데, 더구나 번역문은 좀 ‘난해’하다. 체스터턴의 책은 <정통>(상상북스, 2010)이 새 번역본으로 최근에 출간됐지만, 일단 <오소독시>(이끌리오, 2003)에서 다시금 인용하자면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조금 확장해서 옮겨본다.  

 

   
 

그러므로 하나의 영원한 이상은 보수주의자뿐 아니라 혁신주의자에게도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왕의 명령이 즉각적으로 실행되기를 원하든, 아니면 그 왕이 즉각적으로 처형당하기를 바라든 간에 영원불변한 이상은 반드시 필요하다. 단두대는 많은 과실을 안고 있지만 정당하게 평가하자면, 그것에 진화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진화론적 논쟁은 흔히 사형 집행용 도끼에서 최고의 해답을 찾아낸다. 진화론자가 “당신은 어디에 선을 긋는가?”라고 물으면 혁명주의자는 “나는 그것을 ‘여기에’ 긋는다. 정확하게 당신의 머리와 몸통 사이에”라고 대답한다. 어떤 주어진 순간에 어떤 일격이 가해진다면, 관념적인 옳고 그름의 기준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무언가가 있다면, 영원한 것도 분명 있을 것이다.(<오소독시>, 208~209쪽)

 
   

 

일단 단두대에 대한 체스터턴의 평가는 거기에 ‘진화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고작해야 도끼에서 해답을 찾는다. 도끼가 얼마만큼 좋아졌는가, 정도를 따져본다는 뜻이겠다. 그렇다면 개량된 도끼, 더 좋아진 도끼가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일까? 목을 자르는 데 있어서 진화론자는 어떤 ‘진보’를 성취해내는 것일까? 사정은 진화나 발전의 여지도 없는 ‘영원한 것’과 관련되지 않을까? (목을 자를 때) “당신은 어디에 선을 긋는가?”라는 질문은 얼핏 섬세해 보이는 질문이지만, 한편으론 어리석은 질문이다. 혁명론자/혁명주의자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한다. 그냥 ‘여기’라고. 머리와 몸통 사이. 그걸로 충분하다는 뜻이다. 사실 그렇잖은가? 그게 ‘영원한 어떤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 단두대의 도끼가 아무리 개량․진화된다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원칙은 그 기능이 머리와 몸통 사이를 절단하는 데 소용된다는 점이다. 그것이 어떤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기준’이다. 지젝의 보충 설명은 이렇다.  

 

   
 

우리는 행위의 이론가인 바디우가 어째서 영원을 참조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바로 이런 기반 위에서 이해할 수 있다. 행위라는 것은 오로지 시간 속에 영원을 개입시킴으로써 생각할 수 있다. 역사주의적 진화론은 끊임없는 지연으로 이끌어간다. 즉 그 상황은 항상 지나치게 복잡하다. 언제나 설명되어야 할 많은 측면들이 있다. 즉 그 상황은 지나치게 복잡하다.(<실재계 사막>, 181~182쪽)

 
   

 

‘행위의 이론가’는 ‘the theorist of the Act’의 번역이다. 정관사가 붙은 것은 알랭 바디우에 대한 예우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서 대문자 행위(Act)는 어떤 곤경과 교착 상태를 돌파하는, 사회적 상징계의 좌표를 변화시키는 일을 가리킨다(그런 의미에서 ‘행위’란 말은 특권적이며 ‘행위로의 이행’이나 ‘행동’, ‘활동’ 등과 구별된다). 그러한 행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영원(Eternity)’에 대한 참조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즉 행위는 ‘시간’에 대한 ‘영원’의 개입이다. 반면에 진화론적 관점은 그러한 ‘영원’을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테야르 드 샤르댕 같은 가톨릭계 진화론자는 진화의 ‘오메가점’을 상정하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 진화란 방향성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역사주의적 진화론에서는 모든 결단과 행동이 연기되고 지체된다. 왜냐하면 상황은 언제나 너무 복잡하며 어떤 사안에 대한 찬반은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주저와 머뭇거림이 때론 심사숙고와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숙고가 행위를 대신하지는 못한다. “어디에다 ‘선’을 그을까요?”라는 물음에 대한 ‘정밀한’ 답을 얻을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지 않은가.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단순화’다. 풀지 못할 만큼 엉킨 매듭을 푸는 방법은 애써 풀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도끼로 그 매듭을 끊는 것이다. 그것이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푸는 방법이다. ‘고르디아스의 매듭’이란 프리지아의 왕 고르디아스가 복잡하게 묶어놓아 아무도 풀지 못한 매듭을 알렉산드로스가 칼로 끊어낸 데서 유래한 말이다. 복잡한 문제를 풀려면 때로 알렉산드로스와 같은 과감한 행동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무한한 숙고에 의해 단순한 ‘예’ 혹은 ‘아니오’로 구체화되는 불가사의한 순간이다.” 즉 무한한 숙고가 ‘예/아니오’라는 아주 간단한 대답으로 결정화되는, 응결되는 순간이다.

지난 회부터 다룬 것이 아감벤에 대한 잘못된 도용에 대한 지젝의 비판이었는데, 이제 이런 맥락에서 지젝은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이 갖는 진정한 급진성을 제거하려는 유혹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급진성인가? “9․11 이후에 풍부해진 인간의 존엄과 자유에 관한 현대 개념의 어떤 기본적인 구성 요소를 재고해주길 바라는 수많은 요청에 대해 분석할 수 있게” 해주는 급진성이다. 인용문에서 ‘풍부해진’이 수식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가 아니라 ‘재고해주길 바라는 수많은 요청’이다. 9․11 이후에 과연 인간의 존엄과 자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의문이 제기됐고, 논란이 벌어져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호모 사케르’가 유익한 분석틀이 돼준다는 게 지젝의 판단이다. 그 한 가지 사례로 드는 것은 고문에 대한 논란인데, <뉴스위크>(2001년 11월 5일자)에 실은 ‘고문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이란 칼럼에서 조나단 올터는 이런 주장을 펼쳤다.  

 

   
 

우리는 고문을 합법화할 수 없다. 그것은 미국의 가치와 상반된다. 그러나 우리가 세계 도처에서 자행되는 인권 학대에 반대하는 발언을 계속하는 때라 할지라도 우리는 법정-승인된 심리적 심문처럼 테러리즘과 싸울 수 있는 특별한 방법에 대해 결정짓지 않을 필요가 있다.(<실재계 사막>, 183쪽)

 
   

 

“결정짓지 않을 필요”란 말은 “need to keep an open mind”를 부정확하게 옮긴 것이다. 말 그대로 “열린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무엇에 대해 열린 마음인가? ‘심리적 신문’처럼 테러리즘과 싸우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수단이 강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문을 비인도적 수단으로 제쳐놓지 말고, 그런 수단 가운데 하나로 ‘열림 마음’으로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어불성설인가? 하지만 이 문제와 관련하여 ‘버젓한’ 논쟁이 벌어졌고, 지젝은 이러한 논쟁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신랄하게 짚어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새해 벽두부터 이 ‘고문’이란 문제에 대해서 자세하게 살펴볼 예정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나 차례가 그렇게 됐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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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 2011-01-01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덕분에 지젝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제게는 난해한 구석이 많아서요. 주로 복습을 하면서 아하!하고 무릎을 칠 때가 많습니다.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강건하시고, 모쪼록 뜻한 바를 이루는 풍성한 한해가 되시기를 바랄께요.
 


 

지난 회에서 아감벤 또한 아도르노/푸코처럼 ‘관리되는 세계’와 ‘생체정치 시대’에 관해서 비관적인 전망을 공유하는지 물었다. 지젝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비록 아감벤이 어떠한 ‘민주주의적’ 탈출구도 부정하고 있지만 사도 바울에 관한 상세한 독해에서 그는 ‘혁명적인’ 메시아의 차원을 맹렬하게 재주장하고 있으며, 만일 이런 메시아의 차원이 적어도 뭔가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삶’이 더 이상 정치의 궁극적인 분야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실재계 사막>, 179~180쪽)

 
   

 

‘단순한 생명’ 혹은 ‘벌거벗은 생명’은 생체정치(생명정치)의 대상이다. 하지만 메시아적 차원을 도입하고 고려하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정치의 궁극적인 대상, 유일한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며, 바로 아감벤의 경우가 그렇다는 얘기다. 이때 지젝이 염두에 두고 있는 저작은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코나투스, 2008)이다(번역본 각주에는 <머물러 있는 시간>이라고 옮겨졌다). <남겨진 시간>에 대해서는 한 서평에서 다룬 바 있는데(<책을 읽을 자유>, 현암사, 2010, 450~452쪽 참조) 조금 간추려서 소개하자면, 사도 바울이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에 관한 여섯 차례의 강의록을 묶은 책이다. <호모 사케르>에서 주권의 역설적 논리를 분석하고 수용소야말로 근대성의 노모스(nomos, 규범)이면서 근대 정치의 패러다임이라고 주장했던 아감벤은 <남겨진 시간>에서 바울의 편지에 대한 치밀하고도 유려한 문헌학적 주석을 통해 그의 메시아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면밀히 조명한다.  

 

 

아감벤이 분석 대상으로 삼은 것은 고대 그리스어 성경의 로마서 1장 1절을 구성하는 10개의 단어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나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특별한 사명을 띤 사람입니다”란 뜻으로 풀이되는 이 구절의 원문 “PAULOS DOULOS CHRISTOU IESOU KLETOS APOSTOLOS APHORISMENOS EIS EUAGGELION THEOU”를 구성하는 각 단어에 아감벤은 주석을 붙인다. 로마서야말로 바울의 사상과 복음에 대한 증언적 요약이며, “글의 첫머리 한 개 한 개의 언어가 편지의 텍스트 전체를 총괄하는 형식으로 스스로 축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감벤은 ‘CHRISTOU’가 뜻하는 ‘그리스도’가 단지 ‘기름 부어진 자’를 뜻하는 헤브라이어 ‘마시아(=메시아)’를 그대로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란 ‘구세주 예수’ 또는 ‘예수라는 구세주’를 가리킬 뿐이라는 점에 주의하도록 한다. 그리고 ‘소명 받음’을 뜻하는 ‘KLETOS’의 파생어 ‘클레시스(klesis)’는 루터에 의해 독일어 ‘베루프(Beruf)’로 번역되면서 ‘직업’이라는 근대적 의미까지 획득하게 됐다고 언급하는 식이다. 요컨대 아감벤의 이러한 작업은 ‘단순한 삶’과는 다른 차원의 삶을 고려하게끔 한다.  

 

   
 

다시 말해서 ‘시간의 종말을 기다리는’ 메시아의 태도에 매달려 있는 것은 정확히 ‘단순한 삶’의 중심 자리이다. 분명히 그와 대조되는 후-정치학의 근본적인 특징은 ‘단순한 삶’을 지배하고 통제한다는 정확히 그런 의미에서 정치를 ‘생체정치’로 바꾸는 환원이 된다.(<실재계 사막>, 180쪽)

 
   

 

첫 번째 문장은 잘못 번역됐는데, 원문은 “what is suspended in the Messianic attitude of 'awaiting the end of time' is precisely the central place of 'mere life”이다. ‘suspended’가 ‘매달려 있는’이라고 옮겨졌는데, ‘중지되는’으로 옮기는 게 낫겠다.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다. 조금 의역하여 다시 옮기면, “종말을 기다리는 메시아적 태도는 ‘단순한 삶’이 갖는 중심적 지위를 박탈한다.” 어째서 그런가? ‘종말을 기다리는 메시아적 태도’에서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는 삶, 곧 ‘단순한 삶’은 적극적 의미를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즉 ‘단순한 삶’은 더 이상 삶의 중심이자 핵심으로 행세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 의의가 절감될 수밖에 없다. 반면에 ‘후-정치학’, 곧 ‘정치 이후’의 ‘탈정치(post-politics)’는 ‘정치’를 ‘생체정치’로 축소(환원)시킨다. 고작 ‘단순한 삶’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일이 정치의 모든 것이 된다는 뜻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아감벤을 단순히 ‘생체정치’의 철학자로만 주목하는 것은 그를 오인하는 태도다. 지젝은 “아감벤에 대한 이런 (잘못된) 도용은 미국의 급진적인 학계의 경향을 예시해주는 일련의 사례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꼬집는다. 여기서 ‘급진적인’이란 말은 일종의 아이러니를 담은 말이다(지젝은 아감벤보다 더한 사례가 푸코라는 지적을 덧붙인다). 그래서 이어지는 것은 소위 ‘급진적 정치(radical politics)’에 대한 지젝의 비판이다. 비판의 과녁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민주주의적 해방 프로젝트의 폐쇄에 대한 그의 강조와 함께 도용된 유럽의 지식계는 민주주의적 공간의 점진적이고 부분적인 확대라는 정반대의 장소에 기입되어 있다. 표면상 이런 정치적 급진화의 이면은 다음과 같다. 급진적인 정치실행 그 자체는 권력구조를 동요시키고 교체할 수 있는 끝없는 과정으로 여겨지는데, 그것을 실제로 위태롭게 만들 수 없다. 그러니까 급진적인 정치의 목표는 사회적 배제의 경계를 점차 바꿔주는 것인데, 배제된 행위자들(성적인 소수와 인종적인 소수)한테 그들이 자신들의 동일성에 대해 표명하고 질문할 수 있는 변방의 공간을 만들어줌으로써 권한을 부여하게 된다.(<실재계 사막>, 180~181쪽)

 
   

 

무슨 뜻인지 번역문만으로는 알아차리기 어려운데, 일단 ‘도용된 유럽의 지식계(the appropriated European intellectual topos)’란 말은 푸코나 아감벤 같은 유럽 철학자에 대한 전유, 곧 편의적인 이해를 가리킨다. 아감벤을 생체정치의 철학자로 한정하여 이해하는 태도다. 그러한 ‘도용’과 함께 정작 그들이 주장하는 ‘모든 민주적 해방 기획’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대신에 초점은 ‘민주적 공간의 점진적․부분적 확대’ 쪽으로 맞춰진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정치적 급진화’로 보이지만, 그 이면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어떤 이면인가? “급진적인 정치실행 그 자체는 권력구조를 동요시키고 교체할 수 있는 끝없는 과정으로 여겨지는데, 그것을 실제로 위태롭게 만들 수 없다”라는 점. 요점은 급진적 정치실행 자체가 궁극적으론 권력 구조를 무너뜨리지도 못하면서 그냥 그것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바꾸기도 하는 항구적인 과정 정도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급진적 정치란 그래서 배제된 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을 더 늘려나가는 정도에 머문다. 이것이 말하자면 급진적 정치의 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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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고네>에 대한 주디스 버틀러의 독해를 계속 따라가본다. 지젝은 버틀러가 헤겔뿐만 아니라 라캉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독해를 전개한다고 말한다. 즉 헤겔과 라캉이 버틀러의 두 맞수다. 헤겔은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충돌을 사회적-상징적 질서 ‘내부’에 속한 것으로, 윤리적 실체(ethical substance)의 분열을 드러내는 비극으로 보았다. 즉 크레온과 안티고네는 각각 국가와 가족, 낮과 밤, 인간의 법질서와 신적인 숨은 질서를 대표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라캉은 안티고네가 친족관계를 대표하는 것과 무관하며 차라리 상징적 질서를 설립하는 제스처의 경계적 위치(limit position)를 떠맡는다고 보았다(번역본은 ‘한정된 입장’을 떠맡게 된다고 옮겼다). 여기서 ‘경계’는 ‘한계’이자 ‘극한’이다. 상징적 질서화의 가장자리면서,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경계라는 것이다. 즉 그녀는 상징화의 경계 지점, 상징화가 불가능한 제로 차원(zero-level)을 가리킨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죽음 충동’을 대표한다.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지만 상징계에서 보면 이미 죽어 있고, 사회-상징적 좌표로부터 제외되어 있다.” 즉 사회적-상징적 좌표계에서 배제돼 표시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지젝이 보기에 버틀러는 헤겔과 라캉의 이 두 극단적 입장을 거부하면서 변증법적으로 종합한다(변증법적 종합, 혹은 변증법적 지양이란 부정하면서 동시에 보존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안티고네는 기존의 상징계를 위태롭게 만드는데, 그것의 철저한 외부로부터 뿐만 아니라 그것의 철저한 재분절을 목표로 삼는 유토피아적인 관점으로부터도 위태롭게 한다”(<실재계 사막>, 178쪽). 요점은 안티고네가 단지 상징계의 ‘외부’를 대표한 것이 아니라 어떤 유토피아적 관점을 대표하며, 이것은 상징계의 재분절(rearticulation), 곧 재편, 재배치, 재구성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안티고네는 공적인 공간에 자리가 할당돼 있지 않은 장소를, 거주할 수 없는 위치를 떠맡는다는 점에서 ‘살아 있는 죽음(living dead)’이다. 하지만 그녀가 떠안는 장소/위치는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이며 따라서 우연적이고 특수한 상황에 따라 구조화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라캉에 대한 버틀러의 핵심쟁점이다. 라캉의 혁신성(안티고네가 상징계의 자멸적인 외부에 자신을 위치시킨다는 생각)은 이런 질서, 즉 기존의 친족관계의 질서를 재주장하고 있는데, 최후의 양자택일이 (고정된 가부장제의) 친족관계의 상징적인 법과 그의 자멸적인 무아경의 위반 사이에서 하나가 된다고 묵묵히 생각하고 있다.(<실재계 사막>, 179쪽)

 
   

 

“라캉에 대한 버틀러의 핵심쟁점”은 “Butler's central point against Lacan”을 옮긴 것으로 “라캉에 반대하는 버틀러의 핵심쟁점”이라고 해야 옳다. 라캉과는 생각을 달리한다는 것이다. 라캉의 안티고네 해석의 핵심은 그녀가 상징적 질서 바깥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이 질서를, 확고한 친족관계의 질서를 재확인해준다. 그녀의 궁극적 선택지는 가부장적 친족관계의 상징적 법과 그에 대한 자살적 차원의 황홀한 위반이다. 법과 위반 사이. 이때 위반은 법의 확고함과 엄정함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자살적․자멸적 위반이란 스스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위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버틀러가 제안하는 것은 세 번째 선택, 제3의 선택이다. “제3의 선택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이런 친족관계 그 자체를 재분절하는 것, 즉 상징적인 법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몇 가지 우발적인 사회적 배열들로 재고려하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179쪽) 다시 말해서, 라캉의 안티고네는 어떤 고정된 상징적 질서와 대결하다 필연적으로 패배한다면, 버틀러의 안티고네가 맞서는 상징적 질서는 가변적이며 재배치가 가능하다. 만약 안티고네가 호모 사케르의 형상이라면 이러한 버틀러의 <안티고네> 독해는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론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지젝은 이렇게 정리한다.   

 

   
 

안티고네는 공적인 공간 속으로 받아주길 간절히 원하고 있는 전복적인 모든 ‘병리적’ 요구들을 말로 꺼내놓지만, 그녀가 이런 독해에서 의미하는 바를 호모 사케르와 동일시하는 것은 아감벤의 분석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공격을 놓치는 것이다. 아감벤한테는 완벽한 시민의 목소리가 들리도록 차츰 허용함으로써 그들을 호모 사케르와 분리해내는 한계에 대해 ‘재타협’하는 ‘민주주의적인’ 프로젝트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그의 관점은 오늘날의 ‘후정치학’에서 다름 아닌 민주주의적 공적인 공간이라는 것이 결국 우리 모두가 호모 사케르라는 사실을 감춰주는 가면이 된다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179쪽)

 
   



요점은 버틀러의 안티고네와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가 좀 다르다는 것이다. 둘을 동일시하는 것은 아감벤의 분석이 갖는 파괴력을 둔하게 만든다. 버틀러의 안티고네가 상징적 질서의 재편과 재배치를 요구하는 유토피아적 관점을 대표한다면,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에겐 그런 ‘재협상’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정상적인 시민과 호모 사케르를 구분하는 경계가 민주주의적으로 점차 확장돼 모두가 시민으로 인정․포함되거나 하지 않는다. 아감벤이 보기엔 오히려 지금의 ‘탈정치(post-politics)’ 시대에는 민주적 광간이라는 것 자체가 가면이고 속임수에 불과하다. 무얼 가리고 무얼 속이는가? 우리 모두가 ‘호모 사케르’라는 사실을 가리고 속인다.  

  

 

   
 

그렇다면 이것은 아도르노와 푸코처럼 우리 모두 ‘생체정치’ 대상의 지위로 환원되는 ‘관리되는 세계’의 완전한 폐쇄를 우리 사회발전의 비밀스런 목적으로 확인하는 사람들의 관점을 아감벤이 충분하고도 간단하게 공유하고 있음을 의미하는가?(<실재계 사막>, 179쪽)

 
   

 

‘기계적인’ 번역이라 읽기가 좀 불편한데, 간단히 말해서 아감벤도 아도르노나 푸코와 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냐, 라는 물음이다. 아드르노와 푸코는 주장은 무엇인가? 아도르노의 ‘관리되는 세계’(번역본에선 ‘지배되는 세계’)에 대해선 이전에 언급한 바 있다. 그는 현대 사회가 이대로 계속 발전해나간다면 그 끝에서 완전히 폐쇄적인 ‘관리되는 사회’가 될 거라고 전망한다. 그런 사회에서 우리는 모두는 ‘생체정치’의 대상으로 격하되고 전락할 것이다. 이것은 물론 부정적이고 음울한 전망이다. 과연 아감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 이 질문에 대한 지젝의 대답은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감벤의 입장은 무엇인지, 그는 아도르노와 푸코와는 어떤 점에서 전망을 달리하는지 다음 회에서 살펴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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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호모 사케르에 관한 아감벤의 분석으로 돌아온다. 지젝은 아감벤의 분석이 급진적 민주주의 프로젝트와는 분리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급진적 민주주의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 등이 <사회주의와 헤게모니 전략>(1985)을 필두로 주장한 이론적 입장이다(급진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14회분 참조). 지젝의 주장은 이렇다.  

 

   

 

아감벤의 분석으로 다름 아닌 민주주의의 개념에 대한 질문에 완전히 근본적인 그런 특성을 부여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은 급진적인 민주주의 프로젝트의 한 요소로 묽게 희석되어서는 안 되는데, 그 프로젝트의 목표는 포함과 배제의 한계를 재협정/재정의해서 그 결과로 상징적 영역은 대중 담론의 헤게모니를 차지한 형태에 의해 제외된 사람들의 목소리에 더욱더 귀를 열게 될 것이다.(<실재계 사막>, 176쪽)

 
   

 

첫 문장은 모호해서 이해하기 어려운데, 원문은 “Agamben's analysis should be given its full radical character of questioning the very notion of democracy”이다. 다시 옮기면 “아감벤의 분석은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급진적 성격을 지닌다.” 민주주의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므로 그의 ‘호모 사케르’ 개념도 급진적 민주주의 기획(radical-democratic project)으로 포섭될 수 없다는 것이 지젝의 판단이다. 이 문단에서 다시 정의되고 있는 급진민주주의 기획의 목표는 “포함과 배제의 한계를 재협정/재정의”하는 것으로 돼 있는데, ‘한계(limits)’는 ‘경계’로 이해하는 게 좋겠다. 어디까지 포함하고, 어디까지 배제할 것인가를 다시 협상하고, 다시 정의한다는 뜻이다. 가령 ‘시민’의 범주를 확장하여 최대한 다수의 ‘인간’이 포함되게 함으로써 인권과 시민권이 거의 등치되도록 하는 것이 그러한 전략의 최대치가 될 수 있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결과가 생겨나는가? “상징적 영역은 대중 담론의 헤게모니를 차지한 형태에 의해 제외된 사람들의 목소리에 더욱더 귀를 열게 될 것이다.” 여기서 ‘상징적 영역(the symbolic field)’은 ‘상징계’ 혹은 ‘사회적 현실’로 이해하면 좋겠다. ‘대중 담론의 헤게모니를 차지한 형태’, 즉 ‘the hegemonic configuration of the public discourse’는 ‘공적 담론의 헤게모니적 구도(배치)’라고 옮기는 게 낫겠다. 그러한 헤게모니적 구도에서 배제된 목소리들에 더 개방적이 되는 것이 말하자면 급진적 민주주의가 의도하는 최선의 결과다. 이어서 지젝은 이것이 <안티고네>에 대한 주디스 버틀러의 핵심적 독해와도 연결된다고 말한다. 버틀러는 <안티고네의 주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녀가 나타내 보이는 한계는, 변치 않는 표상도 번역될 수 있는 표상도 가능하지 않는 그런 한계로서… 의식적이고 공개된 영역에 그의 수치스러운 미래로서 흔히 나타나는 상호간의 정당성의 흔적이다.”(<실재계 사막>, 176쪽)

 
   

 

테바이의 통치자 크레온이 전사한 오빠의 장례를 금지하자 안티고네는 이에 맞선다. 오빠의 장례를 정식으로 치르게 해달라는 그녀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위치는 법이 포용할 수 있는 한계(경계)에 놓여 있다. 그것을 “그녀가 나타내 보이는 한계는, 변치 않는 표상도 번역될 수 있는 표상도 가능하지 않는 그런 한계”라고 버틀러는 풀었는데, 번역문은 “the limit for which she stands, a limit for which no standing, no translatable representation is possible”을 부정확하게 옮겼다. 조금 풀어서 옮기면, “그녀가 버티고 서 있고자 하는 경계적 위치는 서 있을 수 있도록 배당되지 않은 자리이며, 어떠한 재현으로도 번역될 수 없는 위치다.” 앞에서 나온 표현을 쓰자면 안티고네가 고집하는, 혹은 고수하고자 하는 위치/입장은 사회적 상징계에 포함되지 않는 자리이며, 따라서 배당될 수도 재현될 수 없는 자리다. 재현될 수도 없기에 그것은 일종의 ‘흔적’이다. “의식적이고 공개된 영역에 그의 수치스러운 미래로서 흔히 나타나는 상호간의 정당성의 흔적”이란 표현은 그래서 나오는데, 이 역시도 부정확하게 옮겨졌다. 원문은 “the trace of an alternate legality that haunts the conscious, public sphere as its scandalous future”이다. ‘alternate legality’를 번역본은 ‘상호간의 정당성’이라고 옮겼는데, ‘대체적 합법성’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크레온이 대표하는 ‘합법성’에 대한 대체/대안이라는 의미다. 다만 그 ‘대체적 합법성’은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에 가능성(흔적)으로만 존재한다. 그리고 마치 유령처럼, 그 ‘수치스러운 미래’로서 ‘의식의 영역, 공적 영역’에 들러붙는다.  

 



이러한 안티고네의 형상은 호모 사케르와도 자연스레 연결된다. “안티고네는 오늘날 프랑스에서 신분증이 없는 사람처럼 완전하고 명백한 사회-존재론적 지위가 없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주장을 공식화하고 있으며, 여기서 버틀러 자신도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를 언급하고 있다.”(176쪽) 여기서 ‘완전하고 명백한 사회-존재론적 지위’란 시민권을 가진 자를 말한다. 반면에 안티고네는 ‘신분증이 없는 사람’, ‘상파피에(sans-papier)’라고 불리는 불법체류자를 닮았다. 존재하지만, 법적으로는 그 존재를 보장받지 못하고, 또 사회-존재론적 지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어째서 우리가 안티고네의 말하는 (것을 위하기도 하는) 입장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녀의 주장의 대상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하는지 그 이유가 된다. 그녀의 오빠가 처해 있는 특이한 입장에 대한 그녀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이 대상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까지 명백한 것은 아니다. 그녀의 입장이 단순히 여성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공무라는 남성의 영역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즉 국가의 수장인 크레온에게 말하는 데 있어서 그녀는 그 사람처럼 말하고 그의 권위를 도착증적인/전치된 방식으로 도용하고 있다. 그녀는 헤겔이 주장했던 것처럼 친척관계를 위해 말하는 것도 아닌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그녀의 가족이 친척관계의 적절한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근친상간적인) 타락을 나타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의 주장은 법의 기본적인 윤곽을, 법이 배제하고 포함하는 바를 바꿔놓고 있다.(<실재계 사막>, 176~177쪽)

 
   

 

첫 문장은 “This is why we should pin down neither the position from which (on behalf of which) Antigone is speaking, nor the object of her claim”을 옮긴 것이다. ‘얽매이다’라고 옮긴 ‘pin down’은 그냥 ‘이해하다’는 뜻으로 봐도 무리가 없겠다(어떤 것을 이해한다는 말은 그것을 꼼짝 못하게 고정시켜놓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안티고네가 말하는 입장, 그가 대표하는 입장뿐만 아니라 그 주장의 ‘목적’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 오빠와의 특별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왜 그렇게 완강하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가 하는 점이 <안티고네>의 미스터리다. 그녀의 입장은 단순하게 ‘여성’을 대표하지도 않으며 헤겔의 말처럼 가족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근친상간으로 얼룩진 안티고네의 집안 자체가 그렇게 정상적인, 도덕적인 집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녀의 주장은 법의 기본적인 윤곽을, 법이 배제하고 포함하는 바를 바꿔놓고 있다”는 것. 즉 법이 무엇을 포함하고 무엇을 배제할 것인가란 문제 자체, 그러니까 법의 근본적 토대 자체를 그녀는 건드리고 있다는 얘기다. 버틀러의 <안티고네> 독해는 다음 회에서 더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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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자율성과 자유라는 이데올로기의 이면이, 주관적 자유가 규율적 메커니즘에 예속된 ‘관리되는 세계’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이미지로 지젝은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을 든다. 어떤 장면인가?  

 

  

   
 

물론 가득 찬 요람에서 폐쇄공포증 같은 생활을 꾸려가는 수백만 명이나 되는 인간 존재들이 매트릭스에게 필요한 에너지(전기)를 생산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었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이 매트릭스가 조종하는 가상현실에 몰두해 있는 상태로부터 ‘깨어날’ 때, 이런 각성은 외부현실의 널따란 공간으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첫 순간에 이런 울타리 속의 두려운 인식이 되는데, 그 속에서 우리들 각자는 실제로 양수 속에 잠겨 있는 태아 같은 유기체가 된다.(<실재계 사막>, 173쪽)

 
   

 

즉 매트릭스가 조종하는 ‘가상현실’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할 때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마치 양수 속에 잠겨 있는 태아처럼 완전히 수동적인 상태의 ‘나’이다. 가상현실에서는 자유롭지만(비록 환상일지라도) 실제 현실에서는 자유를 완전히 상실한 ‘수인’ 같은 형국이다. “이런 완전한 수동성은 우리의 의식적인 경험을 능동적이고 스스로 가정하는 주체들로 유지시켜주는 배제된 환상이 되는데, 그것은 최후의 도착증적인 환상이다.” 여기서 ‘배제된 환상(the foreclosed fanta-sy)’이 가리키는 것이 ‘완전한 수동성’이다. 전적으로 수동적인 상황에 처해 있지만 이러한 현실은 환상으로 치부된다. 아예 원천적으로 폐쇄되고 배제된다(정신분석에서는 주로 ‘폐제’라고 옮긴다). 그러한 배제를 통해서 우리 스스로가 능동적이고 자기-정립적이라는 환상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게 된다. 이렇듯 현실과 환상이 뒤집혀 있다는 의미에서 궁극적으론 ‘도착적 환상’이다.

이 환상 너머의 실재는 무엇인가? “우리의 가장 깊숙한 존재에게서 우리가 대타자의(매트릭스의) 향락의 도구가 된다는 생각은 배터리처럼 우리의 생명물질을 조금씩 써버리고 있었다.”(<실재계 사막>, 173쪽) 요점은 존재의 가장 내밀한 차원에서 우리는 ‘대타자(매트릭스)의 향락’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대타자(매트릭스)는 우리의 생명 에너지(life-substance)를 흡충처럼 빨아먹는다. 하지만 수수께끼. 어째서 매트릭스는 굳이 인간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가? 순수하게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라면 보다 간편한 다른 수단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수백만 명의 생명에너지를 추출해내기 위한 복잡한 장치의 가상현실 세계를 구축하는 것은 합리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했다면 다른 목적이 있는 것 아닐까? 좀 더 설득력 있는 대답은 매트릭스가 ‘인간의 향락(human jouissance)’을 먹고 산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여기서 우리는 대타자 그 차제가 특성이 없는 기계가 되기는커녕 향락의 끊임없는 유입을 필요로 한다는 라캉의 기본 명제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영화 <매트릭스>에 제시된 사물들의 상태를 우리가 뒤집어놓는 방식이다. 그 영화가 우리의 진정한 상황을 깨닫게 되는 장면으로 제시하는 것은 사실상 그와 정반대로서 우리의 존재를 유지시켜주는 기본적인 환상 바로 그것이다.(<실재계 사막>, 174쪽)

 
   

 

라캉의 기본 명제라는 것은 대타자가 향락의 끊임없이 유입을 필요로 한다는 점. 지젝은 이를 근거로 <매트릭스>의 상황을 뒤집어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처해 있는 ‘진정한 상황’을 깨닫게 되는 장면이 정반대로 우리의 존재를 지탱해주는 근본 환상이라는 것이다. 지젝은 클로로포름 마취를 하고 수술대에 누워 난도질을 당하는 환자의 경우로 더 예를 드는데, 프랑스의 생리학자 피에르 플루랑스에 따르면 마취제는 우리의 기억 신경망에만 작용한다. 따라서 수술 중에 우리는 무시무시한 아픔을 고스란히 느끼지만 나중에 깨어날 때 그걸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자연의 일부로서 신체는 아픔을 느끼지만 주체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지젝은 이런 것이 ‘상호수동성의 완벽한 환상 시나리오’가 아닌가라고 묻는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우리의 능동적인 개입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 다른 장면의 완벽한 환상 시나리오로 읽을 수 없을까? 이런 환상적인 지지 없이는, 다시 말해 그가 대타자에 의해 완전히 조종되는 장소인 이러한 다른 장면 없이는 능동적인 자유로운 행위가 있을 수 없다.” 어떤 사례를 들 수 있을까? 지젝은 기대의 어긋나지 않는 사례를 또 챙겨놓는다. 우리의 자유로운 행위가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한 수동성으로 전락한 ‘다른 장면’에 의해 지탱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아마도 가학-피학적인 광경에서 여성 지배자에 대한 노예 노릇으로 도피하려고 날마다 수천 명의 평범한 고용원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수석 경영자의 만화 같은 욕구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은 기반을 갖고 있는 것 같다.(<실재계 사막>, 175쪽)

 
   

 


 

‘가학-피학적인 광경’은 ‘사도-마조히즘 쇼(sado-masochistic spectacle)’를 가리킨다. 보통 롱부츠를 신고 가터벨트를 입은 여성이 채찍을 든 주인 행세를 하면서 남성 고객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게 쇼의 내용이다. 물론 이 쇼에서 남성은 주인 여성에게 전적으로 복종해야 하며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실상 그 고통이 그가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날마다 수천 명 직원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고위 임원이 “여성 지배자에 대한 노예 노릇으로 도피하려고” 그런 쇼를 하는 업소를 찾지는 않는다. 번역상의 오류인데, 다만 그가 그런 쇼에서 안식을 얻으려는 욕구를 갖고 있다는 의미다. 즉 그런 ‘능동적’ 행위자의 ‘수동적(마조히즘적)’ 욕망이 생각보다는 뿌리 깊은 근거를 갖고 있다는 게 지젝의 지적이다. 우리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다른 장면’은 또 어떤 것이 있는지 각자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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