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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감벤의 분석으로 다름 아닌 민주주의의 개념에 대한 질문에 완전히 근본적인 그런 특성을 부여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은 급진적인 민주주의 프로젝트의 한 요소로 묽게 희석되어서는 안 되는데, 그 프로젝트의 목표는 포함과 배제의 한계를 재협정/재정의해서 그 결과로 상징적 영역은 대중 담론의 헤게모니를 차지한 형태에 의해 제외된 사람들의 목소리에 더욱더 귀를 열게 될 것이다.(<실재계 사막>, 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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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은 모호해서 이해하기 어려운데, 원문은 “Agamben's analysis should be given its full radical character of questioning the very notion of democracy”이다. 다시 옮기면 “아감벤의 분석은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급진적 성격을 지닌다.” 민주주의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므로 그의 ‘호모 사케르’ 개념도 급진적 민주주의 기획(radical-democratic project)으로 포섭될 수 없다는 것이 지젝의 판단이다. 이 문단에서 다시 정의되고 있는 급진민주주의 기획의 목표는 “포함과 배제의 한계를 재협정/재정의”하는 것으로 돼 있는데, ‘한계(limits)’는 ‘경계’로 이해하는 게 좋겠다. 어디까지 포함하고, 어디까지 배제할 것인가를 다시 협상하고, 다시 정의한다는 뜻이다. 가령 ‘시민’의 범주를 확장하여 최대한 다수의 ‘인간’이 포함되게 함으로써 인권과 시민권이 거의 등치되도록 하는 것이 그러한 전략의 최대치가 될 수 있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결과가 생겨나는가? “상징적 영역은 대중 담론의 헤게모니를 차지한 형태에 의해 제외된 사람들의 목소리에 더욱더 귀를 열게 될 것이다.” 여기서 ‘상징적 영역(the symbolic field)’은 ‘상징계’ 혹은 ‘사회적 현실’로 이해하면 좋겠다. ‘대중 담론의 헤게모니를 차지한 형태’, 즉 ‘the hegemonic configuration of the public discourse’는 ‘공적 담론의 헤게모니적 구도(배치)’라고 옮기는 게 낫겠다. 그러한 헤게모니적 구도에서 배제된 목소리들에 더 개방적이 되는 것이 말하자면 급진적 민주주의가 의도하는 최선의 결과다. 이어서 지젝은 이것이 <안티고네>에 대한 주디스 버틀러의 핵심적 독해와도 연결된다고 말한다. 버틀러는 <안티고네의 주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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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나타내 보이는 한계는, 변치 않는 표상도 번역될 수 있는 표상도 가능하지 않는 그런 한계로서… 의식적이고 공개된 영역에 그의 수치스러운 미래로서 흔히 나타나는 상호간의 정당성의 흔적이다.”(<실재계 사막>, 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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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바이의 통치자 크레온이 전사한 오빠의 장례를 금지하자 안티고네는 이에 맞선다. 오빠의 장례를 정식으로 치르게 해달라는 그녀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위치는 법이 포용할 수 있는 한계(경계)에 놓여 있다. 그것을 “그녀가 나타내 보이는 한계는, 변치 않는 표상도 번역될 수 있는 표상도 가능하지 않는 그런 한계”라고 버틀러는 풀었는데, 번역문은 “the limit for which she stands, a limit for which no standing, no translatable representation is possible”을 부정확하게 옮겼다. 조금 풀어서 옮기면, “그녀가 버티고 서 있고자 하는 경계적 위치는 서 있을 수 있도록 배당되지 않은 자리이며, 어떠한 재현으로도 번역될 수 없는 위치다.” 앞에서 나온 표현을 쓰자면 안티고네가 고집하는, 혹은 고수하고자 하는 위치/입장은 사회적 상징계에 포함되지 않는 자리이며, 따라서 배당될 수도 재현될 수 없는 자리다. 재현될 수도 없기에 그것은 일종의 ‘흔적’이다. “의식적이고 공개된 영역에 그의 수치스러운 미래로서 흔히 나타나는 상호간의 정당성의 흔적”이란 표현은 그래서 나오는데, 이 역시도 부정확하게 옮겨졌다. 원문은 “the trace of an alternate legality that haunts the conscious, public sphere as its scandalous future”이다. ‘alternate legality’를 번역본은 ‘상호간의 정당성’이라고 옮겼는데, ‘대체적 합법성’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크레온이 대표하는 ‘합법성’에 대한 대체/대안이라는 의미다. 다만 그 ‘대체적 합법성’은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에 가능성(흔적)으로만 존재한다. 그리고 마치 유령처럼, 그 ‘수치스러운 미래’로서 ‘의식의 영역, 공적 영역’에 들러붙는다.

이러한 안티고네의 형상은 호모 사케르와도 자연스레 연결된다. “안티고네는 오늘날 프랑스에서 신분증이 없는 사람처럼 완전하고 명백한 사회-존재론적 지위가 없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주장을 공식화하고 있으며, 여기서 버틀러 자신도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를 언급하고 있다.”(176쪽) 여기서 ‘완전하고 명백한 사회-존재론적 지위’란 시민권을 가진 자를 말한다. 반면에 안티고네는 ‘신분증이 없는 사람’, ‘상파피에(sans-papier)’라고 불리는 불법체류자를 닮았다. 존재하지만, 법적으로는 그 존재를 보장받지 못하고, 또 사회-존재론적 지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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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것이 어째서 우리가 안티고네의 말하는 (것을 위하기도 하는) 입장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녀의 주장의 대상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하는지 그 이유가 된다. 그녀의 오빠가 처해 있는 특이한 입장에 대한 그녀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이 대상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까지 명백한 것은 아니다. 그녀의 입장이 단순히 여성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공무라는 남성의 영역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즉 국가의 수장인 크레온에게 말하는 데 있어서 그녀는 그 사람처럼 말하고 그의 권위를 도착증적인/전치된 방식으로 도용하고 있다. 그녀는 헤겔이 주장했던 것처럼 친척관계를 위해 말하는 것도 아닌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그녀의 가족이 친척관계의 적절한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근친상간적인) 타락을 나타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의 주장은 법의 기본적인 윤곽을, 법이 배제하고 포함하는 바를 바꿔놓고 있다.(<실재계 사막>, 176~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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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은 “This is why we should pin down neither the position from which (on behalf of which) Antigone is speaking, nor the object of her claim”을 옮긴 것이다. ‘얽매이다’라고 옮긴 ‘pin down’은 그냥 ‘이해하다’는 뜻으로 봐도 무리가 없겠다(어떤 것을 이해한다는 말은 그것을 꼼짝 못하게 고정시켜놓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안티고네가 말하는 입장, 그가 대표하는 입장뿐만 아니라 그 주장의 ‘목적’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 오빠와의 특별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왜 그렇게 완강하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가 하는 점이 <안티고네>의 미스터리다. 그녀의 입장은 단순하게 ‘여성’을 대표하지도 않으며 헤겔의 말처럼 가족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근친상간으로 얼룩진 안티고네의 집안 자체가 그렇게 정상적인, 도덕적인 집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녀의 주장은 법의 기본적인 윤곽을, 법이 배제하고 포함하는 바를 바꿔놓고 있다”는 것. 즉 법이 무엇을 포함하고 무엇을 배제할 것인가란 문제 자체, 그러니까 법의 근본적 토대 자체를 그녀는 건드리고 있다는 얘기다. 버틀러의 <안티고네> 독해는 다음 회에서 더 살펴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