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적 정치의 한계에 대한 지적과 더불어 지젝이 제시하는 것은 체스터턴의 비판이다. <정통>에서 인용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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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두대에는 수많은 죄가 있지만 그것을 올바로 평가하려는 데 있어 그에 대한 진화론적인 것은 찾아볼 수 없다. 마음에 드는 진화론적 논의는 도끼에서 가장 좋은 해답을 찾아내게 된다. 진화론자는 “당신은 어디에 선을 긋습니까?”라고 묻는다. 혁명론자는 “나는 바로 여기에 선을 긋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어떤 광풍이 불어닥친다면 어떤 주어진 순간에 옳거나 틀린 개요가 있게 마련이다. 돌연한 어떤 것이라도 있을 것 같으면 영원한 어떤 것이 반드시 있게 된다.(<실재계 사막>, 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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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맥락을 모르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인데, 더구나 번역문은 좀 ‘난해’하다. 체스터턴의 책은 <정통>(상상북스, 2010)이 새 번역본으로 최근에 출간됐지만, 일단 <오소독시>(이끌리오, 2003)에서 다시금 인용하자면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조금 확장해서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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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하나의 영원한 이상은 보수주의자뿐 아니라 혁신주의자에게도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왕의 명령이 즉각적으로 실행되기를 원하든, 아니면 그 왕이 즉각적으로 처형당하기를 바라든 간에 영원불변한 이상은 반드시 필요하다. 단두대는 많은 과실을 안고 있지만 정당하게 평가하자면, 그것에 진화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진화론적 논쟁은 흔히 사형 집행용 도끼에서 최고의 해답을 찾아낸다. 진화론자가 “당신은 어디에 선을 긋는가?”라고 물으면 혁명주의자는 “나는 그것을 ‘여기에’ 긋는다. 정확하게 당신의 머리와 몸통 사이에”라고 대답한다. 어떤 주어진 순간에 어떤 일격이 가해진다면, 관념적인 옳고 그름의 기준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무언가가 있다면, 영원한 것도 분명 있을 것이다.(<오소독시>, 208~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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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단두대에 대한 체스터턴의 평가는 거기에 ‘진화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고작해야 도끼에서 해답을 찾는다. 도끼가 얼마만큼 좋아졌는가, 정도를 따져본다는 뜻이겠다. 그렇다면 개량된 도끼, 더 좋아진 도끼가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일까? 목을 자르는 데 있어서 진화론자는 어떤 ‘진보’를 성취해내는 것일까? 사정은 진화나 발전의 여지도 없는 ‘영원한 것’과 관련되지 않을까? (목을 자를 때) “당신은 어디에 선을 긋는가?”라는 질문은 얼핏 섬세해 보이는 질문이지만, 한편으론 어리석은 질문이다. 혁명론자/혁명주의자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한다. 그냥 ‘여기’라고. 머리와 몸통 사이. 그걸로 충분하다는 뜻이다. 사실 그렇잖은가? 그게 ‘영원한 어떤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 단두대의 도끼가 아무리 개량․진화된다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원칙은 그 기능이 머리와 몸통 사이를 절단하는 데 소용된다는 점이다. 그것이 어떤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기준’이다. 지젝의 보충 설명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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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행위의 이론가인 바디우가 어째서 영원을 참조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바로 이런 기반 위에서 이해할 수 있다. 행위라는 것은 오로지 시간 속에 영원을 개입시킴으로써 생각할 수 있다. 역사주의적 진화론은 끊임없는 지연으로 이끌어간다. 즉 그 상황은 항상 지나치게 복잡하다. 언제나 설명되어야 할 많은 측면들이 있다. 즉 그 상황은 지나치게 복잡하다.(<실재계 사막>, 181~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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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의 이론가’는 ‘the theorist of the Act’의 번역이다. 정관사가 붙은 것은 알랭 바디우에 대한 예우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서 대문자 행위(Act)는 어떤 곤경과 교착 상태를 돌파하는, 사회적 상징계의 좌표를 변화시키는 일을 가리킨다(그런 의미에서 ‘행위’란 말은 특권적이며 ‘행위로의 이행’이나 ‘행동’, ‘활동’ 등과 구별된다). 그러한 행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영원(Eternity)’에 대한 참조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즉 행위는 ‘시간’에 대한 ‘영원’의 개입이다. 반면에 진화론적 관점은 그러한 ‘영원’을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테야르 드 샤르댕 같은 가톨릭계 진화론자는 진화의 ‘오메가점’을 상정하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 진화란 방향성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역사주의적 진화론에서는 모든 결단과 행동이 연기되고 지체된다. 왜냐하면 상황은 언제나 너무 복잡하며 어떤 사안에 대한 찬반은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주저와 머뭇거림이 때론 심사숙고와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숙고가 행위를 대신하지는 못한다. “어디에다 ‘선’을 그을까요?”라는 물음에 대한 ‘정밀한’ 답을 얻을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지 않은가.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단순화’다. 풀지 못할 만큼 엉킨 매듭을 푸는 방법은 애써 풀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도끼로 그 매듭을 끊는 것이다. 그것이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푸는 방법이다. ‘고르디아스의 매듭’이란 프리지아의 왕 고르디아스가 복잡하게 묶어놓아 아무도 풀지 못한 매듭을 알렉산드로스가 칼로 끊어낸 데서 유래한 말이다. 복잡한 문제를 풀려면 때로 알렉산드로스와 같은 과감한 행동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무한한 숙고에 의해 단순한 ‘예’ 혹은 ‘아니오’로 구체화되는 불가사의한 순간이다.” 즉 무한한 숙고가 ‘예/아니오’라는 아주 간단한 대답으로 결정화되는, 응결되는 순간이다.
지난 회부터 다룬 것이 아감벤에 대한 잘못된 도용에 대한 지젝의 비판이었는데, 이제 이런 맥락에서 지젝은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이 갖는 진정한 급진성을 제거하려는 유혹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급진성인가? “9․11 이후에 풍부해진 인간의 존엄과 자유에 관한 현대 개념의 어떤 기본적인 구성 요소를 재고해주길 바라는 수많은 요청에 대해 분석할 수 있게” 해주는 급진성이다. 인용문에서 ‘풍부해진’이 수식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가 아니라 ‘재고해주길 바라는 수많은 요청’이다. 9․11 이후에 과연 인간의 존엄과 자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의문이 제기됐고, 논란이 벌어져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호모 사케르’가 유익한 분석틀이 돼준다는 게 지젝의 판단이다. 그 한 가지 사례로 드는 것은 고문에 대한 논란인데, <뉴스위크>(2001년 11월 5일자)에 실은 ‘고문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이란 칼럼에서 조나단 올터는 이런 주장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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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문을 합법화할 수 없다. 그것은 미국의 가치와 상반된다. 그러나 우리가 세계 도처에서 자행되는 인권 학대에 반대하는 발언을 계속하는 때라 할지라도 우리는 법정-승인된 심리적 심문처럼 테러리즘과 싸울 수 있는 특별한 방법에 대해 결정짓지 않을 필요가 있다.(<실재계 사막>, 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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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짓지 않을 필요”란 말은 “need to keep an open mind”를 부정확하게 옮긴 것이다. 말 그대로 “열린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무엇에 대해 열린 마음인가? ‘심리적 신문’처럼 테러리즘과 싸우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수단이 강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문을 비인도적 수단으로 제쳐놓지 말고, 그런 수단 가운데 하나로 ‘열림 마음’으로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어불성설인가? 하지만 이 문제와 관련하여 ‘버젓한’ 논쟁이 벌어졌고, 지젝은 이러한 논쟁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신랄하게 짚어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새해 벽두부터 이 ‘고문’이란 문제에 대해서 자세하게 살펴볼 예정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나 차례가 그렇게 됐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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